<못된 장난>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못된 장난 마음이 자라는 나무 22
브리기테 블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갑자기 청소년 소설에서 '밝음'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문학이 현실의 반영이라고 한다면 청소년 소설에서 '밝음'이 사라지고 있는 건 무척 우울한 현상이다.  내가 최근에 읽은 청소년 소설들 - <카본 다이어리 2015>, <이름없는 너에게>, 그리고 <못된 장난>까지- 는 각각 환경재앙, 십대미혼모의 불안, 사이버 스토킹에 의한 왕따 문제를 다룬 것들이다.  내가 십대였던 시절에 읽었던 <얄개전>이나 신지식 씨의 <감이 익을 무렵>, <하얀 길> 등과 비교하면 그 변화가 더욱 실감이 난다.  어쩌면 그 시절엔 현실을 두껍게 가리고 치장하려는 가식과 십대를 순수의 시대로 포장하고자 하는 불순의 의도가 강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참 가혹하구나, 하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아무리 그 끝에 '희망'을 살짝 보여준다고 해도 말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청소년기, 그만큼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는 아이들을 나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것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다.   

작년이었던가.  중1이었던 아들녀석이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모였다.  시험을 끝낸 홀가분한 마음에 친구들과 만나 놀고 싶다는 이유였던 것 같다.  중1이면 아직 초등학생의 아동성을 채 다 벗지않았을 때니까.  놀이터 의자에 둘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경비아저씨가 다가 오더란다.  다짜고짜
"여~ 너희들, 어디 사는 애들이야?"
아이들은 쭈뼛거리며 "저희들 다 이 아파트에 사는데요.."했단다.
그랬더니 경비아저씨 하시는 말씀이
"너희같은 청소년들은 놀이터에서 놀면 안되지.  정신적으로 놀아야지, 정신적으로! 다들 집에 가!"했다는 것. 
집에 들어와 투덜대는 아들에게 난 별로 해줄 말이 없었다.  '정신적으로 놀아야 한다'는 말에 푸훗, 웃음이 났지만 어린 아이를 둔 부모들은 성성하게 자란 중고등학생들이 놀이터에 등장하는 걸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어른들은 오직 학교와 집, 학원을 배경으로 서있는 중고등학생들만을 경계를 풀고 바라보려고 한다.   그 날 이후로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모이질 않는다.  차라리 PC방에 모여서 정신적(?)으로 노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는 걸 알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버스토킹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주인공 스베트라나와 그녀의 가정, 그리고 스베트라나를 괴롭히는 아이들과 그 가정의 배경이 되는 사회가 가진 문제점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범적이고 우수한 학생이었던 스베트라나가 '못된 장난'의 희생자가 된 것은 단순히 가해학생들의 성품이 나빠서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그 배경엔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편견과 멸시'라는 사회적 통념이 깔려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비슷하게 겹치는 부분이다.   

실업학교를 다니던 스베트라나는 그 우수함을 인정받아 '그들만의 독특한 분위기'(p.32)를 가진 에를렌호프 김나지움으로 전학을 가게 된다.  부유층 아이들의 기숙학교인 그 곳에 장학금을 받는 통학생으로 들어가게 된 스베트라나가 직면하게 되는 벽은 무엇일까.  '그들만의 독특한 분위기'에 섞일 수 없다는 소외감이 아니었을까.  그 소외감이 점차 열등감으로 발전했을 것이고, 그 열등감을 계속해서 자극하는 아이들로 인해서 스베트라나는 점차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베트라나를 괴롭힌 아이들은 어떨까.  학교 아이들이 만든 카페에 쓰인 글들은 그 아이들 나름대로의 고민과 불안을 엿보게 한다.
'우리 부모님이 나를 에를렌호프 김나지움에 갖다 버렸다는 걸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내가 더 나은 교육을 받는다거나 대학 입학 시험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은 그저 핑곗거리에 불과했어.  사실은 빌어먹을 부부 싸움에 증인이 있는 게 싫었던 거야."(p.167)라거나 '차라리 훌륭한 부모님이 없는 게 나아. 쑥대밭 같은 집안이 더 낫다고. 왜 그런지 알아? 스스로 강해지기 때문이야!'(p.167)같은 글들은 그들의 '못된 장난'의 근원을 설명해준다고나 할까. 
특히 마르시아가 스베트라나에게 한 말은 어른인 '나'를 더 슬프게 한다.

   
  "나 예전에는 다른 기숙 학교에 다녔어. 아이펠에 있는 학교였는데 거기도 똑같았어. 언제나 통학생들이 왕따를 당했지. 왜 그런지 알아?"
나는 휴지로 콧믈을 닦고 고개를 저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모두 절망에 빠져 있거든.  그래서 그러는 거야."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일까?
"다른 아이들이 어떤 상황인지 잘 살펴봐. 우린 모두 깨진 가정에서 왔어. 나도 마찬가지야.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기숙학교에 버려지는 거야. 알겠어? 이곳 아이들은 누구의 부모님이 얼마나 자주 찾아오는지, 누가 편지나 소포를 얼마나 자주 받는지, 그 소포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다 알아. 여기서는 비밀을 간직할 수 없어. 아주 단시간 내에 학교 전체에 소문이 퍼지니까.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자기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해.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뭔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이런 생활이 싫다고 해도 도망칠 수가 없어. 어디로 갈 수 있겠어? 집으로는 못 가. 여기서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해. 그게 문제야. 우리는 마치 텔레비전 리얼리티 쇼에 출연한 것처럼 살아. 쇼는 금방 끝나지만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니까 훨씬 더 끔찍하지."(p.118)
 
   

 난 사람들이 "요즘 애들 문제야.."라고 말하는 걸 싫어한다.  문제가 일어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놓고 "너희들이 문제야."하고 비난하는 건 비겁한 짓이니까.  문제가 있다면 판을 그렇게 꾸며놓은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십대들을 위한 기도>라는 노래다. 부르다가 울컥해서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난다.  이런 바람, 이런 기도의 노래들이 모이고 모이면 언젠가는 우리 청소년 소설이 눈부신 '밝음'으로 조금쯤은 돌아서게 되지 않을까, 하고 바라게 된다. 

http://lifepeace.org/bbs/zboard.php?id=free&no=13411 

<십대들을 위한 기도>  

우리의 십대들이 우울의 늪에 빠지지 말고
햇살같은 웃음으로 (언제나) 살게해 주십시오
그들의 웃음 속에 담긴 희망과 기쁨으로
우리의 삶도 밝아 질 것을 믿습니다.  

하늘의 별 땅의 꽃 자기 마음 돌아 볼 여유없이
피곤하고 숨 가쁘게 (정신없이) 살아 가는 아이들
우리 늘 미안하고 할 말 없는 어른 들이지만
항상 그들을 사랑하게 해 주세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2-17 0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7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9-12-1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남자애들이 놀이터에 모여 있으면 괜히 불안해했는데 아이들은 그저 단순히 모여있는 건데 어른의 잘못된 선입견 일수도 있겠군요. 아이들 쉴곳이 없지요.
공선옥님의 '나는 죽지않겠다'는 밝음이 보입니다. ㅎㅎ

섬사이 2009-12-24 06:35   좋아요 0 | URL
<나는 죽지 않겠다>, 꼭 읽어야겠네요. 서평단 책들 때문에 자꾸 읽고 싶은 책들이 뒤로 밀려요. 문제예요, 문제...-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