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내내 밑그림 가지고 씨름을 했다.  놀이터에 갈 때마다 디카를 들고 나가 모래밭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 자전거 타는 아이들, 씽씽이 타는 아이들, 방방이 타는 아이들, 미끄럼 타는 아이들을 마구 찍어댔다. 아파트 단지 구석구석도 찍었다.  그렇게 했는데도 막상 흰 도화지 위에 그리려고 연필을 들면 '그게 어떻게 생겼더라?'가 되어버리는 부분이 생겨서 그리다 말고 나가서 디카로 찍어 들어와 다시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고.. 를 반복해서 완성한 밑그림이다.  밑그림을 디카로 찍어 그림에 들어갈 글과 함께 권윤덕 선생님께 보냈더니, 다행히 매우 흡족해하셨다고 해서 기분이 한결 가벼웠다.   

오늘, 도서관에서 선생님과 만났다. 
지난 여름, 권윤덕 선생님 댁으로 찾아 뵙고 나서 처음이다.
그동안의 작업을 권윤덕 선생님 앞에 펼쳐 놓으려니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럽던지.  다른 책고르미 엄마와 도서관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림책이 어떻게 진행되어 나가야 하는지, 글에서 이상한 점은 없는지 등등을 세세하게 봐주셨다.  우리가 부끄러워하면 좋다, 좋다,  잘 했다, 잘 했다 하시면서 칭찬만 하셨다.
얼마나 세심하고 상냥하신지, 누구 말처럼 자상한 언니같다는 생각이...
밑그림을 대고 먹선을 뜰 '순지'라는 종이와 먹과 벼루, 세필까지도 직접 챙겨들고 오셨다. 
선생님이 보시는 데서 세필 끝으로 먹선을 뜨려니 손이 부들부들... 

사실, 오늘만 봐주시면 처음 '작가 따라하기' 명목으로 부탁드렸던 두 번의 만남이 모두 이루어진 셈인데, 권윤덕 선생님은 첫번째 장 그림 다 그리고, 두 번째 장 밑그림이 완벽하게 완성되면 다시 연락을 달라고 하신다.  그럼 그 때, 채색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놀러 온다 생각하고 도서관에 오겠다시면서 3년 동안 밭을 일군다는 마음으로 그림책을 만들어보라셨다.  선생님의 그림에서도 꼼꼼함과 치밀함이 느껴지더니, 역시 작은 것 하나라도 깔끔하고 완벽하게 잘 마무리 지으셔야 하는 성격이신가 보다.  약속한 두 번의 만남을 위해 시간을 내주신 것만 해도 (그것도 거의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감지덕지하겠는데 그토록 열성을 쏟아주시니 요령을 피고 대충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작가 따라하기'를 해보니까, 그림책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성과 공이 들어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나 권윤덕 선생님은 불화기법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시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지난 여름에 권윤덕 선생님이 그리신 불화들과 <일과 도구>의 원화, 그리고 <시리동동 거미동동>이 나오기 전까지 작업했던 더미북들을 보면서 놀라고 감탄하다 못해 기가 질리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돌아오는 내내 함께 갔던 사람들과 얼마나 한숨을 푹푹 내쉬었었는지. 

선생님 말씀대로 3년이 될지도 모르고, 5년이 될지도 모르겠다.  오늘 다른 분들과 앉아 먹선을 뜨면서 3년동안은 가구도 바꾸지 말고 동네도 바꾸면 안된다고 농담하면서 웃었지만, 3년이든 5년이든 권윤덕 선생님이라서 가능한 시간이 아닌가 싶다.  내년쯤 새로 출간될 그림책 작업에 신경을 쓰시느라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권윤덕 선생님.  두시간 남짓 먹선을 뜨다 보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 그림책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아무튼 내 이야기가 들어있는 공동 작업의 그림책이 생긴다는 건, 나에게도 그리고 유빈이에게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  

집에 갖고 있던 <일과 도구>를 챙겨가서 선생님께 싸인을 받았다.  지지난해던가.  도서관에 오신 선생님께 부탁해서 도화지에 싸인을 받은 게 있는데,,  ^^  책에 받으니까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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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0-21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인 정신이 느껴져요. 섬사이님의 그림책도 그렇게 정성을 쌓아 완성되겠죠. 소중한 시간 아름답게 보내셨어요.^^

섬사이 2009-10-22 00:44   좋아요 0 | URL
네. 힘들고 부담스럽긴 했지만, 밑그림이라도 그려놓고 보니 뿌듯했어요.
권윤덕 선생님이 지적하신 부분이 있어서
앞으로 또 얼마나 고쳐야할지 모르겠어요.
권윤덕 선생님, 작품에 대한 애정도 깊고 호흡도 긴 분인 것 같아요.
뜻깊은 경험을 했어요.

하늘바람 2009-10-21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궁금해요. 너무나.
님이 만드실 작품이요.

섬사이 2009-10-22 00:48   좋아요 0 | URL
아이고, 뭐, 작품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고등학교 미술시간 이후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던 터라
아무리 기를 써도 엉망진창이랍니다.
권윤덕 선생님은 우리가 그림을 잘 그려서가 아니라 우리 엄마들 그림의 엉성함이 귀여워서(?)'잘했다'고 하시는 거죠. ^^;;

세실 2009-10-2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스승님이 멋지시니 님도 분명 멋진 그림책 작가가 되실듯. 화이팅입니다^*^
습작 그림 보여주세요~~

섬사이 2009-10-22 00:53   좋아요 0 | URL
그림책 작가요? 이번에 발가락 끝만 적셔보고도 저같은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절절히 깨달았어요.
권윤덕 선생님은 물론 작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나시지만요,
끈기, 열성, 치밀함, 집요함에 있어서도 단연코 금메달감이세요.
많이 만나 뵌 건 아니지만 같이 작업하는 엄마들의 공통의견이랍니다. ^^

순오기 2009-10-23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그림책 도전했군요. 멋져요~~
권윤덕 선생님 그림 정말 꼼꼼해서 놀라요.

섬사이 2009-10-25 04:44   좋아요 0 | URL
권윤덕 선생님의 꼼꼼함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어요. ^^
도전을 하기는 했는데, 마무리가 잘 될지 걱정이에요.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만 믿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