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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성당 1
일데폰소 팔꼬네스 지음, 정창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마치 장대한 서사 장르의 영화를 보고 난 듯한 느낌이다. 14세기 스페인의 사회상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약 900페이지에 달하는 적지 않은 양의 글인데도 불구하고 막강한 흡인력을 가졌다. 그 흡인력은 아마도 잘 짜여진 플롯이 단단한 뼈대를 이루고 그 위에 귀족과 지주 등 강한 자들이 저지르는 비정한 폭력과 강탈의 모습과 이에 무참히 짓밟히는 약자들(농노, 노동자, 창녀, 노예, 유태인 등)의 모습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며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악인과 선인의 편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가를 수 있는 분명함, 사랑과 복수, 전쟁과 폭력, 읽는 이를 경악하게 만드는 잔인함, 거기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성실한 영웅 아르나우까지 있으니 긴장과 흥미를 느끼며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책을 읽고나서 “아, 참 재밌었다.”라는 말로 간단히 털어버릴 수 없는 묵직함이 가슴 위에 얹히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귀족과 천민, 지주와 농노 같은 신분으로 평가될 수 없는 ‘인간다운 삶’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그 신분이 최고의 귀족일지라도 폭력에 가까운 권력, 채워지지 않는 탐욕, 배고프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상상을 뛰어넘는 착취, 각종 이해관계에 따라 처세를 달리하는 비겁함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에 비해 악취를 풍기는 천민과 창녀, 노예계층과 지독한 편견에 시달리는 유태인 계층은 보은의 미덕을 알고, 따스한 동료애를 나누며 서로의 가난함과 어려움을 어루만져주는 측은지심의 면모를 보여준다.
인간적인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억눌리는 민중들이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폭력과 착취뿐만이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순식간에 앗아가는 페스트와 왕권다툼으로 벌어지는 전쟁, 흉작으로 인한 기근 등 감내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들은 많았다. 이러한 고달픈 민중의 역사가 베르나뜨와 프란세스카, 그리고 아들 아르나우의 삶을 통해 구체화되면서 음영의 입체감을 띄고 다가오기 시작한다. 아르나우의 아버지 베르나뚜는 영주 베예라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고는 조상대대로 일구던 땅에서 도망쳐 나와 오직 아들에게 자유를 주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바르셀로나로 들어간다. 아르나우는 영웅이 늘 그렇듯이 온갖 고난과 풍파 속에서도 성공을 거듭하여 아버지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에게 복수를 하게 되지만, 그것이 아버지 베르나뚜가 바라던 자유였을까?
자유를 열망하는 짓눌린 민중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 책은 ‘대지의 종’, ‘귀족의 종’, ‘열정의 종’, ‘운명의 종’ 이라는 제목의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아르나우가 유태인 하스다이의 도움으로 환전상으로서 엄청난 재력을 갖게 되고 남작이 되고 명예로운 영사의 직책을 수행하는 성공을 이루는 이야기라도 이와 같이 ‘~의 종’이라는 제목 아래에서 펼쳐지는 것은 우리 인간이 결국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으며 어떤 순간에도 ‘운명의 종’으로서 무엇인가에 늘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비극적 인물들의 인생 여정 속에서 더욱 비참하게 여겨지는 삶은 바로 여인들의 삶이었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세상에 가장 비참한 노예가 있다면 그 노예 아래에 더 비참한 여자가 있다고. 그 말대로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여인의 삶은 기구하다 못해 잔인하고 처참하다. 함부로 겁탈당하고 폭력으로 짓밟히고 기본적인 인권까지 철저하게 박탈당하며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갖지 못한 당시 여인들의 모습은 같은 여자로서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바다의 성당, 산타 마리아 델 마르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상징적인 장소로 부각된다. 거장 베렌게르는 아르나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군주들이 다 그렇게 크고, 그렇게 높고, 그렇게 긴 것을 원하다 보니, 성당들이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거야. 크고, 높고, 좁은 성당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의 성전은 정반대가 될 게다. 그렇게 크지 않고, 그렇게 길지 않고, 그렇게 높지 않은 대신, 아주 넓은 성당. 모든 까딸루냐 사람들이 들어가서 성모 마리아와 함께할 수 있는 성당 말이다. 언젠가 공사가 끝나면, 이곳이 특별한 곳이 아닌 평범한 곳임을, 모든 이들을 위한 공간임을 너도 알게 될 거야. 이곳에 유일한 장식이 있다면, 그것은 빛, 즉 지중해의 빛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우리는 많은 장식을 필요로 하지 않아.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공간,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오는 빛, 그것뿐이란다.”(1권p.294)
너무 크고 좁고 길어서 인간을 짓누르는 종교와 귀족의 절대 권력을 닮은 성당이 아니라 낮고 넓고 모든 이를 끌어안는 공간의 성당, 어둠 속에서 울부짖으며 피흘리는 민중들을 향해 따스하고 밝은 빛을 차별 없이 안겨주는 성당은 아르나우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 계층이 바라는 염원이 고스란히 반영된 공간인 것이다.
아르나우의 어머니 프란세스카는 “그래봤자, 비천한 자들은 죽어서도 제 몸 하나 눕힐 곳 없어. 그렇게 사는 거야. 우리는 그동안 지금의 우리가 되기 위해 무척이나 싸우지 않았느냐. 그러니 명예 따위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마라. 비천한 자를 위한 명예는 세상 어디에도 없단다.”(2권 p.160) 라고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진정한 명예는 낮고 힘없고 가난한 그들 안에 있었던 것 같다.
엄청난 흡인력으로, 읽는 내내 긴장과 흥분을 느끼게 만들었던 이 책이 문학의 오락성과 예술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르셀로나라고 하면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만 떠올렸던 나는 이제 산타마리아 델 마르 성당이 궁금하기만 하다. 그 가운데 서서 창문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지중해의 햇빛과 돔 천장을 올려다 보고 싶다. 그 곳에 가면 온몸이 쪼개질 듯한 고통을 참고 꺾이는 무릎을 간신히 지탱하며 육중한 돌을 지고 걸음을 옮기던 짐꾼들의 순수한 열정을 곳곳에서 만나보게 될 것만 같다. 숙연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싶다.
<오자발견>
◎ 2권
◦ 236쪽 맨 아랫줄 : 아르나아는 그의 성모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 ‘아르나우’로 교정해야 함.
◦ 367쪽 ; “곧 끝날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격식왕여전히 왕은 가스띠야와 전쟁 중이오.”
→격식왕은 뻬드로 3세를 가리키는 말인데, 문맥의 의미가 통하지 않음.
◦ 421쪽 ; “당신의 저 재산을 몰수한다......”
→‘전 재산’으로 교정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