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의 그림이 시선을 끄네요. 빨간 코트를 입은 아이가 뿌루퉁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어 옆으로 누워 있고 표지 오른 쪽 윗부분에 삭막하고 푸르스름한 빛으로 냉랭하게 떠있는 달이 촘촘히 쳐진 거미줄 같은 하늘에 걸려 있어요. 전체적으로 차가운 배경색에 비해 아이가 입은 코트의 빨간색이 참 도드라져 보여요. 아이의 표정에 드러난 불만의 원인이 어디 있는지, 아이는 표지 그림 밖에 있는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네요. 제목으로 봐서는 기다리는 대상이 아빠인 것 같은데 말이죠.
그림책 첫 장에 아이의 이름이 나오네요. ‘앰버’라는 아이군요. 유치원에서 그네를 타는 아이의 표정이 아주 밝아요. 앰버가 입고 있는 코트의 빨간색은 아이의 성격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아요. 활달하고 밝고 적극적인 아이라는 느낌을 주는군요. 앰버는 그네도 높이 탈 수 있고, 그림그리기도 좋아하고, 책도 잘 읽고, 거기다 그 어렵다는 신발끈 매기까지 척척 해낼 줄 아는 아주 영리한 아이라는군요. 이렇게 밝고 적극적인 성격에 영리한 아이의 부모는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무척 즐겁고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앰버는 매일 늦으시는 아빠를 기다려야 한다네요. ‘코트 단추를 목까지 꼭꼭 채운 채’로 아빠만 오시면 당장이라도 나갈 준비를 마친 채.. 친구들도 모두 가버린 유치원에 남아 있는 기분이 어떨까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죠.
기다림이 힘든 건 기다리는 시간 동안의 지루함이나 따분함 때문이 아니거든요. 기다림의 시간은 유난히 더디 흐르게 마련이고, 그래서 평상시의 시간보다 몇 배는 더 길게 늘어져 버린 그 심리적 시간동안 내가 ‘기다림’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용無用의 존재라는 느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버린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유기되어 버린 듯한 슬픔, 그리고 날 그렇게 버려둔 사람에 대한 미움까지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는 것이 기다림이 어렵고 힘든 이유일 거예요. 기다림의 인내를 배우고 기다리는 일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즐기는(?) 법을 배우기엔 앰버는 너무 어린 나이니까, “기다리는 법을 배우라.”는 훈계는 집어치우자구요. 힘든 기다림 끝에 눈물을 흘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앰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네 시부터 시작된 기다림이 여섯시 반을 넘어가자 앰버는 상상을 하기 시작하는군요. 똑똑한 아이예요. 벌써 기다림의 방법 하나를 스스로 터득했잖아요. 상상 속에서 하늘을 날 줄 알게 된 앰버는 아빠를 달에 데려다 놓네요. 아, 표지의 달이 바로 아빠에게 벌 줄 장소였군요. 앰버는 아빠를 달에 남겨둔 채 세상의 아빠들에게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입니다. 늘 바쁘다, 힘들다, 피곤하다, 하면서 곁에 있는 ‘아주 중요한 사람’을 잊어버리곤 하는 세상의 아빠들에게 어서 빨리 ‘아주 중요한 사람’에게 돌아가라는 강한 메시지를 담은 사랑스런 퍼포먼스예요. 앰버의 아빠는 달에서 뭘 하고 있냐구요? 아빠는 ‘기다림’을 배우고 있는 중이죠. 홀로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적막하고 외로운 일인지 아빠에게 가르쳐주려는 앰버의 마음이 짠하게 전해져 와요.
앰버가 입고 있는 생생한 빨간빛의 코트와는 대조적으로 아빠가 입은 회색 코트와 바지, 검정 구두는 아빠가 얼마나 삭막한 잿빛 세계에서 살아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러니 앰버가 아빠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은 단지 기다림만은 아닌 것 같군요. 앰버는 아빠에게 따스한 사랑과 관심이 살아 있는 생생한 감정의 세계를 가르쳐주고 싶은 건 아닐까요? 그렇게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뺨을 부비고, 입을 맞추며, 미소를 나누고, 서로의 가슴에 사랑을 흘려보내는 시간이 앰버는 그리운 거겠죠?
벽에 걸린 시계가 일곱 시를 가리킨 그림에서 앰버는 그림책 오른 쪽 아래 한 귀퉁이에 모릎을 세워 오그린 채 앉아 있네요. 앰버의 표정에서 분노와 슬픔이 함께 느껴져요.
다음 장으로 넘기니 드디어 아빠가 오셨군요. 이 아빠,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봐요.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잖아요. 앰버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없군요. 그리곤 바쁘게 돌아서 앞서 갑니다. 늘 바쁘고 바쁜 일에만 너무 익숙한 나머지 아빠들은 늘 아이들 앞에서 휙 돌아서기 십상이죠. 그렇게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바쁘게 내딛는 엄마아빠의 걸음이 아이들의 여린 마음에 생채기를 얼마나 남기게 될지 같은 염려 따윈 할 겨를도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앰버는 똑똑한 아이예요. 아빠의 소매를 잡아끌어 세웁니다. 처음으로 아빠와 앰버가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네요. 앰버의 말이 아빠의 마음에 가서 닿은 거예요. 아빠는 앰버를 무등 태워 집으로 돌아갑니다.
맞벌이 엄마아빠 이야기만은 아니군요. 전업주부인 저도 그림책 속 앰버의 아빠처럼 잿빛 옷을 온몸과 마음에 휘감은 채로 아이를 대한 적이 많으니까요. 어른이란 게 그런가봐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합리화에 너무 능수능란한 나머지 쉽게 인정하고 고치려하질 않거든요.
앰버의 빨간 코트를 입고 싶어져요. 그 생생한 빛깔로 나를 물들이고 싶어요. 그래서 내 아이들과 내 남편, 부모와 친척, 이웃들에게까지 그 빛깔을 나누어 주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세상이 잿빛으로 보이는 건 내가 잿빛이기 때문이겠죠. 내 마음, 내 웃음, 내 다정한 눈빛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잊는 법 없이 살게 되기를 빌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