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도코노 이야기 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신비한 능력을 가진 도코노 일족. 그 사는 모습이 고요하고 아름답지만 다른 한편으론 무척 고달프고 쓸쓸해 보인다.  두 번째 도코노 이야기 <민들레 공책>을 먼저 읽은 나는 첫 번째 책 <빛의 제국>에서 도코노 일족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넣고’ ‘울리고’ ‘뒤집고’ ‘앞일을 예지하고’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하늘을 날고’ ‘잡초를 제거하고’ ‘불꽃을 피우고’ ‘뮤즈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들의 능력은 이 책 안에서 주목의 목표대상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도코노 일족의 능력은 작가가 자기의 말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쓰인 장치이거나 아니면 작가의 말을 재미있게 감싸는 포장지이지 않을까.

요란스런 유니폼을 입고 악의 무리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영웅적 행위를 만인 앞에 한껏 드러내는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과는 다르게 오히려 남의 눈에 띄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고 조용히 움직이는 그들이 굳이 세상 사람들 안에 섞여 살면서 이루려는 게 무엇일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빛의 제국>에서 도코노 사람들은 어떤 흐름을 타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민들레 공책>에서처럼 역사의 흐름일 수도 있지만, 인연이나 주어진 천명 같은 운명의 흐름이기도 한 것 같다.  이를테면 ‘오셀로 게임’의 에이코와 도키코, 또 ‘잡초 뽑기’의 잡초 뽑는 남자, ‘역사의 시간’과 ‘검은 탑’의 아키코, ‘빛의 제국’과 ‘국도를 벗어나’의 미사키 등이 모두 운명의 흐름 속에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 그날이 올 것을 아키코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그 외에도 깨달은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  커다란 흐름 속에 살고 있다는 것.  아득한 시간과 사람들의 행위가 켜켜이 쌓인 위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기라는 존재를 허비할 수 없다는 것.’(p.280)


이 글 속에 작가 온다 리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민들레 공책>에서도 이런 글이 등장했었다.

 
“저는 세계는 보다 극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세찬 물결 같은 것이 있고, 그곳에 던져지기도 하고 뛰어들기도 하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는 물결 가운데 있습니다.  자기도 함께 흘러가기 때문에 물결의 속도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민들레 공책>.p.133)


어쩐지 ‘흐름’과 그 ‘흐름을 타고 가는 인간’이라는 것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마음 안에 남았다.  생각해볼수록 그 ‘흐름’ 속의 인간이 결코 수동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마치 강물이 수많은 생명체들의 눈부신 생애를 품고 있는 것처럼 우리 개개인은  각각 다른 빛깔의 비늘조각처럼 반짝이며 흐름을 아름답게 만드는 주체적인 존재인 것은 아닐까. 그렇게 우리 모두는 ‘하나는 모든 것 위해서, 모든 건 하나를 위해서, 그리고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병행해서 존재’(p.186) 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기미코가 말하던 능동적으로 흐름에 합류하는 ‘계속의 힘'(p.183)은 바로 그 흐름을 타면서도 자기의 빛깔을 잃지 않고 반짝이며 모두와 함께 가는 데서 얻게 되는 지도 모른다. 


그 반짝임을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경고가 사람의 몸에서 잡초가 자라고 세상이 넝쿨과 잡초로 뒤덮이는 이야기 ‘잡초 뽑기’나 인간이 갑자기 갖가지 식물을 섞어놓은 듯한 모습으로 변해버리는 이야기 ‘오셀로 게임’인 것 같다.  사람을 흉측한 괴물이나 짐승으로 변하게 할 수도 있었는데 온다 리쿠는 왜 사람의 몸에 잡초가 돋고 딸기로 변하고 입에서 양치류 잎사귀가 뻗어 나온다는 설정을 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다가 식물의 수동적 이미지에서 생각이 멈췄다. 

 

그래, 어쩌면 그것은 자기만의 빛깔을 잃고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 그저 ‘흐름’ 위를 부유하는 인간, 심지어 선한 ‘흐름’을 역행하는 악에 대한 상징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사람의 몸에 돋아난 잡초는 ‘분명히 존재하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p.209)이고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p.212)이라고 묘사된다.  그리고는 “매일을 소중하게 살아.  눈을 크게 뜨고, 귓속도 깨끗하게 후비고.  시야 끄트머리에서 일어나는 일도 놓치지 마. 그러면 자네 등에는 잡초가 안 나.  잡초가 안 나는 사람이 세상에 난 잡초를 뽑을 거야.”(p.215)라고 충고의 말을 던져 놓는 것이다.

흐름. 그 흐름을 타고 반짝이며 흘러가는 개개인의 소중한 삶. 그 모두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보살펴온 두루미 선생이 있다. 장수長壽의 능력을 타고난 두루미 선생은 흐름을 여행한 내가 돌아갈 고향 같은 이미지의 인물이다. 실제로 <빛의 제국>에서 회귀, 돌아감에 대한 글이 보인다.  회귀의 그 곳은 기억의 원천인 것 같기도 하고 따뜻하고 평화스런 고향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그 곳엔 ‘본연의 나’ 또는 ‘치유된 나’가 있다. 

이 책에서 회귀는 흐름의 역행이 아니다.  흐름의 끝이 곧 나의 회귀의 장소인 동시에 새로운 흐름의 시작이다.  환생한 미사키가 두루미 선생으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는 곳이며(‘국도를 벗어나’) 야스히코가 자신의 사랑과 상실을 동시에 깨닫고 본연의 나를 발견하는 장소(‘다루마 산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두루미 선생이 데라사키 교지로에게 나타나 “응. 난 늘 있다네.  어디에나 있어.  늘 자네들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디선가 또 만날 일이 있겠지.”(p.133)라고 말했듯이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장소(‘편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사는 곳하고 내가 돌아갈 곳을 향해 기도’(p.299)하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흘러가야 하는 것일 게다.  언젠가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참 평화롭고 따스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제 세 번째 이야기 <엔드 게임>이 남았다.  ‘오셀로 게임’의 에이코와 도키코 이야기가 이어진다고 하는데 기대가 된다.  도코노 이야기, 세 번째 이야기로 끝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쩐지 낚였다든가 말려들었다는 기분이 든다.  요즘 계속 일본작가의 책을 읽게 되는데, 일본에 부는 한류열풍보다 우리나라에 부는 일본문화의 열풍이 훨씬 크고 거세다는 느낌이다.  문화의 교류라는 건 좋은 거지만, 일본의 문화에 우리의 문화가 잠식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위기감이 들기도 한다. 

사족 하나. 
이 책을 읽다가 발견한 글.
“거울을 봐라. 지금 자기가 얼마나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잘 봐둬.  자기가 지금 얼마나 시시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지? 응? 안그러냐? 그야 세상에는 시시한 사람이 수두룩해.  그런 사람들 때문에 네가 불쾌한 일을 많이 당한 것도 인정하마.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시시한 사람이 되어도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  그런 건 누구보다도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냐?‘ (p.150)
이 글을 탈레반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족 둘.
얼마 전 오쿠타 히데오의 <오!수다>를 읽었다.  거기서 작가와 나 사이에 민족감정의 마찰이라는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했는데 이 책에서 온다 리쿠의 자국 역사에 대한 부끄러움을 담고 있는 부분이 보여서 오쿠타 히데오와의 마찰 경험을 상쇄했다. ‘빛의 제국’에서 온다 리쿠는 전쟁 중에 사람을 죽이기 위해 생체실험을 하는 자국의 잔인한 역사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반전이라든가 평화라든가 하는 메시지가 강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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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02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족 하나,에도 추천합니다, 섬사이님 ^^

섬사이 2007-08-03 05: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비로그인 2007-08-0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이거 일본서점에서 봤어요! (한동안 이런 말 하고 다닐것 같다는 느낌이....^^;;; 용서하시와요)

섬사이 2007-08-07 23:49   좋아요 0 | URL
일본여행은 즐거우셨어요? 그리고 일본 소설을 일본 서점에서 보신 게 뭐가 미안하시다고 용서하라 하세요? ^^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