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일어난 이 후, 난 신문을 읽지 않았다. 뉴스도 보지 않았다.
마치 내가 보면 꼭 우리나라 팀이 지더라, 며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가 있을 때마다 궁금해도 눈을 돌렸던 것처럼 내가 언론을 통해 그 사실을 주목하고 따라가면 일을 그르치고 불길한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소식은 들려왔다. 인솔했던 목사가 살해당했고,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지역으로 무모하게 들어간 그들의 종교적 신념이 거세게 비난받고 있고, 저쪽에서 자기네 죄수와 인질을 교환하자는 제의가 있었으며, 그 와중에도 미국은 나 몰라라 하고 있고, 대통령의 특사가 파견되었다고.
희망을 품었다. 지난번과는 다를 거라고, 대선을 목전에 두고 있는 위정자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구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고 말이다.
내가 뭐라고 하더라도 콧방귀도 안 뀔 미국을 향해, 파병이나 FTA 협상 때는 우리나라 국민이 그렇게 반대해도 기를 쓰고 나서더니 이제 온 국민이 나서서 도와달라고 손 내밀 땐 본 척도 안 한다고 궁시렁대기도 했다.
그런데 또 희생자가 나왔단다. 오늘 아침 옆지기에게 신문을 가져다주면서 힐끗 보게 된 신문 일면의 머리기사. 오늘 오후 4시 반까지 협상 안 되면 또 살해.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아래로 둔 피랍자의 사진들. 이 사진을 보게 된 가족들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온 몸의 피가 말라 굳어버리는 것 같겠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보면서 그 앞에서 밥 먹고 웃고 잠자고 농담도 주고받으며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허우적대던 사람이 물 속으로 가라앉고 나면, ‘어머, 어떡해, 큰일났네, 나머지 사람이라도 얼른 물에서 나와야할텐데.’ 하든지 아니면 ‘그러게 누가 물 속으로 들어가래?’하면서. 어쩐지 비현실적이고 괴기스럽다. 이럴 때마다 내가 괴물처럼 느껴진다.
불특정한 무고한 사람들에게 향하는 탈레반 그들의 분노와 증오 또한 괴기스런 비현실이다.
그런 괴기스런 비현실을 현실이 되도록 조장한 배후세력의 정체는 뭘까.
어디 숨어 있을까.
나를 괴물로 만들어버린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