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의 비극적 이면을 바라보는 시선이 칙칙함이나 음습함 없이 이렇게 반짝일 수도 있는 거구나.
유난히 '빛'이라는 낱말이 많이 나오긴 하더라.
'무지개 빛으로 번지는 오솔길'이라든가, '깊은 빛을 발하는 눈동자', '마음 속에서 따뜻한 빛이 잔상처럼 여리게 반짝'거린다는 표현도 있었고, '온 방안이 온실처럼 빛으로 가득했다'고도 했지.
오죽하면 '암울하고 쓸쓸한 이 산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가 빛나는 것'이라고 했을까. 햇빛마저도 '금빛 달짝지근'하고 빌딩의 나란한 창문들이 '저녁 빛으로 파랗게 물드는' 이야기.

그게 바로 바나나의 키친이야. 끈끈한 혈친의 정을 잃은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를 배려하고,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가슴을 내어주고, 마음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고름을 핥아주며 서로의 마음에 조금씩 '빛과 바람이 통하여' 기쁘게 해주려고 애쓰는 이야기.  냉소도 적의도 없이 오직 삶을 사랑하고자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도 난 생뚱맞게 창가에 서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  자꾸 되풀이해서 나오는 '빛', '투명', '반짝이다'란 낱말에 내 마음이 전염된 걸까?

에리코, 부인을 잃고는 자기의 성정체성까지도 바꿔가며 적극적으로 상실의 상처를 극복하고 삶을 사랑하려 노력한 사람이야.  그 모습이 아름답고 정겹고 애잔해서 빛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사람이지. 닮고 싶단 생각도 들었어. 이 사람만큼 살아가는 일에 덤빌 수 있다면, 집착이라든가 성공이라든가 하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아무쪼록 살아갈 수 있도록"하는 절실함만으로 씩씩하게 덤벼볼 수 있다면, 삶의 비극적 이면 따위도 서늘하게 빛나는 달빛쯤으로 승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더라구.

추운 겨울밤 미카게가 유이치에게 돈까스 덮밥을 배달하는 장면에서처럼 '특별한 이유도 없이 포기하지 못하고' 무모하고 바보스러울 필요도 있는 거잖아.  오히려 그런 것들이 마음에 더 세게 부딪치고, 언제든 살아 빛나는 추억이 되어서 '더 힘들고 더 밝은 곳으로 가자' 며 힘을 내게 해주는 거니까.  

슬픔, 고통, 아픔, 쓰라림, 절망 같은 걸 조금 가볍게 하고 싶어지면 바나나의 키친을 읽듯이 빛이라든가 반짝임이라든가 투명하다라는 말들을 주문처럼 외어볼까봐. 말이 씨가 된다는데, 그렇게 하면 캄캄절벽처럼 답답하던 마음에도 어느날 반짝 빛이 들고 따뜻한 봄바람이 불지도 모르잖아.

가볍고 예쁘고 읽기도 쉽지만, 작은 힘을 가진 소설은 아니더라.  하지만 그렇게 큰 힘을 가진 소설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작가가 애용하는 낱말처럼 이 소설이 '반짝'하고 어느 날 저 뒤편으로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도 살짝 들었지만, 문학사적인 평가야 그 쪽 분야의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겠지.

오늘은 그저 모든 것을 빛나게 해놓고서 그 속에 조용히 앉아 있고 싶어.  그러고 보니 부엌이라는 장소가 그러네.. 깨끗이 문질러 닦아놓은 조리대나 칼 같은 것들은 차갑고 서늘하게 빛나지만,  온기가 있고, 나눠먹을 음식이 있고,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식탁이 있고, 누군가에게 건네줄 따끈한 차 한 잔을 끓일 수 있는 곳이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부엌이 되어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슬퍼도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미카게가 부엌에서만은 편히 잠들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너의 부엌은 누구지?  또 나의 부엌은?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07-16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이란 단어가 그리 힘을 주진 않았나보군요.
나의 부엌은? 무얼까? 여기 알라딘마을일까, 아님?

섬사이 2007-07-17 21:07   좋아요 0 | URL
유이치와 미카게, 그리고 에리코는 서로에게 서로의 부엌이 되어주었던 것 같아요. 마음의 부엌을 찾는 일이 쉽진 않을거란 생각이 들어요. 잔잔한 아름다움이 깃든 소설이었어요.

홍수맘 2007-07-16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통해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를 처음 알았답니다. 그리고 금요일에 어느분의 책방출로 <티티새>라는 책을 얻게 되었답니다. 괜히 반가운거 있죠? 갑자기 "통하였는냐"라는 단어가 떠 올랐어요.
며칠전 6촌오빠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컴 앞에 앉을 시간이 없었어요. 잘 지내고 계시죠?

섬사이 2007-07-17 21:08   좋아요 0 | URL
네,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우리 홍수맘님이 너무 힘든 날들을 보내고 계신 것 같아 걱정이 되네요. 너무 힘들어 병나지 않게 조심하세요.

알맹이 2007-07-17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돈까스 덮밥 부분을 너무 좋아해서 저 부분을 읽을 때마다 온몸이 짜릿해요. ^^ 님의 리뷰는 언제나 '빛'을 발하네요~

섬사이 2007-07-17 21:0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돈까스 덮밥 부분에서 감동했어요. 소설로서가 아니라 그 스토리 자체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참 따뜻하게 감동하며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fallin 2007-07-2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이 들어본 책인데 아직 읽어보진 못했네요..리뷰 읽으니 궁금해지네요 ^^

섬사이 2007-07-23 16:15   좋아요 0 | URL
저도 뒤늦게 읽은 책이에요. 하루키와 겐자부로 외에 다른 일본작가 작품은 읽어보질 못해서요. ^^

유스케 2007-07-29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 리뷰를 쓰신 분이 섬사이님이셨군요.. 리뷰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사실 키친에 리뷰달러 들어갔다 이 글 보고 포기하고 나왔거든요.. 제 일본소설 홀릭의 동기가 된 책입니다. 일상적인 장소가 이렇게 위안이 될 수 있구나..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일로도 위로받을 수 있구나 하며 따뜻한 봄볕 아래서 정말 아쉬워하며 책장을 넘기던 그런 책이었더랬죠..

섬사이 2007-07-30 09:31   좋아요 0 | URL
유스케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제 리뷰를 보고 쓰기를 포기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저도 그냥 내가 좋은대로 써가는 막무가내형 리뷰거든요. ^^;; 감동을 받으신 작품이라니까 유스케님의 느낌도 궁금해지는데,, 사실 전 리뷰쓰기 전에 다른 분들 리뷰 절대 안봐요. 다른 분들 리뷰 읽고 나면 기가 죽어서 쓸 용기가 안나더라구요. 용감하게 쓰시고 보여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