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밤 열시에 시작하는 EBS 프로그램 <다큐10>을 시청한다. 어제는 그 주제가 "팔려가는 아이들"이었다. 원래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뽀도 곁에 앉았고,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는 지니도 잠시 나와서 앉았다. 가난에 내몰려 우리 돈 사만육천원에 고기잡이 배에 팔려가는 아이, 여섯살 때부터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캄캄한 광산에 들어가 맨손으로 망치를 잡고 광물을 캐야하는 11세 소년, 다섯살 때부터 양떼를 모는 아이..
하나같이 가난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안타깝게도 체념의 빛이 너무 짙었다. 교육의 권리나 의무같은 건 가난과 생계 앞에서 맥을 못췄다. 전세계에 그런 식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어린이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85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방송이 끝나고 이어지는 지식채널 e...."대한민국에서 초딩으로 산다는 것" 6학년 아이의 자살, 그 아이가 가장 두려운 것은 시험 점수였고, 공부 잘 하는 아이를 이기고 싶었고, 학원을 조금만 다녔으면 했고,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아이. 시험과 성적에 대한 부담감, 부모의 지나친 기대, 과열을 넘어 통제불가능으로 치닫고 있는 교육열.. 등이 초딩으로 살아가기를 힘들게 만들었다.
지나친 결핍이 주는 불행과 지나친 풍요가 주는 불행, 그 양쪽의 불행이 서로 섞이면서 미묘한 맛을 내고 있었다. 뱉을수도 제대로 씹어 삼킬수도 없는, 따끔거리고 서걱거리는 그 쓴 맛의 덩어리를 아이들도 나도 당황스럽게 입에 물고만 있었다.
뽀는 딱 그 나이에 어울릴만한 한숨을 쉬고는 숙제의 의무를 다했고, 지니는 마지막 시험공부를 해야겠다며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혼란스럽다. 기준은 흔들리고 해답은 보이지 않고 행복의 조건은 너무나 여러가지 얼굴을 하고 있어 신뢰할 수 없었다. 엄마가 이렇게 무능력하다는 걸, 아이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아직도 그 쓴 맛의 덩어리는 내 목구멍에 그대로 걸린 채다. 차라리 TV를 보지 않을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