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전쟁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10
로버트 코마이어 지음, 안인희 옮김 / 비룡소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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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해두지만, 이 책은 희망이나 꿈, 낭만 같은 것들로 예쁘장하게 포장된 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세상은 아름다운 거라는 달콤한 속삭임도, 정의는 끝내 승리한다는 열정적인 외침도 없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다.  책을 읽는 동안 세상의 치부를 들여다보고 확인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트리니티라는 명문사립 남자고등학교.  평범한 고등학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작가는 그 속에 악의적인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담아놓았다.

  
레온선생은 예측할 수 없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인물이다.  초콜릿 판매를 통해 학교의 재정상태를 해결하고 학교에서의 자기 위치를 확고히 함으로써 교장이라는 한 단계 높은 자리로 올라서기를 바라는 야망가이며 사랑으로 채워야할 선생님이라는 직분의 자리를 권력욕으로 채우고 군림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레온선생의 변덕스러운 비열함 앞에 당황하며 눈치를 보고 위축된다.

트리니티고등학교의 또하나의 축, 야경대.  학교 내의 비밀서클로서 그들만의 규칙으로 학교를 지배하는 또 다른 계층이다.  학생들을 지배하고 선생님들을 농락하는 이 잔인한 통제세력의 중심에는 아치라는 냉혹하고 지능적인 책략가가 있다.  그는 야경대의 명령권을 거머쥔 실세이다.

교내의 막강한 권력의 두 축 - 레온선생과 야경대 -가 초콜릿 판매에 연합전선을 구축하면서 학교 안의 위선과 폭력, 집단적 광기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제리 르노, 속임수 없는 "풋볼의 정직한 부딪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미술 작업에서 "깔끔한 구도와 각도가 반듯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소년이다.  그러나 약제사인 아버지의 일상을 바라보며 삶이 "그토록 따분하고 지겹고 지루"하게 마냥 흘러가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소년이기도 하다. 

제리는 레온선생이 요구하는 초콜릿 판매를 거부한다.  처음에 그것은 레온선생과 야경대에 대한 저항도 아니었고, 그저 흘러갈 뿐인 지루한 삶에 아무 생각없이 자신을 맡기기 싫다는, 자기 삶의 주도권을 거머쥐고 싶다는 자기 의지의 표현일 뿐이었다.  아니면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죽음의 환영 반대편에서 자기가 살아있음을 증명해보이고 싶은 욕구의 표출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제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레온선생과 야경대에 반기를 들고 저항한 영웅이 되었다가 다시 그들의 계략에 의해 학교의 숭고한 목표를 방해하는 경멸의 대상이 되어 아치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집단적인 폭력의 광기 앞에 철저하게 망가지고 무너지고 버림받는다.

이야기는 레온선생과 야경대의 실세인 아치, 그리고 제리를 주축으로 전개되지만 이 책에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따로 있다.  그건 트리니티 고등학교의 다른 학생들이다.  제리가 홀로 우리 사회에 대한 메타포인 트리니티 고등학교의 구조적 모순과 악의적인 권력에 맞설 때 400명의 다른 학생들은 무얼 했을까.. 그들은 방관자였다.  제리가 초콜릿 판매를 거부하기 전까지, 레온선생의 경멸어린 시선을 견디며 '아니오'라고 대답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거부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조차도 생각하지 못하는 방관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립적 방관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부패한 권력을 가진 세력이 자기를 장악하도록 순순히 스스로를 내맡기고, 욕심과 잔인함, 폭력의 광기로 영혼과 정신이 물들 때까지 스스로를 방관해버린 것이다.  스스로를 방관하고 초콜릿 판매에 호응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안위와 평화는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르나  악의 부패한 권력앞에 무릎을 꿇었으며 철저한 복종을 맹세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쓰러진 제리는 친구 구버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라고 말하지.  하지만 진짜로는 그런 뜻이 아냐.  그들은 네가 너의 일을 하기를 바라지 않아.  네 일이 동시에 그들의 일이 아니라면 말이야.  웃기는 일이지만, 구버, 속임수야.  우주의 질서를 방해하지마라, 구버,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어." 
사회적 모순에 저항했던 제리는 결코 승리하지 못했다.

이 책이 보여주는 이 불편한 진실을 언제까지나 감추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악의 기세등등함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하여 언젠가 세상에 나아가 부패한 사회의 모순과 권력을 마주하게 되거든 그것에 동조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지켜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절대로 스스로를 방관해선 안된다고 가르쳐주고 싶다.  이 책이 보여주는 절망을 현실에서 되풀이하진 말라고,  트리니티 고등학교의 나머지 400명의 학생들 중 하나가 되진 말라고, 할 수만 있다면 제리의 편이 되어주라고, 그래서 이 세상에 희망이 숨쉬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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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5-04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잠 들어 있는 이 책! 꺼내야 겠어요. ^ ^.

비로그인 2007-05-04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흠... 멋있다. 잘 읽었어요 추천! ^^

섬사이 2007-05-07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맘님, 읽으면서 어쩐지 <호밀밭의 파수꾼>의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책이었어요.

체셔님, 관심을 갖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