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 - 충렬왕에서 최영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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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의 마지막 4권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게.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모두 네 권을 읽으면서 고려의 역사를 쭉 정리해보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구나. 그런데 아빠가 독서 리뷰 적은 걸 찾아보니 아주 오래 전에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시리즈를 읽으면서 고려 역사에 대해 한번 읽고 정리한 적이 있더구나. 시간이 좀 흐르긴 했지만, 그 기억이 전혀 안 나다니, 좀 슬프구나. 그 이야기는 이번에 읽은 고려의 역사도 곧 잊혀진다는 거겠지? , 어쩔 수 없지. 그럼 또 고려 역사에 관한 책을 또 읽지 뭐…^^ 그럼 오늘도 할 이야기가 좀 되니까 얼른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게.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에서는 무신 정권과 몽골 침략과 그에 대해 항전하는 고려의 모습을 이야기해 주었잖니. 오늘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해줄게.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려의 왕 이름에는 몽골에 충성하라는 의미로 충()이 들어갔다고 예전에 얼핏 들은 겉 같구나.

그런 왕들 중에 첫 번째 왕이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이었어. 3권에서 이야기할 때 원종 때 세자를 쿠빌라이 칸의 딸과 결혼시킨다고 했잖아. 그래서 앞으로의 고려 왕들은 몽골 황제의 부마가 된다고그 첫 번째가 충렬왕이란다. 그러니까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는 거야. 그런데 당시 충렬왕은 39살이고 몽골 공주인 제국대장 공주가 17살이었단다. 그 이야기기는 충렬왕은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던 거지.

제국대장 공주가 개경에 오면서, 충렬왕의 아내였던 정화궁주는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하는구나. 제국대장 공주는 처음에는 잘 적응을 하지 못했나 봐. 질투심이 않았고, 한 성격을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기도 했대. 심지어 자시보다 20살 넘게 많은 남편을 회초리로 때린 적도 있다는구나. 그랬다가 시간이 지난 다음에 좀 괜찮아졌대. 그런데, 제국대장 공주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화가 좀 많이 났을 거야. 17살에 다른 나라에 와서 이미 결혼한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라고 하니 누가 좋아하겠니. 그것도 평생 공주로 살던 사람이 말이야. 아빠는 제국대장 공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겠더구나.

시간이 흘러도 향수병은 가시질 않은 것 같아. 나중에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몽골에 다녀온 뒤 제국대장 공주는 39살 나이에 죽고 말았단다. 이때 충렬왕은 궁녀 무비라는 사람에 한창 빠져 있었어. 그런데 세자는 엄마인 제국대장 공주가 죽은 것이 무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무비와 측근을 죽여버렸단다. 충렬왕은 그런 아들에게 뭐라 하지 못했어. 충렬왕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력이 점점 약해졌거든. 그에 반해 아들은 세력을 점점 커졌고그래서 충렬왕은 결국 아들한테 왕자리를 넘겨주었단다. 그는 고려 충선왕이었어.

 

1.

충선왕이 왕에 오르고 나서 이것저것 개혁을 추진했단다. 그 개혁들을 몽골 허락 없이 해서 밉보이게 되었단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 계국대장 공주와 결혼을 했어. 그런데 계국대장 공주와 결혼하기 전에 조비와 결혼을 했었어. 당시 왕들이 왕비 둘을 두는 것은 일상이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 그런데, 충선왕이 계국대장 공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조비만 좋아했다고 하는구나. 계국대장 공주는 독수동방만 했대. 자신의 아버지와 너무 비슷하지 않니? 자신이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무비를 죽이기까지 했으면서 말이야. 충선왕도 그리 유능한 왕은 아닌 것 같구나.

한편, 외로움에 힘든 날을 보내고 있던 계국대장 공주는 몽골에 편지를 보냈고, 이를 조사하기 위해 몽골은 100명이나 파견을 보냈다고 하는구나. 그리하여 충선왕과 조비를 몽골로 데리고 갔어. 몽골에서는 충선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서 물러났던 충렬왕을 다시 왕위에 세웠단다. 아들 충선왕에게 왕을 물려준 지 8개월만이었어. 몽골의 의해서 고려 왕이 폐위당하고, 다시 복위되고 힘없는 고려의 단모습을 보여주는구나.

몽골에 간 충선왕은 그곳에서 10년을 지냈단다. 그 사이에 몽골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어. 원나라의 당시 황제였던 성종이 죽고 황위 다툼이 일어났단다. 이때 충선왕과 충렬왕은 각기 다른 사람을 지지했대. 그런데 충선왕이 지지한 무종, 인종 형제가 차례로 황제가 되었단다. 충선왕은 이들이 황제가 되는데 일등공신이 되어 심왕으로 책봉받았다고 하는구나. 충선왕은 원나라에서 상당한 고위직이 된 거였어. 시간을 흘러 충렬왕은 73세에 죽고 충선왕은 10년만에 고려왕에 복위했단다. 그런데 이미 몽골에서도 왕위를 갖고 있었잖니. 충선왕은 두 개의 왕위를 갖게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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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4)

(이익주) 그래서 충선왕이 폐위된 지 10년 만에 복위합니다. 사실 충선왕의 전성기는 복위하기 한 해 전인, 무종을 옹립한 직후부터 시작됩니다. 그때 원에서 심왕으로 책봉받습니다. 지금의 중국 선양시와 랴오양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분봉받으면서 원의 여러 왕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마침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고려 왕까지 되어 두 개의 왕위를 겸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원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정책이 어전회의에서 토의되고 결정되는데,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케식으로 부릅니다. 충선왕이 바로 케식의 일원으로서 원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면서 원의 실력자가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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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려왕이 된 충선왕은 고려에 왔는데 얼마 머무르지 않고 다시 몽골로 갔단다. 그리고 몽골에서 편지로 고려를 통치했어. 충선왕은 두 개의 왕을 겸하고 있다 보니 몽골 황제에서 불만을 갖는 이들이 있었고, 이에 충선왕에게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했단다. 몽골 사람들은 당연히 충선왕이 고려왕을 선택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충선왕은 뜻밖에도 심왕을 선택했단다. 그리고 고려왕은 세자에게 양위를 했대. 충선왕은 좀 독특한 캐릭터로구나. , 그래도 계속 몽골에서 자라났고, 반 이상은 몽골 피를 가지고 있었으니 몽골에서 사는 것이 편할 수도 있겠다 싶더구나. 그런데 충선왕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단다. 충선왕이 지지하던 무종과 인종이 잇달아 죽고 5대 황제인 영종이 즉위한 이후 티베트 지역으로 유배를 가고 말았다는구나.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로구나. 티베트로 유배를 갈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2.

몽골의 공주가 고려왕의 왕비가 되는 경우는 많았는데, 반대로, 고려의 공주는 아니더라도 고려의 여자가 몽골 황제의 황후가 되는 경우가 있었을까? 한 명 있었단다. 드라마로 만들어진 이후로 많이 유명해진 기황후가 바로 그 사람이야. 십대 때 공녀로 몽골에 가게 되었는데, 궁녀가 되고 그 이후 2황후가 되었단다. 1황후가 아니고 2황후이긴 하지만 똑 같은 황후였기 때문에 그 권력이 막강했고 고려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단다. 고려의 왕까지 조정할 수 있었단다. 그래서 공민왕이 제때 왕이 안되고 뒤늦게 왕위에 오른 것도 기황후의 영향력 때문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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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신병주) 여기서 고려 왕의 계보를 잠깐 살펴보자면, 충선왕의 아들 강릉대군이 충숙왕이 됩니다. 그다음은 충숙왕의 장남인 충혜왕이 잇고요. 참고로 공민황은 충숙왕의 차남이죠. 충혜왕이 폐위되자 동생인 공민왕이 왕이 될 뻔했는데, 결국에는 아들인 충목왕이 고려 제29대 왕이 되죠. 충목왕이 즉위할 때 여덟 살이었는데, 4년 만에 열두 살의 나이로 병사해요. 그렇게 해서 공민왕이 이제는 자기 차례라고 생각할 때, 이번에는 충혜왕의 서자인 충정왕이 열 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니까 공민왕은 어린 조카 두 명에게 연이어 밀린 거예요. 충혜왕이 폐위되었을 때는 충목왕에게 밀려 재수하고, 충목왕이 죽었을 때는 충정왕에게 밀려 삼수한 거죠. 결국 공민왕은 삼수 끝에 고려 제31대 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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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의 집안들이 고려의 권력을 거의 잡다시피 했는데, 한가지 골칫거리 왜구 침입이 있었어. 공민왕이 왕이 되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는 생각에 기황후는 공민왕을 왕위에 앉혔다고 하더구나.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기황후의 일가를 처단하려고는 조일신이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켜서 기황후의 오빠 중 한 명을 죽였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이 난을 일으킨 조일신이라는 사람이 공민왕의 측근이라고 했어. 배후에 공민왕이 있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런데 공민왕도 기황후 집안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조일신의 난을 직접 진압하게 된단다. 그리고 기황후 집안의 파워를 새삼 알게 된 공민왕은 자세를 낮추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그것을 기회를 엿 본 거야.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왕권을 세우려고 했거든. 그러기 위해서는 친 몽골파인 기황후 집안을 어떻게든 없애야 했어. 결국 잔치를 가장하여 기황후 오빠인 기철을 비롯하여 기씨 일가를 초대한 후에 기황후와 원나라를 지지하는 부원세력을 일망타진해 버렸단다. 그리고 이자춘 이성계 부자의 도움으로 쌍성총관부를 점령했단다. 이자춘 이성계 부자는 당시 쌍성총관부의 관리였는데, 그곳을 고려왕 공민왕에게 헌납한 것이란다. 원나라가 쇠퇴하고 있는 국제 정세를 잘 읽은 것이 아닐까 싶구나. 이 공로로 이자춘과 이성계는 고려의 관직을 얻게 된단다. 드디어 이성계가 역사에 등장하는구나.

이 즈음 공민왕 암살 기도가 일어나는데 다행히 실패했단다. 증거는 없지만 기황후가 배후로 의심되는 상황이란다. 기황후는 이번에는 공민왕을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원나라 군대 1만명을 고려에 보냈어. 그런데 공민왕은 이들을 순순히 맞이하지 않았어. 최영과 이성계를 시켜 이들을 격파하였단다. 이 전투에서 몽골은 대패하고 겨우 10여 기만 돌아갔다고 하는구나.  이후 공민왕은 자신감을 갖고 개혁을 추진했단다.

이때 신돈이라는 사람을 영입했는데, 토지제도, 노비제도를 정비하고 신진관료들을 대거 양성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추진했단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요승이라고 부르고 업신여겼단다. 그럼에도 왕의 지지를 받은 신돈. 그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권력에 자꾸 관심을 갖게 되면서 결국 탄핵당해 유배를 가게 되었고, 유배 후 이틀 만에 참수 당했다고 하는구나. 권력의 욕심이란 무엇인지

초반에 개혁 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은 사랑하던 왕비 노국대장 공주가 죽고 난 이후에는 정사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아들이 없던 공민왕이 신돈의 여종인 반야와 사랑을 나누고 아들을 낳았는데, 당시에도 그 아들은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반야가 낳은 아들은 정비의 아들이 아니었잖니. 공민왕은 노국대장 공주가 죽고 익비를 왕비로 맞이했는데 아직 아들이 없었어. 그래서 몰래 자제위 중에 홍륜이라는 사람을 익비와 동침을 시켰다고 하는구나. 자제위는 아빠가 얼마 전에 읽은 이병주 님의 <정몽주>편에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공민왕이 만든 미소년의 모임이란다.

홍륜과 동침했던 익비가 임신을 하게 되었어. 공민왕은 이 아이의 아버지가 홍륜인 것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홍륜을 죽이려고 했단다. 그런데 이걸 눈치 챈 홍륜이 오히려 공민왕을 죽이고 된단다. 그렇게 공민왕은 비극적으로 죽고 말았단다. 이 공민왕의 시해 사건을 뒷수습하고 범인도 찾아낸 이가 이인임이라는 사람인데 이 일로 이인임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권력도 잡게 된단다.

 

3.

다음 왕은 누가 될 것인가. 공민왕의 공식적인 아들은 신돈의 여종 반야가 낳은 아들 한 명뿐이었단다. 신돈의 여종 반야가 낳은 아들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소문일 뿐이고 공식적으로는 공민왕의 아들이었으니, 이인임은 그를 왕위에 세우니 그가 우왕이란다. 허수아비 왕으로 세운 것으로 볼 수 있지. 이때 이인임을 지지해준 사람이 최영 장군이었단다. 최영 장군은 이때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이인임의 불법행위도 눈감아 주었는데, 그의 업적에 옥의 티를 남기신 것 같구나.

이인임은 친원 세력으로 권력을 잡으면서 신흥사대부들을 모두 쫓아냈다고 하는구나. 이인임의 권력에 우왕이 맞서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어. 그러자 우왕은 최영을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어. 한때 이인임을 지지했던 최영도 이인임이 도가 지나친 것을 알고, 우왕의 부탁을 들어 이인임을 치기로 했단다. 혼자서는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이성계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함께 이인임 세력을 몰아냈단다. 결국 이인임은 유배를 가게 되었어.

이 즈음에 왜구의 계속된 침입이 있었는데, 육지까지 쳐들어왔단다. 정몽주는 일본에 건너가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어. 일본도 왜구의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몽주의 제안에 긍정적으로 답변을 했단다. 하지만 결국 왜구를 내쫓아야 하는 것은 무장의 몫. 이때 최영, 이성계, 그리고 화약 개발로 유명한 최무선의 활약이 있었단다. 최영은 61세의 노구를 이끌고 해구 소탕을 위해 몸소 출동하고, 최무선은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공격했고,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왜구 토벌에 마무리를 지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쓰시마까지 진출하여 그곳도 정벌했다고 했어.

이인임을 몰아내고 왜구도 무찌르는데 최영과 이성계는 협력하여 큰 성과를 이루어냈단다. 최영과 이성계는 열아홉 살 차이였는데 고려 장수의 신구조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어. 하지만 둘 간의 의견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 있으니 새로 생긴 명나라에 대한 자세였단다. 당시 명나라가 함경도에 불법으로 철령위를 설치를 하였단다. 이에 최영은 명나라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성계는 사신을 보내서 외교적으로 풀자고 했단다. 결국 최영의 파워가 더 있었기 때문에 최영의 말대로 요동정벌을 떠나게 되었고, 그 일은 이성계가 맡게 되었단다.

탐탁지 않은 일을 이성계에게 시켰으니, 이성계가 4불가론을 내세우면서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 아니겠니그래서 결국 고려의 멸망까지 이어지고 말이야. 이 이야기는 예전에 <역사저널 그날 1>을 읽고 이야기해주었으니 오늘은 생략하련다. 이것으로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권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 났단다. 이 책에서는 최영과 이성계에 대한 평가를 해주면서 마무리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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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이익주) 저는 최영이나 이성계 모두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영에게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최영은 개인적으로는 참 청렴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개인의 청렴함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생각하지 못했죠. 그랬기 때문에 최영 개인은 청렴했지만, 공민왕 때는 개혁의 걸림돌이 되었고, 우왕 때는 이인임의 불법행위를 눈감아요. 사회가 구조적으로 부패해 가는 것을 막지 못한 거죠. 어쨌든 최영의 죽음으로 고려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거의 사라집니다. 이때부터 고려가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데, 고려 왕조로서는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이 된 최영에게 국제적인 감각과 사회 변화에 관한 안목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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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아빠도 고려의 역사를 한번 훑어보게 되어서 좋았단다. 중간중간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담겨 있어서 좋았고. 책이 그리 어렵지 않게 적혀 있어서 너희들도 읽으면 좋겠더구나.

오늘은 그럼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복위한 원종이 몽골에 가서 군대를 요청하고 혼인을 제의했을 때, 몽골은 군대는 바로 내주었지만 혼인은 망설였던 것 같다.

책의 끝 문장: 이때부터 고려가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데, 고려 왕조로서는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의 된 최영에게 국제적인 감각과 사회 변화에 관한 안목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익주) 호구조사를 고려의 자율에 맡긴다는 것은 고려의 호구조사 결과를 몽골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전까지 고려에 설치되어 있었던 다루가치를 폐지하고 다시는 설치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 낸 거죠. 또한 그 당시에 고려에 주둔하던 몽골군을 전부 철수하게 하고, 홍차구 같은 부원 세력이 고려의 정치에 개입하려고 하는 것도 이제는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쿠빌라이 칸의 약속이 쿠빌라이 칸이 죽은 다음 몰골의 후손들에게 세조가 정한 옛 제도라는 의미에서 세조구제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 이후에는 몰골의 누군가가, 또는 고려의 부원 세력이 고려의 자주성을 해치려고 시도하면 언제나 이 세조구제에 어긋난다는 논리로 막아 냅니다. 그래서 고려가 끝까지 국가로서 유지될 수 있었죠. 충렬왕의 외교가 거둔 성과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 P33

(이익주) 사실 기황후의 능력은 외모보다는 몽골 여인과는 다른 학식에 있었습니다. 한가할 때는 <여효경>과 각종 역사서를 읽으면서 중국의 역대 황후 가운데에서 본받을 만한 인물이 있는지 공부했다고 합니다. 또한 사방에서 올라오는 공물 가운데 좋은 것이 있으면 태묘에 먼저 바친 후에야 그것을 가졌다는 기록도 있고, 수도 근방에 커다란 기근이 들었을 때는 자기의 사재를 털어서 무려 10만여 명의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처럼 황실 안에서 상당히 현명하게 처신했다는 기록을 보면 몽골 사람들은 잘 갖지 못했던 유교적인 덕목을 기황후가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 P84

(류근) 뭐니 뭐니 해도 공민왕이 불굴의 자세로 추구한 자주성과 독립성이 가장 인상에 남아요. 그 삼엄한 원 치하에서 어떻게든 고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회복하려고 노력한 그 끈기와 오기에 아름다운 고려 정신이라고 박수를 좀 보내 주고 싶어요. - P108

(신벙주) 이인임 세력은 권력을 휘둘러 뇌물을 수수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강제적으로 뺏는 일들을 자행해요. 혹시 수정목이라는 나무 들어 봤어요? 물푸레나무예요. 이 나무가 아주 단단합니다. 야구방망이로 만들어도 되는 나무인데, 이때 이인임의 수하들이 수정목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토기를 내놓으라며 때렸죠. 그러다 보니까 몽둥이가 국가에서 발급한 공문보다도 더 효과가 크다고 해서 수정목 공문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정말 공포의 대상이 됐다는 거죠.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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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 만적에서 배중손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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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을 이야기해줄게. 아빠가 메모를 하면서 꼼꼼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너희들에게 독서편지를 다시 쓰려고 보니 이미 기억 속에서 많이 사라져 있더구나.  메모의 불분명한 내용은 다시 책도 뒤적거리기도 했단다. , 아빠의 짧은 기억력이 원망스럽구나. , 더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바로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1170년 무신정변 이후 약 100년 동안 민란이 무려 75회나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그만큼 백성들은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야. 2권 독서편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신이 정권을 잡으면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했다면 백성들 지지를 받으면서 더 오랫동안 정권을 잡았겠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뇌가 없었어. 자시들의 욕심만 채우려고 급급했지. 그러니까 서로 치고 박고 죽이고 권력이 십 년 가기가 어려웠어. 이 때 일어난 난 중에 유명한 난을 두 개 이야기해줄게. 먼저 1176년 공주 부근의 명학소라는 곳에서 망이 망소이의 난이 있었단다. 당시 행정 구역을 나눌 때, 급이 있었는데 가장 높은 급은 주현, 그 아래로 속현이 있고 그 아래 향, , 부곡이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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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2)

(이익주) 고려 시대 지방 제도의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모든 군현이 같은 등급에 있지 않고, 크게 세 등급으로 나눠집니다. 가장 위에 있는 등급인, 지방관이 파견되는 군현을 주현으로 부릅니다. 주인 주() 자를 쓰지요. 그다음 등급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옆에 있는 주현으로부터 간접 통치를 받는 속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는 향, , 부곡이 있는데, 이 향, , 부곡에 사는 사람들은 좀 어려운 말로 잡척(雜尺)으로 부르지요. 이 작첩들은 일반 군현에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세와 공물, 역 같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유지를 경작하거나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을 생산해 국가에 납부하는 역을 더 지므로 살기가 더 힘듭니다. 사회적으로는 천대받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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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학소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 즉 급이 낮은 지역으로 많은 불이익을 받으며 살았단다. 당시에는 이사의 자유도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계속 살아야 했어.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가 난을 일으켜서 관군을 투입했지만 관군은 패배하고 말았단다. 나라에서는 명학소를 주현으로 등극시켜주는 조치를 했어. 그러자 백성들이 너무 착했던지, 어리석었던지 백성들의 분노가 잦아들었지. 그렇게 난리가 수그러들자 관군은 망이, 망소이와 그들의 가족을 잡아가버렸어. 그제서야 다시 봉기를 했지만 리더가 사라진 봉기는 실패를 하고 말았단다. 그리고 '주현'도 다시 명학소로 강등당했다고 하는구나.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

또 하나 민란을 이야기해볼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노비의 난인 만적의 난이 이 시절에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망이 망소이의 난도 그렇고 만적의 난도 그렇고, 예전에 교과서에 나와서 이름들만 기억나는 그런 민란이란다. 만적의 난도 안타깝게 내부 배신자 때문에 실패를 했고나라에서는 이 난에 참여를 했던 100여 명을 모두 수장시켜 죽였다고 하는구나그래도 이런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 민란이 계속 발생하자 향, , 부곡의 숫자는 점점 줄어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1.

최충헌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최충헌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있었는데 실패를 했다는구나. 이 암살사건이 실패하고 나서 최충헌의 자신의 권력을 더 막강하게 했고, 암살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기 위해 교정도감을 설치했는데, 이 교정도감이 나중에는 최씨 무신정권의 핵심적인 권력기구가 되었대. 그리고 그 교정도감의 우두머리를 교정별감이라고 했는데, 최충헌부터 4대 동안 교정별감을 세습했다고 하는구나.

신종이 죽고 제21대 희종이 왕이 되었는데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24살이었단다. 혈기 넘치던 시기에 왕이 되었는데, 모든 정권은 최충헌이 갖고 있으니 마음에 안 들었겠지. 그래서 자객 10명을 시켜서 최충헌을 암살하려고는 시도를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단다. 그러자 최충원은 희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아들을 왕위에 앉혔으니 그가 제22대 강종이었단다. 왕도 마음대로 폐위시킬 수 있는 권력이 최충헌에게 있던 거야. 왕 위에 교정별감이 있었던 거지. 강종이 왕 위에 오른 것이 60세였어그래서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단다. 그리고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올랐단다. 고려 제23대왕 고종은 고려 왕 중에 가장 오랜 기간 즉위했다고 하는구나. 46년간.

...

고종 3년 거란의 침입이 있었는데 관군이 변변치 않았어. 왜냐하면 유능한 장수는 모두 최충헌의 사병 소속이었거든. 그래도 사병이 얼마나 된다고 관군에 영향을 주냐고 할 수 있지만, 최충헌의 사병은 수만 명이나 되었대. 그 많은 사람들은 월급 주려면 만만치 않을 텐데, 얼마나 수탈을 해서 부를 챙겼을까 싶구나. 거란이 침입을 했지만 최충헌은 자신의 사병을 나라에 내주지 않았어그렇게 되자 화가 난 승려들이 최충헌을 상대로 군사를 난을 일으켰는데, 잘 훈련된 최충헌의 사병들을 이길 수 없었지. 이 난에 참여했던 승려들 800여 명이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구나. 한편, 거란의 침입은 조충이라는 분께서 간신히 막았단다. 혼자 막은 것은 아니고 거란 위쪽에서 치고 내려오는 몽골족과 연합해서 막아낸 것이라고 하는구나.

자신의 개인 욕심만 채우던 최충헌은 장수를 누리고 71살에 죽었다고 하는구나. 평생 자신의 권력에만 신경 썼던 최충헌. 그나마 다른 무신들과 달리 말년에 문인을 일부 등용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뿌리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최충헌처럼 권력 욕심이 많은 사람의 후세들의 특징은 서로 싸우는 것... 역시나 최충헌이 죽고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어. 이 싸움에서 장남 최우가 정권을 잡게 되었단다. 그런데 이제 권력 욕심만 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몽골이 고려를 노리고 있었단다.


2.

앞서 거란의 침입을 이야기할 때조충이 거란 북쪽에서 내려오는 몽골과 연합해서 거란을 물리쳤다고 했잖아. 몽골에서는 이 일로 형제의 맹약을 맺자고 했어고려에서는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없으니 몽골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단다. 몽골이 형이고 고려가 아우. 이 맹약 이후 몽골은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했어. 사신으로 왔던 제구예는 난동을 부리기도 했단다. 그런데 그 몽골 사신 제구예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너머에서 죽은 사건이 일어났단다누가 죽였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런데 몽골에서는 고려 사람이 범인이라고 단정 짓고 책임을 물었단다. 고려로서도 억울한 일이었지. 압록강 밖이면 동진족, 여진족 등 외부 세력도 있었고, 몽골족 중에 원한이나 다른 이유로 죽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이 사건으로 고려는 몽골과 단절을 선언했단다.

약간은 무리한 선택이 아닌가 싶구나. 당시 몽골은 유럽부터 아시아 대부분의 땅을 정벌한 세계 최강 기마부대를 가진 나라였는데... 이 일이 있고 6년 뒤 몽골은 고려를 침략해 왔단다. 6년이나 걸린 이유는 그 동안 남송, 금나라를 공격하느라 늦은 것이란다. 남송과 사대를 맺고 있는 고려도 가만 둘 수 없으니 제구예 사건을 핑계로 고려를 쳐들어왔단다. 개경을 지나 충주까지 그래도 밀고 내려온 몽골군. 고려 관군이 버텨내기는 쉽지 않았단다. 이 때 백성들로 이루어진 초적들이 관군을 도와 몽골군과 싸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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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최태성) 그 정체는 바로 초적입니다. 초적은 고려 민주이에요. 먹고살기 어려운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다가 무리를 지어 도적질하는 무리가 된 거죠. 사실 이 초적들은 무신 정권에 반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몽골군이 오니까 무신 정권에 손을 내밀고 몽골에 대항해 함께 싸우자고 한 거예요. 심지어 마산, 이 마산은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인데, 그 마산에 있는 초적 우두러미 두 명이 직접 최우에게 와서 몽골과의 전쟁에 자기들을 써 달라고 자원합니다.

(류근) 초적들이 평소에는 관군들에 쫓기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나라에 위기가 닥치니까 일단 묵은 감정은 접고 외적과 싸우자는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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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성에서 박서, 김경손 등이 몽골군을 무찌르는 쾌거를 이뤘지. 아빠는 박서, 김경손이라는 분들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분들인데, 엄청난 영웅이었더구나. 그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면 좋겠는데, 아빠의 기억력이 얼마나 버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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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신병주) 귀주성의 승리는 이끈 김경손에 관한 기록을 보면 몽골군이 쏜 화살에 팔을 맞아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끝까지 부대를 지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김경손이 아주 중요한 곳에서 군사들을 지휘하는데, 몽골군이 쏜 포탄이 계속 날아오자 부하들이 김경손에게 너무 위험하니까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권합니다. 근데 김경손은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이면 부하들이 동요할 것이다.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라면서 끝까지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부대를 지휘하죠. 정말 대단한 장군입니다. 명장이죠.

(류근) 당대의 영웅이었는데, 우리가 잘 몰랐던 거네요. 진짜 감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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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려는 역부족이었어. 결국 조공과 인질을 보내기로 하고 화친을 맺었단다. 하지만 고려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인질도 안 보냈어. 그리고 다시 항전 준비를 했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단다. 강화도로 옮겨 왕족은 대피할 수 있으나 육지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은 그대로 핍박을 받는 상황이었지. 그래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최우는 반대 세력을 죽이면서까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단다. 백성들도 각자도생 한다고 산과 섬으로 피신했지만 역부족이고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하는구나

...

몽골의 2차 침입이 일어났단다. 최우는 강화도에도 몸 사리고 있을 때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가 몽골군은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단다. 몽골의 사령관 살라타이가 화살에 맞아 죽은 대승이었어. 그래서 몽골은 잠시 물러나게 된단다.

1233년 홍복원, 필현보라는 사람이 서경성을 빼앗아 몽골에 항복하는 일이 벌어진단다.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구나왕권이 상실되고 권력 잡은 무신들은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고 있으니 홍복원, 필현보 이 사람들도 아마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저런 짓을 한 것 같구나. 하지만 힘없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너무 나쁜 사람들이구나. 홍복원은 몽골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되고 고려 침입의 선두에 섰다는구나.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이 약 5년간 이어졌단다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볼 수 있어. 이 때 경주 황룡사 구층탑과 초조대장경 등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고 말았대그리고 불심의 힘으로 외세를 몰아내고자팔만대장경을 간행한 것도 이 때라고 하는구나몽골의 3차 침입은 본국에 있던 대칸이 죽으면서 철수를 했다고 하는구나

1247년 몽골의 4차 침입이 있었는데, 이 때도 2년만에 대칸이 죽어 철수를 했고,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이 있었단다. 이때는 칭키스칸의 조카 예쿠와 홍복원이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어. 예쿠는 몽골 진영 내 내분이 일어나서 금방 돌아가고 홍복원이 혼자 군대를 지휘했다고 하는구나충주성에서 김윤후가 다시 대승을 거두어 몽골은 다시 물러났다고 하는구나. 처인성에서 활약을 했던 김윤후가 이번에는 충주성에서... 김윤후라는 분은 다시 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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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80)

(신병주) 후대의 역사는 김윤후가 높이 평가받기에는 상당히 불리한 여건으로 지속됩니다. 원 간섭기에는 몽골에 저항한 인물이니 제대로 평가받기가 어려웠고, 조선 시대에는 신분이 승려인 김윤후가 크게 활약한 것을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별로 없었죠. 하지만 조헌이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에 김윤후를 언급할 정도로 그 당시에 많은 백성 사이에서, 특히 의병장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윤후가 대몽 항쟁의 상징으로 분명히 회자되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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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4년 몽골의 6차 침입이 있었고, 이때부터 몽골은 고려에 머물면서 온갖 노략질을 했단다. 1258년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지배를 하기 시작했지. 고려가 몽골의 계속된 침입을 막아냈지만결국은 역부족이었던 거지. 당시 고종의 태자(나중에 원종이 됨)가 몽골 칸을 만나 강화를 맺기 위해 몽골에 갔단다. 그런데 칸이 죽고 동생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게 되었어. 원종은 어느 동생 편을 드는 것은 고려의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었어. 원종은 쿠빌라이를 찾아갔는데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단다. 쿠빌라이가 다음 칸이 되었거든. 칭키스칸 다음으로 유명한 그 쿠빌라이 칸을 원종이 찾아간 것이지.

...

한편, 당시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은 최의가 잡고 있었는데, 문신인 유경과 무신인 김준이 손을 잡고 최의를 제거하였단다. 그렇게 최의가 죽으면서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단다. (1258) 그런데 김준은 혼자 권력을 잡고 싶었는지 유경을 죽이고 전권을 잡았단다.

....


3.

원종이 몽골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버지 고종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단다. 쿠빌라이 칸은 원종에게 왕을 임명하고 고려로 보내주었단다. 이 때부터 고려가 몽골에 사대하기 시작한 것이야. 이 때 원종이 쿠빌라이와 맺은 강화 조약은 비록 고려가 전쟁에서 지고 나서 맺은 조약이지만, 당당한 요구도 포함되어 있어 외교적으로 성공한 강화조약으로 평가를 받는다고 하구나. 원종이 쿠빌라이와 친분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요구를 했고, 쿠빌라이도 이를 흔쾌히 받아준 것 같아. 그것으로 인해 그 이후에도 몽골이 고려라는 나라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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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이익주) 그 당시 고려의 상황을 평가할 때는 몽골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대제국이라는 점,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 가운데 국가를 유지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을 전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때 고려라는 국가를 유지하게 한다는 쿠빌라이 칸의 약속을 뒷날 세조구제(世祖舊制)로 부르는데, 고려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모든 시도에 대해 고려 측에서는 세조구제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반대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런 점에서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이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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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이 고려로 돌아왔을 때 정권은 김준이 잡고 있었는데원종은 임연이라는 사람을 이용하여 김준을 제거했단다. 그러자 이번에는 임연이 권력을 차지하고 원종까지 폐위를 시켰단다. 칼 잡은 자들의 끝없는 욕망을 보고 있는 듯하구나. 이 소식이 몽골에 있는 쿠빌라이의 귀에 들어갔어원종과 쿠빌라이는 돈독한 사이인데 원종을 폐위시켜? 쿠빌라이는 압력을 행사했고 원종은 복위를 했단다. 복위한 원종은 다시 쿠빌라이를 만나러 몽골에 갔단다그리고 몽골 군대를 빌려와 임연을 공격하려고 한 것이지. 그런데 임연은 등창에 걸려 죽고 말았단다. 그렇게 길고 긴 무신정권이 끝이 나고 말았단다. (1270)

원종은 태자를 쿠빌라이 칸의 딸과 결혼을 시켰단다앞으로 고려의 왕이 될 태자가 몽골 황제의 부마가 된 것인데, 이것은 이후 한동안 쭉 이어졌단다그런데 이런 원종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어.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였단다. 원래 삼별초는 무신정권 때 만들어진 조직으로 치안을 담당하고 도적을 잡는 조직으로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이루어졌단다. 이 삼별초를 이끌고 있던 배중손은 원종이 몽골에 강화조약을 맺은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계속 항전했던다. 또다른 왕, 온왕도 세웠어.

처음에 강화도에 있었는데, 강화도를 떠나 진도에 주둔지를 세웠어. 삼별초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세를 키워나갔단다. 몽골군과 싸워서 승리하기도 했어하지만 몽골과 고려관군의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패배하고 말았단다. 그리고 왕으로 세웠던 온왕이 죽고 배중손도 진도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돼. 배중손을 뒤이어 김통정이라는 사람이 남은 부대를 이끌고 제주도로 향했단다. 몽골에서 회유를 했는데 거절했고, 몽골은 다시 대규모 군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공격했어. 그렇게 몽골에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삼별초마저 결국 제주도에서 궤멸하고 말았단다. 하지만 삼별초와 이를 지지했던 백성들의 항전은 잘 기억해야 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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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이익주) 우리가 흔히 삼별초의 항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삼별초만의 항쟁이 아니라 삼별초를 중심으로 하는 고려 전 백성의 항몽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평가는 복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외세에 대항해 싸웠다고 해서 무조건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겠죠. 고려가 28년 동안 몽골과 싸운 점, 강화를 통해 왕조를 유지하고자 노력한 점 등을 고려해 삼별초를 중심으로 하는 항몽도 종합적으로 새롭게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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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1170년 무신 정변이 일어나고 한동안 무신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민란이 일어났다.

책의 끝 문장: 역사를 단순하게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하면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가 보인다는 사실을 삼별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됐습니다.


(신병주) 한때는 국사 시간에 향*소*부곡을 천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가르쳤는데, 최근에 바뀌었어요. 양인과 천민을 나누는 가장 큰 구분점은 국역을 지는지 안 지는지입니다. 향*소*부곡에 사는 사람들도 국역을 지기 때문에 일단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죠. 다만 하는 일이 천역(賤役)이어서 일반적인 양인과는 좀 구분해야 합니다. 특히 소라는 지역은 수공업을 전문으로 해서 물품을 조달하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금소에서는 금을 생산하고, 은소에서는 은을 생산하죠. - P33

(이익주) 다소 역설적이긴 합니다만, 최충헌이 그렇게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왕실은 그대로 두고 그 권위를 이용하면서 자기의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하고 세습까지 했죠. 그래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신하가 권력을 4대에 걸쳐 세습할 수 있었던 겁니다. - P76

(이익주) 고려에 호감이 있었다기보다는 고려를 고구려와 같은 나라로 알았다는 점이 컸을 겁니다. 훗날인 1259년에 고려 태자가 몽골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납니다. 그때 쿠빌라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고려는 만 리나 되는 큰 나라다. 옛날에 당 태종이 친정했어요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나에게 왔으니 이건 하늘의 뜻이다."
(류근) 진짜 고려를 고구려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 몽골이 그 정도로 국제 정세에 어두웠는데도 패권 국가가 되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나마 고구려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게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간 보기 정도로 형제가 되자는 카드를 내밀어 본 거 같아요.
- P87

(신병주) 그래서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논란이 많아요. 강화 천도가 전략적 천도인지 도피성 천도인지 판단하기가 어렵거든요. 전략으로 보는 쪽은 강화 천도가 항전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것으로 강조하고 해석합니다. 강화도라는 천연의 요새에서 오랫동안 버팀으로써 몽골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보는 거죠. 반면에 도피로 보는 쪽은 어차피 몽골에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우라는 집권자가 자기 안위를 위해 안전이 보장되는 강화도로 천도했다고 해석하죠. 이런 지적을 할 수 있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무렵에도 여전히 초적들이 준동하고 백성들이 반란을 계속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몽골이 아니더라도 최우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너무 많은 거예요.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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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 강감찬에서 최충헌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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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를 이야기해줄게. 1권에서는 고려 건국부터 후삼국 통일, 그리고 광종, 천추태후 등에 관한 이야기를 있었잖아.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거란의 침략이 있었고, 강조가 막아내려고 했으나 패배하고 개경까지 함락이 되었잖아. 그리고 당시 왕인 현종은 나주까지 천도를 했다고 이야기해 주었지. 2권에서는 이 이야기부터 다시 해주었단다. 이때 고려가 나주로 몽진한 것은 강감찬의 조언에 따른 전략적 결단이었다고 하는구나. 조선 선조의 무작정 도망과는 다른 몽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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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류근) 제가 처음에는 몽진이라는 말만 듣고 경기를 일으켰는데,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까 (조선) 선조의 몽진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요. 선조의 몽진이 지극히 보신적 도망이었다고 한다면 (고려) 현종의 몽진은 강감찬이 사태를 분석해 선택한 전략적 결단이었잖아요. 어떤 문제의 본질과 현상을 제대로 파악해서 그에 걸맞는 대안을 사유해 내는 능력을 보여 준 건데, 이래서 인문학적 교양이 필요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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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그 다음 이야기를 해줄게. 다행히 사신 하공진이라는 사람이 거란을 설득을 해서 거란은 개경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이때 하공진도 인질로 같이 거란 진영으로 끌려갔단다.

..

1018년 거란은 소배압을 필두로 다시 고려를 침입했단다. 세 번째였어. 이때는 강감찬 장군이 분비를 잘 해서 흥화진이라는 곳에서 승리를 했단다. 그래도 거란은 강감찬 장군을 피해서 개경까지 접근했지만, 거란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고려군의 대피로 다시 퇴각하고 말았어. 그런데 이 거란의 퇴각은 쉽지 않은 길이었단다.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준비하고 있었거든. 거란 군대는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한테 대패하고 세 번의 침략은 끝이 났단다. 이후 약 100년간 거란은 고려를 쳐들어오지 않았고 평화가 유지되었다고 하는구나.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승리를 했을 때 나이가 72살이었다고 하는구나. 그야말로 노익장이 무엇인지 보여준 것 같구나.

시간은 흘러 1104년 고려 제15대 숙종 때 이번에는 여진이 침략을 했단다. 이때 윤관 장군이 있었는데, 윤관의 제안으로 별무반을 조성해서 여진 공격에 대비하자고 했단다. 별무반이 정비가 되고 1107(예종 때)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공격했다고 하는구나. 이 전쟁에서 대승을 해서 동부 9성을 차지를 했대. 역사 기록에 동부 9성이라고 되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하는구나. 다만 조선 세종 때 출간된 <지리지>에 따르면 두만강 북쪽 지역이 맞을 것이라고 했어. 이 지역이 세종 때 개척한 6진과도 같은 위치였거든.

그런데 멀어서 운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공을 받는 조건으로 2년 만에 동부 9성을 여진에 반환했다고 하는구나. 후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참 아쉬운 결정이구나. 그래도 이런 결정 때문에 당시 여진이 금나라를 세우고 송과 거란을 침략하면서,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1.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이자겸이라는 외척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좀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이자겸은 제16대 왕 예종의 장인이고, 17대 왕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었다고 하는구나. 오늘날 상식으로는 좀 이해가 안 가는 관계인데, 아무튼 인종은 이모랑 결혼을 한 것이란다. 그것도 이모 두 명이랑 결혼을 했어. 이렇게 두 왕의 장인인 이자겸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어. 이자겸은 인주(오늘날 인천) 이씨였는데, 그 전부터 많은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란다.

인종은 이자겸의 권력이 너무 세다 보니 더 이상 볼 수 없고 이자겸과 그의 측근인 척준경을 공격했단다. 하지만, 이자겸의 반격에 인종은 신하 10여 명만 데리고 도망을 갔단다. 이 때 궁궐이 다 불타기도 했대. 이 사건을 역사는 이자겸의 난으로 기록하고 있단다. 도망간 인종은 이자겸에서 왕위를 주겠다고 했는데, 이자겸은 거절했단다. 지금처럼 왕의 뒤에 앉아서 권력을 독식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 것 같아. 인종은 이번에는 이자겸의 측근인 척준경을 회유했단다. 결국 이자겸은 지지 기반을 잃게 되고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고 얼마 안 있다 죽었다고 하는구나. 이자겸이 영광에 유배 갔을 때 말린 생선을 먹었는데, 그 생선에 너무 맛있어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구나. 그 생선이 바로 오늘날에도 유명한 영광 지역의 특산물인 굴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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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류근) 근데 제가 인터넷에서 이자겸을 검색해 봤더니 아주 재미있는 연관 검색어가 나와요. 영광 굴비가 나오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이자겸이 영광에서 말린 생선을 맛있게 먹고 난 다음에 비록 귀양을 온 몸이지만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지어 줬다는 겁니다. 그 생선이 바로 영광 굴비고요. 굴비가 한자로 굽힐 굴()자에 아닐 비() 자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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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척준경도 탄핵되어 귀향을 갔다고 하는구나.

, 이번에는 묘청의 난을 이야기해보자꾸나. 묘청이 원래는 난을 일으킨 것은 아니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주장했대. 서경은 오늘날 평양인데, 묘청이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하는 것은 풍수지리상으로도 좋고 여진을 공격해서 고구려 영토 회복을 하자고 했어. 시인으로 유명한 정지상, 백수한 등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지지했단다. 그에 반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반대를 했지.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에 와서 서경의 입지 조건을 함 봐달라고 했고, 인종은 실제로 서경에 가려고 했다는구나. 그런데 가는 길에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대. 그리고 이 천재지변은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지 말라는 의미라면서 서경 천도는 안 된다고 했단다. 그렇게 되니 묘청은 난을 일으켰단다. 묘청은 서경 천도에 진심이었나 보구나.

이 소식을 들은 김부식은 서경천도운동을 지지했던 정지상, 백수한을 왕명도 없이 참수해 버렸다고 하는구나. 당시 정지상, 백수한은 개경에 있었거든. 이는 분명 과잉 진압이었는데, 정지상에 대한 사적 복수라는 이야기도 돌았다고 하는구나. 묘청의 난은 묘청의 측근 조광의 배신으로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단다. 조광이 묘청을 죽였거든. 뒤늦게 조광은 자신도 처벌 받을 것을 알고 약 일 년 간 저항했지만, 토벌대장 김부식이 이끌고 온 부대에서 패배하고 말았단다.

삼국사기의 지은이로만 알고 있던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토벌대장이기도 했단다. 예전에 아빠는 다른 역사책에서 알게 되었는데, 정지상까지 자기 마음대로 죽였다니 이미지가 더 안 좋아졌구나. 묘청의 난이 1135년에 일어났는데, 묘청의 난이 진압된 이후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기 시작해서 1145년에 완성했다고 하는구나.


2.

18대 왕 의종 때가 되면 고려 문신들이 무신들을 멸시하는 그런 시대가 된단다. 지위가 낮은 문신들이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무신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하극상도 빈번했어. 의종은 이런 것을 좀 조정해야 하는데, 문신들하고만 술파티를 벌이는 등 주지육림에 빠졌고, 의종과 문신들의 파티에 볼거리로 무신들이 수박희라는 결투 경기를 벌여야 했단다. 무신들도 같은 신하인데 열이 받겠지. 불만이 고조된 무신들 중에 하급관리였던 이의방, 이고가 난을 일으키게 되었단다. 이의방과 이고는 하급관리다 보니 고위급 무신 인사인 정중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정중부가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면 난이 시작되었단다.

무신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의종을 지켜줄 이가 누가 있겠어. 의종은 무신들의 의견을 모두 받아주기로 했단다. 그런데, 의종을 보좌하던 환관들이 무신을 치려는 계획을 세웠어. 그런데 환관들 중 한 명이 배신을 하면서 무신들이 환관의 계획을 알게 되어 오히려 환관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단다. 무신들은 환관뿐만 아니라 문신들도 죽였는데, 3일 동안 140에서 150명을 죽였다고 하는구나.

무신에 의해 의종은 폐위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갔고, 무신들은 의종의 동생을 왕위에 세웠는데 그가 제19대왕 명종이란다. 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세워진 왕으로 허수아비 왕이었어. 무신들은 무신회의기구인 중방을 만들었고, 이 중방이 최고권력기구가 되었어. 무신들은 논공행상을 따지다가 자기들까지 다투게 되는데, 이의방은 이때 반대파를 숙청했는데, 함께 무신의 난을 주도했던 이고도 이때 죽였다고 하는구나.

무신들의 내분을 지켜보던 문신 김보당이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켰는데 금방 진압이 되었단다. 그런데 김보당은 죽기 전에 이야기하기를 모든 문신들이 난에 참여했다고 했어. 그래서 무신들은 또다시 많은 문신들을 죽였단다. 학살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이때 이의방의 부하 이의민은 유배가 의종을 찾아가 죽였다고 하는구나.

이의방은 무신의 일인자가 되어 권력을 휘둘렀어. 하지만 이의방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단다. 정중부와 아들 정균이 이의방을 제거하면서 실권을 잡았어. 이때 정중부의 나이가 일흔이 넘었어. 무신들 사이에서도 일흔 넘어서도 권력을 탐내는 정중부를 좋게 보지 않고 등을 돌리기 시작했어. 5년간 이어진 정중부 정권은 25살 청년장수인 경대승에 의해 끝나고 만단다. 경대승은 정중부를 죽이고 권력을 잡았어. 하지만 경대승은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경대승의 꿈에 죽은 정중부가 나온 다음 병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더구나. 경대승이 죽고 나서는 명종의 명에 따라 이의민이 정권을 잡았고, 이의민 권력은 13년간 이어졌단다.

이의민은 최충헌에 의해 죽고 말았어.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이후 최씨 무신정권이 4 62년간 이어지게 된단다. 그런데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는 것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는구나.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는 일로 시작된 싸움이 커져서 최충헌이 이의민까지 죽였대.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명종에게 봉사십조라는 개혁안을 제안했대. 그런데 이 명종이라는 왕은 무신정권 초기 이의민이 허수아비로 세운 왕인데 여전히 왕을 하고 있구나. 무신정권을 잡은 이들은 벌써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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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신병주) 흔히 하는 말로 가늘고 길게 살자라는 신조에 딱 맞는 왕이에요. 명종이라는 왕은 1170년에서 1197년까지 무려 28년간 재위했어요. 우리 역사에서 왕권이 없이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으로는 아마 1위일 겁니다. <고려사절요>를 쓴 사관들의 평가가 핵심을 찌르죠. “왕은 천품이 아주 나약하고 여러 번 변고를 겪어서 놀랍고 두려워하여 아주 심기가 약했다. 그래서 모든 군국의 기무는 무신들에게 견제 되었다. 심지어 회노애락까지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했다. “슬프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명종으로서는 자기가 왕위를 유지하는 한 집권 세력은 누구로 바뀌어도 상관없다고 적절하게 타협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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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동생 신종을 왕위에 세웠단다.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는 신종의 며느리, 그러니까 태자비를 이혼시키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에 세우려고 했어. 이 일로 최충헌과 갈등을 빚었단다. 결국 최충헌과 최충수는 싸우게 되었고, 최충수는 최충헌에 의해 척살당하고 말았단다.

무신 정권이 문신의 멸시를 참지 못하고 권력을 잡긴 했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은 내지 않고 문신들처럼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탐욕을 부렸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당시에도 역사적으로도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 같구나. 이 무신 정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면서 오늘 편지를 마치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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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80)

(이익주) 무신 정변을 세 가지 다른 층위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신 정변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의종의 측근 가운데 무신과 기타 세력 간의 싸움으로 볼 수 있고, 조금 멀리서 보면 무신 전체와 문신 전체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멀리서 보면 무신 대부분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문제까지 생각이 미치죠. 그 당시 고려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중하층을 구성했던 지방의 향리 계층이 무신 대부분의 원류입니다. 향리들이 서울로 올라가 무신이 되고, 무신 정변을 통해 권력을 드디어 장악한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무신 정변으로 일어난 권력 교체를 중하층의 무신이 상층의 문신들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무신 정변은 권력의 상하이동을 의미하고요. 이때 권력을 잡은 무신들, 그리고 그 공급원이 되는 지방의 향리층이 이후 전개되는 고려 후기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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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고려의 11세기는 정변과 전쟁으로 시작된다.

책의 끝 문장: 그래야 후세의 평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죠.


(박금수) 별무반은 기병을 강화한 특별 군대입니다. 크게 기병인 신기군과 보병인 신보군으로 나누고, 그 외에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전문 부대들이 있습니다. 강한 활을 쓰는 경궁군이 있고, 노 하나가 아니라 두세 개를 연결한 강력한 노를 쓰는 정노군이 있죠. 또한 돌을 그냥 던지기도 하고 돌팔매에 끼워 먼 거리를 던지기도 하는 석투군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각, 즉 뿔로 만든 악기를 입으로 부는 이 대각을 불어 신호를 보내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옆에서 죽어 나가는 매우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끊임없이 대각을 불어 추정되는 도탕군이 있는데, 도탕군은 돌격 부대인데도 기병이 아니라 보병이었어요. 그래서 이 도탕군의 임무는 적이 공격대형을 제대로 형성하기 전에 돌입해 분탕질을 치며 적의 기세를 꺾는 소수 정예부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P55

(최태성) 이자겸의 본관이 어딘지 아십니까? 인주입니다. 인주 이씨죠. 인주가 어디냐면 지금의 인천이에요. 인주 이씨는 대대적으로 왕실과 혼인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던 대표적인 외척 세력인데, 가계도를 보면 정말 복잡합니다. 순종, 선종, 예종, 인종에게 시집을 간 인주 이씨 집안의 딸이 총 열 명이나 됩니다. 그중에서도 제16대 왕 예종과 결혼 사람이 이자겸의 둘째 딸 문경태후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가 바로 제17대 왕 인종이 되지요. - P85

(신병주) 묘청의 난을 이제까지는 개경파 대 서경파 또는 문벌 귀족 세력 내부의 분열과 같은 식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사실은 국제 정세의 변화도 매우 중요한 지표입니다. 특히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수립되는 과정의 현장에 있었던 김부식이라는 인물이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고려가 나아갈 길을 어떻게 고민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지금도 그렇지만, 국내 정세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도 함께 고려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 P144

(이익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용어를 정리해 볼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환관은 거세한 남성이고, 궁궐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내리라고도 하는데, 고려 시대에는 내시와 환관이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환관은 우리가 아는 그 환관인데, 내시는 거세한 남성이 아니라 국왕에게 총애받는 젊고 유능한 문신 관료들입니다. 내시들은 늘 왕과 함께 있으면서 지근거리에서 왕을 시종하는 사람들이죠. 문벌 귀족의 자제들 또는 과거에 급제한 유능한 젊은 관료들은 내시가 되는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는 환관과 내시가 다른 개념인데, 의종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친위군뿐 아니라 환관마저도 권력자로 만들어 놓아 그들과 함께하는 측근 정치를 해 왔던 것입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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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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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랜만에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었단다. 이번에 읽은 이언 매큐언의 책은 비교적 최근작인 <바퀴벌레>라는 책이란다. 장편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100페이지 남짓이라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단다. 별 생각 없이 읽다 보면, , , 이런 감탄사가 속으로 나왔단다.

아빠가 책소개를 전혀 읽지 않고, 책 읽는 스케줄을 고려하다가 얇고 빨리 읽을 수 있는 책 중에 고른 책이었거든. 첫 문장을 읽었을 때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재해석한 책인가 싶었단다. 이언 매큐언이 예전에 <햄릿>을 재해석한 <넛셀>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거든. 그런데 읽다 보니 뭔가 좀 이상했단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이 거대한 벌레로 바뀌었는데, 이언 매큐언의 <바퀴벌레>에서는 바퀴벌레가 사람으로 바뀌었거든.. 소설의 첫 문장에서 짐 샘스라는 이가 거대 생물체로 변신했다고 해서, 짐 샘스라는 사람이 거대한 벌레로 변신한 것인 줄 알았는데, 짐 샘스라는 바퀴벌레가 사람으로 바뀐 것이었어.

그렇게 짐 샘스는 영국의 총리가 되었단다. 그리고 계속 읽다 보면 한가지 사건이 떠오르더구나.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가 그것이었어. 뒤늦게 책 소개를 찾아 봤더니 예상대로 브렉시트를 모티브로 하고 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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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문학의 대표작가 이언 매큐언이 2019년 발표한 장편소설 『바퀴벌레』는 정치가로 변신한 벌레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브렉시트 시대 영국 사회를 다룬 작품으로, 카프카를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정치풍자 소설로 주목받았다.

브렉시트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의미하는 조어다. 2016년 국민투표로 결정되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합류한 지 47년 만인 2020 1 31일 영국은 공식적으로 유럽연합을 떠났다. 그 배경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럽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 증가와 대규모 난민 유입 등으로 유럽연합에 대한 국민 인식이 악화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탈퇴 여론이 있었다.

이에 보수당은 2015유럽연합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걸고 총선에서 과반수를 얻었다.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유럽연합 잔류 결과를 예상하고 불만 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 2016년 국민투표를 단행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탈퇴 51.9%, 잔류 48.1%라는 결과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결정되었다.

캐머런 총리는 결과에 책임지고 사퇴했고 뒤이어 테레사 메이 총리가 취임했다. 탈퇴 협정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북아일랜드는 유럽연합에 가까운 수준의 통합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협정안은 브렉시트 찬성파의 반대로 하원에서 세 차례 부결됐으며, 메이 총리 역시 국민투표 결과를 이행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이러한 자국의 우스꽝스러운 포퓰리즘 정치를 목도한 매큐언은엄청나게 절망했다 CBC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래서 『바퀴벌레』를 쓰는 동안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며, 이 작품으로 브렉시트에 대한 여론이 바뀌지는 않겠지만어둠 속에서의 짐승 같은 웃음을 통해 사람들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작가로서 현시대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이 유머와 풍자라고 느꼈다고. 『바퀴벌레』는 바로 브렉시트 사태에 대한 매큐언의 첨언이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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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건 그렇고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책이 워낙 얇다 보니 길게 이야기할 수도 없겠구나. 총리가 된 바퀴벌레 짐 샘스. 사람의 몸이 되어 움직임도 익숙하지 않고 몸의 구조가 흉측스럽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면서 출근을 했단다. 걱정과 함께 들어선 각료회의에 그는 깜짝 놀랐단다. 정부의 여러 장관들 모두 바퀴벌레들이 변신한 사람들이었어. 외무장관인 베네딕트 한 명만 빼고 말이야. 짐 샘스는 그 전부터 자신의 종족을 위한 일을 했는데, 인간으로 변신했으니 이걸 기회로 삼기로 했어. 인간 세계를 무너뜨리는 방법을 생각해 내고 그걸 추진해 나갔지.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역방향주의라는 거야. 아빠는 역방향주의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는데, 소설의 내용을 통해서 정리해보면 자본주의에서 돈의 흐름을 반대로 하는 것이라 보면 돼. 예를 들면 소비를 하게 되면 돈을 주고, 노동을 하게 되면 돈을 받는 게 아니고 회사에 돈을 주는 것이야. 저축을 하면 마이너스 이자가 있어서 저축을 하지 않게 되었어. 그리고 25파운드 이상의 돈을 소지하고 있으면 불법이었지. 이 이상한 말도 안 되는 정책을 시도하려고 했단다. 정부 각료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찬성을 했단다. 그 사람은 바퀴벌레가 아닌 외무장관 베네딕트이었어. 이 사람을 어쩌지? 한 사람 매장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성추행 사건에 연루시켜서 잘라 버렸단다. 이제 그들의 역방향주의 정책을 방해하려는 세력은 없었어.

프랑스 영해 불법 침입했던 영국 어선이 프랑스 함대에 부딪혀 침몰하여 여섯 명의 영국인 어부가 죽은 사고가 발생했는데, 짐 샘스는 이것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하여 지지율을 높이는데 성공을 했어. 그런 지지율을 바탕으로 역방향주의 정책도 잘 포장하여 국민의 동의를 얻어냈단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에게도 지지를 받았단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역방향주의 정책을 추진하려고 했단다. 정황으로 보나 소설이 나온 시기를 봐서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를 생각하고 소설을 썼을 거야. 그렇지, 트럼프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ㅎㅎ. 짐 샘스와 바퀴벌레 일행들은 역방향주의를 의회에 통과시키고, 다시 바퀴벌레로 돌아왔단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이야기란다.

, 소설을 읽다 보니 문득 우리나라에 일본의 바퀴벌레가 변신한 사람들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요즘처럼 대놓고 친일을 하던 정부가 있던가 싶거든. 이 바퀴벌레들아, 이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 그 사람들의 몸에서 나와서 너희들 세계로 돌아가라.


PS:

책의 첫 문장: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책의 끝 문장: 그 다음엔 여섯 장관이 그의 다리를 하나씩 잡고 웨스트민스터궁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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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29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대 정부에서 해오던 균형 외교
를 무너 뜨린 후과를 어떻게 감당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민들에게는 인색하면서 외국정
부에 퍼주는 걸 보면, 참...

정말 이러다 큰 일 나게 생겼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지 싶습
니다.

bookholic 2023-04-29 19:32   좋아요 1 | URL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합니다.ㅠㅠ
아직도 4년이나 남았다는 것이 앞을 캄캄하게 하고요...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 왕건에서 서희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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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을 마무리하고 올해는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단다. 아빠가 역사에 취약한 편인데, 특히 고려는 더욱 그렇단다. 조선시대에 책이나 영상 매체를 다뤄서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주워 들은 것들도 있곤 한데, 고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단다. 고려를 다룬 책들을 읽은 적도 있긴 한데, 아주 오래 전이라서 기억에서 희미해졌어. 그래서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을 읽으면서 고려 500년 역사를 정리해보려고 했단다. 중간중간 재미있는 내용들이 있으면 너희들에게도 이야기해주고 말이야.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는 모두 4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오늘은 1권을 이야기해줄게. 자 그럼 고고~


1.

고려 이전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가 있었고, 통일 신라 말기 정권이 무너지면서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생겨나면서 우리나라는 전쟁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단다. 먼저 후백제부터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후백제는 견훤이라는 사람이 세웠는데, 진훤이라고 읽기도 한대. 지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구나. 견훤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를 했다고 볼 수 있어. 당시 지방의 권력을 잡고 있는 호족이 되었거든. 견훤은 전라지역의 장군으로 복무하다가 전라지역을 지반으로 후백제를 건국했단다. 자신의 고향이 아닌 곳에서 나를 세운 것이 특이했는데, 그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인지 견훤은 반신라정책을 펼쳤단다. 무너져가는 신라의 반기를 든 것이지.

...

후고구려는 승려 출신 궁예라는 건국했는데, 그 밑에 있던 왕건이 민심을 잃은 궁예를 처단하고 고려라는 나라를 세웠단다. 918년이었어. 왕건의 아버지는 호족 출신으로 금수저라고 할 수 있어. 고려를 세운 왕건은 견훤과 달리 친신라 정책을 펼쳤단다. 당시 신라는 이름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고, 후백제와 고려의 기세가 비슷하였단다.

견훤과 왕건은 대구 지역에서 큰 전투를 벌였는데, 왕건은 이곳에서 대패를 하고 휘하에 있던 장군 여덟 명이 죽었다고 했어. 그들이 전투를 벌여 여덟 명이 죽은 산을 그때부터 팔공산이라고 했다는구나. 전세가 견훤으로 넘어오나 했는데, 견훤은 집안이 화목하지 못했나 봐. 견훤의 아버지가 상주 지역의 호족으로 있었는데, 왕건에게 귀부하였다고 하는구나. 귀부라는 말은 스스로 와서 복종하는 것을 뜻한단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이번에는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왕건에게 투항하는 일이 벌어진단다.

후백제를 세우고 왕건과 전투에서 대승을 한 견훤이 아들에게 쫓겨났다고? 견훤이 왕위를 둘째 아들에게 주려고 했는데, 이에 첫째 아들 신검이 반란을 일으켰던 거야. 그리고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죽이려고 하자 견훤은 왕건한테 도망을 간 것이지. 후백제는 이미 집안 싸움으로 인해 자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대세는 고려로 넘어왔어. 신라도 고려에 투항했지. 고려는 대대적으로 신검의 후백제를 공격하였고, 결국 신검은 항복하고 만단다. 왕건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게 돼. 견훤의 집안 싸움이 없었다면 어쩌면 견훤의 후백제가 후삼국을 통일했을 수도 있었던 거야. 그랬다면 그 이후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평행우주가 있다면 후백제가 통일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볼 수 있을까?


2.

우리나라 왕 중에서 가장 많은 아내를 둔 왕은 누구였을까? 그건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이야. 무려 29명의 아내를 두었대.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던 그 즈음 지방 호족 세력이 엄청나게 컸고, 그들과 관계 개선을 하기 위해서는 정략결혼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는구나. 그래서 그렇게 많은 아내를 두었다고 하는구나. 그래도 많아도 너무 많은 것 같구나.

===============

(63)

(이익주) 제가 왕건을 위해 변명을 좀 하겠습니다. 너무 개인사적 측면으로만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요. 왕건이 스물아홉 명의 아내를 거느린 것, 사실은 거느렸다고 하기도 뭣하지만, 아무튼 스물아홉 번이나 결혼한 것은 여자가 좋아서라기보다는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치적인 계산을 한 것이죠. 왕건은 그 자신이 호족이고, 전국의 호족들은 왕건과 대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경력을 시작했죠. 이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견훤과 싸우며 신라를 계속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각 지방에서 독립 세력으로 존재하던 호족들의 지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력한 호족과 가장 믿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동맹을 맺는 방법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아까 지도에 봤던 것처럼 전국 곳곳에 있는, 각 지역의 가장 유력한 호족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그 호족의 지지를 끌어내려 합니다. 그 결과 스물아홉 번이나 결혼했던 것이고요.

===============

...

왕건은 29명의 아내를 통해 아들 25, 9명을 낳았대. 벌써 왕위 계승 싸움의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조선에서는 왕을 이을 아들을 태자라고 하는데, 고려에서는 정윤이라고 했다는구나. 1왕후는 아들이 없어서 제2왕후의 장남 왕무를 정윤으로 삼았는데, 2왕후는 배경이 별로라서 세력도 약했다고 하는구나. 배경도 좋고 세력이 좋기로는 제3왕후가 좋은데, 3왕후는 아이도 많이 낳았다고 하는구나. 아들 다섯에 딸 둘이었지.

943 5, 왕건이 67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단다. 일단 제2대 왕은 왕무가 되었어. 혜종이었지. 그런데 혜종은 제3왕후의 아들들인 왕요, 왕소와 대립을 이뤘어. 혜종은 세력이 약했는데, 몸도 허약했단다. 거기에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아우들도 있고...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진단다.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혜종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역모를 꾸민 거야. 왕의 장인이 역모를 꾸민다? 뭔가 석연치 않구나. 아무튼 왕규는 혜종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다고 했어. 그리고 이 난을 혜종의 동생인 왕요가 진압을 했다고 했대. 일명 왕규의 난이지.

하지만 이것은 왕요가 다 꾸민 것으로 추정된대. 왕요가 자신의 기반을 더 다지기 위한 작전.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 일이 있고 얼마 안 되어 혜종 마저 34살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단다. 즉위한 지 2년만이었어. 그런데 혜종에는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요가 왕규의 난을 진압한 공을 들어 왕위에 오르게 된단다.

그가 고려 3대 왕 정종이란다. 정종은 왕위에 오르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어. 백성들과 호족들이 모두 반대를 했지. 그러면서 호족들은 왕요의 동생 왕소 밑으로 줄을 섰단다. 그런데 정종도 젊은 나이에 죽게 돼. 기록에 의하면 번개에 놀라 병을 얻게 되어 죽었다고 하는데, 의문의 죽음이지. 그리고 후계에 자신의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왕소에게 왕을 물려주었단다. 왕소가 제4대 왕이 되었으니 광종이란다. 고려 광종 왕소와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 동생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그 이전 왕이 고려와 조선 모두 정종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고려의 정종과 조선의 정종이 닮은 점도 지적을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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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110)

(신병주) 고려의 정종과 조선의 정종이 정말 닮았다고 했잖아요. 왕으로 재위한 기간은 두 사람 다 매우 짧아요. 근데 조선의 정종은 동생 태종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 무서운 동생이 정몽주와, 정도전, 방석 등을 죽이는 것을 다 봤거든요. 자기까지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싶으니까 동생에게 왕위를 깔끔하게 물려주고 격구와 사냥 같은 취미 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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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 4대왕 광종은 예전에 시험 문제에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되는구나. 노비안검법과 과제제도 시행으로 말이야. 광종은 26년간 재위하면서 고려라는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왕권 강화하는데 힘썼다고 하는구나. 노비안검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해주는 것으로, 호족들이 관리하던 노비들을 양인으로 풀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호족의 반발이 심했다고 하는구나. 노비안검법을 시행한 것이 광종 7년이라고 하는데, 왕위에 즉위한 7년 동안 호족들의 눈치를 보면서 왕권을 강화를 해서 팡 터뜨린 것이란다. 광종은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를 사람을 등용해서 그 사람의 조언을 정책으로 많이 삼았다고 하는구나.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과거제도인데, 이 때 만들어진 과거 제도는 인재 등용의 산물로, 조선말까지 약 1000년간 이어지게 된 것이란다.

그리고 관복을 제정하여 위계 질서를 세우려고 했고, 호족 세력의 힘을 빼기 위해 최측근 호족도 숙청했다는구나. 워낙 많은 사람을 죽여서 광종의 이 빛날 광()이 아니라 미칠 광()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대. 그래서 고려 광종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의 제목도 빛나거나 미치거나였다나그런 드라마가 있었구나.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제목인데

고려 시대 유명한 사람, 어쩌면 악명 높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천추태후란 사람이 있었단다. 예전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었는데, <천추태후>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많이 유명해졌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이 사람 가족 관계가 좀 복잡하단다. 고려 초기에는 왕족 내에서 근친혼이 일상이라고 하긴 하지만, 천추태후는 복잡해도 너무 복잡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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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신병주) 천추태후는 드라마로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웬만큼 역사를 아는 사람조차도 잘 몰랐던 인물입니다. 5대 왕 경종에게는 아내가 되고, 6대 왕 성종에게는 동생이 되고, 7대 왕 목종에게는 어머니가 되고, 8대 왕 현종에게는 이모가 되는 인물이에요. 천추태후를 거치지 않고는 고려 시대의 왕 네 명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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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왕은 경종이고, 아내로는 헌애왕후 황보씨와 헌정왕후 왕보씨 이렇게 둘이었는데, 둘은 자매라고 하더구나. 이 중에 헌애왕후 황보씨가 바로 나중에 천추태후가 되는 사람인데, 왕건의 손녀이기도 했대. 경종은 즉위한 지 1년만에 죽고 동생이 왕위에 오르는데 제6대 왕 성종이란다. 헌애왕후 황보씨는 아들이 하나 있었고, 남편이 죽고 난 다음 천추궁에 머무르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곳에 있으면서 승려 출신 김치양이라는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었대. 그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김치양을 유배 보냈다고 하는구나.

이때까지는 조용하게 있었는데, 성종이 죽고 헌애왕후 황보씨가 낳은 경종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제7대 왕 목종이었어. 당시 목종의 나이가 18살이라서 자신이 직접 친정을 해도 될법한데,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였단다. 그러면서 유배 갔던 김치양을  데리고 오기도 했어. 다시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사랑을 하게 되었고, 천추태후는 마흔 살에 아들을 낳았단다. 그리고 목종은 자식들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동성연애를 했다는구나. 오호이런 상황이 되자,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낳은 아들을 왕위에 세우려고 했는데, 왕족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단다.

왕족들은 대량원군이라는 사람을 다음 후계자로 세우자고 했어. 그런데 대량원군이라는 사람도 흠이 있는 사람이었어. 대량원군은 누구냐면, 경종의 둘째 부인이자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 황보씨가 숙부인 왕욱과 불륜으로 애를 낳았는데 그 애가 바로 대량원군이었어. 불쌍했던 것은 헌정왕후 황보씨는 대량원군을 낳다가 그만 죽었단다. 천추태후가 낳은 김시양의 아들과 대량원군누가 후계자가 되었을까?

이때 막강 군대를 가지고 있던 강조라는 사람이 정변을 일으켰단다. 그래서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어. 그가 제8대왕 현종이란다. 강조라는 사람이 후계 정리를 싹 해버린 거지. 강조는 목종, 김치양, 천추태후이 낳은 김치양의 아들을 모두 죽였단다. 그리고 천추태후는 멀리 유배를 보냈어. 그렇게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천추태후의 세상도 막을 내렸단다.


4.

고려 초기 외세 침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거란이란다. 우리나라 북쪽 이민족들인 거란족, 여진족, 말갈족, 만주족 등이 헛갈리곤 하는데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해 주어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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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이익주) 거란과 여진은 분명히 다릅니다. 거란은 몽골 계통의 유목민입니다. 우리가 아는 요라는 나라를 건국하죠. 여진은 거란보다는 우리와 좀 가깝습니다. 발해가 건국되었을 때 고구려의 유민이 지배층이 되고 말갈족이 피지배층이 됐다고 알고 있는데, 그 말갈이 발해가 망하고 거란에 점령된 다음에 여진으로 불린 거죠. 그리고 이 여진이 1115년에 금을 건국하고 더 나중인 1616년에는 후금을 세웠다가 1636년에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만주족으로 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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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년 성종 때 거란의 침입이 있었어. 신하들 대부분은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어 땅을 떼어주는 것을 지지했는데, 서희라는 사람은 홀로 반대를 했단다. 그리고 서희는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을 짓고, 오히려 강동6주를 얻어냈단다. 전쟁 한번 하지 않고 말로써 땅을 얻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던가. 서희는 강동6주를 얻는 대신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과 사대관계를 유지한다는 조건이 있었대. 하지만 말이 쉽지 송과 관계를 그렇게 쉽게 끊게 되면 이번에는 송으로부터 공격을 받지는 않을까? 그런 것을 대비해서 서희는 송나라에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대. 거란의 침입에 대해 송나라에게 도움을 청하는 척하고, 송나라도 도와줄 여력이 없어서 고려를 도와주지 않게 되었고, 고려는 송에서 도와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했대. 이게 다 너희 송나라 때문인 것처럼 이야기해서 송나라가 책임감을 느끼게 말이야. 정말 멋진 작전이구나.

….

강조의 정변의 이후 천추태후가 물러나고 목종이 폐위되었을 때 거란은 이것을 빌미로 고려를 쳐들어 오게 되는데 이것을 거란의 2차 침입이라고 한단다. 강조라는 사람이 강동6주에서 방어를 했지만 고려군은 패배를 하고 개경까지 함락되는 위기에 빠지게 된단다. 당시 왕이었던 현종은 나주로 천도를 한단다.

여기까지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의 이야기란다. 고려 역사도 다이나믹하고 흥미진진하구나. 편지를 쓰기 전에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대략 해주었더니 너희들도 재미있게 들었잖니. 이 책에서 읽은 기억이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고려 역사에 대한 지식으로 머리가 꽉 찬 느낌이구나. 조만간 2권도 읽고 이야기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신라 말 정치는 도탄에 빠졌고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책의 끝 문장: 개경은 불바다가 됐고, 서희도 죽고 양규도 죽고, 그럼 고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익주) 고려가 건국된 지 100여 년 정도 지난 다음에 김관의라는 사람은 <편년통록>을 씁니다. 이 책에는 왕건의 조상에 관한 설화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용왕 등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가 계속 나옵니다. 이것은 왕건의 집안이 예성강을 통해 개성에서 중국의 산동반도를 왕래하며 무역했다는 것을 암시하죠. 그런데 작제건(왕건의 할아버지)이나 그 선대가 활동하던 시기를 거꾸로 추론해 보면 남쪽에서 장보고가 활동하던 시기와 거의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 시대에 남쪽 해상에서 큰 세력을 이루었던 장보고와는 별도의 독립된 세력으로 왕건의 가문이 활동했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 P20

(이익주) 안 주는 것보다는 주는 게 나았겠죠. 그리고 왕건의 가장 큰 선물은 호족이 지방에서 가지는 세력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왕건이 견훤보다 훨씬 앞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건은 자기에게 귀부해 오는 호족들의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 주겠다고 약속하죠. 이처럼 왕건은 중폐(重幣), 즉 선물을 많이 하고, 비사(卑辭), 즉 자기를 낮추는 말을 쓰는 태도를 보입니다. 될 수 있으면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거죠. 왕건도 호족이거든요. 여러 가지 동맹의 관계로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는 정책이 왕건에게서 나왔던 것이죠. 견훤 역시 그 지역의 호족들과 연합도 하고 결혼 정책도 펼치지만, 호족들을 지배하려는 속성이 왕건보다 강한 편이었습니다. 여기서 왕건과 견훤의 차이가 나타나죠. - P39

(신병주) 조선 시대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기록을 보면 "정도전 등이 먼저 군사를 준비했으므로 우리는 정당방어다."라는 식으로 나오거든요. 근데 정작 난을 일으켰다는 정도전 등에게서는 군사적인 움직임을 전혀 찾을 수가 없죠. 그래서 왕규의 난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겁니다. "왕규가 난을 일으켰으므로 우리는 정당하게 진압한 거다." 그런데 실체가 없죠. 하지만 역사는 왕규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남았고요. - P98

(이익주) 고려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라는 문제는 여성의 지위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지요. 재산상속 문제부터가 조건과는 다릅니다. 고려에서 부모가 사망하면 제산이 어떻게 상속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사정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원칙은 "자녀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나누어 준다."입니다.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준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부모에 대한 의무도 똑같이 요구하는 것이고요. 예를 들어 제사는 조선 시대처럼 장남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지냅니다. 그리고 부모가 살아 있을 때 봉양하는 의무도 장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녀에게 똑같이 있습니다. - P157

(신병주) 거란의 제1차 침입 당시의 상황과 제2차 침입 당시의 상황을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제1차 침입 당시의 고려는 성종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왕권이 상당히 안정돼 있었죠.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는 상황이니까 서희와 같은 명장을 배출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져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제2차 침입 때는 강조라는 인물이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정치 체제가 불안정해졌죠. 결과적으로 크게 보면 정치가 안정되고 지지 기반이 확실했을 때는 국방이라든가 외교에서 힘을 받을 수 있는데, 제2차 침입 때는 고려 자체가 정치적으로 무너진 것도 패배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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