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Young Adult 세계명작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양정화 엮음 / 꿈꾸는아이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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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아릿하니 가슴 한켠에 저림을 남기는 이야기였다.

 가장 닮은 느낌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이었을까?

 거기에 더해 허허로움과 어처구니없음이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느낌도.

 

이 책에 대한 감상은 책을 2/3이상 읽었을 때까지도 "무슨 소설이야 이거?"라는 말로 대체 시킬 수도 있을만큼, 핵심도 주제도 목적도 보이지 않은채 내 머릿속에서 겉돌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갑작스런 사고를 통해 이야기의 흐름과 함께 반전한다.

 

아무리 가벼운 소재로 적어내려간 이야기라도 철학이 담겨있지 않은 책, 무엇도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책은 읽다가도 던져버리는 못된 버릇을 버릴 수가 없다.

 단순히 시류에 올라타 목적없이 휩쓸려가면서 그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들의 감정마저 분탕질치고 지나가는 이야기를 경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오전에 내던졌던 책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아직 가난했고, 무능력했고, 이름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둘은 곧 떨어지게 되었고 기다림에 지친 그녀는 황금의 빛과 안정을 쫓아 그를 떠난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고 그녀를 되찾기 위해 부와 유명세를 얻기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불법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다시 순간의 달콤한 시간이 지나가고 예기치 못한 사고는, 비극적 결말을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만다.

 그는 죽고, 진실은 그의 꿈의 뒤쪽, 광막하고 어두운 도시 저쪽에 녹아 없어져 간다.

 

몇번이나 던진 질문이지만 이 책의 제목이 왜 위대한 개츠비? 무엇이 위대하다는 것일까? 하고 갸웃거릴 수 밖에 없다.

 사랑하는 한 여자를 위해 5년 동안이나 한시도 포기하지 않고 잊지도 않고, 그 사랑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그가 위대한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의 죄마저 짊어진 사랑이 위대했던 것일까?

 

생전에 수없이 많은 파티를 열고, 수 많은 사람이 그의 초대를 받아 찾아왔고 또 초대되기를 기다리더니 죽은 뒤엔 그 많은 사람 중에 단 한사람만이 그의 죽음을 기리기위해 찾아오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신뢰받지 못한 역설적 위대함일까.

 

그는 사랑에 실패했고 남겨진 것은 그를 기억하는 몇 사람의 슬픔과 안타까움,  물길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남겨진 이들만이 꿈꿀 수 있는미래뿐이다.

 

허무와 공허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에 발견하게 되는 근원적 빛, 그 빛의 눈부시게 밝음과 눈부심에 눈뜰 수 없는 모순을 발견해야했던 이야기였다.

 사랑마저 허무를 낳는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단지 사랑도 허무하게 스러지고 녹아 없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의 위대한 행적과, 그의 위대한 사랑을 알고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위로로 삼아본다.

 

-- 이런 사람만은 되지 말자고 결심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은 확신한다. --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톰과 데이지, 그들은 경솔한 인간이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부숴버리고 난 뒤, 뒤로 물러나서 자기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를 다른 사람들이 치우도록 하는 족솔들이었다. _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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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초간
데이비드 폴레이 지음, 신예경 옮김 / 알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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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초간, 자신이 쓰레기차가 되거나 쓰레기차에게서 쓰레기를 뒤집어 쓰게 되는 상황을 면하게 하는 3초의 법칙이 담긴 책이다.

 

쓰레기차란 쓰레기같은 감정, 즉 사람들을 불쾌하고 괴롭게 만드는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다니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책은 20년 전 저자가 어떤 택시기사를 통해 얻은 교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느날 택시를 타고 가던 저자는 어떤 난폭한 운전자로 인해 사고가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적반하장 격으로 상대 운전자는 택시기사를 향해 심한 욕을 퍼붓는다.

 그런데 이  택시 기사의 반응이 놀랍다.

 자신을 욕하고 있는 난폭한 운전자를 향해 웃으며 친철하게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택시기사가 해준 말이 저자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택시기사의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쓰레기차 같아요. 절망감, 분노, 짜증, 우울함 같은 쓰레기감정을 가득 담고 돌아다니거든요. 쓰레기가 쌓이면 자연히 그것을 쏟아버릴 장소를 물색하게 되지요. 아마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들은 당신에게 쓰레기를 버릴 거예요. 그러니 누군가가 얼토당토 않게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더라도 너무 기분 나빠히자 마세요. 그냥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어주고는 다른 일로 주의를 돌리세요. 제 말을 믿으세요. 틀림없이 전보다 더 행복해지실 겁니다."

 

결국 택시기사가 말하는 쓰레기차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나 혹은 당신일 수도 있다.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누군가에게 쏟아낼 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간에 그 순간 당신도 쓰레기차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책은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쓰레기차가 될 수 있는 상황을 현명하게 면할 수 있게 해주는 지혜를 적고 있다.

 그 지혜를 한마디로 말하면 "3초간"이고 조금 더 길게 말하면 "부정적 감정에대해서 무시하기"다.

 부정적 감정이란 화를 유발하는 쓸데없는 감정을 이르는 말로, 그런 부정적 감정이 가득차게 되면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럼으로써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쏟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감정의 낭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3초의 법칙이다.

 

책 속에서는 3초의 법칙을 숙달할 수 있게해주는 감정 지키기 연습법을 3장에 걸쳐 20가지를 소개하고 각각의 연습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사례를 자신의 경험 속에서 찾아 적어두고 있다.

 

비슷한 책들을 많이 봤지만 이 책은 그런 책 중에서도 비교적 이해가 쉽고(직접 경험한 사례가 담겨있어), 각 장의 끝머리에 각 장을 요약해 핵심적인 실천법을 연습할 수 있게 돕고 있어 숙달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특별히 눈에 띄는 것으로 '무시하기'라는 과감한 답을 제시함으로써 눈길을 끌었다.

 

현명하게 나의 감정을 통제하고,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쓰레기 감정을 투기하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툼과 갈등을 멀리하고, 원만하고 애정어린 대인 관계를 위한 기분좋은 긍정 심리학을 실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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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몽상 -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홍성영 옮김 / 하늘연못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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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847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이다보니 참 많은 것이 담겨있다.

 그래서 무슨 감상을 적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핑계를 대신해 내 나름으로 생각해본 "이 책에 적합할 것 같은 읽는 순서"를 적어두기로 한다. 

 

먼저 이 책의 구성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련다.

 총 4부 더하기 역자의 말 더하기 작가 연보 합 847페이지.

 짜맞춘 듯 각부는 각각 약 200페이지 분량.

 

제 1부 환상, 제 2부 풍자, 제 3부 추리, 제 4부 공포.

 

나의 "이런 순서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크게 두가지를 기준으로 해야겠다.

 첫번째는 에드거 앨런 포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경우이고, 두번째는 "그게 누구야?", 혹은 "이름은 들어봤지."의 경우가 되겠다.

 참고로 나는 후자에 속했다.

 

사실 '거의' 누구에게 이렇게 잃으면 좋겠다며 간섭, 혹은 선입견이 될지 모를 사족을 붙이지 않는 편인 아닌 내가  이런 지침까지 세운 데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간만에 최근 읽었던 어떤 책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아득한 절망(조금 과장하자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 이미 '난해하다'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지무지 난해했기 때문에 이 글을 적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잃으면 더 재밌게, 더 깊이 음미하며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나름의 '즐김의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앞에 적어놓은 글로 "이 책이 그렇게 어려웠어?"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버리길 바란다.

 꼭 그렇지만은 않으니 말이다. 다만 사용 순서와 방법의 문제다.

 아무리 좋은 자동 장치도 사용에 서투르면 구식 수동 장치만큼도 못써먹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면 좋으리라.

 

본론으로 첫번째 에드거 앨런 포를 아는 사람은(이미 이 책 정도는 읽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앞에서부터 읽어 나가도 상관 없다.

 마음대로 읽고 싶은 부분을 펴고 읽어가시길.

 이미 에드거 앨런 포를 아시는 당신은 얼마든지 이 책의 진미를 즐길 수 있을테지요. 자신만의 방식으로.

 

중요한 것은 두번째 쪽이다.

 난 보통(거의 틀림없이) 거의 모든 책을 앞에서부터 쭈욱 읽어나간다. (심지어 문제집을 풀 때도 그렇다.)

 그런 습관이 이 책 앞에서 나를 무너뜨렸다.

 

 에드거 앨런 포를 전혀 혹은 거의 모르는 당신께는 먼저 840페이지부터 847페이지까지 이어져 있는 작가 연보를 읽어보시길.

 시간이나 장비에 여유가 있으신 분이라면 그가 활동하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생애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읽는다면 금상첨화.

 

그런 후 1부를 건너뛰고 2부를 읽는다.

 2부는 제법 흥미진진하기에 워밍업에 좋습니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1부를 펴고 읽기 시작합니다.

 이야, 제가 왜 이렇게 배치를 했는지는 읽으시는 분만은 아실테지요. 흐흐흣.

 그 다음은 읽고 싶은 대로 읽습니다.

 

사실 한 편 한 편에 대해 감상을 적어가며 읽고 있었지만, 단편들의 모음집이고 이해 불가 판정 작품도 생기고, 난해 판정은 널리고, 이해 혹은 즐김을 초반엔 찾기가 너무 힘들어 하나하나 적어나가는 것이 읽어가는 호흡을 자꾸 끊는 것 같아 "책을 즐기자"하는 생각으로 그만 두었습니다.

 

그렇게 한 뒤에야 비로소 속도가 붙고 마침 재밌는 부분들을 만나서 즐거이 읽어 내려갔습니다.

 제 경우엔 초반의 고비를 넘고 나서는 무척 속도감 읽게 내려갔습니다.

 역시 고전의 반열에 드는 작가의 작품이다보니 이야기의 짜임이나 구성 전개가 무척 매끄럽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이해 불가 판정 작'은 예외지만요.

 

현대적인 문체나 소재, 전개에 익숙해지다보니 고리타분하고 뭔가 시시하다고 느끼게 되는 부분은 아쉽다기보다 되려 씁쓸했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맵고 짠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 버린 것일까?하는 달갑지 않은 깨달음이 말이죠.

 

이 책에 실린 소재들도 그 당시엔 정말 충격적이다 못해 엽기적인 수준이었을 것을 생각하니 우린 얼마나 무뎌진 것일까? 하는 반성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감상을 제쳐두고 이런 이야기를 적고 있는 것은 아마 '고전에서 되새길 수 있는 순수함'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 였습니다.

 

작가의 창작에 있어 부정할 수 없는 고려 요소 중 하나가 독자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끈질기게 인기가 있든 없든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만 써 내려가는 작가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학계라고 경제의 원리가 존재하지 않을테니 가난한 작가가 언제까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써나가는 자세를 관철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작가는 독자가 원하면서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됩니다.

 아, 어쩌다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이 독자가 원하는 것일 경우도 있겠습니다. 이것이 최선이 되겠군요. 정정합니다.

 

이 얘기와 전혀 상관 없다고 생각 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순수함의 회복"을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단순한 광기가 지배하는 낭만도 철학도 없는 작품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아마 읽는 순간의 팽팽한 긴장감, 스릴, 짜릿함은 느낄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요?

 

최초의 추리 소설이라는 '모르그 가의 살인'이 실려있기에라거나 에드거 앨런 포라는 위대한 작가의 상상, 창작, 고뇌와 묘사, 풍자가 담겨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담고 싶어했을 순수한 열망을 떠올리며 이 책을 돌아봅니다.

 

두껍다고 하면 무척 두꺼울 수 있는 이 책이 무척이나 술술 읽히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했을까요?

 무엇이 나에게 책장을 넘기게 했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최초'라는 것의 의미, '기원'이라는 말이 품은 속 뜻의 어떤 다른 면을 본 것 같은 느낌입니다.

 애써 적어둔 감상들을 내팽개치고 보니 뭔가 허전한 것 같기도 하지만 오늘은 허전한대로도 좋을 듯 합니다.

 

철학과 낭만이 담긴 추리, 공포의 맛을 보시겠습니까? "예", 라면 자 이제 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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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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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편지란 평소에 말로는 하기 힘들었던 일들, 일단 풀어놓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릴 오래 참아왔던 일들, 혹은 수줍음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속 깊은 정, 사랑.
 쓰다가 지우고 적어가다 고치기를 수 없이 반복하며 고심하고 고심해 건넬 내 마음이 담긴 몇 장의 종이.가 아닌가 싶다.

 

카프카가 그랬을까?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았던지, 얼마나 오래 쌓아두고 덮어두었던 기억들을 들춰냈던지 편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었다.

이름은 익숙하지만 작품이라고는 '변신' 밖에 읽어본 적 없는 카프카라는 하나의 존재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편지였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전에 '변신'을 읽으며 느꼈던 가족간의 깊은 골, 이해할 수 없던 그 매정함과 단절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느낀 아버지를 한마디로 표현해보면, 자기 중심적인 나라는 알맹이에 근엄함 엄격함으로 된 갑주를 두르고 언행 불일치의 칼을 휘두르며 애정을 '행사'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아끼면 다른 사람도 그 마음을 반드시 알아채 줄 것이라 믿는다.
 그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의 한 명이었던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애정엔 너무나 접점이 없었다.
그것이 애정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여길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 돌이키려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된 슬픈 현실만을 마주할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카프카는 아버지를 '거인'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고, 항상 두려움으로 아버지에 대한 공포만을 키워갔던 것 같다.
 그것이 깊은 '트라우마'가 되어 성장하면서도 기를 펼 수 없게 되었고 늘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아버지의 한 마디(그것이 긍정적이면 긍정적이어서 불안했고 부정적이면 그런 반응이 당연했기에 불안해했다)에 너무나 연연해 했다.

아버지가 두렵고 무서웠지만 아버지를 떠날 수도 없었다.
그는 영원히 홀로 설 수 없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뿜어내는 위엄과 공포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노예였다.
 거기에 그의 몸은 나약했고, 많은 병마에 시달렸다. 그것은 '최악'의 조건의 다름 아니었다.

 

편지 속에서 카프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 가슴 속엔 아예 처음부터 분노의 마음이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우연히도 바로 그 일을 빌미로 잡게 되어 가슴 속의 분노를 터뜨리신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지요.'
또 고함을 지르는 아버지를 보는 기분을 '교수형 준비를 하나하나 같이 지켜봐야하는 상황에 처해져 마지막으로 올가미가 그의 머리 앞에 내려지고 난 순간에야 자신의 사면 소식을 듣게되는 사형수'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니 그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던가.

 

카프카의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무엇인가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그렇듯 그 역시 자신감이 강하고 스스로의 결정과 방식에 대한 믿음이 거의 절대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재벌 2세가 그렇듯 카프카는 상대적으로 주눅들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카프카에게 있어 아버지는 늘 무섭고 어렵고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무섭고 어렵게 느꼈을 것은 위에 적어둔 것과 같은 것들이었고 알 수 없었던 것은 한결같지 않은 아버지의 행동이었으리라.
 자식들에게는 욕을 하지마라, 음식을 흘리며 먹지말라며 금지 시켜놓고서는 자신은 수시로 욕설을 내뱉고 식탁에서 그의 자리가 가장 더러웠으며,  가게와 가정에서 멀어질 수록 관대하고 다정하고 친절하고 사려깊고 동정적인 되곤 했던 모습에 어린 카프카가 얼마나 큰 혼란과 원망을 느꼈을지.

 

언젠가 티브이에서 공익 광고로 "집 안과 집 밖에서 당신은 얼마나 다른 사람입니까?"하고 묻는 것을 보았다.
 나 또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스스로를 반성하기도 했다.

카프카에게 있어 글쓰기란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 편지 역시 그 의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원하고 바랬던 것은 오직 정신적 무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리라. 아버지의 크나큰 거인의 그늘을 벗어나는 것, 그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정신적 무능력 상태를 벗어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세 번에 걸친 약혼에도, 그녀들을 정말 사랑했음에도 그는 결국 결혼하지 못하고 혼자 남는다.
 
카프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관계의 원만함에는 전적으로 동경했으나 그 동경의 크기를 넘어서는 아버지와 자식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결혼을 통해 아버지와 대등한 존재가 되겠다는 이상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대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겪었던 갈등을 자신이 자신의 자식과 겪게 될까 두려웠다.
 결국 이것이 '트라우마'가 카프카에게 내린 최종 선고가 되고 말았는지 그는 혼자 지내다 마흔 한살이 되기 얼마 전 병으로 죽고 만다.

 

이것이 카프카의 삶의 모든 기록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아버지에 대한 의도적 결별을 위해 쓰여진 것이며,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와 대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선택했던 결혼 생활을 위해서 아버지가 가진 모든 '능력'을 자신 또한 갖추어야 함을 깨닫고 난 후 무너져버린 삶.
 그에겐 오직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벗어나기 위해 써내려가는 글이 있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새해 명절을 맞아 가족이 모여 화목한 시간을 보내야 할 날을 앞두고 읽기에 좋았던 것인지 혹은 나빴던 것인지 애매한 기분이다.


 다만 마음 깊이 새겨둘 일이다. 아무렇지 않게 하는 어떤 행동들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늘을 드리울 수도 있음을.

 

그의 삶과 그의 작품들에 짧은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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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7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안영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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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으며 이 책이 떠올라 다시 읽어봤다.
 카프카의 창작물들은 무척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그와 아버지의 관계를 떠올리며 읽으니 훨씬 이해가 수월했다.

 

변신은 매일같이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듯 죽어라 일하는 외판원 그레고르가 악몽에서 깨어나던 어느날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악몽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의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챈다.
 이런, 배 쪽에 무척이나 낯선 수 많은 다리와 조그만 점들이 있는 흉측한 벌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악몽같은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그는 제 시간에 기차를 타지 못한 것을 먼저 걱정하고 당황할 만큼 자신보다 자신의 일과 가족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짐승이나 다름 없는 흉측한 벌레가 되어버리면서 가족들과 겪는 갈등과 그 갈등에서 느끼는 그레고르의 절망과 슬픔을 지나치게 매정한 가족들의 태도를 통해 극대화 하고있는 작품이다.

 그렇게 자신을 의지하고 위해주던 가족들이 자신의 '변신'을 마주하는 모습은 너무 상반되어 있어 서글프기까지 하다.


처음엔 변해버린 그를 걱정하고 위해주던 가족들도(비록 막상 마주하면 놀라고 흥분해서 그에게 더 깊은 상심을 안겨주었지만) 점차 그에게 무관심해져 간다.
 그나마 그와 가족 간의 마지막 연결 고리 역할을 하던 여동생 그레테마저 그를 외면하고 거부하게 되었던 운명의 날, 그는 홀로 서글픈 최후를 맞는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 또한 그레고르에겐 무척이나 사납고 권위적이며 거인과도 같이 느껴지는 존재다.
 그레고르를 극도록 쇠약하게 만들었던 치명적 상처(등에 박힌 사과) 또한 아버지가 낸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존재이며 변해버린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보다 두려움과 절망을 더 크게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와 소통하려했던 여동생 또한 운명의 날에 더 이상 그가 오빠나 아들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선언해 버린다.
 그렇게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그레고르는 죽고 완벽하게 처리된다.

 없던 것처럼.

 

그의 죽음 후 남은 가족은 빠르게 본래의 상태로 회복해가고 싱싱한 팔 다리를 가진 딸의 성장을 목격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뭔가 카프카의 삶을 빗대어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소설이었다.
 
이 책에 덧붙여 몇 편의 단편들이 있었다.
 첫 번째로 유형지에서.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난해한 소설이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탐험가가 어떤 나라의 형 집행을 입회해달라는 어느 지역 사령관의 초대를 받고 유형지를 찾는다.
 그곳에는 특이한 모양의 형 집행기가 있다.
 그 형 집행기는 죄수의 몸에 자동으로 죄명을 새기는 장치로,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12시간 이상 걸려서 자동으로 서서히 사람을 죽인다.
 특징적인 것은 형 집행기가 작동한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형을 당하는 죄수는 온순해지고 그 눈빛에 지성을 품게 되고 그것이 전신으로 퍼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살아서는 괴롭고 추한 인간의 모습을 죽어서는 남기지 않는 신기한 사형기구인 셈이다.


그 장치는 전 사령관의 발명품으로 한 때는 인기가 있었지만 현재에 이르러는 '장교'만이 이 장치를 사용한 형의 집행에 찬성하고 있을 뿐인 구시대의 유물이다.

 

현재의 사령관이 탐험가를 형 집행의 입회를 부탁한 이유가 그 장치의 폐기를 위한 것임을 예상한 '장교'는 탐험가에게 이 장치를 통한 형 집행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줄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탐험가는 그것을 거절하고 '장교'는 본래 형을 집행할 예정이던 죄수를 석방하고 스스로 형틀에 눕는다.
 그런데 최후의 옹호자가 자신의 위에 누웠기 때문일까?
작동을 시작한 형틀은 곧 스스로 해체되어가면서 최후의 옹호자인 '장교'도 순식간에 함께 해체해 버린다.


그 결과 형틀을 통해 죽음에 이른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 생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죽게 된다.
 그가 이 형틀을 통한 죽음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지성어린 눈빛도 구원의 그림자도 없는 깊은 확신만을 간직한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탐험가가 형틀의 발명자인 노 사령관의 무덤을 찾는 장면과 마지막 형 집행을 면한 죄수와 함께 있던 사명이 떠나는 그를 향해 달려오는 장면까지를 적고 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두 번째로 관찰.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너무 단락적이고 접점을 찾기 힘들고 이야기간의 거리감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마치 어느날 어떤 상태, 혹은 기분을 되는대로 메모지에 휘갈겨 둔 것을 옮겨놓은 것 같은 모양새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카프카 자신의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그의 외로움과, 절망, 소심함과 안심 따위의 감정이 담긴 기억의 한 페이지일 것이다.

 

세 번째로 선고.
 게오르크 페테르부르크의 친구 약혼녀 아버지 등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이야기다.
 자신의 결혼 소식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친구에게 알려야 한다는 약혼녀의 말에 그는 친구에게 보낼 편지를 적어서 아버지의 방을 찾는다.

 그리고 거기서 아버지에게서 익사형을 선고 받는다.
 익사형을 선고하고 아버지는 침대로 쓰러지고 그는 강의 다리 난간을 뛰어넘어 물 속으로 뛰어든다.

 짧은 이야기이고 이제 생각하기도 조금 지쳐서 왜 그랬는지는 생각하지 않으련다. 그저 이해해주시길.

결국 이 이야기도 아버지와 카프카의 이야기에 다름 아닌 형태를 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갈등을 표현함으로써 그는 아버지에게 어느정도 통쾌한 복수를 했다고 느꼈을까?
 그렇지도 못했을 것 같다.

그들은 결국 누구도 치유받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가 상처 주고 받을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를 인정하고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못했으리라.


 그것이 프란츠 카프카가 말하곤 하는 카프카적 기질이나 뢰비적 기질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미워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 묘한 관계 속에서 태어난 오묘하고 난해한 카프카의 글을 이렇게 읽고 감상을 적어가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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