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2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2
박경철 외 지음 / 리더스북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책이 사람을 고른다." 영화 <허리케인 카터>의 명대사라고 한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흥미를 끌면서도 '그럴리가'라는 불신도 함께 풍기고 있었다.

책을 별로 안 읽던 시절에는 나도 "오, 이 한 권의 책이 내 인생을 바꿀지도 몰라!"라는 믿음을 갖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 권, 한 권 읽는 책이 늘어갈수록 단 한 권의 책이 내 인생 전부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이 책은 우리 나라 각계의 명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서른명이 자신의 삶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책, 혹은 어떤 계기가 된 스물 아홉권의 책을 그 속에 얽힌 사연과 함께 들려준다.

 (서른명인데 스물아홉권인 이유는 두 사람이 같은 책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교수, 학자, 사업가, 정치인, 언론인, 기자, 작가, 목사 등 다양한 명사들이 소개하는 다양한 책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이 소개하는 책들은 모두 한번씩은 꼭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만큼 하나같이 독특한 풍미를 풍기고 있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책이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야기하는데 어찌 회가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각각의 명사들의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은 모두들 열정적인 다독가라는 것이다.

 수 없이 많은 책을 읽다보니 그 안에서 보물을 발견해 낼 수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간략히 소개된 책들의 이야기, 더군다나 아직 나 스스로도 읽지 않은 이야기들을 다시 소개하는 것은 참 무리한 이야기다.

 

책은 직접 읽기 전까지는 절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중요한 부분이나 줄거리를 전해듣는 일, 혹은 단지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찬찬히 혹은 깊이 빠져들며 자신의 호흡에 맞춰 한 장 한 장 넘겨진 페이지가 마음에 남으면 그 때 그 책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책이란 참 좋은 것이다.

 늘 그곳에 있어 내가 필요할 땐 기꺼이 그가 품고 있는 지혜를 빌려주니 좋다.

 로또는 당첨되는 순간에서 잠시간 행복하게 만들어줄 뿐이지만, 책은 계기가 되고 교훈이 되고 여운이 되어 행복이 자랄 수 있는 옥토가 되어주며, 로또는 단 몇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한정된 행운일 뿐이지만 책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보물상자다.

 

사람이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책이 사람을 고른다는 말을 앞에도 적었었다.

 거기에 더해 난 이렇게 생각한다.

 책이 사람을, 그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뀌려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책과 만나는 것이라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갈 만큼 책은 오지랖이 넓지도 친절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일까?

 

치열하게 답을 구하는 사람에게 답은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나 스스로도 답을 얻지는 못했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생각한다.

 돌아보면 난 참 나태했다.

 오래 방황했고, 오래 헤메다보니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늪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행복은 늘 너무 멀리 있었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모르고 지냈다.

 

정말 다행히도 요즘은 그 길이 조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래 헤메던 미로에서 겨우 빠져나온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이 책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명사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책읽기의 당위성을 이야기한다.

 여기 소개한 한 권의 책이 자신에게 계기가 되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책 한 권으로 자신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 계기를 통해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답을 내어주는 존재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그 질문에 자극받고 답을 구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맡겨진 책임이다.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을 무척 싫어한다고 박경철님은 이야기한다.

 '통섭의 식탁'의 최재천 교수님이나 '48분 기적의 독서법'의 김병완님은 다독과 함께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 한 권이 나를 이만큼 바꾸었다면, 나를 바꾼 단 한 권의 책이 열 권이 되고 백 권, 천 권이 되면 나는 얼마나 바뀌게 될까 상상해본다.

 

내가 책을 고르든, 책이 나를 골랐든 결국 책과 함께라면 우리는 바뀔 것이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내 말은 너무 서툴러서 내가 읽고 감상을 적어내는 책들에게 늘 미안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난 더 많이 읽을 것이고, 더 많이 적어낼 것이다.

 그렇게해서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어서 좋은 책, 좋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바램뿐이다.

 

책이 있어서 좋다. 책이 품고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좋다. 책이 건네는 위로의 말들이 너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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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1984년 청목 스테디북스 1
조지 오웰 지음 / 청목(청목사) / 2010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내가 산 책 목록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할 책 중의 한 권이 바로 이 책 조지 오웰의 1984년으로 중학교 때 적과흑을 읽고선 오, 이런 신세계가!하는 마음으로 사둔 10여권의 고전 중 하나다.

 

 처음 읽었을 때 어린 마음에도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아 1984년의 이미지가 지워지질 않았었다.

 

그런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다보니 이 책을 다시 읽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후다닥 읽어버렸다.

 내용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윈스턴과 줄리아가 위장한 사상경찰인 채링턴의 이층 방에서 체포되는 순간에는 절로 낙심이 되면서 곧 그들이 겪게 될 지옥을 떠올리며 안타까워 할 수 밖에 없었다.

 

멋진 신세계와 1984년은 무척이나 닮아있다.

 두 소설의 작가의 활동 연대와 집필 시기도 큰 차이가 없고 배경조차 둘다 영국이다.

 

생각해보니 무척 닮은 듯한 두 소설은 다른 점도 참 많다.

 

한 쪽은 문명을 무척 발전시킨 상태에서 이상향을 건설했고, 다른 한쪽은 극도로 쇠퇴시키는 쪽을 선택했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쾌락에 제한이 없지만 1984년에는 쾌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것도 차이점이 될 수 있겠다.

 

 거기에 신세계에서는 누구나 '행복'을 누리지만 1984년에서는 역시 '행복'이라는 개념조차 없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발생 단계에서부터 완벽한 맞춤식 처리와 훈련을 통해 철저하게 규격화시켜두기에 성장 한 후에는 굳이 감시하거나 제어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학습된 조건 반사가 그들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구별해준다.

 거기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소마'는 그들이 복잡한 감정에 빠져드는 것을 막아준다.

 감정이란 순간적인 경향이 강하기에 약한 감정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소마' 1그램이면 그들은 그저 행복할 수 있다.

1984년에서는 사상교육과 이중사고를 통한 사고의 회피(?) 그리고 신어를 통한 표현 가능한 개념의 삭제함으로써 사고를 제한한다.

 무엇보다 24시간 꺼지지 않으며 거의 모든 장소에 설치되어있는 텔레스크린은 감히 그들에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사상교육들은 그들이 다른 무엇도 아닌 '대형'만을 사랑하도록 만든다. 

 

멋진 신세계에는 신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완벽한 건강과 부족함 없는 생활이라는 완전한 행복을 누린다.

 1984년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대형이 존재하며 권력이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기막힌 차이점은 멋진 신세계에서는 추방되는 이유가 그들이 체제에 반항했기 때문이지만, 1984년에서는 반항하는 한 그들(영사)은 그들(반항자)를 죽이지 않는다.(영사는 영국 사회주의)

그들(영사)은 순교자를 원하지 않는다.

 완벽한 학습, 이해, 수용의 단계를 거쳐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체제에 순응하며 대형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들은 끝이다.

 

 

과학적 화학적 세뇌와 문화적 사회적 세뇌를 구분할 것도 없이 두 이야기는 인간성이 완벽히 말살된 세계를 무척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각각의 세계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시스템을 완벽히 파악하고 또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시스템에서 어떤 결함이나 결점 이상을 느끼지 못한다.

 모두가 완벽하게 만족하는 세상. 그야말로 신천지, 신세계가 아닐까?

 

두 이야기에서 그들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집단'을 벗어나 '개인'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들에게 있어 사색이나 사유의 시간이 될 수 있는 혼자있는 상태는 위험하다.

 늘 서로가 서로를 감시해야 하며, 같은 행위를 해야 할 것을 소리없이 강요한다.

 

우리는 이런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

 개인성이 말살된 세계,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은 세계, 어딘가 심하게 일그러진 세계를 경계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세계의 부품으로 올바르게 기능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고, 스펙 쌓기에 열중한다.

 그것이 아직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라면 난 참 바람직하고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것은 좋은 일, 행복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반대의 이야기를 적을 필요는 없겠다.

 

충분한 살풍경이 이미 그려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난 행복하게 살고 싶다.

 물론, 지금도 무척 행복한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다른 행복을 또한 원한다.

 부품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도록.

 

다만 죽는 날까지 나로 살고 싶다.

 

읽을 때마다 맛이 다르다. 정말 신기하고 놀랍다.

 (어쩜 이렇게 불친절하고 이기적인 감상일까!하는 놀라움까지를 느끼며)

 

간략히 줄거리라도 적어야겠다 ^^;;

 윈스턴 스미드는 오세아니아에 사는 서른 아홉의 정맥류궤양에 시달리는 평범한 남자다.

 현재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의 세개의 강국으로 나뉘어있으며 늘 전쟁중이다.

 오세아니아를 이끄는 지도자는 '대형'으로 그는 불멸하며 모든 미래를 예언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의 세계에는 어느 곳에나 텔레스크린이라는 양방향 방송장치가 존재하며 그것은 아주 작은 소리까지 잡아낼 수 있으며 어디서나 모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오세아니아에는 '이중사고'라고 하는 특별한 사고 형태가 존재하는데 '이중사고'를 이용하면 어떤 사실을 부정하고 그 부정했다는 사실조차 망각함으로써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까지 가능하다.

 한마디로 늘 정신을 백지상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그 백지에 당의 사상과 논리를 적기만하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영사 즉 영국 사회주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슬로건을 내세운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 세가지 슬로건이야 말로 이 소설의 모든 것이다.

 

 대략 알아야 할 것은 대형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뿐이며, 체제에 예속되어 있는 한 그들은 자유롭고 전쟁을 계속 하는 것으로 지배는 평화롭게 계속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소설 속에서 윈스턴을 교육하는 오브리엔이 친절히 일러주는 것을 참고로 하면 좋겠다.

 

동화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윈스턴은 어느날부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줄리아가 쪽지를 건네는 것으로 시작해 당에대한 반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당에서 금지하는 온갖 비행을 저지른다.

 사람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겠지만 그것은 영사에게 있어 분명 반항이요 비행이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죽음의 순간을 걱정하면서도 그들은 호기롭게 그 시간들을 즐긴다.

 그리고 그날.

 그들은 죽은 목숨이 된다.

 

애정성.

 고문을 담당하는 부서가 위치한 건물의 이름이다.

 사랑이 담긴 온갖 고문을 통해 그들이 윈스턴에게 원하는 것은 '대형을 사랑하게 되는 것' 완전히 대형을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 그들은 윈스턴을 놓아주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는다.

 

결국 그가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고문이 코앞까지 닥쳐오고 결국 그는 무너진다.

 

이 소설은 풍자 소설인 것 같다. 아마 그 시대의 어떤 사회적 구조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이러한 상상을 끌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웃고 넘기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 적나라해서 잔혹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진정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광인은 단순히 전체 중의 소수자인지도 모른다."는 말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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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 하서명작선 40 하서명작선 40
헉슬리 지음, 황종호 옮김 / (주)하서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놀라운 소설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1984년의 미래를 그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던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중앙 런던 인공 부화 조건 반사 육성소에서 시작된다. 

 인공 부화라든가 조건 반사 육성에서 상상할 수 있는 조류라든가 동물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다.

 

이곳 육성소에서는 '일정한 규격'에 맞는 '인간'을 '대량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대의 의학, 과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복제, 배아, 줄기세포, 맞춤아기 따위의 일들이 이곳에서는 당연하게 이루어진다.

 특정한 계급의 '인간'을 그 계급의 인간이 수행할 '업무'에 꼭 필요한 조건들에 맞춰 육성하고 불필요한 조건들은 제거하는 것이 이 육성소의 업무이며 누구도 그것에 의문이나 이견을 제시하는 일은 없다.

 

그들의 세계는 '공유' '균등' '안정'이라는 표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표어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반영하며 완벽하게 함축하고 있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따위로 분류되는 각각의 계급들은 서로 완벽한 위계를 지니며, 발생 단계에서부터 완벽한 화학적, 심리적 처리를 거쳐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좋아하는" 불행을 모르는 하나의 세계의 세포로써 기능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세계에나 그렇듯 이 완벽하고 완전한 세게에도 부적응자가 존재했다.

 그의 이름은 '버나드', 그는 알파 플러스라는 우수한 지배 규격의 인간이지만 발생 단계의 어떤 처리가 잘못되어(소문에) 하급 규격의 인간의 특성이 발현되고 만 존재다.

 그는 줄곧 육체적 결함에 대한 의식의 과잉에 시달렸고 다른 인간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며 늘 외로워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완전히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헬름홀츠' 같은 알파 계급이며 '100% 알파'라고 불릴 정도로 우수한 육체적 조건을 타고 났으며 능력 또한 우수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자신의 완벽함에 열광하는 사람들 속에서 되려 괴로워하며 결국 극심한 고독에 시달린다. 

 

그런 그들에게 '야만인' 존의 존재는 탈출구가 되어주었다.

  임신과 출산,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개념이 극도의 혐오를 줄 뿐인 것으로 '조건 반사 교육'이 이루어지는 이 세계에서 존은 특별한 케이스였다.

 

우연히 '야만인 육성 지구(원주민을 놓아 기르는 지역, 그들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에 관광을 갔던 알파 계급의 남자와 베타 계급의 여자가 불의의 사고로 남자는 돌아가지만 여자는 그곳에 남겨지고 완벽히 이루어졌을 피임이 실패해 태어난 존재가 그다.

 

그런 그를 야만인 지구에 관광갔던 '버나드'가 신세계로 데리고 오면서 이야기는 급진전 된다.

 

이 세계에서는 '정조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인은 만인의 것이다."가 그들의 이념이며 완벽히 조건 반사 교육이 이루어진 '신 인류'에겐 쾌락이든 무엇이든 통제없이 마음껏 허락된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을 '야만인' 존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 인류'에겐 '소마'라고 불리는 약물이 상시 지급된다.

 '소마'의 효력은 모든 것을 잊게해주는 것.

 괴로움도 슬픔도 시간마저도 완벽히 잊게 해주는 것이 '소마'였다.

 

발생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각종 처리와 조건 반사 교육 그리고 '소마'의 조합은 너무나 완벽해 모두가 행복한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존은 베타 계급의 레니나라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레니나 역시 존을 사랑했지만 존과 레니나의 사랑은 같을 수 없었다.

 

존은 '야만인의 세계'에서 자라며 그들의 사상을 익히고 있었고 늘 비난당하는 어머니를 봐왔기에 '만인은 만인의 것이다'라는 개념을 인정 할 수 없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불의의 사건들로 존과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이 세계에서 추방되게 된다.

 

중앙 런던을 떠나온 후 존은 어떤 등대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인간들이 찾아와 그를 귀찮게 한다.

 존은 자신의 그릇된 욕망들을 정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데 그 행위가 특히 신세계 인간들의 관심을 끈다.

 

급기야 그를 찾아온 인간의 무리는 그에게 채찍질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존은 그를 찾아온 레니나를 향해 무참한 채찍질을 행한다.

 자신에게까지 심한 채찍질을 했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난 후 등대에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된다.

 

 

부끄럽지만 내 비겁한 무기가 할 말이 정리되지 않으면 줄거리를 늘어놓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줄거리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아무리 잘 읽히는 소설조차 나를 괴롭히게 되는 이유는 감상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은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능력의 결여는 때로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이 책 속의 신세계에는 그러한 괴로움이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완벽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적합하게 발생하고 성장하고 키워진다.

 때로 찾아오는 혼란, 우울, 괴로움은 '소마' 1그램이면 씻은듯 사라진다.

 그들은 불행을 알 수 없으며, 차별이나 부족 불안에의한 괴로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똑같은 규격의 상품을 찍어낸 산업화 된 공장처럼 심지어 그들은 인간조차 '보카노프스키 법'이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복제하여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 '부품'에 가깝다.

 

이 이야기의 배경 연대로 등장하는 '포드00년'이라든가 '신'을 칭하는 감탄사가 '포드님'인 것이나 "값싼 자동차이신 포드님"이라는 욕이 존재하는 것에서 급격히 발전하는 규격화 된 산업에 대한 작가의 우려와 불안이 엿보인다.

 이 이야기를 예사로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이 소설과 많은 점에서 닮아있기 때문이다.

 

과학과 사회제도 심지어 가치관까지 지배하는 세계와 그 세계에 아무런 불만도 요구도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간들.

 표현할 수 없이 섬뜩하기만 하다.

 

버나드나 헬름홀츠의 고독과 존의 죽음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수 많은 것을 박탈당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이 정말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정리는 되지 않으면서 자꾸 의문만 느는 충격과 경악의 참 먹먹한 이야기였다.

 

아, 이 소설에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인용된 부분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렇게 무리하게 마무리 짓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나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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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정치경제학 - 하버드 케네디스쿨 및 경제학과 수업 지상중계
천진 지음, 이재훈 옮김 / 에쎄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정치나 경제라는 말은 사실 내겐 무척 낯선 단어들이다.

 늘 개인적 의미의 경제 활동을 하고, 선거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결국 겉돌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함의 이유는 "내가 어떻게하든 달라질 것은 없잖아?" 혹은 "골치아파, 자기들끼리 치고 박으며 알아서 하라 그래."와 같은 포기와 무관심이었다.

 

하지만 나이들어가면서 경제 활동의 중요성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책임, 욕구)이 커져가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측 불가능한 정치⊙경제적 요인이 늘어갈수록 그에 따른 불안이 증가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문적인 교육 과정을 통해 불안을 방지할 지적 공백을 메우기란 지금에 와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 시점에서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경제나 정치적 흐름과 시행되고 있거나 시행될 예정에 있는 정책들의 학문적 근거에 대해, 경제적 이슈들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인 나도 어느정도 알고 있는 굵직한 사례를 배경으로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사례를 통해 제시되고 해석되는 견해들을 통해 현재의 국제 정세를 희미하게나마 쫓아갈 수 있도록 간결하게 적어나가고 있다.

 

먼저 책의 구성과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추가로 부록이 딸려있는 형식이다.

 

1장에서는 각국의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인플레이션의 관계에 대해 여러 사례와 견해를 보여준다.

 통화와 환율정책에 있어 중앙은행의 재량권 얼마나 부여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환율의 역할 그리고 환율에 적용되는 각각의 환율정책의 특성과 장단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와 현재 그리스가 겪고있는 극심한 재정위기와 같은 경제적 위기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과 IMF의 역할 등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

 

 2장에서는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의료보험에 있어 미국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현상(의사의 과다진료 행위, 가입 환자의 의사에 대한 집요한 소송, 의료보험 미가입자의 무임승차)을 자세히 다루면서 그 심각성을 보여주고, 의료보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 따르는 정치 경제적 어려움들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불평하는 우리나라의 의료보험 제도는 비교적 우수한 제도와 시스템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 할 수 밖에 없었다.

 

3장에서는 경제학의 탄생과 변화, 종교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적 간략히 적고 있다.

 

4장에서는 경제학의 새로운 분야로 개척되고 있는 문화와 경제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다룬다.

 지금까지는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았던 분야로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소개되는 형태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탄소 배출관련 국제 협의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미국의 다양한 분야의 현실들에 대해 각 분야의 권위자들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사례를 분석하고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고 행해진 논의와 제안된 방안을 이야기하던 앞 장들과는 달리 정치경제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근본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경제와 정치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많은 경험을 지닌 비중있는 학자라고 하는 이들도 섣불리 어떤 문제의 해결 방안이라는 것을 내놓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인 제프리 프리든 교수는  "저는 전형적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 질문을 던질 뿐이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학자와 교수의 역할은 해결책을 정해 내놓는 것이 아닌 다양한 견해와 방안을 연구하고 논의될 수 있는 씨앗을 뿌리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마지막 장의 끄트머리에 저자는 전 하버드 대학 총장의 '행복'에 대한 강연을 들려준다.

 결국 우리가 올바른 정치를 갈구하고, 적절한 경제 정책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함일 것이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행복의 수단'으로 이용하던 것들이 되려 '목적'이 되어 우리의 행복을 갉아내고 불안을 증대시키게 된 것 뿐이다.

 

부록을 통해 저자는 하버드 대학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적고 있는데,  '하버드'라는 대학이 가지는 강점이 특별한 '개성적' 사람들이 아닌 다양하고 수준 높은 연구와 견해를 접하고 배울 수 있는 환경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큰 대학과 작은 대학을 옷의 경우 가격이 비싼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닌 내게 잘 맞는가의 문제라고 비유하며 큰 대학이 좋고 작은 대학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내 목적에 적합한가 부적합한가의 구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학의 가치가 그 이름과 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욕구와 목적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입시에 목숨까지 오가는 우리나라 현실에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나 역시 정치와 경제에 대해 무척 무관심했었다. 내가 신경쓴다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식인의 책임'을 다하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답이 있는지 그들 스스로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나은 답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논의를 계속해야 한다고도 한다.

 

99.99% 불가능한 일이라도 해보면 0.01%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그 0.01%의 가능성마저 사라져버려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가능과 불가능은 어쩌면 아주 작은 차이가 만드는 것일 거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막상 감상을 적으려니 무슨 말을 어떻게 적어내야 할지 무척 고민됐었다.

 사실 내게 쉬운 책은 아니었다.

 어렵고 낯선 용어도 많았고, 동의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관심 했던 것들에 대한 관심도 결국 나를 위한 자기위안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불안과 불만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무엇인가 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 나에겐 큰 의미가 되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읽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달 마지막으로 읽었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 두었던 것도 큰 힘이 되었다.

 

무의미 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라도 '도전'하다보면 가까워질 수 있다.

 

이 책 속에 담긴 수 많은 세계적 석학들의 이야기는 깊고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단지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학문적 목적으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다르게 해석하겠지만, 깊이도 수준도 없는 나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무관심'에서 벗어나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세상은 소통을 이야기하고, 학문은 통섭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은 시도였고, 사소한 노력이었지만 조금 더 세상으로 통하는 통로가 넓어진 기분이다.

 

 

 

이 서평은 네이버 북카페 이벤트를 통해 해당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읽고 개인적 주관에 의해 작성된 감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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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단순하게 사는 대충형 인간
디터 브란데스 지음, 이영희 옮김 / 큰나무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드물게 감상을 적으려하면 아쉬움이 먼저 떠오르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그런 아쉬움 책 중의 한권에 또 올라갈 것 같다.

 내 보기에 우리나라는 효율을 무척 중시한다.

 그래서 한가지 일을 통해 여러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희망하고 때로는 그런 희망이 목적이 되어 어떤 경향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조준점은 어긋나 있지 않나 싶다.

 

인생을 단순하게 사는 것으로(단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단순, 혹은 대충은 자포자기 식의 막무가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그 나름의 버림, 포기,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을 포함한 삶의 형태다.) 누릴 수 있는 효과를 기업 경영 측면에서만 이야기하고 있기에 읽는 와중에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생겨버렸다.

 본래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는 쉽사리 집중을 흐트리고 산만하게 하곤 하니 말이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을 알아도 내가 경영인의 위치에 서 있지 않는 한 경영인의 단순하지 않은 방참에 이끌려 갈 수 밖에 없을테니 되려 몰랐을 때보다 불평 불만이 늘어버리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완벽을 추구하고 실수가 용납되지 않으며 빗나간 예측에 가슴을 졸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불안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복잡해져가는 기업과 사회 구조에 단순함의 미덕이라는 화두를 건네려는 노력은 그 호응의 정도와 무관하게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더 큰 이익, 더 큰 편리함, 더 큰 발전을 위해 선택한 완벽을 추구하는 경향이 되려 성취와 효율을 저하시키는 일이 빈번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는 단순 경영의 성공 사례를 예로 들며 단순경영이 결코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 경영 방식이 아니며 되려 그 어떤 완벽주의 경영 방식보다 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비효율적인 복잡성을 줄여 단순 경영으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몇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신뢰다.

 기업은 고객을, 고객은 기업을, 그리고 직원과 기업이 서로 신뢰를 두텁게 해야하며 그 신뢰가 없이는 불안의 증대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복잡성의 증가를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명확한 목표를 지니는 것이다.

 목표가 분명할 때 일의 추진력은 속도가 붙고 목표가 분명하지 않을 때는 자주 길을 잃고 헤멜 수 밖에 없다.

 

 세번째로 일관성이다.

 명확한 목표와 마찬가지로 흔들리지 않는 주관, 일관성이 결여된 기업은 결국 최초의 목표를 망각한 채 난파된 배처럼 시장이라는 바다에서 침몰할 수 밖에 없다.

 

 네번째로 집중력이다.

  어떤 일에서든 집중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좋은 결과를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세상의 요구에 응하려면 기업 역시 복잡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한 것 같다.

 하지만 그 복잡한 요구를 단순한 방법으로 충족시켜 나가면서 발전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어쩌면 지금의 세상은 우리에게 완벽한 삶을 제시하고 그 완벽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사회의 요구였던 완벽함은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지우는 의무라는 족쇄처럼 되어 우리의 행복을 갉아 먹고 있는지도.

 

행복 할 수 있다면 좀 더 단순해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굳은 신뢰와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일관성을 견지하며 집중한다면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보고와 예측에 온 힘을 쏟아낼 때보다 더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계획을 세우는데 지쳤다.

 성과를 예측하고 분석하는데 온 힘을 쏟아도 결과는 늘 빗나간다.

 그렇다면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무엇보다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왜 그것을 하는지 늘 목적을 잊지 말라는 것이리라.

 

내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기회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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