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1984년 청목 스테디북스 1
조지 오웰 지음 / 청목(청목사) / 2010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내가 산 책 목록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할 책 중의 한 권이 바로 이 책 조지 오웰의 1984년으로 중학교 때 적과흑을 읽고선 오, 이런 신세계가!하는 마음으로 사둔 10여권의 고전 중 하나다.

 

 처음 읽었을 때 어린 마음에도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아 1984년의 이미지가 지워지질 않았었다.

 

그런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다보니 이 책을 다시 읽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후다닥 읽어버렸다.

 내용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윈스턴과 줄리아가 위장한 사상경찰인 채링턴의 이층 방에서 체포되는 순간에는 절로 낙심이 되면서 곧 그들이 겪게 될 지옥을 떠올리며 안타까워 할 수 밖에 없었다.

 

멋진 신세계와 1984년은 무척이나 닮아있다.

 두 소설의 작가의 활동 연대와 집필 시기도 큰 차이가 없고 배경조차 둘다 영국이다.

 

생각해보니 무척 닮은 듯한 두 소설은 다른 점도 참 많다.

 

한 쪽은 문명을 무척 발전시킨 상태에서 이상향을 건설했고, 다른 한쪽은 극도로 쇠퇴시키는 쪽을 선택했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쾌락에 제한이 없지만 1984년에는 쾌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것도 차이점이 될 수 있겠다.

 

 거기에 신세계에서는 누구나 '행복'을 누리지만 1984년에서는 역시 '행복'이라는 개념조차 없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발생 단계에서부터 완벽한 맞춤식 처리와 훈련을 통해 철저하게 규격화시켜두기에 성장 한 후에는 굳이 감시하거나 제어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학습된 조건 반사가 그들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구별해준다.

 거기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소마'는 그들이 복잡한 감정에 빠져드는 것을 막아준다.

 감정이란 순간적인 경향이 강하기에 약한 감정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소마' 1그램이면 그들은 그저 행복할 수 있다.

1984년에서는 사상교육과 이중사고를 통한 사고의 회피(?) 그리고 신어를 통한 표현 가능한 개념의 삭제함으로써 사고를 제한한다.

 무엇보다 24시간 꺼지지 않으며 거의 모든 장소에 설치되어있는 텔레스크린은 감히 그들에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사상교육들은 그들이 다른 무엇도 아닌 '대형'만을 사랑하도록 만든다. 

 

멋진 신세계에는 신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완벽한 건강과 부족함 없는 생활이라는 완전한 행복을 누린다.

 1984년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대형이 존재하며 권력이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기막힌 차이점은 멋진 신세계에서는 추방되는 이유가 그들이 체제에 반항했기 때문이지만, 1984년에서는 반항하는 한 그들(영사)은 그들(반항자)를 죽이지 않는다.(영사는 영국 사회주의)

그들(영사)은 순교자를 원하지 않는다.

 완벽한 학습, 이해, 수용의 단계를 거쳐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체제에 순응하며 대형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들은 끝이다.

 

 

과학적 화학적 세뇌와 문화적 사회적 세뇌를 구분할 것도 없이 두 이야기는 인간성이 완벽히 말살된 세계를 무척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각각의 세계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시스템을 완벽히 파악하고 또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시스템에서 어떤 결함이나 결점 이상을 느끼지 못한다.

 모두가 완벽하게 만족하는 세상. 그야말로 신천지, 신세계가 아닐까?

 

두 이야기에서 그들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집단'을 벗어나 '개인'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들에게 있어 사색이나 사유의 시간이 될 수 있는 혼자있는 상태는 위험하다.

 늘 서로가 서로를 감시해야 하며, 같은 행위를 해야 할 것을 소리없이 강요한다.

 

우리는 이런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

 개인성이 말살된 세계,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은 세계, 어딘가 심하게 일그러진 세계를 경계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세계의 부품으로 올바르게 기능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고, 스펙 쌓기에 열중한다.

 그것이 아직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라면 난 참 바람직하고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것은 좋은 일, 행복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반대의 이야기를 적을 필요는 없겠다.

 

충분한 살풍경이 이미 그려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난 행복하게 살고 싶다.

 물론, 지금도 무척 행복한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다른 행복을 또한 원한다.

 부품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도록.

 

다만 죽는 날까지 나로 살고 싶다.

 

읽을 때마다 맛이 다르다. 정말 신기하고 놀랍다.

 (어쩜 이렇게 불친절하고 이기적인 감상일까!하는 놀라움까지를 느끼며)

 

간략히 줄거리라도 적어야겠다 ^^;;

 윈스턴 스미드는 오세아니아에 사는 서른 아홉의 정맥류궤양에 시달리는 평범한 남자다.

 현재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의 세개의 강국으로 나뉘어있으며 늘 전쟁중이다.

 오세아니아를 이끄는 지도자는 '대형'으로 그는 불멸하며 모든 미래를 예언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의 세계에는 어느 곳에나 텔레스크린이라는 양방향 방송장치가 존재하며 그것은 아주 작은 소리까지 잡아낼 수 있으며 어디서나 모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오세아니아에는 '이중사고'라고 하는 특별한 사고 형태가 존재하는데 '이중사고'를 이용하면 어떤 사실을 부정하고 그 부정했다는 사실조차 망각함으로써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까지 가능하다.

 한마디로 늘 정신을 백지상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그 백지에 당의 사상과 논리를 적기만하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영사 즉 영국 사회주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슬로건을 내세운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 세가지 슬로건이야 말로 이 소설의 모든 것이다.

 

 대략 알아야 할 것은 대형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뿐이며, 체제에 예속되어 있는 한 그들은 자유롭고 전쟁을 계속 하는 것으로 지배는 평화롭게 계속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소설 속에서 윈스턴을 교육하는 오브리엔이 친절히 일러주는 것을 참고로 하면 좋겠다.

 

동화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윈스턴은 어느날부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줄리아가 쪽지를 건네는 것으로 시작해 당에대한 반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당에서 금지하는 온갖 비행을 저지른다.

 사람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겠지만 그것은 영사에게 있어 분명 반항이요 비행이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죽음의 순간을 걱정하면서도 그들은 호기롭게 그 시간들을 즐긴다.

 그리고 그날.

 그들은 죽은 목숨이 된다.

 

애정성.

 고문을 담당하는 부서가 위치한 건물의 이름이다.

 사랑이 담긴 온갖 고문을 통해 그들이 윈스턴에게 원하는 것은 '대형을 사랑하게 되는 것' 완전히 대형을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 그들은 윈스턴을 놓아주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는다.

 

결국 그가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고문이 코앞까지 닥쳐오고 결국 그는 무너진다.

 

이 소설은 풍자 소설인 것 같다. 아마 그 시대의 어떤 사회적 구조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이러한 상상을 끌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웃고 넘기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 적나라해서 잔혹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진정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광인은 단순히 전체 중의 소수자인지도 모른다."는 말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