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싱글맨>은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물론 주인공과 작가의 목소리를 동일시하는 건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만, 작품의 배경인 1962년에 작가의 나이와 주인공 조지의 나이가 동일하게 58세이며, 동성애자이자 영문학을 공부한 지식인이라는 점 등이 일치한다는 면에서 볼 때, 작가와 주인공이 크게 분리될 것 같지는 않다.


이 소설은 단 하루 동안의 시간적 배경으로 주인공의 생각과 심리를 묘사하는데 중심이 맞춰져 있는데, 시간의 응집력 덕분인지 노년, 소수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 인간이 느낄법한 상실감이 무척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 상실감은 자연스레 죽음, 소수자에 대한 편견,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성찰로 이어진다.


어조는 담담하고 독백적이지만, 그 안에는 슬픔과 분노, 따뜻함과 서늘함,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아름답다.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한 인간의 내면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이 모든 감정들을 꿈결처럼 모두 맛볼 수 있어 짧은 시간이나마 행복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마치 조지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조지의 죽은 애인 짐이 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결국엔 이 소설 역시 진정한 소통을 통한 사랑만이 구원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말하고자하는 것 같다. 상대의 고통과 감성에 대해 진정으로 듣기를 원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지만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며, 사랑이란 상대를 이해하려는 끝없는 노력에 있다는 사랑의 진리, 그리고 이것을 제대로 깨닫고 진짜 사랑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죽음의 공포마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구원에 관한 전설 말이다. 그건 후반부에 등장하는 학생 케니와 조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을 통해서 제시되지만, 예컨대 비동성애자들의 동성애자를 향한 적대감이나 불이해 또는 비이해(잘못 이해하거나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일)가 이해로, 넓은 의미의 사랑으로 전환되는 방식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톰 포드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작품은 오랜만에 책 속에 깊이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이미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든 또 하나의 소수자, 여성인 나로서는 주인공 조지가 느끼는 허무와 고독의 느낌에 많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 나서 현실로 다시 돌아 온 조금 뒤에는 마치 중년의 나이에 청춘 드라마를 보고 난 듯한 야릇한 아쉬움(소외감?)이 들었다. 이 알 수 없는 허전함은 뭘까? 그건 아마도 내가 가사와 육아 노동의 책임에서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결혼제도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관능과 열정에 진짜 방해꾼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육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고 전문직과 가사도우미를 가진 조지의 정신적이고 낭만적인 삶(노년에 가까운 나이에도 무려 십대 말 혹은 이십대 초(?)의 청년과 낭만적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이 은근히 부러울 지경이었다면 돌을 맞으려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실재로는 서른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연인 돈 바카디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33년간을 행복하게 함께했다고 한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크리스&, 어 러브 스토리>(2007)라는 다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그러니까 실재 인물들이 출연한다는 소리다. 열일곱 소년과 쉰이 다 된 남자의 성적 이끌림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 있게 보여지게 될까? 올해 단연 화제의 영화였던 <은교>도 떠오르고, 막연한 호기심이 생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아가면서 한 번쯤 일탈을 꿈꾸어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아버지, 어머니, 자식, 형제라는 이름의, 가족이라는 이름의 이 든든한 울타리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토대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단단히 얽어 매는 사슬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자명한 진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상상하는 일이 때로는 지리멸렬해 보이는 일상을 달리 보이게 해줄 수도 있다. 필립 로스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종말의 한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엄정하고 엄숙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세상에는 이 소설의 주인공의 형 하위처럼 온갖 재능과 행운과 인품을 다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인공이 수술 대기 중 만난 한 환자처럼 모든 부모와 형제가 연달아 죽고 아내마저 떠나 보내는 아픔에서 겨우 헤어나자마자 심각한 질병에 걸린 불운한 사람, 이유 없이 찾아온 온갖 불행을 그저 견뎌내야만 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세상이 이토록 부조리한 것이라는 사실은 왠만큼 살아 본 사람이면 다 아는 얘기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이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건가?


           사실, 소설의 내용 자체는 너무나 평범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람둥이의 일대기쯤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힘을 지니게 되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부한 방식으로 타락한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한 보통 인간의 말로를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섬뜩한 공감을 이끌어 내는 방식 말이다. 주인공은 세 번의 결혼을 하고 첫 번째와 두 번째 결혼에서 각각 아들 둘과 딸을 얻었다. 첫 결혼은 아들이 단단한 생활인이 되기를 원한 아버지 때문에 한 결혼이었으므로 주인공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고, 영혼의 동반자와도 같은 피비와의 두 번째 결혼은 성적 에로티시즘에 대한 갈망으로 뇌가 없는 모델과의 관계 때문에 파탄이 났다. 주인공이 늙고 병들자 세 번째 아내는 무능력한 모습으로 주인공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해 이 결혼마저 끝이 난다. 끝까지 자신을 증오하는 두 아들과는 달리 아버지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관대한 딸 낸시와 자상한 형이 어느 정도 도움과 위안을 주지만, 그 마지막 관계의 끈 마저도 스스로 거부하는 지경에 이른 주인공은 병마와 함께 비참한 고독을 맞게 된다. 자신으로 인해 상처 입은 아들들로부터 끝끝내 이해 받지 못한 것을 못내 억울해 하기만 했던 주인공은 여러 차례의 수술과 그 과정에서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절대적인 고독을 겪게 되면서 육체적, 정신적 극한의 상황에 이르게 되자 마침내 처절한 회환에 휩싸여 몸부림친다.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자책에 박자를 맞추어 쳤다. 심장제세동기를 불과 몇 센티미터 차이로 빗나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어디가 부족한지 랜디나 로니보다 훨씬 잘 알 수 있었다. 보통 냉정하던 이 사람은 마치 기도하는 광신자처럼 사납게 자기 가슴을 쳤다. 이 실수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실수, 모든 뿌리 깊고, 멍청하고, 피할 수 없는 실수들로 인한 가책에 시달리다-자신의 비참한 한계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면서도, 마치 삶의 모든 파악할 수 없는 우연을 스스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심지어 하위도 없어! 이렇게, 심지어 하위도 없이 끝이 나다니!”(164-165)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목이었다. 삶은 끝없이 계속되는 게 아니므로, 우리는 한 번밖에 살 수 없으므로, 우리가 살면서 저지르는 실수들은 결코 지워지는 게 아니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죽음이라는 종말이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살아간다는 건 말할 수 없이 엄정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까지나 열여덟 살”(175)일 수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하며, 이 준엄한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다는 것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이 미술을 가르치는 클래스에서 영감 운운하는 학생에게 주인공은 어느 예술가의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86) 번역자 정영목이 옮긴이의 말에서 지적한 대로 작가의 예술관을 대변하는 말일 것 같은 이 말은, 삶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 평생을(무려 41년을!) ‘에브리맨 보석상에 바친 아버지, 34년째 묘지 파는 일만을 해온 남자, “할 일은 해야 한다가 자신의 확고한 철학인 무덤 파는 남자의 부인, 타인에 대한 신뢰와 헌신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딸 낸시는 모두 이런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빛나는 순간은 어쩌면 찰나와도 같은 매혹에 굴복하는 순간이 아니라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하루하루일 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것은 꿈이었을까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나의 현실인 속에서의 , 기시감, 고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몽상적 분위기로 낯설게 하기에는 성공하나, 크게 공명을 울리는 부분은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조차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저 그렇게 속에서처럼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는, 형체가 불분명한 자아의 허우적거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 방향과 실체가 없으니 만남도 일시적일 밖에 없을 . 사랑 역시 찰나적이다.


말미에 작가는 준의 결혼 생활을 생명인 나비를 날려 보낸 허물, 껍데기라고 명명한다.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는 것이 본질인 인간의 영혼을 일상이라는 견고한 말뚝으로대 붙잡아 두려 한다면 본질은  날려 보낸 껍데기 같은 일상만 부여잡고 살게 되리라는 말이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우연과 불친절하기만 , 꿈과 현실의 지루한 넒나듦 끝에 마침내 우리에게 무척이나 친근한 도식이 형체를 드러낸다. 자유로운 영혼은 고독하다. 고독은 자체로 인간을 지치게 만들고 사랑을 갈구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결국 사랑의 완성이란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대신 일상은 고독을 잊게 주는 특효약이다. 고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몸부림으로 결혼 생활이라는 일상을 선택한다. 영혼의 자유를 댓가로 말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영혼은 자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전과는 반대로, 이제 자유에의, 고독에의 향수와 갈망을 간직한 일상에 지쳐간다….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진부한 인생의 아이러니! 과연 우리는 같은 고독과 사랑의 우로보로스로부터 빠져나올 있을까? 작가의 대답은 부정적인 같다. 나는 작가의 이런 태도가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고독과 사랑과 일상의 아이러니에 대한 생각은 별반 새로울 것이 없지만 대신 작가의 적은 사랑에 대한 가지 아포리즘은 생각해 볼만 하다.

새로운 애인을 만나면 헤어진 애인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갈급을 뜻하는 걸까. 그런 연유로 사랑이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리는 모양이다.”

                                                            

작가의 말대로 정말 인생의 진리는 되나 보다. 위의 도식에 밀란 쿤데라의 통찰을 끼워 넣을 수도 있겠다. 갈급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자신이 하고픈 이야기, 자신이 만든 상대방의 이미지)만을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에 상대방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하고 따라서 이해,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홍상수의 영화 <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남자 주인공이 무턱대고 화가의 젊은 아내 유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우스꽝스런 장면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갈급이 알맹이인 낭만적 사랑은 애초에 실패가 예정된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진정 수긍할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젊은 날의 경험을 통해 희미하게라도 이런 사랑의 허무함을 깨닫고는 결연하게 인생의 다음 단계, 가족 만들기라는 편리한 공식에 투항하고 마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애초에 가족이란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주의를 기반으로 한다고 말할 있으리라이 허무를 철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낭만적 사랑의 기억을 기웃거리며 상실감에 허우적댈 것이다. 그러니 결혼 남녀들이여, 낭만적 사랑의 허무를 철저하게 긍정하라!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고독과 소통에의 열망이 일상이라는 괴물에 완전히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 여전히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자명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도저히 달아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실존적 과제인 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 내 감정을 완전히 동화시키는데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소설의 주제의식 만큼은 모두가 깊이 고민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3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의 논리대로 성경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꿈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듣게 된다면 누구라도 아브라함처럼 제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는 잔인한 일도 서슴지 말아야 할 것이며,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확신한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 짓이라는 비웃음을 받는다 해도 전 세계의 동물들을 한 쌍씩 태울 수 있는 거대한 배를 만드는 일에 당장 착수해야 할 것이다. 대를 잇기 위해 아버지와 자는 일도 망설이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을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고 확신한다면 이웃 민족의 갓난아기까지 씨를 말리는 학살 행위도 정당하다고 강변할 수 있을 것이다. 새우나 가재 같은 갑각류를 먹기라도 한다면 동성애자들과 함께 기꺼이 처벌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레위기의 기나긴 금지사항 목록을 보면 오늘날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벌을 받지 않고 살아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구약에서 말하는 온갖 에피소드들과 율법 사항들에 관해 글자 그대로 믿으려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수처럼 살기위해 우리 모두가 집도 가족도 버리고 평생을 부랑자로 떠돌아 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귀신을 쫒는다며 남의 가축 2천 마리를 물에 빠져 죽게 만들어 놓고도 어떤 보상도 하지 않고 유유히 제 갈 길을 간다거나, 어떤 현대의학도 무시하고 기도와 믿음으로 병자를 치유한다며 중증 환자를 제 맘대로 다루는 사람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하며, 우리 모두 당장 대형 교회로 달려 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외치며 헌금함을 뒤집어엎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무턱대고 상식과 법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서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거나 자신이 예수처럼 신의 아들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대신 예수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지,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을 지에 대해 곰곰이 숙고해볼 것이다.


저자 게리 윌스는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메시지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온 미국의 대표적 지성으로, 그 대표적 결과물이 바로 이 책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이다. 역자의 소개에 다르면, 또 다른 저서(<게티즈 버그 연설, 272단어의 비밀>)로 퓰리처 상까지 받은 바 있는 저자는 문화역사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한 때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할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한다. 게다가 위의 두 책은 현재 미국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신앙서적 목록에 있다고 하니 이 책의 무게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과연 저자가 생각하는 예수가 한 말과 행동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는 싱거울 정도로 단순하고 명백한 만고불변의 진리임에 틀림없지만, 게리 윌스가 보기에 성서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부인하기 힘든 보편적인 진리 선언에 반드시 수식어가 한 가지 덧붙여져야 한다. “급진적으로”라는. 


예수는 결코 ‘좋은 남자의 표본’으로 살지 않았다. 지금까지 교회가 덧씌워온 ‘유순하고 온화하며 고결한 예수’라는 이미지는 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실재 모습이 아니다. 예수는 누더기를 걸치고 돌아다니며 사회적으로 경멸의 대상이 되는 창녀, 장애인, 병자, 죄인들과 격식 없이 어울렸으며, 불경스럽고 거친 독설가로 살았다. 예수가 일으킨 온갖 초자연적 이적들은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온갖 층위의 계급적 차별과 종교적 율법주의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예수는 첫째와 꼴찌,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지도자와 대중, 건강한 자와 병자 등으로 나누어 차별하는 행위와, 인간을 완고한 형식의 틀에 얽매이게 하는 일이 인간과 인간이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결코 타락한 사회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거나 속세를 초월하는 시늉을 한 적이 없다. 대신, 온갖 차별과 율법과 권력체계로부터 해방될때만이 참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메시지를 목숨을 걸고 전달하고자 애쓴 급진적 행동가였으며, 바로 그 때문에 율법주의(형식주의)를 내세우는 교회와, 제국주의 정치 권력자의 공모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예수가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는 과정은 예수의 소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한다. 인간이 빵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으며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유혹을 버리고 하나님 아래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일, 그리고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의 위험함을 깨닫도록 가르치는 일 말이다. 광야에서의 정신적 단련을 통해 예수는 빵(물질)과 세속적 권력, 오만함 등을 통한 모든 종류의 ‘값싼 구원’을 단호히 거부하고 이를 넘어서는 깊이를 획득하게 되며, 이로써 장차 사람들을 이끌 방향을 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가져온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말해 그것은 하나님 나라다. 예수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것으로 선포했으며, 그 나라는 지금도 역동적인 진행 과정에 있다. 게리 윌스가 보기에, 예수는 자신의 실재와 하나님 나라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는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선물을 건네받은 첫 번째 대상은 광야의 수행자들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었으며, 그들을 모이게 한 행동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정화’의 이적을 통해서였다. 예수는 당시의 온갖 사회적 장벽들과 금기들을 파괴하는 행동들을 통해 사람들을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 가치 있는 자와 가치 없는 자, 존경받는 자와 존경받지 못하는 자로 나누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차별과 배제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과는 반대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각별하게 관심을 쏟을 오늘날의 로마 백부장, 튀루스의 여인, 사마리아의 나병환자인 부정한 자, 또는 아웃사이더는 어떤 사람들이겠는가? 저자는 예수라면 나치 하의 유대인들과 지금의 동성애자들과 함께 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예수는 외적인 정결과 순결을 조롱하는 언행을 결코 멈추지 않았으며, 내면의 빛(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사랑)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가 동성애자들과 같은 사회적 아웃사이더들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하나님 나라에 근접하려면 이 ‘부정한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뿐만 아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끊임없이 부자와 권력자, 착취자를 통렬하게 비난한다. 예수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는 계급과 권력이 없는 나라다. 그런데 교회는 모든 극단주의를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 립서비스 만을 제공한다. 저자가 보기에 이는 그들이 예수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정신적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자만과 겉치레, 위선에 대한 예수의 꾸짖음은 어떤가. 중세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교회가 이에 대해 떳떳할 수 있을까?


예수는 또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했다. 하나님 나라는 평화로운 곳이다. 저자는 예수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라’고 말함으로써 로마의 탄압에 맞서는 일체의 정치적 저항을 포기했다는 점을 들어 예수가 반정치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프로그램은 “체계적인 반정치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국가 폭력이나 패권적 정치에 반대한 부분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일체의 저항적 정치에 대해서도 반대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계급이나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것도 정치적 행위임에 분명한데 저자는 정치 개념을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가령 부시의 아프간이나 이라크 침공처럼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에 대해 예수라면 어떤 말을 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이는 오로지 예수의 사랑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가 우리에게 준 계명을 지킴으로써만 예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다. 그 계명이란?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는 이같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기 위한 대가로 자기희생을 택했다. 저자에 따르면, 예수의 죽음 역시 신의 사랑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예수의 피는 결코 분노한 아버지에게 바치는 희생이 아니다. 예수의 자기희생은 죄악을 정복하기 위해 인류를 대신해서 치른 특별한 희생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분노가 아닌 사랑의 증거라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몸은 부활을 통해 영적인 몸으로 거듭났으며, 부활은 지금도 이 땅의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우주적인 언어로 우리들 사이를 이끄는 성령을 통해 예수가 우리들 ‘사이’에 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핵심 메시지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쉽게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자면 보는 관점에 따라 성서를 이해하는 방식과 내용이 뚜렷이 갈린다. 저자 게리 윌스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그는 성서에 대한 보수주의적 독해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이며 급진주의자로서의 예수의 면모를 제시하는데 집중하지만, 예수세미나와 같은 극단적인 ‘역사적 예수’ 위주의 성서 해석과도 분명한 선을 긋는다. 저자가 보기에, “얼핏 보기에 기묘하거나 위험하거나 초자연적인 것들은 모두 의심스럽다는 제퍼슨 식 가정”에 동의하는 로버트 펑크를 비롯한 예수세미나 팀의 입장은 성서의 내용을 문자적 측면으로만 파악하는 새로운 근본주의라는 것이다. 성서에 대한 이런 독해는 성서를 지나치게 빈약하게 만드는 자의적인 해석으로, 진정한 급진주의자 예수를 순하게 길들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한 것이다. 저자는 예수에게서 믿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뺀 채 “‘역사 속에 존재하는 예수’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퇴비 더미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태평양 바다에서 뉴욕 시를 찾아내려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믿음, 이적들과 부활을 통해 그것을 입증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는 마커스 보그와 같은 민중신학자들의 관점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으로 보인다. 


저자가 쓴 쌍둥이 책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와, 보수주의적  입장을 대변하는 톰 라이트와 진보적 입장을 대변하는 마커스 보그의 논쟁으로 구성된 책인 <예수의 의미>를 함께 읽는다면 저자 게리 윌스를 다른 스펙트럼의 신학자들과 구별짓는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2. 05. 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전 손택은 진정한 미국의 양심이자 세계의 양심이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한 손택의 날카로운 지적들은 정치세계나 미디어뿐만 아니라 나처럼 평범한 개인들까지도 세계시민으로서의 지위와 의무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손택에 따르면, 인간이란 존재는 고통 받고 있는 타인의 육체를 담은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하는 사악한 존재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만 보아도 이는 명백히 입증된다. 끔찍한 교통사고 현장을 ‘구경거리’로 생각하는 자신을 생각해보라.)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찍은 전쟁사진이나 부당한 권력이 신체에 가하는 폭력을 담은 사진(혹은 그림)들조차도 카메라의 혹은 화가의 의도와 취사선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는 수동적 존재다. 그토록 남의 나라의 비극을 담은 박물관 짓기를 좋아하는 오지랖 넓은 미국에 흑인들의 노예사를 담은 박물관 하나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떠올리지도 못하는 것처럼.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찍힌 육체들은 늘 구경거리로, 수동적으로 보이기만을 당하는 (수치심이라고는 없는) 사물과도 같은 역할을 해왔으며, 그 시선의 주체는 언제나 백인들이었다. (이런 사실을 손택이 지적해 주지 않았다면 나 또한 백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벌거벗은 채 굶주리고 있는 비쩍 마른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시선의 폭력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사진이 순간적인 연민과 고통의 감정을 자극하지만 그 사진 속의 대상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서사가 빠진 이미지 자체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에는 많은 슬픔과 고통이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식의 무력감만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종류의 무력감이 사람들을 냉소적이고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연민이라는 감정 역시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탓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까지도 증명해 주는 샘이기 때문에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더 이상 연민만을 베푸는 일을 그치는 게 우리의 진짜 과제다. 정치적 차원의 이성적 사고와 행위로 연결되지 않는 순간적 연민 따위의 자극이란 쓸모없는 감정의 소비일 따름이다. ☞[정치적 행동주의자로서의 수잔 손택의 면모가 드러나는 이와 같은 비판은 거대 미디어나 사진기자들(또는 작가들)의 양심보다도 오히려 이들의 그림을 소비하는 나 같은 개인의 양심에 더욱 날카롭게 꽂힌다.]

모든 사람들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방관하도록 뉴스를 스펙터클로 만드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미국의(나아가 서양의) 저널리즘을 비판하면서도 이미지가 곧 현실이라는 극단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 이미지가 현실이라면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이미지를 구경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현실로 겪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기록되고 알려지고 이해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문제는 고통을 전하는 일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방식에 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바라보아야 한다. 더 이상 연민이란 감정을 소비하지 말고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덜어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들을 지옥에서 어떻게 구출할 것인지,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것인지를 말이다.

결론적으로 분노와 고통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억하기’ 자체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지 말고,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색하기’가 중요하다. 사색의 시작은 이런 것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진정한 공감의 순간이란 어쩌면 바로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사족: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연수의 단편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 마지막에 들어있는 “작가의 말”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오는데, 손택의 이 책을 읽고 공감한 끝에 쓴 게 아닐까 싶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에 대한 관점이 닮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집에 들어있는 단편 <달로 간 코미디언>에는 작중 인물을 통해 수전 손택이란 이름이 직접 언급되는 장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소통에 대한, 사랑에 대한,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참으로 명쾌한 통찰이다. 김연수와 손택의 결론에 깊이 공감하면서, 세계시민으로서의 내가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 대해 작게나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무겁게 고민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