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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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블룸의 <독서의 기술>을 읽다가 셰익스피어에 관한 블룸의 절대적 지지에 선동당해(이보다 더 자극적인 선동이 또 있을까) 나로서는 <햄릿>을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셰익스피어가 문학적 위력이라는 면에서 <성경>에 맞먹는 유일한 인물이며, 구약의 야훼, 신약의 예수, 코란의 알라보다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의 설득력은 더 크다고까지 하니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수사법과 상상력의 자원은 야훼, 예수, 알라를 능가하"며, "햄릿의 정신과 그 정신을 확장하는 데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신이 사용한 언어보다 아직까지는 더 넓고 더 민첩하다"니, 대체 그 어떤 다른 칭송의 말이 여기에 필적할 것이가... 

 

정말 그 정도로... 하는 의심을 하기에는 너무도 무게감 있는 문학 평론계의 대부의 말씀이기에 다시 한 번 확인이라도 해보고싶은 충동이 드는게 당연지사. 그래서 책을 펴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나갔다. 인생 중반을 넘어서 읽는 <햄릿>은 역시나 다르게 다가왔다.. 20대 초반에, 그리고 30대에 읽었을 때는 깊이 공감하지 못했을 여러 대목들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러 차례 다시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인생을 좀 아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 젊은 날의 어리석음에 대한 회한...이런 것들이 대문호 셰익스피어에게마저 친근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다니, 이게 대체 좋은 소식인건지 슬픈 소식인건지...  

 

<햄릿>에는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한 수많은 지혜들이 담겨있지만, <햄릿>의 주제어를 한 단어로만 말하라고 한다면 "용기"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 부쩍 이런 생각을 자주 했더랬다. 이담에 아이들이 다 커서 내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한 가지만 말해달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용기"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셰익스피어 생각도 마찬가지였던가보다...

 

내친 김에 해럴드 블룸의 햄릿 인물평도 인용해 본다."왜 <햄릿>을 읽는가?... 햄릿 왕자는 지식인 중의 지식인으로서, 서구 정신의 고귀함이며 재앙이다. 이제 햄릿은 지성 그 자체의 표상이 되었고, 그것은 서구적인 것도 아니고 동양적인 것도 아니며, 남성적인 것도, 여성적인 것도, 흑인의 것도, 백인의 것도 아니고 단지 최상의 상태의 인간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진정으로 다문화적인 최초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284쪽)

 

일체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비판적 독법에 대해 심한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 극보수 비평가가로서의 주장이기는 해도 문학작품에 녹아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이라면 일각연이 있는 저자의 생각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모든 문화와 계급적 배경을 다 떼고서 그저 단순히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햄릿이라는 캐릭터를 문학 역사상 최고의 지식인이자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본다는 블룸의 견해에 대해서 말이다.

 

 

햄릿: 한 방울의 악 성분이 종종 고귀한 본질 모두를 말살시키고, 치욕을 불러온단 말일세.(39쪽)

 

햄릿: 나 원 참, 봐요, 훨씬 더 낫게 해야지. 모든 사람을 각자의 값어치대로만 대접하면, 태형을 피할 사람 있어요? 당신의 명예와 가치에 버금가게 그들을 대접하시오, 그들의 자격이 모자랄수록 당신의 선심은 더욱 값질 테니까.(85쪽)

 

햄릿: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를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94쪽)

 

햄릿: 가장 깊은 내 영혼이 선택의 주체 되고 인간들을 선별할 수 있게 된 이후로 그대를 자기 사람으로 확정했네. 왜냐하면 그대는 모든 해를 입으면서 아무 해도 입지 않고, 운명의 시련과 보답을 꼭같이 고맙게 맞이한 사람이니까. 그러므로, 혈기와 분별력이 너무나 잘 배합되어 운명의 여신이 아무 곡조나 연주하는 피리가 아닌 이들은 복받았어. 격정의 노예가 아닌 사람 알려주게. 그럼 난 그를 그대처럼 내 심중에, 암, 내 마음 한가운데 지니겠네. (104-5쪽) 

 

배우 왕: 지금 당신 말한 대로 생각한다 믿지마는 우리들이 작심한 바 우린 자주 깨뜨리오. 결심이란 기껏해야 기억력의 노예일 뿐, 태어날 땐 맹렬하나 그 힘이란 미약하오. 그 열매가 시퍼럴 땐 나무 위에 달렸짐나, 익게 되면 그냥 둬도 떨어지는 법이라오. 우리들이 자신에게 빚진 것을 잊어버려 못 갚는 건 정말이지 피할 수가 없는 거요. 격정 속에 우리들이 자신에게 제안한 건 그 격정이 사라지면 결심조차 없어지오. 슬픔이나 기쁨이나 격결하면,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그 자체가 소멸되오. 기쁜 마음 광분하면 슬픈 마음 통탄하고, 별것 아닌 사건으로 슬픔 기쁨 엇갈리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아니하며, 사랑조차 운에 따라 바뀌는 건 이상할 것 하나 없소..... 그렇지만 순서대로 시작에서 끝을 내면, 의도한 바 운명과는 정반대로 가는지라 우리들이 계획한 건 끊임없이 뒤집히오. 우리 생각 우리 거나, 그 결과는 아니라오. (111-2쪽)

 

햄릿: 덕이 없더라도 그걸 몸에 걸쳐보세요. 악습에 대한 감각을 모조리 잡아먹는 습성이란 괴물도 이 점에선 천사랍니다. 즉 곱고 착한 행동이 습관이 되면, 그놈이 쉽사리 입을 수 있는 외투나 예복 또한 준답니다.오늘 저녁 자제하면 그 때문에 다음번 금욕은 조금 쉽고, 그 다음은 더 쉬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습관은 천성의 각인조차 바꿔놓을 수 있으며, 악마를 누르거나 놀라운 힘으로 그놈을 내던집니다. (133-4쪽)

 

햄릿: ...헌데 이 무슨 짐승 같은 망각인지, 혹은 결과를 너무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인지- 그 생각을 쪼개봤자, 반에 반만 지혜이고 나머지는 비겁함이겠지만- 난 내가 왜 이건 하리라고 살아 말하는지 모르겠다, 해치울 명분과 의지, 힘과 수단이 있음에도.....진정으로 위대함은 큰 명분이 있고서야 행동하는 게 아니라, 명예가 걸렸을 땐 지푸라기 하나에도 큰 싸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149쪽) 

 

왕: ...사랑의 발단은 시간임을 알며, 그 불꽃과 열기도 시간 가면 줄어듦을 실제 증거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길 속엔 그것을 약화시키는 일종의 심지나 검댕이 자라는 법이며 언제나 꼭같이 좋은 것도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좋은 것도 넘치면 홧병처럼 제풀에 죽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픈 일 하고플 때 해야 돼. 왜냐면 <하고픔>은 말이 많고 손이 많고 사건이 많은 만큼 변하고 줄어들고 지연되며, <해야 됨>도 한숨이 피 말리는 것처럼, 누그러지면서 우리를 해치니까. (168쪽)

 

햄릿: 아무 상관 없어. 우린 전조를 무시해.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특별한 섭리가 있잖은가. 죽을 때가 지금이면 아니 올 것이고, 아니 올 것이면 지금일 것이지. 지금이 아니라도 오기는 할 것이고. 마음의 준비가 최고야. 누구도 자기가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지 모르는데, 일찍 떠나는 게 어떻단 말인가? 순리를 따라야지. (198-9쪽)

 

2014.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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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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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정치를 통해 드러난 인간 세상의 복잡한 진실을 들여다보기를 회피하고 편리한 속물적 태도로 삶을 견뎌온 파티걸 클라리사와, 행동이 결여된 채 온갖 지식과 정념의 소비로 일생을 허비해온 루저 피터 월시의 삶은 닮은꼴. 셉티머스의 죽음은 이들(우리 대부분)의 게으름에 대한 속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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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앵무새 열린책들 세계문학 56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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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겹의 이야기가 중첩되는 구조일 뿐만 아니라 사유의 밀도도 높아 많은 집중력을 요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플로베르가 자신의 소설 순수한 마음을 쓰는 동안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소녀 펠리시테의 앵무새 룰루를 묘사하기위해 박물관에서 대여해 온 앵무새 박제의 진본을 화자가 찾아가는 과정이 하나의 전체적인 틀을 이룬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소설의 결말답게, 우리는 끝내 진본이 어떤 것인지 알아낼 수 없다.

 

당대에 유행하는 철학적 흐름을 이런 식으로 적용하여 쓴 소설은 사실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김연수의 지적인 소설, 꾿빠이 이상』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 이상의 데스마스크 진본 찾기라는 미션을 수행해나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진본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동일한 결론으로 끝나는 소설 말이다. 어쨌건 이 작품은 한 시대의 지적 유행대표까지 하는 소설인 탓에, ‘유행의 정점을 지나 그에 대한 반성까지 하고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모든 유행상품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뻔 했던 소설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 작품은 오랜 기간 동안 나의 무의식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질문, 도대체 문학이 심리학이나 진화론, 혹은 뇌신경과학과 다른 차원에서, 혹은 이들 학문의 지대한 결과물들을 넘어서서 인간에 대해 더 말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매력적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개인사)의 모호성, 해독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소설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훌륭한 까닭은 작가의 역사(개인사) 이해에 대한 회의라는 주제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결국 우리의 현재의 삶과 문학과 예술의 의미에 대한 보다 진지한 탐색으로 이어지는 탁월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가령,역사(개인사)라는 텍스트 이해는 오직 그 진리성이 가져올 우리 삶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위해서만 중요하다는 커다란 주제는 내가 먼저 접했던 그의 최근작(2011년 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강렬한 울림을 주었던 진리이다. 그러나 플로베르의 앵무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통찰이 담겨져 있다. 문학은 타인과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결코 도달할 수는 없지만 절대 헛되지는 않을 노력을 통해 타인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을 돕는 훌륭한 다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것이 바로 화자이자 주인공인 가 에마 보바리처럼 지속적인 간통을 행하고 자살을 기도했던 아내의 삶을 이해하려 애쓰는 내용이 소설의 보다 중요해 보이는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까닭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유는 물론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플로베르에 관한 사실상의 평전을 쓰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 는 곧바로 아내의 삶의 항로로 뛰어들어 들여다보는 대신, 굳이 플로베르의 앵무새 찾기로, 플로베르의 삶의 궤적 더듬기로 우회한다. 그 종착점은 분명 부정한 아내와의 삶을 지금까지 꾸역꾸역 함께 해온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우회가 필요했을까? 물론 는 어쩌다 플로베르라는 작가의 세계에 빠져든 플로베르의 팬이자 연구가다. 그러나 과연 와 플로베르와의 만남이 우연이었을까? 결국 플로베르의 삶이라는 텍스트와 그가 남긴 소설이라는 또 다른 텍스트는 의 아내라는 텍스트에 대한 훌륭한 보조 텍스트 기능을 한 탓에 하필이면 이 작가에게 끌리게 되었던 것 아닐까?

 

'나'는 최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갖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로도 이어진다.

아마 그것은 기질상의 문제일 것이다. () 어떤 사람들을 실망과 성취를 두려워하여 기권하고 구경한다. 다른 사람들은 뛰어들어 즐기고 위험을 감수하는데, 최악의 경우 그들은 몹쓸 병에 걸릴 것이고 잘해야 도망쳐 나와 평생 콩을 혐오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엘렌을 어느 쪽에서 찾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209-210)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내를 다 이해하지는 못한. 그의 말대로, 책은 일어난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지만 냉혹하게도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므로. 그렇지만 그는 보다 나은 망원경을 사용하기만 한다면 그만큼 더 많은 별들이 나타난다는 믿음을, 그리고 우리가 자존심 때문에 하나의 해답만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타인(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할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을 조용히 읍조린다. 다만,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고, 그저 알 수 있을 뿐이며, “완전한 결합이란 희귀하다는 쓸쓸한 결론을 덧붙이면서.

 

이 소설도 자칫하면, 사랑이란 상대방의 고통에 대해 헤아리고 상상해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 그런 노력을 통해 소통(이해) 비슷한 것에 다가갈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의 고통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뭐 그런 따듯하고 보드라운 얘기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줄리언 반즈의 소설은 끝내 휑하니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빠져나가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남긴다.

 

사실 나는 이런 맛에 소설을 읽는다. 섣부른 위로를 받는 느낌보다는 삶의 비밀에,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 게 어떤 전율을 가져다주니까. 아마도 이런 전율이야말로 소설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일 거다. 이 소설의 도 플로베르가 예술이 도덕성을 고취시킨다거나, 정치적 대의를 위해 봉사한다거나, 혹은 위로를 제공한다는 따위의 주장들에 콧방귀를 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문장 하나는 주인공이 격언 중의 격언이라며 한 다음의 말이다.

 

글쓰기와 관련된 진리는 출판을 하기 전에 틀을 짤 수 있지만, 삶의 진리는 이제 너무 늦어서 아무 효과가 없을 때 겨우 그 틀을 짤 수 있다. (210)

 

슬픈 진실이다. 정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언제나 너무 늦게 등장하는 게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삶을 끝내려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소설 혹은 예술이라는, 우리 삶을 이해하기 위한 보조 텍스트를 간혹 기웃거리면서, 그것을 통해 가끔씩은 살아가는 일의 쓸쓸함이, 고독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받기도 하면서 말이다.

 

모리아크는 말년에 쓴 <회상록>에서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늘어놓고는 타인의 공감을 강요하는 대신, 자신이 읽은 책,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 자신이 본 연극들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작품들을 통해 자신을 발견했던 그는 결국 그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바로 이 소설의 화자처럼 말이다. 멋있지 않은가? 우리의 대화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어쩌면 소통이란 게 가능할 것도 같은 느낌이다. 더 자주, 사람들과 모리아크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삶은 지금보다 아주 조금은 덜 쓸쓸하고 조금은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2013.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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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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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2005년) 이 책은 '생각의 나무'에서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었는데,  최근(2010년) 출판사를 바꾸어 '청미래'에서 다시 개정판으로 출판되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보고 나서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영화에 나온 한 대사 때문이었다. 프루스트를 전공한 학자였으나 대학에서 실직 당하고 동성 애인으로부터 실연까지 당한 채 고향으로 돌아 온 삼촌이, 좌절에 빠진 조카를 위로하는 장면에서 하는 말인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프루스트는 인생의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평생 고통에 찬 삶을 살아왔지만, 고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으므로 자신의 인생이 값진 것이 되었으며, 오히려 행복했던 시간이야말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가장 멍청하게 살았던 시간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니 고통이야말로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보석 같은 것이니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라.’ 그 장면의 내용이 잊히지 않아 예전에 구입해 두고 모셔 놓기만 했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스완네 집 쪽으로 1, 2>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긴 했는데, 그 지루함에 대한 선입견 탓에 선뜻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예전에 읽었던 보통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역시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보통은 프루스트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콕콕 집어 핵심을 요약정리 해놓고 있다. 그것도 무척 재치있게. 보통이 프루스트 전문가도 아닐 뿐만 아니라 설령 전문가라 하더라도 어느 한 사람의 해석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참고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당신이 프루스트의 텍스트를 직접 만나 이 정도의 의미를 잡아낼만한 능력 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보통의 정리를 다시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프루스트는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는 고열을 앓으면서도 죽음이 자신을 덮치는 그 순간까지 책을 쓰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단순히 과거의 흔적을 추적하는 회고담이 아니, “시간의 분해와 상실의 이면에 있는 원인들을 탐색하여 삶을 낭비하지 않고 삶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실천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낫낫이 기억하고 그 의미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프루스트는 소설을 읽는 행위(그리고 다른 모든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는 결국 자기 자신(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을 읽는 행위라는 걸 알려준다. 그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여주인공에게 부여하지 않고서는 소설을 읽을 수 없다고 말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가 읽는 소설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삶과 친밀한 교감을 나누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현실에서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가 된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아마 독자가 자신에게서 결코 경험해 보지 못했을 어떤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이 진실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35-36)

 

책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면(이를 마르키 드 로 현상MLP’이라고 한단다) 좋은 점은 무엇일까? 우선 책 속의 사건이나 인물과 유사한 일을 겪거나 유사한 사람을 만났을 때 당황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어떤 느낌도 자기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게 되며(, 고독감을 해소해주며), 우리가 명확히 서술할 수는 없었으나 우리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느낌들을 콕 집어서 지적해 주는 능력 덕분에 우리의 삶을 이전보다 더 잘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즉 이게 뭐지? 할만한 상황이 줄어들고, , 이게 그거구나, 하고 상황을 이해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프루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약 천재의 새로운 걸작을 읽게 된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멸했던 우리 자신의 성찰들, 우리가 억압했던 기쁨과 슬픔, 우리가 깔보았지만 그 책이 문득 우리에게 그 가치를 가르쳐 주는 감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42)

 

셋째, 프루스트는 여유 있게 사는 법을 알려준다. 작가는 이전에는 우리가 거의 마음에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없는 삶의 측면들에 많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깊이 들여다보고, 연민을 느끼고, 그것을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여 공감을 이끌어내는 존재이다. 잠드는 것을 묘사하는 데 30페이지를 쓴 프루스트야말로 작가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젊은 주부가 가정불화를 이유로 열차 밑으로 몸을 던져 사망.”이란 신문 기사를 단숨에 읽고 넘어간다면 『안나 카레리나』같은 걸작을 통해 받게 되는 것과 같은 감명은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사건을 접할 때 인생의 비극성과 희극성에 대한 귀중한 통찰로 이어지는 공감과 연민을 갖기 위해서는 위대한 작가들처럼 대상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넷째, 프루스트는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을 알려준다. (이 주제는 역시나 이 책의 가장 많은 페이지를 차지한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무척 논리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고 심지어 현자의 글 같았지만, 그 자신은 지독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 살았다. 유태인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와 간섭으로 지극히 의존적인 성격이 되었으며, (어머니와의 지나친 애착 탓에 강화되었을 지도 모를)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꼈으며, 이성으로부터도 종종 퇴자를 맞았으며, 동성애의 대상 역시 냉담함이나 죽음으로 그에게 고통만을 남겼으며, 집필 계획을 세웠던 자신의 희곡에 대해 어느 극장에서도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걸작은 한동안 어느 친구에게서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었었다. 육체적으로도 천식, 만성적 소화불량과 변비, 예민한 피부, 오한, 기침, 치통, 소음에 대해 민감함, 나쁜 시력 등에 시달렸으며, 침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정도로 허약했다. 그는 거의 모든 면에서 극도의 감각적 예민함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그는 정말 고통의 화신, 고통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우리를 향해 하는 말은 우리는 앓는다, 고로 생각한다는 것. 그에 따르면 우리는 문제가 있기 전까지는, 즉 우리가 고통에 빠지고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는 우리는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젊었을 적의 한때, 나중에 회고할 때 너무 불쾌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자신의 기억에서 기꺼이 지워버리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았거나, 그런 삶을 살지 않았던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전적으로 후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모든 어리석고 불건전한 삶을 통해서 궁극적인 단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면 진정 현명한 사람이 되었는지-우리 중 누구라도 현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한에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혜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도 우리 대신 가줄 수 없는 여정을 통해서, 누구도 우리 대신 해줄 수 없는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93-94)     

 

그는 또 말했다. “행복은 몸에 좋다. 그러나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고뇌다라고. 그러니까 만족보다는 불행이, 그리고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읽는 것보다는 고통스러운 연애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으리라. 그리고 고통의 정도가 클수록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사고의 깊이는 더 깊어지리라. 행복할 때는 그저 무지한 채로 남아있으리라.

 

그러나 고통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고통은 그저 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탐구의 가능성을 열어줄 뿐 고통 자체가 그것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더 큰 지혜는 제대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불행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는 데 있다. 보다 많은 경우에, 고통은 더 헛되고 나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고통(콤플렉스)에 대처하는 잘못된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해결책을 생각해 보도록 유도한다. 예컨대 사교계의 최고 귀족가문들의 초청인사 목록에 들지 못해 괴로워하는 베르뒤랭 부인의 경우, 손이 닿지 않는 신포도에 대처하는 여우처럼 좌절된 대상에 대해 무작정 비난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좌절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른 인물들의 경우에도 자신의 실수나 무지나 결점에 대해 보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결함은 극복될 수 있으며 보다 지혜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아야 함을,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섯째, 프루스트는 감정을 표현할 때 진부하거나 허식이 가득한 문장을 사용하지 말고, 보다 상황에 맞는 표현, 좀더 정직하고 정확한 표현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진부하고 허식이 가득한 표현법에 매달리는 것은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방식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프루스트는 집요할 정도로 구체적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 적합한 말을 찾도록 노력했다. 그는 모든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확실성이란 없습니다. 심지어는 문법적인 확실성도 말입니다. … 우리의 선택, 우리의 취향, 우리의 불확실성, 우리의 욕망, 우리의 연약함의 모습이 새겨진 것만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132)

 

우리는 작가는 아닐지라도, 세상을 주체적으로 느끼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흉내나 내는 말을 하면 자신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상투어로는 결코 자신만의 정체성을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 생각의 고유한 성격을 더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관례를 무시해야 한다.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모든 성공적인 예술작품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전에는 왜곡되었거나 무시되었던 현실의 측면들을 우리의 시야에 회복시키는 능력이다. 프루스트의 표현에 따르면,

 

허영, 열정, 모방심리, 추상적인 지성, 습관이 오랫동안 우리의 눈을 가려 왔으며, 예술의 과제란 그것들을 치우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술은 우리를,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숨겨져 있는 깊은 층위에 도달하도록 이끈다. (142)

 

그러니까 삶은 상투적이라기보다는 낯선 실체라는 걸 인정하잔 말이다!

 

여섯째, 프루스트는 자기자신을 지키면서도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을 알려준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아낌 없이 베풀고 아낌없이 칭찬하는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기억되었다. 스스로 대화의 주제를 이끌지 않고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기울여 들어주며 상대의 관심사에서 대화의 소재를 찾아냈으며, 누구도 지루해하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정중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의 이런 태도는 사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는, “친교의 표현 양식인 대화란, 습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피상적인 여담일 뿐이다. 우리는 일 분 일 분의 공허함을 무한정 반복하는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평생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단언하면서, 친교란 본질적이고 소통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유일한 부분을 피상적인 자아를 위해 희생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친교는 우리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려는 거짓말이상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정한 사람이었다는 게 아니다. 어느 정도의 회의주의는 오히려 삶의 불완전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친교에 대한 프루스트의 비관적 태도는, 친구가 우리의 가장 심오한 자아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력자라거나 우리의 관심사와 타인의 관심사가 쉽게 일치할 수 있다는 낙관적 기준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상대에게 보다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상 대화란 게 시간과 공을 들여 계속해서 수정할 수 있는 글쓰기와는 달리 공백도 수정 기회도 없이 쉬지 않고 쏟아내야 하는 특성 탓에, 의사가 상당히 왜곡될 가능성이 높은 불완전한 전달 방식임에 틀림없지 않는가. 또 오로지 이기적으로 자신의 관심사에 충실 하느라 상대를 지루하게 하느니 상대방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게 보다 실용적인 친교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프루스트에게는 친교의 목적이 소통(지적 교류) 보다는 온정과 애착에 있었다. 대부분 자신보다 지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 바랄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게다가, 진지하고 솔직한 태도는 종종 친교에 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타자와의 교류를 위해서는 친교보다는 독서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프루스트는 애정과 진실을 분리함으로써, 충직하고 매력적인 친구이자 정직하고 심오한 사상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대화라는 무계획적이고 두서 없고 피상적인 매체의 처분에 맡기기엔 너무 중요한 주제임을 잊지 말 것, 그러니 친교 시 질문에 답하기 보다는 질문을 하는 입장이 될 것, 친교를 남들을 가르치기 보다는 그들에 대해 배우는 장으로 생각할 것.

 

일곱째, 프루스트는 좋은 삶이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부당하게 무시하고 헛되이 다른 것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가르쳐준다. 그는 화가 샤르댕이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이루는 대상들을 아름답게 볼 수 있도록 복원해 내는 재능에 감탄하면서, 예술가의 역할이 이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해 눈을 뜰 수 있도록, 미처 발견하지 못한 미감을 찾아낼 수 있도록 매개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봄으로써 생길 수 있는 행복은 프루스트의 치유 관념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불만이, 삶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대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의 유년기가 흐릿하고 평범하게 기억되는 까닭은 유년기에 실재로 매혹적인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억들을 잊어버린 탓이다. 한 조각의 마들렌이 불러일으킨 유년기의 풍부하고 친밀한 기억은 그의 유년기가 자신이 기억보다 더욱 아름다운 시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평범했던 것은 그의 삶이 아니라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삶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삶이 매우 아름답게 보이는데도 삶이 사소한 것처럼 생각되는 까닭은, 삶의 흔적 그 자체가 아니라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고 있지 않은 매우 다른 이미지들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는 데 있다. – 때문에 우리는 삶을 멸시하는 것이다. (195-196)

 

우리가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고 믿는 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탓이다. 우리 자신에게 고유한 아름다움은 언제나 삶의 소박하고 세부적인 사소한 모습들(폭신한 벙어리 장갑 한 짝, 가느다란 냄새를 피워 올리는 풀꽃 향기등처럼)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들은 대체로 낡았을 뿐 아니라 쓸데없이 사치스럽다. 프루스트는 수수한 광경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복원하라고 주장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특정 계급이나 집단의 천편일률적인 취향을 연결시켜 이해(확신)하는 조잡한 방식을 넘어서서 그 사람만의 독특한 취향과 특징을 들여다 볼 것을 권한다. 그런 것이 없다면 아무리 그의 직함이 화려하다 해도 그는 자신만의 미학이 없는 지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역으로 말한다면, 누구든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에 있어서 진부한 계급적 교양에 기대지 말고 보다 섬세하게 개발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스스로 평가할 능력이 없는 속물 예술 애호가가 자신의 느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의 교양을 입증하려는 무교양적 행태를 벌이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알고 있다면 말이다.

 

여덟째, 프루스트는 행복한 사랑을 하는 법을 알려준다. 비법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간은 친숙한 것을 경멸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다. 인간은 영구적으로 보이는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반대로, 무언가 박탈 당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사랑에 있어 밀땅의 법칙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진리인가 보다. 프루스트도 이렇게 말한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저항하고, 즉시 소유할 수 없으며, 앞으로 소유할 수 있을지조차 처음에는 알 수 없는 여성들만이 유일하게 흥미를 끄는 사람들이다.” 프루스트에게는, 오늘 밤 시간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창녀는 제 아무리 매력적이라 할 지라도 사랑의 감정을 자극할 수는 없다. 슬픈 창녀의 딜레마’. 여성들이여, 그리고 남성들이여, 행복한 사랑을 하려거든 때때로 오늘 밤 시간이 없어요라고 말할 준비를 하라. 그리고 가끔씩 질투심을 자극하라. 습관은 사랑의 가장 큰 적이며 불확실성이야말로 사랑의 최음제이므로!

 

아홉째, 프루스트는 책을 치워버려야 하는 순간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대가가 느꼈던 것을 자신 속에 다시 그려 보려고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때문에 독서를 해야 한다. 그러나 설사 우리를 돕는 것이 다른 작가의 생각일지라도, 결국 우리가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이다. 책들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감수성을 키워주고 지각능력을 길러주지만, 어떤 시점에 다다르면 그러기를 멈춘다. 이것은 그 저자가 우리가 아니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대가들은 우리의 상황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커다란 자극은 주지만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독서의 역할이 안내원역할에 있는 것이지 해결사역할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

 

우리 속 깊은 곳에 있지만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알지 못했던 집의 문을 마법의 열쇠로 열어주는 한, 우리의 삶에서 독서의 역할은 유익한 것이다. 반면에 독서가 정신에 자신만의 삶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해진다. 그러면 진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사고의 본질적인 진보 및 우리의 진실한 노력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이상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몸과 마음이 완벽히 평온한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맛을 보면 되는,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246-247)

 

작가는 신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깊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디 예술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자. 예술가가 포착한 아름다움은 대상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자신만의 이유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고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에 내재한 일반적인 교훈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자. 일리에 콩브레에 가서 마들렌을 먹어본다고 해서 프루스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 말로 예술 우상숭배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하는 것일 터.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콩브레를 방문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일 거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야말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내린 나의 소박한 결론:

1.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고 많은 지혜를 주는 중요한 작가임에 틀림없구나. 꼭 읽어봐야겠다.

2.     보통은 글을 참 재치 있고 재미있게 잘 쓴다.

3.    책만 들여다보지 말고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기울이고, 주말에는 하이킹을 가자. 오늘을 소중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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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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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이야기는 진실은 기억의 주체혹은 역사적 해석 의도에 따라 완전히 그 실체가 달라진다는 포스트모던한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진실의 모호성기억의 불완전함이나 왜곡 가능성을 경고하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이 소설을 반만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주인공 토니는 결국 자신의 잘못된 기억을 정정하고 진실의 실체와 대면하는 순간을 맞기 때문이다. 무려 40여년 전의 애인이었던 베로니카가 자신 몫이라며 넘겨준 얼마간의 유산과 역시 40여년전에 이미 죽은 친구 에이드리언의 일기 한 페이지메리라 불리우는 베로니카와의 몇차례의 간단한 이메일 교환과 두 차례의 짧은 만남이런 작은 퍼즐 조각으로 토니는 진실에 다다른다물론 진실은 언제나 끔찍한 얼굴을 하고 있다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진실의 추함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다찌질한 평균치 인생을 살아온 토니가 더 이상 찌질한 인간이기를 멈추고 성숙한 인간으로 탈바꿈 하게 되는 계기는 바로 그가 이 진실 찾기를 멈추지 않았다는데그리고 그 진실을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냉정하게 성찰하는 일과 연계시키는 의미화 작업을 행했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 전체의 주제는 사실 -대부분의 좋은 장편들이 그렇듯소설의 앞부분에 모두 복선으로 나와있다역사 선생과 학생들간에 주고받은 역사에 대한 생각들이 괜히 삽입된 게 아닐 것이므로난데없이 시작된 진실 찾기 게임을 통해역사가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만 생각했던 미숙한 토니는 자신의 자기기만적 기억을 마주하면서 결국 역사가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조 헌트 선생의 정정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을 것이다그러나 토니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건 역설적으로 역사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토니에게는 명징한 정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말하면서 친구 롭슨의 자살의 실체적 진실을 알기 힘들다는 것을 예로 들며진실을 안다는 것(역사 이해)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그러나 조 헌트 선생이 에이드리언을 향해 제기한 반론은 의미심장하다선생은 롭슨 자신의 증언이 없다 해도 검시관의 보고서일기나 편지전화 기록주변인 인터뷰 등을 통해 진실에 근접할 수 있으며당사자 본인의 설명에 의존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며행위를 통해 행위자의 정신상태가 추론될 수 있으므로역사와 역사가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바로 이런 일들이 토니가 나중에 실행하게 되는 작업들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억은 경험이 주관적 해석을 거쳐 입력된 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분류수정되는 역동적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으며나아가 왜곡이야말로 기억의 본질이라는 사실에 오늘날의 뇌신경과학자들은 대부분 동의한다그런데 문학의 역할이 고작 이 뻔한 신경과학적 사실을 확인하는 일에 있겠는가사실 기억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우리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를 하는 건 오로지 현재의 욕구와 관심사 때문이라는 데서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다토니의 기억이 패배감과 수치감이라는 자신의 해석과정과이 경험을 없었던 것으로 부정하고픈 이후의 욕구 때문에 왜곡되어 저장되었던 것처럼 말이다그러면 과연 이 왜곡된 기억의 객관적 진실을 되찾는 일즉 다시 기억하기기억 수정하기를 통해 토니가 찾게 되는 삶의 진실은 무엇인가문학이 답하는 건 바로 이 부분일 거다.

 

또다시 작가가 앞부분에 깔아준 복선으로 돌아온다면 이해가 훨씬 명확해질 것이다장면은 영어 수업시간필 딕슨 선생은 “’탄생성교그리고 죽음.’ 이것이 T. S. 엘리엇이 말한 인생의 총체이지.”라고 말한 후이름 모를 시를 한 편 들려주고는 학생들에게 감상을 묻는다학생들 가운데 가장 진지하고 똑똑했던 에이드리언은 이 시가 에로스와 타나토스에 관한 이야기라고 답한다. “죽음의 원칙과 충돌하는 에로스의 원칙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에 대한 이야기라고당시에는 누구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에이드리언은 타나토스에 굴복하고 만 듯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그렇다면 토니의 삶은 어땠을까과연 에로스가 충만한 삶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버전의 타나토스에 붙들린 삶이었을까?

 

나름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토니 앞에 베로니카라는 까다로운 수수께끼가 다시 떨어졌다수수께끼를 받아 들기 이전의 토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젊은 날의 그는 사랑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상대의 진심을 저울질하고취향에 대한계급적 차이에 대한 열등감으로 상대의 사소한 언행도 모욕으로 받아들이며질투심으로 인한 적의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소심하고 좁은 마음의 소유자다그러니까 과거의 그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건들은 그런 그의 태도가 낳은 해석들을 거친 기억의 산물인 것이다그는 노년이 된 지금까지도 철저하게 자기보존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온 인물이다다시 말해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그는 오로지 점수를 잘 받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고감정을 유예하고적당히 책임지지 않을 연애만 했다이후에도 겉으로는 이혼한 아내와 친분을 유지하고 결혼 한 딸과도 가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동네 병원 도서 관리직으로 자원봉사도 하면서 적당한 만족감을 유지하지만그 어떤 관계나 일에서도 진정성은 부족하고 그러니 당연히 외로운 삶을 산다그런 가운데기억의 목록에서 지워버리려고 할 만큼 토니에게 수치를 안겨준 옛 애인 베로니카라는 불편한 과거가 모습을 드러내자 위기감에 사로잡힌 토니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불청객과 집요한 한판 퍼즐게임을 벌이게 된다.

 

그 시작 단계부터 토니는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에이드리언이 남긴 편지의 말미가 만약 토니가로 끝나버리자 토니는 그 뒤에 올 말들을 여러가지로 상상해 보는 부분은 무척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토니가 더 분명하게 바라보고더 단호히 행동하고더 진실한 윤리적 가치를 고수했다면그가 애초엔 행복이라고그리고 나중엔 만족이라고 칭했던 수동적인 평화 상태에 그처럼 쉽게 안주하지 않았다면만약 토니가 두려워하지 않았다면스스로를 허락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서 허락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면 등등그렇게 가설에 가설을 거듭하면 마지막 가설에 이르게 된다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만약 토니가 토니가 아니었다면. (154)

 

후반부에 토니는 세 차례에 걸쳐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데첫 번째 진실을 발견한 후에는 이런 절절한 회한의 감정에 시달린다.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했고인생이 내게 던져주는 얼마 되지도 않는 교훈에 대해 크게 깨달을 깜냥도 못 되었다내 식으로 말하면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마냥 이렇다면 이렇게그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그래서 난생처음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젊은 시절 알게 된 친구를 잃었다즐겼던 야망을 저버렸다인생이 너무 성가시지 않기를 바랐고 성공을 거두었다이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평균치학교를 떠난 후 나란 인간은 줄곧 그랬다대학에서직장에서 평균치우정과 성실과 사랑에서 평균치섹스에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평균치였다…. 평균치란 말이 메아리 쳐 울려 퍼졌다평균치 인생평균치 진실평균치 윤리관. (173-174)

 

이 대목에서 정말 뜨끔했다속 좁고 상종하기도 싫었던 천하의 찌질이 토니와 내가 다를 바 뭐란 말인가과연 나는 언제 한 번이라도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다운 대결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소설의 초반에서도 에이드리언은 역사를 인식함에 있어서 어느 한 개인이나 구조나 카오스적 본질에 떠맡기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개개인의 책임소재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데책임에 관한 생각은 그의 짧은 일기에서도 반복된다첫 번째 진실의 전기충격을 받은 토니 역시 책임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게 되는데결론은 에이드리언의 것과 비슷하다.

 

나는 그 범위를 좁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미안하지만우리는 세상을 뜬 부모도형제자매도외동 신세도우리의 유전자도사회도그 어떤 것도 원망할 수 없다정상적인 환경에 있다면 안 될 일이다그와 정반대인 상황을 강력히 입증할 만한 것이 없다면자신의 인생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개념부터 챙겨라(181)

 

어쩌면 토니는 우리보다 운이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죽음이 모든 것을 무화시키기 전에 자신의 삶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에.

 

노년에 이르면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182-183)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붕괴하는” 순간을 겪어야만 한다. “그 새로운 것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 해도.”(183그러면 기억의 붕괴지나온 삶의 붕괴를 체험한 토니는 이제 타협과 부박함으로 점철된 인생”(239항로를 벗어날 수 있을까쉽지는 않을 것이다깨달았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토니는 베로니카로부터 계속해서 아직도 감을 못 잡는다고 질책을 받고수제 감자칩이 두꺼운 감자칩이라는 속뜻을 못 알아차리고 글자 그대로 손으로 만든 감자칩인 줄 알고 펍 주인에게 따지고 들어 상대를 황당하게 만든다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게 마련인 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상처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를 향해 기꺼이 마음을 열어두는 용기가 없다면 세상은 온통 이해불가의 모호한 모순덩어리로 다가올 뿐일 것이다그런 용기를 뒤로 하고 두려움 때문에 자기보존욕구에만 충실하게 산다면그러니까 나뿐인 놈”(=나뿐놈)이라면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도삶의 구원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그런데 이해를 하게 되면 두려움도 사라진다.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학문의 의미가 아니라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145)        

 

마침내 베로니카의 진실-그 일면이라 할 수 있겠지만-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 토니는 베로니카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 아프게 공감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이들을 이전과는 달라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다비로소 타인과의 진정한 교감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토니의 라는 것도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처럼그는 살인자도 아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일부러 곤경에 빠뜨리는 싸이코패스도 아니다그저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보통의 수동적인 인간에 가깝지 않은가그러니까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잤다는 끔찍한 진실을 뒤늦게 알게 된 오이디푸스처럼 제 눈을 찌를 필요까지는 없을지 모른다그런데도 바로 그 수동적 삶의 태도가 얼마나 비윤리적인 것인지를 이토록 강력하게 설득하는 소설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책을 덮고 나서 나는 서둘러 줄리언 반즈의 다른 책들을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201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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