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하루키 - 하루키의 인생 하루키의 문학
히라노 요시노부 지음, 조주희 옮김 / 아르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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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에 대한 평전을 출간하는 일이 종종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의 본문을 읽기 전부터 나는 내심 저자의 용기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인 히라노 요시노부 스스로도 서문에 밝히고 있는 바대로, 이 평전은 하루키 자신이 수많은 잡지와의 인터뷰, 에세이, 강연 등에서 직접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무척 조심스레 쓰여 졌다. 사실 애초부터 하루키에 대한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얻을 것이라거나, 색다른 관점으로 심도 있게 꿰뚫는 하루키의 문학세계 따위를 접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키에 대한 팬심 하나로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웬걸, 의외로 이 책은 나를 작가 하루키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동안 나도 하루키 작품의 애독자로서 적지 않은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을 둘러싼 모험상실의 시대, 어둠의 저편, 해변의 카프카, 스푸트니크의 여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Q84.... 아마도 단일 작가의 작품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것 같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적지 않게 출간된 그의 에세이도 꾸준히 읽어왔기 때문에 나는 하루키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독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히라노 요시노부의 성실한 자료 조사와 문학 연구자로서의 내공 덕분에, 그동안 내가 몰랐던 몇 가지 주변적인 사실을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팬들에게는 작가에 대한 사소한 정보도 소중하다!), 하루키 문학을 관통하는 주제의 변화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다.

 

그동안 마치 작가가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베일에 가려져있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아님 혹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 아무튼 미시마 유키오처럼 아버지가 승려였다!), 1Q84에 자주 언급되는 아쿠타가와 상에 대한 그의 심상치 않은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엔도 슈사쿠나 오에 켄자부로와 같은 대가들이 각종 문학상 심사위원으로서 하루키의 작품을 평한 심사평 내용 등은 꽤 흥미로웠다.

 

사회 참여적 태도라 할 수 있는 커미트먼트로 이행하기 전 그의 문학이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디태치먼트였던 것도 하루키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세대 전체의 흐름이었다는 저자의 통찰도 재미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제 세대 전체가 보다 사회 참여적이 되었단 말일까? 몇 십 년 늦게 일본의 뒤를 밟아나가고 있는 우리나라는 어쩌면 아직도 국가나 사회적 관습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열심히 디태치먼트중인 지도 모른다. ‘개인으로서 독립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훈련... 확실히 그런 훈련은 좀 더 필요하다.(우리에겐 계몽이 더 필요해요!) 물론 그 개인이 단순한 상품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서.

 

하루키 소설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에 대한 하루키 자신의 명쾌한 설명도 재미있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완전히 도망칠 수 없는 문제, 어디까지고 쫓아오는 자아의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인 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완전히 도망칠 수 없는 그림자 같은 것, 그것이 바로 양입니다. (74)

 

하루키에게 자아의 그림자란 대체 뭘까? 그게 그에겐 왜 그토록 중요할까...? 그의 책들을 모조리 다시 읽어보고 싶다. 처음으로 평단의 전적인 칭찬을 받아낸 작품이라는 태엽감는 새 연대기』 3부작과 함께. 


그가 많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루살렘 상을 수상할 때 했던 유명한(일부에서는 비아냥거리가 되었던) ‘벽과 계란연설의 한 부분은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개인의 혼이 가진 존엄함을 드러내어 거기에 빛을 더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의 혼이 시스템에 끌려 들어가 멸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거기에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쓰고,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사람을 겁주고 울고 웃게 만듦으로써 개개인의 영혼이 가진 소중함을 밝히려고 계속해서 시도하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매일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153)

 

책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분량을 채운 뒷부분의 하루키 작품 줄거리 모음을 보고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앞부분 내용의 성실함을 감안해서 그냥 너그러이 보아 넘기기로 했다

 

2013. 04.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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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랑클 -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다
안나 S. 레드샌드 지음, 황의방 옮김 / 두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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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의 수용소>를 읽은 이들에게는 빅터 프랑클의 사생활에 관한 약간의 추가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죽음의 수용소> 내용의 반복, 요약으로 채워져있다. 일종의 청소년을 위한 인생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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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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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으로 장장 17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나서 톨스토이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던 차에, 때마침 새 옷을 입고 분권되어 출간된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을 구입했다. 평전이란 걸 처음 접해보는 나로서는 츠바이크의 수려한 미문에 우선 깜짝 놀랐다. 한 인간이 행한 일들과 살아온 방식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 형식의 정보를 기대했던 나에게, 한 인간의 정신에 대한 관조적 성찰에 가까운 츠바이크의 글은 평전의 매력을 제대로 알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이 평전을 읽고 나서 이제 나는 살아있던 당시부터 성인이중인격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던 톨스토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전적으로 츠바이크의 높은 수준의 균형 잡힌 통찰력 덕분이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정신세계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 성과보다도 예술과 종교, 사회사상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과 모순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게 내게는 무엇보다도 큰 소득이었다. 그리고 이 뜻밖의 지적 수확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츠바이크는 세상과 인간에 대해 너무도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찰력과 심미안을 지녔던 예술가 톨스토이가 국가, 교회, 사유재산, 불평등에 반대하는 혁명적 사회사상을 적극적으로 설파하는 톨스토이로, 나아가 말년에는 외적 투쟁이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을 통한 개인의 영적 완성을 목표로 삼으면서 예술과 문화의 폐지까지 주장하는 극단적인 종교적 금욕주의자가 되기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결코 단순히 나열하는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톨스토이라는 한 인간의 내면이 시대적 흐름이라는 외적 환경에 반응하면서 갈등하고 변화하는 내적 투쟁의 모습을 때로는 날카롭고 냉정하게, 때로는 따듯한 연민의 시선으로 잡아내어 그의 실체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치열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가장 진실한 예술가이자 고귀하고 전형적인 윤리학자, 위대하고 성자에 가까운 인간임에 틀림없지만, 이론적 사상가로서는 어리석고 수치스런 도박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보따리 속에다 영원히 건전한 세계를 몽당 갈무리하기 위해서 무모한 마술사의 재주를 선보인다. 그는 모든 문제들이 트럼프처럼 손쉽게 다루어지도록 단순화한다. 일단 인간을 쉬운 본보기로 들어서 선과 악, , 관능, 동포애, 신앙 따위로 배열한다. 이어서 그 트럼프들을 섞어놓고 으뜸패로 사랑을 뽑아내면 도박에 이기는 것이다. 세계의 순간 속에서 수백만 인류가 추구해 온 영원히 해결 불가능한 전 세계적 유희가 야스나야 폴랴나의 서재에서 간단히 해결된다. (163-164)

 

평생을 귀족과 지주의 신분으로 살면서 젊은 시절에는 도박, , 여자에 빠져 살았고, 가정을 꾸린 이후에는 무려 열 세 명의 자녀를 두면서 타고난 천재성으로 마음껏 예술적 생산 활동을 하면서 온갖 명예와 추종자를 거느려온 예술가가 말년에는 이 넘치는 향락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극단적인 금욕주의자가 되어 성자로 생을 마감하려는 마지막 허영의 유혹에 저항하기 힘들었으리라는 평가에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톨스토이 스스로도 그런 자기 허영에 저항하려는 몸부림을 일기뿐만 아니라 말년에 몰래 쓴 작품에도 남겨놓았으니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모든 지식과 예술과 정치마저 부정하는 종교적 삶이라니, 톨스토이 같은 지성인이 왜 그런 몽매주의에 가까운 중세적 성자 코스프레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던 나는 오히려 자기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연민과 공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피나는 자기극복의 노력으로도 예술에 대한 열정도, 가족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으로 인한 재산 소유욕도, 아내에 대한 혐오감도 완전히 버릴 수 없었고, 이로써 그는 자신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관념적 선언이 얼마나 공허한 이상주의인지를 스스로 입증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계급, 가족, 예술적 본능을 정신력 하나로 폐기, 극복하고 영적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자신의 단호한 주장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움을 확인하며 거듭 절망했던 노예술가의 고통에 찬 내면의 절규에서 나는 오히려 그의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톨스토이를 성자로 자리매김하여 그를 무작정 우러러 보게 만들려는 후대인들의 노력을 통해서보다, 오히려 츠바이크의 지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톨스토이라는 한 인간의 영혼이 내게는 더 친근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츠바이크의 도스토옙스키와 니체 평전도 내쳐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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