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3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의 논리대로 성경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꿈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듣게 된다면 누구라도 아브라함처럼 제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는 잔인한 일도 서슴지 말아야 할 것이며,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확신한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 짓이라는 비웃음을 받는다 해도 전 세계의 동물들을 한 쌍씩 태울 수 있는 거대한 배를 만드는 일에 당장 착수해야 할 것이다. 대를 잇기 위해 아버지와 자는 일도 망설이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을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고 확신한다면 이웃 민족의 갓난아기까지 씨를 말리는 학살 행위도 정당하다고 강변할 수 있을 것이다. 새우나 가재 같은 갑각류를 먹기라도 한다면 동성애자들과 함께 기꺼이 처벌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레위기의 기나긴 금지사항 목록을 보면 오늘날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벌을 받지 않고 살아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구약에서 말하는 온갖 에피소드들과 율법 사항들에 관해 글자 그대로 믿으려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수처럼 살기위해 우리 모두가 집도 가족도 버리고 평생을 부랑자로 떠돌아 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귀신을 쫒는다며 남의 가축 2천 마리를 물에 빠져 죽게 만들어 놓고도 어떤 보상도 하지 않고 유유히 제 갈 길을 간다거나, 어떤 현대의학도 무시하고 기도와 믿음으로 병자를 치유한다며 중증 환자를 제 맘대로 다루는 사람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하며, 우리 모두 당장 대형 교회로 달려 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외치며 헌금함을 뒤집어엎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무턱대고 상식과 법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서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거나 자신이 예수처럼 신의 아들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대신 예수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지,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을 지에 대해 곰곰이 숙고해볼 것이다.


저자 게리 윌스는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메시지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온 미국의 대표적 지성으로, 그 대표적 결과물이 바로 이 책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이다. 역자의 소개에 다르면, 또 다른 저서(<게티즈 버그 연설, 272단어의 비밀>)로 퓰리처 상까지 받은 바 있는 저자는 문화역사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한 때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할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한다. 게다가 위의 두 책은 현재 미국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신앙서적 목록에 있다고 하니 이 책의 무게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과연 저자가 생각하는 예수가 한 말과 행동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는 싱거울 정도로 단순하고 명백한 만고불변의 진리임에 틀림없지만, 게리 윌스가 보기에 성서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부인하기 힘든 보편적인 진리 선언에 반드시 수식어가 한 가지 덧붙여져야 한다. “급진적으로”라는. 


예수는 결코 ‘좋은 남자의 표본’으로 살지 않았다. 지금까지 교회가 덧씌워온 ‘유순하고 온화하며 고결한 예수’라는 이미지는 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실재 모습이 아니다. 예수는 누더기를 걸치고 돌아다니며 사회적으로 경멸의 대상이 되는 창녀, 장애인, 병자, 죄인들과 격식 없이 어울렸으며, 불경스럽고 거친 독설가로 살았다. 예수가 일으킨 온갖 초자연적 이적들은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온갖 층위의 계급적 차별과 종교적 율법주의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예수는 첫째와 꼴찌,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지도자와 대중, 건강한 자와 병자 등으로 나누어 차별하는 행위와, 인간을 완고한 형식의 틀에 얽매이게 하는 일이 인간과 인간이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결코 타락한 사회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거나 속세를 초월하는 시늉을 한 적이 없다. 대신, 온갖 차별과 율법과 권력체계로부터 해방될때만이 참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메시지를 목숨을 걸고 전달하고자 애쓴 급진적 행동가였으며, 바로 그 때문에 율법주의(형식주의)를 내세우는 교회와, 제국주의 정치 권력자의 공모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예수가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는 과정은 예수의 소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한다. 인간이 빵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으며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유혹을 버리고 하나님 아래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일, 그리고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의 위험함을 깨닫도록 가르치는 일 말이다. 광야에서의 정신적 단련을 통해 예수는 빵(물질)과 세속적 권력, 오만함 등을 통한 모든 종류의 ‘값싼 구원’을 단호히 거부하고 이를 넘어서는 깊이를 획득하게 되며, 이로써 장차 사람들을 이끌 방향을 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가져온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말해 그것은 하나님 나라다. 예수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것으로 선포했으며, 그 나라는 지금도 역동적인 진행 과정에 있다. 게리 윌스가 보기에, 예수는 자신의 실재와 하나님 나라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는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선물을 건네받은 첫 번째 대상은 광야의 수행자들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었으며, 그들을 모이게 한 행동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정화’의 이적을 통해서였다. 예수는 당시의 온갖 사회적 장벽들과 금기들을 파괴하는 행동들을 통해 사람들을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 가치 있는 자와 가치 없는 자, 존경받는 자와 존경받지 못하는 자로 나누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차별과 배제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과는 반대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각별하게 관심을 쏟을 오늘날의 로마 백부장, 튀루스의 여인, 사마리아의 나병환자인 부정한 자, 또는 아웃사이더는 어떤 사람들이겠는가? 저자는 예수라면 나치 하의 유대인들과 지금의 동성애자들과 함께 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예수는 외적인 정결과 순결을 조롱하는 언행을 결코 멈추지 않았으며, 내면의 빛(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사랑)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가 동성애자들과 같은 사회적 아웃사이더들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하나님 나라에 근접하려면 이 ‘부정한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뿐만 아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끊임없이 부자와 권력자, 착취자를 통렬하게 비난한다. 예수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는 계급과 권력이 없는 나라다. 그런데 교회는 모든 극단주의를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 립서비스 만을 제공한다. 저자가 보기에 이는 그들이 예수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정신적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자만과 겉치레, 위선에 대한 예수의 꾸짖음은 어떤가. 중세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교회가 이에 대해 떳떳할 수 있을까?


예수는 또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했다. 하나님 나라는 평화로운 곳이다. 저자는 예수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라’고 말함으로써 로마의 탄압에 맞서는 일체의 정치적 저항을 포기했다는 점을 들어 예수가 반정치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프로그램은 “체계적인 반정치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국가 폭력이나 패권적 정치에 반대한 부분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일체의 저항적 정치에 대해서도 반대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계급이나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것도 정치적 행위임에 분명한데 저자는 정치 개념을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가령 부시의 아프간이나 이라크 침공처럼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에 대해 예수라면 어떤 말을 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이는 오로지 예수의 사랑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가 우리에게 준 계명을 지킴으로써만 예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다. 그 계명이란?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는 이같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기 위한 대가로 자기희생을 택했다. 저자에 따르면, 예수의 죽음 역시 신의 사랑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예수의 피는 결코 분노한 아버지에게 바치는 희생이 아니다. 예수의 자기희생은 죄악을 정복하기 위해 인류를 대신해서 치른 특별한 희생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분노가 아닌 사랑의 증거라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몸은 부활을 통해 영적인 몸으로 거듭났으며, 부활은 지금도 이 땅의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우주적인 언어로 우리들 사이를 이끄는 성령을 통해 예수가 우리들 ‘사이’에 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핵심 메시지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쉽게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자면 보는 관점에 따라 성서를 이해하는 방식과 내용이 뚜렷이 갈린다. 저자 게리 윌스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그는 성서에 대한 보수주의적 독해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이며 급진주의자로서의 예수의 면모를 제시하는데 집중하지만, 예수세미나와 같은 극단적인 ‘역사적 예수’ 위주의 성서 해석과도 분명한 선을 긋는다. 저자가 보기에, “얼핏 보기에 기묘하거나 위험하거나 초자연적인 것들은 모두 의심스럽다는 제퍼슨 식 가정”에 동의하는 로버트 펑크를 비롯한 예수세미나 팀의 입장은 성서의 내용을 문자적 측면으로만 파악하는 새로운 근본주의라는 것이다. 성서에 대한 이런 독해는 성서를 지나치게 빈약하게 만드는 자의적인 해석으로, 진정한 급진주의자 예수를 순하게 길들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한 것이다. 저자는 예수에게서 믿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뺀 채 “‘역사 속에 존재하는 예수’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퇴비 더미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태평양 바다에서 뉴욕 시를 찾아내려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믿음, 이적들과 부활을 통해 그것을 입증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는 마커스 보그와 같은 민중신학자들의 관점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으로 보인다. 


저자가 쓴 쌍둥이 책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와, 보수주의적  입장을 대변하는 톰 라이트와 진보적 입장을 대변하는 마커스 보그의 논쟁으로 구성된 책인 <예수의 의미>를 함께 읽는다면 저자 게리 윌스를 다른 스펙트럼의 신학자들과 구별짓는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2. 0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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