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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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전 손택은 진정한 미국의 양심이자 세계의 양심이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한 손택의 날카로운 지적들은 정치세계나 미디어뿐만 아니라 나처럼 평범한 개인들까지도 세계시민으로서의 지위와 의무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손택에 따르면, 인간이란 존재는 고통 받고 있는 타인의 육체를 담은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하는 사악한 존재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만 보아도 이는 명백히 입증된다. 끔찍한 교통사고 현장을 ‘구경거리’로 생각하는 자신을 생각해보라.)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찍은 전쟁사진이나 부당한 권력이 신체에 가하는 폭력을 담은 사진(혹은 그림)들조차도 카메라의 혹은 화가의 의도와 취사선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는 수동적 존재다. 그토록 남의 나라의 비극을 담은 박물관 짓기를 좋아하는 오지랖 넓은 미국에 흑인들의 노예사를 담은 박물관 하나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떠올리지도 못하는 것처럼.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찍힌 육체들은 늘 구경거리로, 수동적으로 보이기만을 당하는 (수치심이라고는 없는) 사물과도 같은 역할을 해왔으며, 그 시선의 주체는 언제나 백인들이었다. (이런 사실을 손택이 지적해 주지 않았다면 나 또한 백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벌거벗은 채 굶주리고 있는 비쩍 마른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시선의 폭력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사진이 순간적인 연민과 고통의 감정을 자극하지만 그 사진 속의 대상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서사가 빠진 이미지 자체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에는 많은 슬픔과 고통이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식의 무력감만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종류의 무력감이 사람들을 냉소적이고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연민이라는 감정 역시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탓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까지도 증명해 주는 샘이기 때문에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더 이상 연민만을 베푸는 일을 그치는 게 우리의 진짜 과제다. 정치적 차원의 이성적 사고와 행위로 연결되지 않는 순간적 연민 따위의 자극이란 쓸모없는 감정의 소비일 따름이다. ☞[정치적 행동주의자로서의 수잔 손택의 면모가 드러나는 이와 같은 비판은 거대 미디어나 사진기자들(또는 작가들)의 양심보다도 오히려 이들의 그림을 소비하는 나 같은 개인의 양심에 더욱 날카롭게 꽂힌다.]

모든 사람들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방관하도록 뉴스를 스펙터클로 만드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미국의(나아가 서양의) 저널리즘을 비판하면서도 이미지가 곧 현실이라는 극단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 이미지가 현실이라면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이미지를 구경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현실로 겪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기록되고 알려지고 이해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문제는 고통을 전하는 일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방식에 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바라보아야 한다. 더 이상 연민이란 감정을 소비하지 말고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덜어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들을 지옥에서 어떻게 구출할 것인지,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것인지를 말이다.

결론적으로 분노와 고통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억하기’ 자체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지 말고,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색하기’가 중요하다. 사색의 시작은 이런 것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진정한 공감의 순간이란 어쩌면 바로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사족: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연수의 단편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 마지막에 들어있는 “작가의 말”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오는데, 손택의 이 책을 읽고 공감한 끝에 쓴 게 아닐까 싶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에 대한 관점이 닮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집에 들어있는 단편 <달로 간 코미디언>에는 작중 인물을 통해 수전 손택이란 이름이 직접 언급되는 장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소통에 대한, 사랑에 대한,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참으로 명쾌한 통찰이다. 김연수와 손택의 결론에 깊이 공감하면서, 세계시민으로서의 내가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 대해 작게나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무겁게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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