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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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한 번쯤 일탈을 꿈꾸어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아버지, 어머니, 자식, 형제라는 이름의, 가족이라는 이름의 이 든든한 울타리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토대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단단히 얽어 매는 사슬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자명한 진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상상하는 일이 때로는 지리멸렬해 보이는 일상을 달리 보이게 해줄 수도 있다. 필립 로스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종말의 한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엄정하고 엄숙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세상에는 이 소설의 주인공의 형 하위처럼 온갖 재능과 행운과 인품을 다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인공이 수술 대기 중 만난 한 환자처럼 모든 부모와 형제가 연달아 죽고 아내마저 떠나 보내는 아픔에서 겨우 헤어나자마자 심각한 질병에 걸린 불운한 사람, 이유 없이 찾아온 온갖 불행을 그저 견뎌내야만 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세상이 이토록 부조리한 것이라는 사실은 왠만큼 살아 본 사람이면 다 아는 얘기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이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건가?


           사실, 소설의 내용 자체는 너무나 평범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람둥이의 일대기쯤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힘을 지니게 되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부한 방식으로 타락한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한 보통 인간의 말로를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섬뜩한 공감을 이끌어 내는 방식 말이다. 주인공은 세 번의 결혼을 하고 첫 번째와 두 번째 결혼에서 각각 아들 둘과 딸을 얻었다. 첫 결혼은 아들이 단단한 생활인이 되기를 원한 아버지 때문에 한 결혼이었으므로 주인공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고, 영혼의 동반자와도 같은 피비와의 두 번째 결혼은 성적 에로티시즘에 대한 갈망으로 뇌가 없는 모델과의 관계 때문에 파탄이 났다. 주인공이 늙고 병들자 세 번째 아내는 무능력한 모습으로 주인공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해 이 결혼마저 끝이 난다. 끝까지 자신을 증오하는 두 아들과는 달리 아버지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관대한 딸 낸시와 자상한 형이 어느 정도 도움과 위안을 주지만, 그 마지막 관계의 끈 마저도 스스로 거부하는 지경에 이른 주인공은 병마와 함께 비참한 고독을 맞게 된다. 자신으로 인해 상처 입은 아들들로부터 끝끝내 이해 받지 못한 것을 못내 억울해 하기만 했던 주인공은 여러 차례의 수술과 그 과정에서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절대적인 고독을 겪게 되면서 육체적, 정신적 극한의 상황에 이르게 되자 마침내 처절한 회환에 휩싸여 몸부림친다.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자책에 박자를 맞추어 쳤다. 심장제세동기를 불과 몇 센티미터 차이로 빗나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어디가 부족한지 랜디나 로니보다 훨씬 잘 알 수 있었다. 보통 냉정하던 이 사람은 마치 기도하는 광신자처럼 사납게 자기 가슴을 쳤다. 이 실수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실수, 모든 뿌리 깊고, 멍청하고, 피할 수 없는 실수들로 인한 가책에 시달리다-자신의 비참한 한계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면서도, 마치 삶의 모든 파악할 수 없는 우연을 스스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심지어 하위도 없어! 이렇게, 심지어 하위도 없이 끝이 나다니!”(164-165)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목이었다. 삶은 끝없이 계속되는 게 아니므로, 우리는 한 번밖에 살 수 없으므로, 우리가 살면서 저지르는 실수들은 결코 지워지는 게 아니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죽음이라는 종말이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살아간다는 건 말할 수 없이 엄정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까지나 열여덟 살”(175)일 수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하며, 이 준엄한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다는 것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이 미술을 가르치는 클래스에서 영감 운운하는 학생에게 주인공은 어느 예술가의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86) 번역자 정영목이 옮긴이의 말에서 지적한 대로 작가의 예술관을 대변하는 말일 것 같은 이 말은, 삶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 평생을(무려 41년을!) ‘에브리맨 보석상에 바친 아버지, 34년째 묘지 파는 일만을 해온 남자, “할 일은 해야 한다가 자신의 확고한 철학인 무덤 파는 남자의 부인, 타인에 대한 신뢰와 헌신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딸 낸시는 모두 이런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빛나는 순간은 어쩌면 찰나와도 같은 매혹에 굴복하는 순간이 아니라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하루하루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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