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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갑자기 프랑스 소설에 관심이 가서 발자크부터 시작해 보았다. 그는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며 무려 137편의 소설로 구성된 『인간 희극』을 야심차게 집필했는데, 『고리오 영감』은 그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라고 한다. ‘리얼리즘’의 선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인물이나 배경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리만큼 섬세하고 날카롭다.
“가난에 쪼들린 나머지 가장 끔찍한 고통 앞에서도 냉정할 수 있는” 하숙집 주인과 하숙인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열정적으로 사업을 하여 많은 돈을 벌지만, 두 딸에 대한 끔찍한 사랑으로 거액의 지참금과 함께 두 딸을 각기 귀족과 성공한 사업가와 결혼 시키지만, 이들에게 평생에 걸쳐 모은 모든 돈을 내어주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궁핍함과 고독을 끌어안고 비참하게 살아가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는 몰락한 부르주아 고리오 영감, 허영과 사치로 똘똘 뭉쳐 마지막까지도 아버지와 주위 사람들을 이용하고 배반을 일삼는 구제불능의 이기적인 두 딸, 이들 간의 관계를 지켜보며 자신의 양심을 되돌아보기도 하지만, 출세에 대한 목마름으로 끊임없이 상류귀족사회(사교계)를 기웃거리는 가난한 법대생 라스티냐크(그의 사회적 처지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적 갈등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를 연상시켰다. 말미의 <작품 해설>을 읽어보니 도스토예프스키는 발자크의 사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캐릭터에서도 힌트를 얻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현자처럼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꿰뚫어보며, 강자의 이익에 복무하는 법률을 조롱하여 의식적 악행을 일삼고 라스티냐크를 악의 세계로 유혹하는 ‘불사조’ 보트랭....
이런 인물군의 배치는 부르주아 계급 사회가 막 형성되고 있을 당시에는 나름 신선하고 날카로운 세태 발굴로 주목 받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미 수많은 멜로드라마 구조의 전형이 되었다. 이런 인물들 간의 갈등은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 주부들에게 가장 사랑받아온 주말 드라마의 단골 내용이기도 하지 않은가! 발자크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200여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 전혀 어색함이 없다는 사실, 아니 마치 지금의 우리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 같아 책을 읽는 내내 수치심마저 들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고 슬프기까지 하다. 출세주의, 황금만능주의가 수그러들기는커녕 갈수록 더욱더 맹위를 부리고 배반과 후안무치가 난무하고 있는 현실이니 말이다.
문학 비평의 신과도 같은 존재인 헤럴드 블룸은 보트랭이라는 인물의 매력 때문에 이 소설에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한국에는 이미 홍길동이 있고 서구에도 로빈훗이라는 인물이 변주되어온 지 오랜데, 보트랭이 이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블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보트랭의 문학적 계보는 고딕 양식이라기보다 고양된 낭만주의에 가깝다. 그는 바이런적인 영웅-악당이지만 생존자다. 바이런의 작품에서는 어느 누구도 마흔에 도달한 사람이 없지만, 범죄 세게의 보트랭은 ‘불사신’이다. 보트랭은 탐구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경멸하는 사회와 교전 중이다... 보트랭은 실제도 무정부주의자이지만 전체 범죄계를 전적으로 체계화하여 이를 오만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보트랭은 시칠리아인이 아니라 파리지앵이었다. 그래서 그의 악마적 자부심은 가족적이 아니라 개인적이다. 그 추진력의 동기는 동성애적이지만 발자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젊고 잘생긴 제자들에 대한 갈망이 주로 성적인 것과 연관되었는지 아니면 가부장적 태도를 표방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보트랭은 젊은 제자들이 여성과 사랑에 빠져 관계를 맺을 때에만 성적인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세계문학의 천재들』, 809쪽, 강조 표시는 필자의 것임.)
그러니까 보트랭은 19세기를 풍미했던 낭만주의적 영웅의 전조였던 것이다. 사회의 규범이나 법률은 무시를 넘어 조롱하고, 자기 자신의 판단과 감성만을 절대시하며, 강자의 오만을 체화한 무정부주의자라는 또 하나의 전형 말이다. 홍길동과 로빈훗의 감성이 권력자에 대한 분노와 사회적 약자 집단에 대한 연민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19세기 영웅들의 감성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약자에 대한 연민 보다는 부조리한 사회를 향해 그 사회를 통째로 거부하고 전복할 수 있는 개별적 인간의 힘, 인간 의지의 크기와 강도, 즉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는 게 더 큰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다른 낭만주의 영웅과는 달리 보트랭은 ‘불사신’으로 오랫동안 살아남기까지 한다. 어딘가 <다크 나이트>의 조커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하고... 어쨌든, 이런 ‘오만한 천재’ 캐릭터를 사랑하는 헤럴드 블룸의 유치한 선민사상과 마초적 악취가 갑자기 훅, 하고 내 코를 건드리는 바람에,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진실에 대한 발자크의 신랄하고 사실적인 묘사에 대한 감탄에 저릿저릿했던 내 두뇌와 가슴이 황급히 냉정을 되찾고 말았다.
블룸에 따르면, 발자크의 후속작품들 속에서 보트랭은 “하계의 악마에서 파리 경찰조직의 신적 존재로 단계적으로 변모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발자크 자신처럼 “합법주의자, 왕당파, 그리고 과두정치의 수호자”가 된다고. 그러니까 조커가 베트맨이 된다는 급 싱거워지는 얘기다.
그런데 더 맥 빠지게 만드는 얘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머싯 몸에 따르면(『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 발자크에게는 청년 라스티냐크처럼 명성과 부에 대한 야심이 평생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천재적 재능은 있었지만 지나친 허영과 낭비벽으로 평생을 빚더미 위에서 살았으며, 이를 해결하기위해 돈 많은 여성들을 결혼 대상으로 삼아 끈질긴 구애를 반복하는 파렴치하고 저열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역시 작품에 대한 감상은 그 작품만을 읽고 끝내야 좋은 건가... 정신분열도 아니고, 작품 속에서 그토록 혐오스럽게 묘사했던 인물들의 행태를 자신이 반복하고 살았다니, 인간의 위선이란 그 끝이 어딘가 싶다. 아님 두뇌라는 불변의 자본을 지닌 ‘천재’의 도덕성은 보통 인간의 도덕성보다 더 약해지기 쉬운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역시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과 욕망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더욱 생생하게 전달된다는 아이러니의 또다른 예를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게츠비』라는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자기 자신이 지닌 욕망 덕분이었듯 말이다. 하여간 문학이 인간을 구원해준다는 명제가 언제나 옳은 건 아닌 것 같다는 슬픈 결론.
2013. 0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