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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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갖는 인간 심리의 복잡성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꿰뚫는 대가의 시선을 따라 인물들의 내면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재미! 긴 이야기지만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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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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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윤리적 의구심을 뒤로하고, 만만치 않은 분량의 이 소설을 끝까지 완전히 몰입해서 읽었다. 내가 특별히 문학적 감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작품 자체의 흡입력이 정말 대단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에 이어 『롤리타』를 읽게  되면서, 실로 절절한 사랑에 관한 소설 3종세트를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독서가 이어지게 된 까닭은 문학동네 광고에 엮인 탓도 있을 것이고, 비슷한 주제의 완전히 서로 다른 작품들을 비교하면서 음미해보는 재미를 맛보고 싶은 마음도 내게 있었던 때문인거 같다. 어쨌든. 세 작품 모두 주인공이 절대적인 대상에 대한 갈망과 집착으로 서서히 자기파괴에 이르게 되는 처연한 내용이지만, 내 안을 가장 요동치게 만들었던 소설은 롤리타다. 단연 롤리타의 압승이다! 


주인공이 상대를 완전히 주관적으로 대상화하여 전유한다는 측면에서는 세 작품이 모두 같은데, 어째서 이 소설은 이토록 읽는 내내 가슴을 아리게 만들고, 책을 덥고난지 한참이 지나도록 이 비극적인 아름다움에 넋 놓고 할 말을 잃게 만드는걸까...? 그건 확실히 언어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역량 덕분일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책을 덮고 난 후에도 롤리타와 험버트의 고통이 내 살갖을 파고들어, 한동안 다른 책을 집어들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험버트와 롤리타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언어라는게, 문장이라는게 예술의 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그 어떤 시보다도 더욱 확실히 알게해준 나보코프에게 경의를 바친다.


상대의 삶을 파괴하면서, 그 사실을 결코 모르지 않으면서도 철저하게 자기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만들어낸 '사랑'이라는 이름의 틀 안에 갇혀버리고만 험버트는 탐닉적 사랑의 자폐적 속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다. 탐닉이 단순한 에로티시즘을 넘어서서 예술적 숭고함의 경지에까지 다다른 사랑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문득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가 떠올랐다. 하나의 미적 대상에 대한 무시무시한 집착과 끈질긴 소유욕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로 인해 완벽하게 배제당한 대상 그 자체의 무심함에 의해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소유할 수 없는 이상향으로 남기에, 끝내 파국적 결말을 맞을 수 밖에 없었던 또다른 이야기 말이다. 험버트의 미적 향유의 대상은 인간이고, 험버트는 그 대상을 육체적으로도 향유하지만, 그 대상을 결코 소유할 수는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대상은 결국 그 자신의 판타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건 뭐 모든 낭만적 사랑이 공유하고 있는 널리 알려진 진실 아니겠는가. 

 

그런데, 비록 지금 나도 정서적 공감이라는 예술적 쾌락을 맛본 '공범'이 되기 했지만, 그래서 언어 예술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지만, 우리가 조금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인간의 관습법의 한계가 아니라, 예술의 의미에 관한 질문 말이다. 예컨대, 미적 향유의 대상으로 전유당한 대상이 난데없이 맞닥드린 어마어마한 폭력의 문제에 눈감는 예술도 가치가 있을까? 하는 것과 같은 질문. 그 모든 예술적 희생양 가운데서도 가장 가여운 우리 롤리타... 그녀가 철저하게 파괴당한 유년기의 기억을 끌어안은 채 평생을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다. (그래서 나보코프가 그녀를 일찍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기에, 나로서는 이 폭력적이기 짝이없는 예술지상주의(극단적 탐미주의)에는 끝내 동의할 수가 없다. (종교를 비롯한 다른 모든 근본주의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나의 이중성이 어쩌면 예술작품을 즐기는 많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를 설명해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실재의 삶과 소설이 서로를 모방하면서도 어느 지점에 가서는 서로 달라지는 이유, 달라야 하는 이유 말이다. 


아, 언어유희가 많아 까다로웠을 번역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거론되거나 암시된 문학텍스트들을 세심하게 찾아 각주를 달고 섬세하게 말의 뉘앙스를 살리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은 번역자 김진준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싶다. (역자 약력을 읽어보니 이 분은 내게 살만 루슈디라는 또다른 언어의 대가를 만나게 해준 분이다!) 까다로운 말장난이 가득한 외국어로 쓰인 책에 독자로하여금 이토록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니 과연 빛나는 번역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2013.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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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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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금지는 욕망을 북돋우고, 중단을 모르는 감정의 자기증식의 끝에는 자기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요즘에도 이런 식의 몰입식 사랑을 하는 젊은이가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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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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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상대를 찾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중류계층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해주는 소설이다. 뭐 이 점에 있어서는 전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도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고전 가운데 이만큼 추상적인 철학이나 당대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 소설도 없을 것이다. 내게는 아직 문학의 역할에 대한 논쟁에 한 편을 들 정도의 내공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일단 이에 대한 판단은 접어두고라도,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토록 사적인 세계에만 배타적으로 천착하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현대의 칙릿소설이나 텔레비전 주말드라마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이 작품이 이들 현대 드라마의 원본(즉 오리지날)이라는 점일 것이다. 적어도 이 작품만큼은 원본과 복사본의 지위가 위계적일 수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장에 굳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원본의 화려한 향기가 살아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비롯된 이른바 칙릿소설들의 교과서로 사용된 텍스트이니만큼 애초부터 뭔가 원조만이 가지고 있는 다채로움을 맛볼 수 있을 거란 기대 반, 시대적 한계와 진부함에 실망할 수도 있다는 각오 반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결론적으로 제인 오스틴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과연 제인 오스틴은 인간의 위선이나 어리석음에 대한 냉소적 풍자에 있어 지존이라고나 할까. 어떤 인물을 묘사하려 할 때 그녀에겐 긴말이 필요 없다.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몇 문장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충분히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보아왔던 인물들을 겹쳐놓고 낄낄거리거나 때로는 자신의 폐부를 간파당한 것 같아 움찔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재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뭐 우리에겐 은희경도 있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흥미롭다. 그런데 다른 인물들에 비해 가장 나의 관심을 끈 인물들은 선하고 아름다운 제인도, 지혜롭고 똑똑한 편견장이 엘리자베스도 아니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이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찬사를 늘어놓고 그의 비위를 맞추는 일을 자신의 모든 행동의 기준으로 삼으면서도,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이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경멸감을 표출하며, 극단적으로 형식적이기만 한 예의범절과 경제적 안위를 최상의 목표로 삼고 지나칠 정도로 성실하게 규격화된 삶을 살아가는, 단순하다 못해 우둔해서 코믹하기 짝이 없는 자폐적 모습을 보여주는 콜린스 씨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재미가 덜했을까? 그는 상류층 끄트머리에 위치하면서 자녀의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 욕구에 불타오르는 베넷 부인과 완벽한 짝을 이룬다

 

순간의 실수로, 오로지 사치와 허영에 들떠 살아가는 뇌가 없는 아내를 평생 감내하는 대신 독서와 산책으로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고 있는 베넷 씨에 대해서는 나는 진심으로 연민을 느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젊고 아름다운 데다 마음씨도 착해 보이는-젊고 아름다우면 마음씨도 착해 보이게 마련이니- 한 여인에게 반해 결혼하게 되었는데, 막상 결혼해 보니 머리도 나쁘고 마음도 꼭 막혀 있는지라 그녀에 대한 애정은 결혼 초기에 진작 끝나버렸다. 존경, 존중, 신뢰는 영원히 사라졌고, 가정의 행복에 대한 그의 생각들도 모두 깨져버렸다. 그러나 베넷 씨는 누구 탓도 아닌 자신의 경솔함으로 초래된 실망을 보상하기 위해서, 어리석거나 나쁜 짓을 한 결과 불행해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찾는 도락 따위에 빠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전원과 책을 사랑했다. 그리고 주로 이런 취미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자기 아내에게서 덕을 본 것이라고는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그의 즐거움에 기여했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남편이 아내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의 행복은 아니지만, 달리 즐길만한 거리가 없는 처지라면 주어진 여건에서 얻을 것을 얻는 것이 진정한 현자일 것이다. (328-329)

 

이런 구절을 정말 스물한 살에(이 작품은 애초에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완성되었으나 십오 년 후에나 지금처럼 제목이 바뀌어 출판되었다고 한다.) 썼을까? 아님 서른여섯쯤에 개작을 하면서 추가한 부분일까? 후자라면 수긍이 가고, 전자라면 작가가 정말 조숙한 천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재벌쯤 되는 부를 상속받은 높은 신분의 상속인, 재벌 2이지만 자신과 장래의 며느리를 간섭할 부모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체격이 건장하고 남자답게 생겼으며 과묵하고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배려가 많은 반면 약간의 거만함만을 약점으로 가지고 있는 다아시 씨는 엘리자베스를 만나 거만함마저도 내려놓으면서 만인의 연인으로 등극했다. 온갖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특히 많은 소녀들이 즐겨 보는 하이틴 로맨스에서 앞을 다투어 여성들의 로망으로 설정될 이 이상적인 배우자감이 바로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제인 오스틴 자신의 욕망이 좀 지나치게 솔직하게 표현된 게 아닐까 싶어 잠시 민망한 미소를 짓게 된다.... 하지만, 오스틴 자신의 첫사랑이 상대 집안의 반대로 깨져버리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게 된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는 눈감아 주고 싶다. , 고전이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다 완벽한 건 아니라는 걸 늘 잊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과 도망가는 무분별함을 거리낌 없이 실천하는 막내 리디아나, 불운하게 타고난 외모로 인해 현학적 지식에 집착하나 현실적인 지혜와는 거리가 먼 셋째 메리(세상에, 여성의 외모와 지성의 상관관계가 이 때부터...?!), 그리고 콜린스가 지루하고 매력 없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면서도 교육은 잘 받았지만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게는 결혼만이 가장 확실하고 좋은 가난 예방책임을 알기에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으로 (어쩌면 비장한 마음으로) 콜린스를 선택한 샬럿에게도 작가가 좀 더 애정 어린 관심을 가져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당시에는 똑똑하지만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 처녀가 샬럿과 같은 선택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인 오스틴처럼 조카들을 돌보면서 형제에게 의지해서 살거나 남의 가정교사로 입주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니 말이다.) 물론 한 권의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동일한 비중을 부여하긴 힘들 것이다.


그런데 엘리자베스처럼 성격이 활달하고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사교적인 인물이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고 과묵한 상대에 대해 오만하다든지 반대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는 얼마나 흔한지! 자신의 판단력과 선함을 절대화하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그런 사람의 작지만 적극적으로 행해진 실수가 타인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불행을 야기할 수 있는지...! 이런 것을 잡아낼 줄 아는 제인 오스틴의 성격은 어떤 쪽에 가까웠을지 궁금해진다. 제인 오스틴에 관한 영화 <비커밍 제인>을 봐야겠다. 작가의 실재 모습과 얼마나 가깝게 그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책장을 덮으며, 이 천재적인 작가가 일찍 죽지만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다채로운 인물상을 발굴해 냈을까 싶어 새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다섯 자매특히 리디아메리와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이 이후에 어떻게 살아갔을 지 궁금증을 풀어주었을 것도 같다. 인물 탐구에 있어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그야말로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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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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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프랑스 소설에 관심이 가서 발자크부터 시작해 보았다. 그는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며 무려 137편의 소설로 구성된 인간 희극을 야심차게 집필했는데, 고리오 영감은 그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라고 한다. ‘리얼리즘의 선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인물이나 배경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리만큼 섬세하고 날카롭다.

 

가난에 쪼들린 나머지 가장 끔찍한 고통 앞에서도 냉정할 수 있는하숙집 주인과 하숙인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열정적으로 사업을 하여 많은 돈을 벌지만, 두 딸에 대한 끔찍한 사랑으로 거액의 지참금과 함께 두 딸을 각기 귀족과 성공한 사업가와 결혼 시키지만, 이들에게 평생에 걸쳐 모은 모든 돈을 내어주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궁핍함과 고독을 끌어안고 비참하게 살아가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는 몰락한 부르주아 고리오 영감, 허영과 사치로 똘똘 뭉쳐 마지막까지도 아버지와 주위 사람들을 이용하고 배반을 일삼는 구제불능의 이기적인 두 딸, 이들 간의 관계를 지켜보며 자신의 양심을 되돌아보기도 하지만, 출세에 대한 목마름으로 끊임없이 상류귀족사회(사교계)를 기웃거리는 가난한 법대생 라스티냐크(그의 사회적 처지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적 갈등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를 연상시켰다. 말미의 <작품 해설>을 읽어보니 도스토예프스키는 발자크의 사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캐릭터에서도 힌트를 얻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현자처럼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꿰뚫어보며, 강자의 이익에 복무하는 법률을 조롱하여 의식적 악행을 일삼고 라스티냐크를 악의 세계로 유혹하는 불사조보트랭....

 

이런 인물군의 배치는 부르주아 계급 사회가 막 형성되고 있을 당시에는 나름 신선하고 날카로운 세태 발굴로 주목 받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미 수많은 멜로드라마 구조의 전형이 되었다. 이런 인물들 간의 갈등은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 주부들에게 가장 사랑받아온 주말 드라마의 단골 내용이기도 하지 않은가! 발자크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200여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 전혀 어색함이 없다는 사실, 아니 마치 지금의 우리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 같아 책을 읽는 내내 수치심마저 들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고 슬프기까지 하다. 출세주의, 황금만능주의가 수그러들기는커녕 갈수록 더욱더 맹위를 부리고 배반과 후안무치가 난무하고 있는 현실이니 말이다.

 

문학 비평의 신과도 같은 존재인 헤럴드 블룸은 보트랭이라는 인물의 매력 때문에 이 소설에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한국에는 이미 홍길동이 있고 서구에도 로빈훗이라는 인물이 변주되어온 지 오랜데, 보트랭이 이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블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보트랭의 문학적 계보는 고딕 양식이라기보다 고양된 낭만주의에 가깝다. 그는 바이런적인 영웅-악당이지만 생존자다. 바이런의 작품에서는 어느 누구도 마흔에 도달한 사람이 없지만, 범죄 세게의 보트랭은 불사신이다. 보트랭은 탐구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경멸하는 사회와 교전 중이다... 보트랭은 실제도 무정부주의자이지만 전체 범죄계를 전적으로 체계화하여 이를 오만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보트랭은 시칠리아인이 아니라 파리지앵이었다. 그래서 그의 악마적 자부심은 가족적이 아니라 개인적이다. 그 추진력의 동기는 동성애적이지만 발자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젊고 잘생긴 제자들에 대한 갈망이 주로 성적인 것과 연관되었는지 아니면 가부장적 태도를 표방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보트랭은 젊은 제자들이 여성과 사랑에 빠져 관계를 맺을 때에만 성적인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세계문학의 천재들, 809강조 표시는 필자의 것임.)

 

그러니까 보트랭은 19세기를 풍미했던 낭만주의적 영웅의 전조였던 것이다. 사회의 규범이나 법률은 무시를 넘어 조롱하고, 자기 자신의 판단과 감성만을 절대시하며, 강자의 오만을 체화한 무정부주의자라는 또 하나의 전형 말이다. 홍길동과 로빈훗의 감성이 권력자에 대한 분노와 사회적 약자 집단에 대한 연민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19세기 영웅들의 감성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약자에 대한 연민 보다는 부조리한 사회를 향해 그 사회를 통째로 거부하고 전복할 수 있는 개별적 인간의 힘, 인간 의지의 크기와 강도, 즉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는 게 더 큰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다른 낭만주의 영웅과는 달리 보트랭은 불사신으로 오랫동안 살아남기까지 한다. 어딘가 <다크 나이트>의 조커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하고... 어쨌든, 이런 오만한 천재캐릭터를 사랑하는 헤럴드 블룸의 유치한 선민사상과 마초적 악취가 갑자기 훅, 하고 내 코를 건드리는 바람에,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진실에 대한 발자크의 신랄하고 사실적인 묘사에 대한 감탄에 저릿저릿했던 내 두뇌와 가슴이 황급히 냉정을 되찾고 말았다.

 

블룸에 따르면, 발자크의 후속작품들 속에서 보트랭은 하계의 악마에서 파리 경찰조직의 신적 존재로 단계적으로 변모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발자크 자신처럼 합법주의자, 왕당파, 그리고 과두정치의 수호자가 된다고. 그러니까 조커가 베트맨이 된다는 급 싱거워지는 얘기다.

 

그런데 더 맥 빠지게 만드는 얘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머싯 몸에 따르면(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 발자크에게는 청년 라스티냐크처럼 명성과 부에 대한 야심이 평생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천재적 재능은 있었지만 지나친 허영과 낭비벽으로 평생을 빚더미 위에서 살았으며, 이를 해결하기위해 돈 많은 여성들을 결혼 대상으로 삼아 끈질긴 구애를 반복하는 파렴치하고 저열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역시 작품에 대한 감상은 그 작품만을 읽고 끝내야 좋은 건가... 정신분열도 아니고, 작품 속에서 그토록 혐오스럽게 묘사했던 인물들의 행태를 자신이 반복하고 살았다니, 인간의 위선이란 그 끝이 어딘가 싶다. 아님 두뇌라는 불변의 자본을 지닌 천재의 도덕성은 보통 인간의 도덕성보다 더 약해지기 쉬운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역시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과 욕망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더욱 생생하게 전달된다는 아이러니의 또다른 예를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게츠비』라는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자기 자신이 지닌 욕망 덕분이었듯 말이다. 하여간 문학이 인간을 구원해준다는 명제가 언제나 옳은 건 아닌 것 같다는 슬픈 결론.

 

2013.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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