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 소설
- 일리아스(호메로스, 아우쿠스테 레히너 편): 그리스 판 구약성서. 질투, 배신, 오만, 분노, 복수, 전쟁, 전쟁, 전쟁..... 그로부터 2천 7백여 년 후... 과연 인간은 조금이라도 성숙해진걸까...? 이제 천병희 선생의 원본 번역판 읽어야지
- 투쟁영역의 확장(미셸 우엘벡): 소립자의 서론격. 투쟁영역의 확장이라는 자유지상주의 현대사회의 절대명령을 거부하는 인간들이 도달하는 곳은 결국 고독과 절망의 막다른 골목...?
- 사과는 잘해요(이기호): 죄의본성에 관한 고찰인지, 주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건지, 판옵티콘적 감시사회의 수동적 본질을 지닌 주체에 관한 비판인지... 주제의식이 명확하지 않고 갈팡질팡하는 듯한 느낌. 일단 나는 주체성을 회복하려면 스스로의 욕망을 되찾아야 한다(자신만의 사랑의 대상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에 주목한다.
-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이기호): 소설의 의미에 관한 고찰이 담겨있는 자전적 소설들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웃기다가 진지하다가... 재미있긴 한데 패부를 찌르는 뭔가는 약간 부족하다.
-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 인물에 대한 풍자적 묘사 기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고전이 달리 고전이 아닌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엘리자베스라는 주인공 케릭터가 너무 매력적이고 사랑스럽지 않냐고 언니에게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를 편애하지만, 나는 엘리자베스 같은 성격의 소유자와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저 단정적 어투라니...!
- 마더나이트(커트 보네거트): 홀로코스트 같은 비극적 사건을 들여다보는데도 익살이 효과적일 수 있다니! 자신의 죄를 잘 알고 있는 가해자의 자학적 유머는 아무리 도가 심해도 불쾌하지 않다는 게 핵심인 듯.
-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커트 보네거트): 잘 모르는 인물들에 대한 풍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따라 웃을 수가 없다. 그저 뭐지? 하고 어리둥절해하다가 각주를 보고는 아~ 하고 잠시 이해하는 척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사물들 (조르주 페렉): 소비주의에 잠식당해가는 현대인의 삶을 군더더기 없이 강렬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몽유병자나 다름없었다.”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게는 정수리를 내리치는 책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정말이지 청년들의 필독서로 지정해야 한다. 한 젊은이가 사회 질서에 편입되어가는 모습을 어쩜 이렇게 짧으면서도 구체적이고 선명하고 예리하게 묘사해낼 수 있을까! 애잔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 단순한 열정(아니 에르노): 문학적 ‘퇴행’이라며 평론가들 사이에서 말들이 많았다지만, 그 나이에, 그 지성에, 그렇게 단순한 열정을 가질 수 있다니...., ‘성숙’이건 지성이건 아님 단순한 경험의 축적이건 간에 관계의 본질을 알만한 나이의 작가가 정말 그렇게까지 사랑에 맹목적이 될 수 있을까? 이 사랑 이야기가 어떤 연극적인 ‘놀이’가 아니라 진지한 것이었다면 부럽기만 하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확실히 알겠다. 매혹, 사랑의 열정, 그건 최고의 사치임에 분명하다. 다른 건 댈게 아니지!
* 비소설
- 마흔의 서재(장석주): ‘서른’에 관한 책들은 많은데 왜 ‘마흔’이 주제인 책은 없는 거야, 하고 투덜거리자마자 이 무시당해 온 세대에 관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는 데 대해 어리둥절해하며 고른 책. 작가의 소설 창작에 관한 책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주문한 책. 그런데... 자연주의 노장철학과 독서의 즐거움에 대한 동어 반복이 다라니....! 독서의 경력이 별로 많지 않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쓰는 글이란 걸 너무 의식한 탓일까? 5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는 명석하고 지적인 애서가의 날카롭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들려주는 달관한 인생관 같은걸 기대했었는데... 약간 실망이다.
- 피로사회(한병철): 신자유주의 사회의 자기착취 메커니즘을 명쾌하게 밝혀준다. 그럼 우리가 진짜 주체적으로 사는 길은...?
-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작년에 재밌게 읽은 책을 이번에 전혀 다른 각도로 다시 읽게 되어 이번 달 독서 목록에 포함시켰다. 복잡한 철학 이론을 전유하는 방식으로 페미니즘 사상을 세련되게 다듬는 일보다는 당장 구타나 강간 같은 직접적인 폭력이나 포르노그래피의 상징적 폭력성, 매매춘 과정에서 터무니없이 불공정하고 폭력적인 대우를 받는 현실을 개선하는 일이 더욱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해준 책이다. 또한, 공동육아 시설을 늘리는 등 출산과 양육이라는 여성의 가장 큰 부담을 사회적으로 나누고 덜어주는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일도 더없이 중요하겠고.
- 몸에 갇힌 사람들-불안과 강박을 치유하는 몸의 심리학(수지 오바크): 몸의 증상은 단지 마음의 상태만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몸 스스로의 욕구와 불만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신호일 수도 있다는 도전적인 시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몸을 외적으로만 판단하는 환경에서는 몸을 통제하려는 무한히 실패를 거듭하는 시도들(성형, 헬스...)로 이어지고 우리는 결국 스스로에 대해 언제나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말에도. 우리의 자연스런 몸을 인정하고, 긍정하고, 받아들이자!
- 우리 그리고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것들(하베르너 지퍼):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반박하기위해 최신 뇌과학 이론을 두루 섭렵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동물에도 이타적 본성이 조금씩은 발현되며, 인간이 다른 영장류 동물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직립보행도, 털이 없는 것도 아닌, 사회성, 즉 남을 위하는 이타적 본능이 크게 작동하도록 진화되었다는 점이라고 한다. 인간의 신체에서 뇌가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동물에 비해 현저히 높은 것도 먹이를 확보하기 위한 계산 능력이 아니라 사회성 발달 때문이란다.
그런데 거울뉴런세포의 존재가 전혀 입증된 게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다. 이렇게 미처 검증되지도 않은 사실들이 성급하고 공공연하게 회자되었던 건 최근 공감 윤리가 대세로 떠오른 탓이었을 것이다. 내게 가장 재미있는 건 공정함이 회손될 경우 인간 뇌의 공감기능은 즉시 작동을 중지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타인에 대해서까지 이타심을 발휘하는 인간은 드물다는 말이겟지. 공감보다 중요한 공정함...!! 인간의 뇌란 게 뭔가 굉장히 공정한 것같은 느낌이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