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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아프가 본 세상 1
존 어빙 지음, 안정효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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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이 품절된지 오랜데 아직도 재간이 안되고 있네요.... 넘 읽고싶어요. 책 더 찍어주세요, 출판사 관계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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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스
돈 드릴로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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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무려 두 박스의 책이 배달되었다.

내가 한국서 부친 책들이 6주가 지난 지금에야 도착한 것이다. 얼마나 반가운지!

음식이 잘 차려진 고급 부폐 앞에서 뭘 먼저 골라 접시에 담아야 할 지 몰라 초조해지기까지 하는 딱 그 심정으로, 박스에서 꺼내 주루룩 쌓아둔 책더미 가운데 가장 먼저 골라 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서울에 머무는 여름동안 보았던 몇 편의 영화 가운데,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 난해한 영화였기 때문에 돈 드릴로의 원작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고 있었던 터였으므로...

 

데이빗 크로넨버그라는 명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해도 이 경우 역시 영화가 원작을 넘어서지 못하는 전형적인 경우였다. (크로넨버그 감독, 지못미...)

나는 이런 종류의 책에 익숙하지는 않다. 누아르적이면서도 무지하게 철학적이며 동시에 유치하지 않은 비극적인 비장미가 있는 소설. 세련의 어떤 극치를 맛보는 느낌.

읽고 있는 내내 조금도 지루할 틈 없이(영화와는 달리... ㅜㅜ) 흥분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단지 이런 류의 소설을 처음 접한 사람으로서 느끼게 되는 신선한 충격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내용의 만만치 않은 깊이가 내 뇌의 깊은 곳을 자극한 탓도 있다고 강변하고 싶다. 

자본주의의 꼭대기에 있는 이들은 과연 어떤 생각들을 하며 살지, 그 파멸은 어떤 모양을 하게될지 궁금하다면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지금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과 자본은 거의 한 몸인것 같다. 심지어 철학까지도 전유한 자본의 모습. 섬뜩하다. 수학과 경제학 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사회과학, 기술과학, 의학, 종교까지도... 그 모든 것이 대자본가에 의해 채택되고 향유되고 사용되기를 기다린다....

이 정도면 거의 묵시론적 상황 아닌가. 대체 이 세계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걸까. 자본에 의해 포섭당하지 않고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있기나 할 걸까...? 우리 개개인은 과연 이 거대한 시장 시스템의 쓰나미를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혹은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자본의 변방에도 가보지 못한 주변인으로 하여금 이런 거대한 세계의 흐름 같은 것도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해 주는 책이라니, 소설의 힘은 바로 이런 데 있는게 아닐까.

아무튼, 이런 책은 문학의 역사는 아직 다하지 않은게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까지 해준다.

돈 드릴로,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 밖에...!

 

자 보라. 불길에 휩싸인 남자.(...) 킨스키는 틀렸다. 시장은 총체적인 것이 아니다. 시장은 이 남자를 포함할 수 없었고, 그의 행동을 흡수할 수 없었다. 이런 견고함과 공포는 흡수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시장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140-141쪽)

 

주인공 에릭의 파멸은 바로 이런 자기의심, 회의에서 이미 내정되어 있는 게 아닐까?

 

"저건 도용이야."

"저 사람은 가솔린을 뒤집어쓰고 성냥으로 불을 붙인 거야."

"전부 베트남 승려들이 했던 거야. 계속해서 했던 거, 가부좌 자세로."

"고통을 상상해 봐. 그걸 느껴보라고."

"영생을 위해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거지."

"뭔가를 말하기 위해.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별로 독창적일 게 없다고." 그녀가 말했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려면 불교도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인가? 저 사람은 진지하게 생각해서 한 거야. 목숨을 끊었잖아. 바로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진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141)

 

"난 지금 무엇이 중요한지 안다고."

(...) "지금 중요한 게 뭐지?"

"내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깨닫는 것. 타인의 상황,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 간단하게 말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아는 것. 나는 당신이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그건 이미 진실이 아냐. 오늘 오전에는 진실이었어. 그러나 그땐 진실이었던 것도 지금은 아무것도 진실이 아니야." (166)

 

자신의 고통에만 집착하는 시인 아내 앨리스의 냉소주의와 대립되는 에릭의 인상적인 말들.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려는 의지에서 그의 현실적 파멸과 그로 인한 구원 가능성까지 읽어낸다면 내가 너무 나가고 있는 걸까?

 

뒤틀린 방에서 남자가 나에게 소식을 전했어

차가운 진실의 한 조각 같이 느껴졌지

나의 슬픈 영혼은 입에서 튀어나와

금니는 뿌리까지 찢어져버렸어

 

나를 예전의 나로 있게 해줘

운을 달 수 없는 바보

길을 잃었지만 살아 있어 (188)

 

옆과 뒤는 절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지난 시절로 되돌아 가고싶어도,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하나의 세계를 배반한 댓가로 받게될 파멸이 코앞에서 시퍼런 칼날을 내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머리를 자르러 작은 이발소로 간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이발사 앤소니의 이야기,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들으러. 중단 없는 전진을 휘몰아대는 시장의 지휘관으로서 끊임없는 변화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질주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에릭에게 따듯한 위안을 주는 이 대목, 좋다.

물론 현재의 삶을 송두리채 부정당할 지도 모를 인생 '재점검' 시간만큼은 어떻게든 유예하고 싶을테지만...   

나는 과거 일을 뒤돌아보는 걸 싫어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느 날의 일, 어느 주의 일 혹은 인생 전체를 재점검하다니. 으깨서 내용물을 짜내. 내장을 제거해. 힘이라는 것은 기억이 동반되지 않을 때 가장 잘 작용하는 거야. (...) 힘이란 것은 아무것도 구별하지 않을 때 가장 잘 작용해. (246-7)

 

기억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악마가 되지 않도록 해 주는 제어장치란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에릭이 자신의 고환이 비대칭이란 것에 집착하는 일, 이발사 앤소니가 머리를 깎을 때 좌우 대칭을 중시하는 것, 그러나 에릭이 머리를 한 쪽만 자른 채 이발소를 떠나는 일, 그리고 암살자 베노의 균형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한쪽으로 치우친 것, 조금 비뚤어진 것의 중요성 말이야. 너는 균형만 찾았지. 아름다운 균형을. 등변에 좌우대칭. 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 나는 너를 알고 있어. 너는 일본 엔의 변동을 그것이 경련을 일으키고 변덕을 부리는 흐름 속에서 추적했어야만 하지. 작은 변덕. 형태가 기묘한 것."

"구성이 이상한 것."

"바로 거기에 답이 있는 거야. 네 몸에, 전립선에." (266-7)

 

비대칭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뭔가 기묘한 것, 질서를 벗어난 것, 바로 그런 것이 전체 흐름의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말일까? 나아가, 거대한 금융자본주의의 흐름에 역행하는 듯 보이는 어떤 작은 징조들(여기서 등장하는 시위대의 시위, 분신, 무정부부의자의 파이 던지기 테러 같은것..?)이 미래의 어떤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이야기일까...? 마치 에릭이 다양한 애인들과 성관계를 맺고 충족감을 느끼지만, 정작 자신의 아내에게서는 섹스를 거부당하는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일처럼... 

 

기억, 추락, 타인의 고통과 어긋남에 대한 민감성의 복원... 이런 것들이 구원과 관련되어 있는 건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파멸과 죽음을 통해 마침내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구원에 다가갔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 에릭 역시 끝을 모르는 욕망-거대한 추락-기억(반성)-거의 자초하는 파멸의 단계를 통해 구원에 이르고 있는게 아닐까? (너무 도식적이라 내가 써놓고고 맘에 안들긴 하지만...-_-) 평론가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 목록에 또 하나의 텍스트를 추가해 넣고

싶다는 생각도 내 멋대로 한 번 해 본다.

 

암튼 이 소설은 스케일도, 흡입력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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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코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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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사랑, 인생, 결혼, 죄, 죽음과 부할에 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 조만간 꼭 다시 읽고싶다! 존 치버, 그 자신의 피로 쓴 이 책은 아마도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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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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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폴 오스터 책 가운데 가장 말랑말랑한 작품이다. 이번엔 열린책들에서 글자간격도 널널하게 편집해주시고... 문장들 역시 전작들에 비해 수월하게 읽히는 맛도 나쁘지 않았다. 번역도 한 몫 한 듯.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나가는 청춘일기지만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폴 오스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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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열린책들 세계문학 38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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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지적인 소설이다. 많은 한국 작가들이 사랑해마지않는 작가 폴 오스터. 그가 이후에 지속적으로 천착하게 될 문제의식들을 한꺼번에 제대로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내가 먼저 만났던 몇몇 후속 작품들 속에서도 비슷한 주제가 변주되고 있지만, 이 작품만큼 플롯 자체보다 작가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 언어에 대한 고민, 서사구조와 방식에 대한 고민 등이 압축적으로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도 없는 것 같다.

 

문학 이론에 대한 짧은 지식 탓에, 책을 덮고도 꽤 오랜 시간을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로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아야 했다. 그 결과, 이 소설은 탐정이라는 인간에 대한 직업적 관찰자와 닮은 직업을 가진 작가가 실재로 탐정이 되어 타인의 삶을 관찰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마침내 관찰을 하는 주체와 관찰 대상의 심리적 전도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관찰자가 실은 관찰 대상이었음이 드러나는 아이러니마저 보여준다는 내용으로 정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기록하는 자는 눈에 보이는 사실을 세세한 것까지 그대로 묘사하는 기록자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 내적 논리를 사유하는 사색가로, 나아가 오로지 전체적인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갖는 추상적 탐미주의자로, 자신의 지상의 삶마저 잃어버린 유령같은 절대 고독자로,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어두운 과거와 작별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하는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이런 이야기 구조를 관통하면서 내가 찾아낸 주된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 즉 작가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위해 자기 자신의 평범한 실재적인 삶을 버리고 영원히 고독과 친구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작가는 정녕 유령같은 존재일까?

 

2. 인간의 삶은 과연 얼마만큼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 것인가? 그 우연성을 용기 있게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의무일까, 아니면 최대한 우연성을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기위해 애쓰는 게 보다 가치 있는 삶일까?

 

3. 인간의 삶은 관습적인 사회적 관계(가족, 동료...)의 지배를 받는다. 여기서 벗어나 자기결정권을 지닌 한 개인으로서 완전히 독립적, 주체적으로 사는 일이 가능할까?  어떤 쪽을 지향하는 삶이 보다 윤리적인 걸까?

 

4. 인간은 각기 고유의 정체성이란 걸 가지고 있을까? 정체성은 관계의 상호작용으로 완전히 변하기도 하는 모호한 것일까

 

물론 작가가 어떤 명시적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작품들을 통해 그가 대체로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70, 80년대를 풍미했던, 그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이런 주제들에 대한 관심이 폴 오스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글쓰기의 의미와 방식에 대해 가장 성실하게 고민한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얼마 전 읽은, 비교적 최근작인 환상의 책에서도 거의 같은 주제가 변주되고 있지만, 그 작품에서는 질문 보다는 작가로서의 확신 같은 게 더욱 느껴졌었다. 특히 이야기가 절망에 빠진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주목한 점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 이야기에 한껏 공감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소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덕분이었다.

 

소설에서 재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폴 오스터 만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나는 뉴욕 3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 <유리의 도시>에 나오는 돈키호테에 관한 인상적인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쓴 이유가, 이야기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는 미치광이가 된 실재 인물 돈키호테가 글로 표현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치유하기 위해서라거나, 실은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는 등의 가설을 내어놓지만, 작중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작가 폴 오스터는 주인공 돈키호테가 자신이 보여주는 이야기의 재미를 통해 자신의 기이한 행위에 공감하게 만듦으로써 독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작가를 이용한 거라는 색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결국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작가가 아니라 주인공이고, 주인공의 자기 삶에 대한 정당화의 성패 여부는 재미에 달려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고마운 말을 해주다니! 덕분에 아무리 주제의식이 신선하고 날카롭다 해도 도무지 재미없는 이야기에는 순순히 공감할 수 없었던 나도 이젠 좀 더 떳떳해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재미없는 소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으리라! ^^;;

 

2013. 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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