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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꿈이었을까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7월
평점 :
또 하나의
현실인 꿈 속에서의
삶 , 기시감, 고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글 전반에
흐르는 몽상적 분위기로
낯설게 하기에는 성공하나, 크게 공명을
울리는 부분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조차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저 그렇게
꿈 속에서처럼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는, 형체가 불분명한 자아의
허우적거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 방향과 실체가 없으니
만남도 일시적일 수
밖에 없을 터. 사랑 역시
찰나적이다.
말미에 작가는
준의 결혼 생활을
생명인 나비를 날려
보낸 허물, 껍데기라고 명명한다.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는 것이
본질인 인간의 영혼을
일상이라는 견고한 말뚝으로대
붙잡아 두려 한다면
본질은 날려 보낸 채
껍데기 같은 일상만
부여잡고 살게 되리라는
말이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우연과 불친절하기만 한, 꿈과 현실의
지루한 넒나듦 끝에
마침내 우리에게 무척이나
친근한 도식이 형체를
드러낸다. 자유로운
영혼은 고독하다. 고독은 그 자체로
인간을 지치게 만들고
사랑을 갈구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결국 사랑의 완성이란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대신 일상은 고독을
잊게 해 주는
특효약이다. 고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몸부림으로
결혼 생활이라는 일상을
선택한다. 영혼의
자유를 댓가로 말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영혼은 자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전과는 반대로, 이제 자유에의, 고독에의 향수와 갈망을
간직한 채 일상에
지쳐간다….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진부한 인생의
아이러니! 과연
우리는 이 같은
고독과 사랑의 우로보로스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까? 작가의 대답은
부정적인 것 같다. 나는 작가의
이런 태도가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고독과 사랑과 일상의
아이러니에 대한 생각은
별반 새로울 것이
없지만 대신 ‘작가의 말’에 적은 사랑에
대한 한 가지
아포리즘은 생각해 볼만
하다.
“새로운 애인을
만나면 헤어진 옛
애인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갈급을 뜻하는 걸까. 그런 연유로
사랑이란 늘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리는 모양이다.”
작가의 말대로
정말 인생의 진리는
몇 개 안
되나 보다. 위의 도식에 밀란
쿤데라의 통찰을 끼워
넣을 수도 있겠다. 갈급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자신이 하고픈 이야기, 자신이 만든
상대방의 이미지)만을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에 상대방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하고
따라서 이해, 즉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홍상수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남자 주인공이 무턱대고 화가의 젊은 아내 유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우스꽝스런 장면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갈급이 알맹이인 낭만적
사랑은 애초에 실패가
예정된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진정 수긍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젊은
날의 경험을 통해
희미하게라도 이런 사랑의
허무함을 깨닫고는 결연하게
인생의 다음 단계, 즉 가족
만들기라는 편리한 공식에
투항하고 마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애초에
가족이란 건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주의를 기반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 허무를 철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낭만적 사랑의 기억을
기웃거리며 상실감에 허우적댈
것이다. 그러니 결혼
한 남녀들이여, 낭만적 사랑의 허무를
철저하게 긍정하라!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고독과 소통에의
열망이 일상이라는 괴물에 완전히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 여전히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자명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도저히 달아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실존적 과제인
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 내 감정을 완전히 동화시키는데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소설의 주제의식 만큼은 모두가 깊이 고민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