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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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세대라는 단어를 주로 정치적 행동주의와 연관 지어 떠올렸던 나에게 비트족이나 히피족이란 말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신념을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까지 확장하여 실천하고자 한 이들을 일컫는 긍정적인 단어였다. 이와 더불어 페미니즘, 가족, 성 해방(성적 자유주의), 과학의 진보에 관해서도 나는 나름 입장이라 할만한 것까지는 못 돼도 공감하는 관점 정도는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미셸 우엘벡은 이런 나의 생각을 마구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경제적 자유주의 못지않게 성적 자유주의도 인간을 무한경쟁의 늪에 빠뜨려 동물의 왕국에서의 지배논리인 강자의 논리에 종속되게 만든다는 우려는 아직 우리에게는 낯선 주제이기 때문이리라. 아직은 사회의 봉건적 관습과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고 이를 지켜내는 일이 시급한 우리에게는 이처럼 극단적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어두운 측면에 주목하는 관점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게 아마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선진적 서구사회가 당면한 문제라면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해당될 문제이니만큼 미셸 우엘벡이라는 작가를 간과하고 넘어가서는 안될 것 같다.

 

<섹스 앤 더 시티>를 비롯한 여러 미국 드라마를 즐기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의 자유분방한 사생활을 은근 부러워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나이를 불문하고 짝짓기가 지상 최대의 과제이자 온갖 고통과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는 서구 사회의 모습이 좀 지나치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오로지 성적 경쟁력을 갖추고 유혹의 기술을 연마하는데 젊음을 다 써버리고, 나이 듦을 경멸하고 두려워하는 서구 문화는 서구의 대량 소비주의 문화와 함께 현재 우리 사회에도 점점 깊숙하게 스며들고 있는 것 같다. 경제적 평등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된 유럽의 사민주의 국가(스웨덴, 덴마크 같은)를 비롯한 서구에서는 지금, 역사적으로 무한 자유를 부여 받은 지 얼마 안 된 성의 영역에서 새로운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 우엘벡의 진단이다. 그런데 개인주의의 확장이라는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귀결된 성 해방은 우엘벡이 보기에, 공동체주의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사회를 이끈다. 그에 따르면, 가족은 원시 공산주의의 마지막 섬으로 남아있었는데, 성적인 자유는 개인을 시장의 원리로부터 지켜주는 그 마지막 공동체마저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기 때문이다.

 

정말 놀라운 생각이다. 가족과 공산주의를 연결시키는 이 논리는 근대의 핵가족 시스템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유지시키는 기본 구조라는 엥겔스의 비판을 정면으로 뒤집는 논리 아닌가? 가족 제도가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구라는 페미니즘의 일반적인 입장에 대해서도 대립되기는 마찬가지다. 이 소설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강조하고 긍정하는 최신 프랑스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을 대놓고 비판하는 장면도 있다. 그렇다면 우웰벡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란 어떤 것일까? 부르주아적 가족주의 윤리로 돌아가잔 말일까?

 

작가가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은 좀 혼란스럽지만, 일단 두 가지의 극단적인 미래사회 모습을 상정해 보는 것 같다. 하나의 가능한 대안은 어느 정도 동질화된 전체주의적인 사회인 것 같다. 작가의 두 분신 가운데 하나로 보이는 분자생물학자 미셸(이름도 작가와 같다.)이 상상하는 이상적 미래에 관한 대목에서 이 소설은 갑자기 공상과학 소설이 되지만, 인류의 미래를 상상하는 데 과학의 진보가 가져올 긍정적 효과를 배제할 이유는 없다는 자세로 주인공을 따라 나도 최대한 상상력을 가동시켜 보았다. 미셸은 모든 악의 근원은 차이거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차이와 거리를 줄이기 위해 유전학을 이용하자는 황당해 보이는 발상을 나름 진지하게 한다. 말하자면, 유성생식이 아닌 자기복제 방식으로 생명을 연장함으로써 돌연변이(차이)를 막고 개체의 영생도 누리자는 거다. 정말 멋진 신세계스러운 소름 끼치는 대안이다. (책에는 미셸의 입을 통해 실재로 올덕스 헉슬리와 그의 저작이 종종 긍정적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또 다른 극단에 서 있는, 미셸의 형이자 작가인 브뤼노는 무책임한 성적 자유주의자들을 끊임없이 조롱하고 경멸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도 성적 욕망에 전 생애를 몰아넣는 섹스중독자이다. 그가 차이거리를 좁히려는 방식은 처절할 정도로 직접적이고 육체적이다. 그는 육체의 교접만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리고 실재로 어떤 짧은 한 순간 동안에는 자신이 정신적으로도 구원받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의 육체가 온전한 한에서만 해당된다. 슬프게도, 둘 중 한 사람의 육체가 훼손됨과 동시에 그들의 사랑은 급격히 나아갈 길을 잃고 만다.

 

유전학과 성적 자유주의는 어쩌면 기괴한 디스토피아로 이끄는 서로 매우 닮은 한 쌍의 끌개인지 모른다. 양쪽 다 육체의 변형 또는 만족이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막연하게라도 상상하는 미래의 길은 어떤 길일까? (작가의 역할이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있지는 않지만, 이 소설의 주제 자체가 어느 정도 미래소설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에 분명 막연하게나마 작가 나름의 대안도 어느 정도는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에는 한 편으로는 힘과 경쟁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는 남성성을 부정적으로 보고,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상호적 관계와 이타주의에 미래적 가치를 두는 서술들이 간간히 보이는데, 나로서는 유난히 이런 부분들에 눈길이 갔다.

 

할머니는 기꺼이 손자를 맡았다. 아이는 부족함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 옷은 언제나 깔끔했고 일요일 점심때는 늘 특별한 요리를 먹었으며 애정도 듬뿍 받았다. 할머니는 평생 그렇게 자식과 손자를 위해 살았다. 만일 누구든 인류의 행동에 관해서 철저하게 분석하고자 한다면, 미셸의 할머니와 같은 사람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리라. 그런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평생토록 오로지 헌신과 사랑으로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 자기들의 삶을 말 그대로 남에게 바친 사람들, 그러면서도 전혀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헌신과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들의 삶을 남에게 바치는 것 말고는 삶의 다른 방식을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여성이었다. (99)

 

<낙관주의, 너그러움, 은근한 연대, 화합 등이 세상을 발전시킵니다. 미래는 여성의 것입니다.> (134)   

 

확실히 여자들은 여러 면에서 남자들보다 나았다. 여자들은 상냥하고 다정하고 동정심이 많았으며, 폭력이나 잔혹함이나 이기심이나 자기 주장에 이끌리는 경향이 덜했다. 게다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합리적이고 똑똑하고 근면했다. ……

그렇다면 남자들은 대관절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일까? 맹수들이 많았던 옛날에는 남성의 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몇 세기 전부터 남자들은 거의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따금 테니스 경기를 하면서 따분함을 잊는다. 그건 별로 나쁠 게 없다. 하지만 때로 그들은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들이 역사를 발전시킨다고 생각하면서 벌이는 일은 주로 전쟁과 혁명이다. 전쟁과 혁명은 터무니없는 고통을 야기할 뿐 아니라, 매번 모든 것을 백지 상태로 만들고 다시 건설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과거의 가장 좋은 것을 파괴하기 일쑤다. 그리하여 인류의 진화는 정연한 흐름 속에서 점진적으로 상승해 가는 양상을 보이기보다는 무질서하고 불규칙하고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다. 그 모든 것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남자들에게 있다. 모험과 도박을 좋아하는 그들의 성향, 그들의 기괴한 허영심, 그들의 무책임, 그들의 폭력에 말이다. 여자들이 주도하는 세계는 모든 점에서 남자들이 주도하는 세계보다 나을 것이다. 비록 진보는 더딜지언정, 그 세계는 모두가 행복한 상태를 향해 규칙적으로 나아갈 것이다. 되돌아가는 일도 없이, 그리고 모든 것을 한 번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없이 말이다. (178-179)

 

책 제목인 소립자가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개인은 우엘벡이 보기에는 그 자체로는 텅 비어 있으며 그저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이제 두 개의 가설만이 남게 되었다.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의 운동을 결정하는 감추어진 속성들이 국소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립자들은 서로 얼마만큼 떨어져 있든 간에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또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들이 관측 문제와 무관하게 내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 소립자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우리는 깊디깊은 존재론적 공허 앞에 놓이게 된다. (136)

 

           개인의 동기, 욕망, 가치관 등은 세대 전체를 통해 형성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변형되는 것이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후기구조주의적 관점에 동의한다면, 이 소설에 장황하게 설명되고 있는 양자역학 이론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 해도 작가의 소립자론에 대해 어느 정도는 어림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는 도덕과 법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해 온 것으로 지목된 규범을 거부하기 위해 택한 또 다른 극단적 대안이었던 무한한 개인적 자유의 추구가 결국은 힘에 대한 야만적인 숭배로 귀결되고 말았던 예들이 수없이 나열된다. 이것은 내게, 타인과의 이타적, 연대적 관계가 배제된 단순한 욕망 덩어리로서의 개인은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경고로 보였다.

 

이 소설은 프리드리히 니체, 오귀스트 콩트, 질 들뢰즈 등 굵직한 철학자의 이름과 신학과 현대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먹물들을 자신의 향연에 초대하려는 듯 보이지만, 너무 많은 이론들을 끌어들여 논쟁에 참여시키려다 보니 산만해져서 깊이도 핵심도 살짝 놓쳐버린 듯한 아쉬움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갈망하는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바로 사랑이다. 진부해 보이는가? 얼핏 진부해 보이는 것을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작가의 일이라면 우엘벡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다음은 미셸이 남긴 명상 노트의 한 대목이다.

 

사랑은 존재들을 결합시킨다. 영원히 하나가 되게 한다. 선행은 존재와 존재를 묶어 주고 악행은 존재와 존재를 이간시킨다. 분리란 악의 또 다른 이름이다. 분리란 거짓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름답고 거대하고 상호적인 얽힘뿐이기 때문이다. (324-325

 

작가 우엘벡 자신이 부모의 이혼으로 조부모에 의해 길러졌다고 하니만큼, 이혼과 이로인한 가족의 붕괴가 가져온 고통이 작가에게 얼마나 생생하고 뼈저린 것인지는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책에는 히피족을 비롯한 반문명/자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넘쳐난다. 책의 많은 부분이 이들을 조롱하고 극단적 성적 자유주의자들의 행태를 역겹게 보이도록 묘사하고 그들간의 폭력적 행위와 관계를 그리는데 할애되고 있는데, 작가의 사적인 감정이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들이 모두 양육이라는 책임을 거부하고 자신의 성적 쾌락만을 좇는 극단적 이기주의자이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온당하게 말한다면, 이들은 우리에게 문명의 부정적 폐해를 끊임없이 각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지금의 생태주의 사상의 뿌리가 되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성적 자유주의에 대한 작가의 과감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해볼 참이다. 또한 이 책은 현대 과학 이론이나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 등에 대해 보다 진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좀 더 간절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내게 의미 있는 독서였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폐해가 인간성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아넣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인류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그려보려는 노력이 중단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은 위안이 된다.

 

2012.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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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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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위화를 처음 만난 건 장예모 감독이 그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 <인생>을 통해서다. 공리의 연기가 빛났던 영화 <인생>은 원작을 따로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 자체로 완벽하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였다. 영화가 나온 지는 오래 되었고 언젠가 이 영화를 보았던 기억도 조금은 남아 있지만, 나이가 들어 최근 다시 보니 정말 대단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물결을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밖에 없는 대다수 민초들의 잡초와도 같은 삶이 이토록 숭고하고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작품은 이 작품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영화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내게는 위화 보다는 장예모라는 감독의 이름 석자를 또렷이 머릿속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고, 그저 되는대로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나로 하여금 뒤이어 비교적 최근작인 <산사나무 아래서>를 찾아보는 열성을 발휘하게까지 했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는 <인생>에 비길 바 못 되었다. 아마도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운명(혹은 역사)의 힘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하는 의무를 부여 받은 인간 삶의 비극적 수동성과, 그 모든 불운에도 불구하고악착같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내고야 마는 인간의 강인함에 더 많은 공감을 할 수 있는 나이 탓일 거다.

 

이런 위화와의 인연은 그가 올해 여러 언어로 출간한 에세이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통해 다시 이어졌다. 열 개의 단어(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 홀유)를 통해 중국의 어제와 오늘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는 그에게서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었다. 49년의 공산혁명과 이후의 문화대혁명(66-76)을 통해 거대한 정치적 격변을 겪은 바 있는 중국 민초들은 89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이제는 경제적 대격변을 겪고 있는 중이다. 1960년 생인 위화는 마오의 문화대혁명기를 온몸으로 체험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풀어놓으며, 이를 현재의 중국이 겪고 있는 거대한 경제적 변혁기의 혼란과 병치시킨다.

 

두 시기를 관통하는 언어는 혁명풀뿌리라는 말이다. 중국은 아직도 대장정 중이다. 풀뿌리가 주인이 되는 사회를 향해. 거대한 집단적 광기를 통해 풀뿌리는 마침내 홍위병이 되고 조반파가 되고 거부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변화에 대해, 혁명이 부분적으로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위화의 대답은 완전히 긍정적이지도 완전히 부정적이지도 않다. 문혁과 개혁개방은 최하층에게 정치적, 경제적 상승이라는 두 차례의 거대한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가차없는 집단적 광기는 언제나 무시무시한 부작용을 낳는다는 자명한 사실에는 예외가 없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문혁을 통해 인간성 말살이라는 처참한 교훈을 되새길 겨를도 없이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현재의 중국은 산채’(가짜 상품)홀유’(속임수, 허풍)라는 특이한 단어로 대변되는 윤리의 실종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물질적 궁핍으로 인한 허기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사람들은 광기에서 벗어나 그 동안 내동댕이쳤던 윤리의식에로 눈을 돌리게 될까? 이것은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향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던져보는 질문이다.      

 

중국에 위화와 같은 지식인이 있다는 건 한 줄기 축복이다. 순전히 작가의 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태도의 진지함 차원에서만 우리 나라 작가와 연결 지어 본다면 유머러스한 장정일정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위화의 글이 유독 가깝게 느껴지는 건 중국과 한국이 처한 슬픈 현실(극단적 빈부격차와 윤리의식의 실종이라는 자본주의의 폐해)과 이에 대해 작가가 느끼는 안타까움 탓만은 아닐 것이다. 위화에게는 사회의 부조리를 준엄하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심판자의 시선이 아니라, 옆에서 열심히 구경하다가 시시때때로 참견하는 구경꾼 같은 느낌, 작가 자신이 민초의 일부인 양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사랑스러움이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생생히 되살려내는 현란한 입담뿐만 아니라, 현재의 어떤 심각한 사건도 따뜻함과 유머를 잃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전달하여 독자로 하여금 강렬하게 공감하게 만드는 작가의 탁월한 역량이 부럽기만 하다.

 

글쓰기에 대한 그의 생각 몇 구절을 옮겨 본다.

 

나중에 젊은이들이 종종 내게 묻곤 했다. “어떻게 해서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었나요?”

나의 대답은 하나이다. 바로 글쓰기덕분이었다. 글쓰기는 경험과 같다. 혼자서 뭔가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137)

 

그러니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일단 쓰고 보자.

 

지금의 나는 이미 27년이라는 글쓰기 경력을 갖고 있고 이제는 나는 글쓰기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일생을 통틀어 표현하고 싶은 무수한 욕망과 감정을 품게 된다.ㅏ 하지만 실제 현실과 개인의 이성과 지혜가 이를 억누르고 만다. 하지만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을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가 사람의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인생을 더욱더 완전하게 해준다고 믿는다. 또는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두 갈래 인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현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의 길이다. 이 두 가지 길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가 강대해지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내 현실에서의 삶의 길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것은 허구에서의 내 삶의 길이 갈수록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147)

 

그러니까 너무 풍부하게 살면 글을 쓸 여력이 없어진다는 말씀. 글을 쓰고 싶다면 삶은 적당히 단순하게 만들자.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53-354)

 

고통은 글쓰기의 연료다. 프루스트 역시 고통이 사유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통을 찬양했다.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타인이 배제된 자신만의 고통(자기연민)으로는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좋은 글은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연결될 때 나오는 것이므로. 글쓰기의 본질은 소통과 공감에 있으므로.

 

2012.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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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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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2005년) 이 책은 '생각의 나무'에서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었는데,  최근(2010년) 출판사를 바꾸어 '청미래'에서 다시 개정판으로 출판되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보고 나서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영화에 나온 한 대사 때문이었다. 프루스트를 전공한 학자였으나 대학에서 실직 당하고 동성 애인으로부터 실연까지 당한 채 고향으로 돌아 온 삼촌이, 좌절에 빠진 조카를 위로하는 장면에서 하는 말인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프루스트는 인생의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평생 고통에 찬 삶을 살아왔지만, 고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으므로 자신의 인생이 값진 것이 되었으며, 오히려 행복했던 시간이야말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가장 멍청하게 살았던 시간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니 고통이야말로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보석 같은 것이니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라.’ 그 장면의 내용이 잊히지 않아 예전에 구입해 두고 모셔 놓기만 했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스완네 집 쪽으로 1, 2>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긴 했는데, 그 지루함에 대한 선입견 탓에 선뜻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예전에 읽었던 보통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역시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보통은 프루스트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콕콕 집어 핵심을 요약정리 해놓고 있다. 그것도 무척 재치있게. 보통이 프루스트 전문가도 아닐 뿐만 아니라 설령 전문가라 하더라도 어느 한 사람의 해석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참고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당신이 프루스트의 텍스트를 직접 만나 이 정도의 의미를 잡아낼만한 능력 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보통의 정리를 다시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프루스트는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는 고열을 앓으면서도 죽음이 자신을 덮치는 그 순간까지 책을 쓰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단순히 과거의 흔적을 추적하는 회고담이 아니, “시간의 분해와 상실의 이면에 있는 원인들을 탐색하여 삶을 낭비하지 않고 삶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실천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낫낫이 기억하고 그 의미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프루스트는 소설을 읽는 행위(그리고 다른 모든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는 결국 자기 자신(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을 읽는 행위라는 걸 알려준다. 그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여주인공에게 부여하지 않고서는 소설을 읽을 수 없다고 말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가 읽는 소설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삶과 친밀한 교감을 나누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현실에서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가 된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아마 독자가 자신에게서 결코 경험해 보지 못했을 어떤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이 진실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35-36)

 

책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면(이를 마르키 드 로 현상MLP’이라고 한단다) 좋은 점은 무엇일까? 우선 책 속의 사건이나 인물과 유사한 일을 겪거나 유사한 사람을 만났을 때 당황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어떤 느낌도 자기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게 되며(, 고독감을 해소해주며), 우리가 명확히 서술할 수는 없었으나 우리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느낌들을 콕 집어서 지적해 주는 능력 덕분에 우리의 삶을 이전보다 더 잘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즉 이게 뭐지? 할만한 상황이 줄어들고, , 이게 그거구나, 하고 상황을 이해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프루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약 천재의 새로운 걸작을 읽게 된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멸했던 우리 자신의 성찰들, 우리가 억압했던 기쁨과 슬픔, 우리가 깔보았지만 그 책이 문득 우리에게 그 가치를 가르쳐 주는 감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42)

 

셋째, 프루스트는 여유 있게 사는 법을 알려준다. 작가는 이전에는 우리가 거의 마음에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없는 삶의 측면들에 많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깊이 들여다보고, 연민을 느끼고, 그것을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여 공감을 이끌어내는 존재이다. 잠드는 것을 묘사하는 데 30페이지를 쓴 프루스트야말로 작가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젊은 주부가 가정불화를 이유로 열차 밑으로 몸을 던져 사망.”이란 신문 기사를 단숨에 읽고 넘어간다면 『안나 카레리나』같은 걸작을 통해 받게 되는 것과 같은 감명은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사건을 접할 때 인생의 비극성과 희극성에 대한 귀중한 통찰로 이어지는 공감과 연민을 갖기 위해서는 위대한 작가들처럼 대상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넷째, 프루스트는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을 알려준다. (이 주제는 역시나 이 책의 가장 많은 페이지를 차지한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무척 논리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고 심지어 현자의 글 같았지만, 그 자신은 지독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 살았다. 유태인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와 간섭으로 지극히 의존적인 성격이 되었으며, (어머니와의 지나친 애착 탓에 강화되었을 지도 모를)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꼈으며, 이성으로부터도 종종 퇴자를 맞았으며, 동성애의 대상 역시 냉담함이나 죽음으로 그에게 고통만을 남겼으며, 집필 계획을 세웠던 자신의 희곡에 대해 어느 극장에서도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걸작은 한동안 어느 친구에게서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었었다. 육체적으로도 천식, 만성적 소화불량과 변비, 예민한 피부, 오한, 기침, 치통, 소음에 대해 민감함, 나쁜 시력 등에 시달렸으며, 침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정도로 허약했다. 그는 거의 모든 면에서 극도의 감각적 예민함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그는 정말 고통의 화신, 고통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우리를 향해 하는 말은 우리는 앓는다, 고로 생각한다는 것. 그에 따르면 우리는 문제가 있기 전까지는, 즉 우리가 고통에 빠지고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는 우리는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젊었을 적의 한때, 나중에 회고할 때 너무 불쾌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자신의 기억에서 기꺼이 지워버리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았거나, 그런 삶을 살지 않았던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전적으로 후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모든 어리석고 불건전한 삶을 통해서 궁극적인 단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면 진정 현명한 사람이 되었는지-우리 중 누구라도 현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한에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혜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도 우리 대신 가줄 수 없는 여정을 통해서, 누구도 우리 대신 해줄 수 없는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93-94)     

 

그는 또 말했다. “행복은 몸에 좋다. 그러나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고뇌다라고. 그러니까 만족보다는 불행이, 그리고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읽는 것보다는 고통스러운 연애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으리라. 그리고 고통의 정도가 클수록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사고의 깊이는 더 깊어지리라. 행복할 때는 그저 무지한 채로 남아있으리라.

 

그러나 고통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고통은 그저 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탐구의 가능성을 열어줄 뿐 고통 자체가 그것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더 큰 지혜는 제대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불행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는 데 있다. 보다 많은 경우에, 고통은 더 헛되고 나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고통(콤플렉스)에 대처하는 잘못된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해결책을 생각해 보도록 유도한다. 예컨대 사교계의 최고 귀족가문들의 초청인사 목록에 들지 못해 괴로워하는 베르뒤랭 부인의 경우, 손이 닿지 않는 신포도에 대처하는 여우처럼 좌절된 대상에 대해 무작정 비난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좌절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른 인물들의 경우에도 자신의 실수나 무지나 결점에 대해 보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결함은 극복될 수 있으며 보다 지혜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아야 함을,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섯째, 프루스트는 감정을 표현할 때 진부하거나 허식이 가득한 문장을 사용하지 말고, 보다 상황에 맞는 표현, 좀더 정직하고 정확한 표현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진부하고 허식이 가득한 표현법에 매달리는 것은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방식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프루스트는 집요할 정도로 구체적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 적합한 말을 찾도록 노력했다. 그는 모든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확실성이란 없습니다. 심지어는 문법적인 확실성도 말입니다. … 우리의 선택, 우리의 취향, 우리의 불확실성, 우리의 욕망, 우리의 연약함의 모습이 새겨진 것만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132)

 

우리는 작가는 아닐지라도, 세상을 주체적으로 느끼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흉내나 내는 말을 하면 자신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상투어로는 결코 자신만의 정체성을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 생각의 고유한 성격을 더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관례를 무시해야 한다.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모든 성공적인 예술작품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전에는 왜곡되었거나 무시되었던 현실의 측면들을 우리의 시야에 회복시키는 능력이다. 프루스트의 표현에 따르면,

 

허영, 열정, 모방심리, 추상적인 지성, 습관이 오랫동안 우리의 눈을 가려 왔으며, 예술의 과제란 그것들을 치우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술은 우리를,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숨겨져 있는 깊은 층위에 도달하도록 이끈다. (142)

 

그러니까 삶은 상투적이라기보다는 낯선 실체라는 걸 인정하잔 말이다!

 

여섯째, 프루스트는 자기자신을 지키면서도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을 알려준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아낌 없이 베풀고 아낌없이 칭찬하는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기억되었다. 스스로 대화의 주제를 이끌지 않고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기울여 들어주며 상대의 관심사에서 대화의 소재를 찾아냈으며, 누구도 지루해하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정중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의 이런 태도는 사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는, “친교의 표현 양식인 대화란, 습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피상적인 여담일 뿐이다. 우리는 일 분 일 분의 공허함을 무한정 반복하는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평생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단언하면서, 친교란 본질적이고 소통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유일한 부분을 피상적인 자아를 위해 희생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친교는 우리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려는 거짓말이상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정한 사람이었다는 게 아니다. 어느 정도의 회의주의는 오히려 삶의 불완전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친교에 대한 프루스트의 비관적 태도는, 친구가 우리의 가장 심오한 자아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력자라거나 우리의 관심사와 타인의 관심사가 쉽게 일치할 수 있다는 낙관적 기준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상대에게 보다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상 대화란 게 시간과 공을 들여 계속해서 수정할 수 있는 글쓰기와는 달리 공백도 수정 기회도 없이 쉬지 않고 쏟아내야 하는 특성 탓에, 의사가 상당히 왜곡될 가능성이 높은 불완전한 전달 방식임에 틀림없지 않는가. 또 오로지 이기적으로 자신의 관심사에 충실 하느라 상대를 지루하게 하느니 상대방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게 보다 실용적인 친교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프루스트에게는 친교의 목적이 소통(지적 교류) 보다는 온정과 애착에 있었다. 대부분 자신보다 지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 바랄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게다가, 진지하고 솔직한 태도는 종종 친교에 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타자와의 교류를 위해서는 친교보다는 독서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프루스트는 애정과 진실을 분리함으로써, 충직하고 매력적인 친구이자 정직하고 심오한 사상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대화라는 무계획적이고 두서 없고 피상적인 매체의 처분에 맡기기엔 너무 중요한 주제임을 잊지 말 것, 그러니 친교 시 질문에 답하기 보다는 질문을 하는 입장이 될 것, 친교를 남들을 가르치기 보다는 그들에 대해 배우는 장으로 생각할 것.

 

일곱째, 프루스트는 좋은 삶이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부당하게 무시하고 헛되이 다른 것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가르쳐준다. 그는 화가 샤르댕이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이루는 대상들을 아름답게 볼 수 있도록 복원해 내는 재능에 감탄하면서, 예술가의 역할이 이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해 눈을 뜰 수 있도록, 미처 발견하지 못한 미감을 찾아낼 수 있도록 매개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봄으로써 생길 수 있는 행복은 프루스트의 치유 관념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불만이, 삶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대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의 유년기가 흐릿하고 평범하게 기억되는 까닭은 유년기에 실재로 매혹적인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억들을 잊어버린 탓이다. 한 조각의 마들렌이 불러일으킨 유년기의 풍부하고 친밀한 기억은 그의 유년기가 자신이 기억보다 더욱 아름다운 시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평범했던 것은 그의 삶이 아니라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삶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삶이 매우 아름답게 보이는데도 삶이 사소한 것처럼 생각되는 까닭은, 삶의 흔적 그 자체가 아니라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고 있지 않은 매우 다른 이미지들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는 데 있다. – 때문에 우리는 삶을 멸시하는 것이다. (195-196)

 

우리가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고 믿는 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탓이다. 우리 자신에게 고유한 아름다움은 언제나 삶의 소박하고 세부적인 사소한 모습들(폭신한 벙어리 장갑 한 짝, 가느다란 냄새를 피워 올리는 풀꽃 향기등처럼)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들은 대체로 낡았을 뿐 아니라 쓸데없이 사치스럽다. 프루스트는 수수한 광경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복원하라고 주장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특정 계급이나 집단의 천편일률적인 취향을 연결시켜 이해(확신)하는 조잡한 방식을 넘어서서 그 사람만의 독특한 취향과 특징을 들여다 볼 것을 권한다. 그런 것이 없다면 아무리 그의 직함이 화려하다 해도 그는 자신만의 미학이 없는 지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역으로 말한다면, 누구든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에 있어서 진부한 계급적 교양에 기대지 말고 보다 섬세하게 개발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스스로 평가할 능력이 없는 속물 예술 애호가가 자신의 느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의 교양을 입증하려는 무교양적 행태를 벌이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알고 있다면 말이다.

 

여덟째, 프루스트는 행복한 사랑을 하는 법을 알려준다. 비법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간은 친숙한 것을 경멸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다. 인간은 영구적으로 보이는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반대로, 무언가 박탈 당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사랑에 있어 밀땅의 법칙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진리인가 보다. 프루스트도 이렇게 말한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저항하고, 즉시 소유할 수 없으며, 앞으로 소유할 수 있을지조차 처음에는 알 수 없는 여성들만이 유일하게 흥미를 끄는 사람들이다.” 프루스트에게는, 오늘 밤 시간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창녀는 제 아무리 매력적이라 할 지라도 사랑의 감정을 자극할 수는 없다. 슬픈 창녀의 딜레마’. 여성들이여, 그리고 남성들이여, 행복한 사랑을 하려거든 때때로 오늘 밤 시간이 없어요라고 말할 준비를 하라. 그리고 가끔씩 질투심을 자극하라. 습관은 사랑의 가장 큰 적이며 불확실성이야말로 사랑의 최음제이므로!

 

아홉째, 프루스트는 책을 치워버려야 하는 순간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대가가 느꼈던 것을 자신 속에 다시 그려 보려고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때문에 독서를 해야 한다. 그러나 설사 우리를 돕는 것이 다른 작가의 생각일지라도, 결국 우리가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이다. 책들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감수성을 키워주고 지각능력을 길러주지만, 어떤 시점에 다다르면 그러기를 멈춘다. 이것은 그 저자가 우리가 아니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대가들은 우리의 상황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커다란 자극은 주지만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독서의 역할이 안내원역할에 있는 것이지 해결사역할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

 

우리 속 깊은 곳에 있지만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알지 못했던 집의 문을 마법의 열쇠로 열어주는 한, 우리의 삶에서 독서의 역할은 유익한 것이다. 반면에 독서가 정신에 자신만의 삶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해진다. 그러면 진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사고의 본질적인 진보 및 우리의 진실한 노력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이상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몸과 마음이 완벽히 평온한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맛을 보면 되는,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246-247)

 

작가는 신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깊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디 예술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자. 예술가가 포착한 아름다움은 대상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자신만의 이유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고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에 내재한 일반적인 교훈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자. 일리에 콩브레에 가서 마들렌을 먹어본다고 해서 프루스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 말로 예술 우상숭배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하는 것일 터.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콩브레를 방문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일 거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야말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내린 나의 소박한 결론:

1.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고 많은 지혜를 주는 중요한 작가임에 틀림없구나. 꼭 읽어봐야겠다.

2.     보통은 글을 참 재치 있고 재미있게 잘 쓴다.

3.    책만 들여다보지 말고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기울이고, 주말에는 하이킹을 가자. 오늘을 소중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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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좋아했던 것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2
미야모토 테루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좋아했던 것 (미야모토 테루, 작가정신, 2011(2007))

 

사랑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건지의 한 예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가장 욕망에 끌려 다니기 쉬운 남녀간의 사랑에서 조차도 사랑의 이타적 본성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기만 한다면, 그 관계가 어떻게 끝나든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고 그 시간을 평생의 재산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그러니까 사랑은 상대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설령 상대가 내 곁을 떠난다 해도 상대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을 맛본 것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상대의 결점과 어리석음을 보듬어 안는 성숙함을 통해서만 진짜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

 

사실 이렇게 도식적으로 요약한 말들은 우리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지 못하지만, 설득력 있게 잘 쓰여진 소설은 우리의 삶의 태도를 조금은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중간 이상은 되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은 들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여기 나온 네 남녀는 다 너무 착하다. 자신의 꿈을 위해 공들여 모은 돈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타인에게 선뜻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데 여기 모인 네 젊은이들이 모두 그런 캐릭터다. 그래서 동화 같은 느낌이 들고 마치 천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하지만 한동안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소설만 읽어 좀 지친 마음이었는데, 이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무척 편안하고 상쾌한 느낌이었다. 때로는 이렇게 마쉬멜로우처럼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달달한 소설을 읽고 삶에 대해 낙관적으로 느껴보는 일도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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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이 이야기는 진실은 기억의 주체혹은 역사적 해석 의도에 따라 완전히 그 실체가 달라진다는 포스트모던한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진실의 모호성기억의 불완전함이나 왜곡 가능성을 경고하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이 소설을 반만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주인공 토니는 결국 자신의 잘못된 기억을 정정하고 진실의 실체와 대면하는 순간을 맞기 때문이다. 무려 40여년 전의 애인이었던 베로니카가 자신 몫이라며 넘겨준 얼마간의 유산과 역시 40여년전에 이미 죽은 친구 에이드리언의 일기 한 페이지메리라 불리우는 베로니카와의 몇차례의 간단한 이메일 교환과 두 차례의 짧은 만남이런 작은 퍼즐 조각으로 토니는 진실에 다다른다물론 진실은 언제나 끔찍한 얼굴을 하고 있다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진실의 추함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다찌질한 평균치 인생을 살아온 토니가 더 이상 찌질한 인간이기를 멈추고 성숙한 인간으로 탈바꿈 하게 되는 계기는 바로 그가 이 진실 찾기를 멈추지 않았다는데그리고 그 진실을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냉정하게 성찰하는 일과 연계시키는 의미화 작업을 행했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 전체의 주제는 사실 -대부분의 좋은 장편들이 그렇듯소설의 앞부분에 모두 복선으로 나와있다역사 선생과 학생들간에 주고받은 역사에 대한 생각들이 괜히 삽입된 게 아닐 것이므로난데없이 시작된 진실 찾기 게임을 통해역사가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만 생각했던 미숙한 토니는 자신의 자기기만적 기억을 마주하면서 결국 역사가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조 헌트 선생의 정정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을 것이다그러나 토니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건 역설적으로 역사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토니에게는 명징한 정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말하면서 친구 롭슨의 자살의 실체적 진실을 알기 힘들다는 것을 예로 들며진실을 안다는 것(역사 이해)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그러나 조 헌트 선생이 에이드리언을 향해 제기한 반론은 의미심장하다선생은 롭슨 자신의 증언이 없다 해도 검시관의 보고서일기나 편지전화 기록주변인 인터뷰 등을 통해 진실에 근접할 수 있으며당사자 본인의 설명에 의존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며행위를 통해 행위자의 정신상태가 추론될 수 있으므로역사와 역사가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바로 이런 일들이 토니가 나중에 실행하게 되는 작업들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억은 경험이 주관적 해석을 거쳐 입력된 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분류수정되는 역동적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으며나아가 왜곡이야말로 기억의 본질이라는 사실에 오늘날의 뇌신경과학자들은 대부분 동의한다그런데 문학의 역할이 고작 이 뻔한 신경과학적 사실을 확인하는 일에 있겠는가사실 기억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우리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를 하는 건 오로지 현재의 욕구와 관심사 때문이라는 데서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다토니의 기억이 패배감과 수치감이라는 자신의 해석과정과이 경험을 없었던 것으로 부정하고픈 이후의 욕구 때문에 왜곡되어 저장되었던 것처럼 말이다그러면 과연 이 왜곡된 기억의 객관적 진실을 되찾는 일즉 다시 기억하기기억 수정하기를 통해 토니가 찾게 되는 삶의 진실은 무엇인가문학이 답하는 건 바로 이 부분일 거다.

 

또다시 작가가 앞부분에 깔아준 복선으로 돌아온다면 이해가 훨씬 명확해질 것이다장면은 영어 수업시간필 딕슨 선생은 “’탄생성교그리고 죽음.’ 이것이 T. S. 엘리엇이 말한 인생의 총체이지.”라고 말한 후이름 모를 시를 한 편 들려주고는 학생들에게 감상을 묻는다학생들 가운데 가장 진지하고 똑똑했던 에이드리언은 이 시가 에로스와 타나토스에 관한 이야기라고 답한다. “죽음의 원칙과 충돌하는 에로스의 원칙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에 대한 이야기라고당시에는 누구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에이드리언은 타나토스에 굴복하고 만 듯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그렇다면 토니의 삶은 어땠을까과연 에로스가 충만한 삶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버전의 타나토스에 붙들린 삶이었을까?

 

나름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토니 앞에 베로니카라는 까다로운 수수께끼가 다시 떨어졌다수수께끼를 받아 들기 이전의 토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젊은 날의 그는 사랑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상대의 진심을 저울질하고취향에 대한계급적 차이에 대한 열등감으로 상대의 사소한 언행도 모욕으로 받아들이며질투심으로 인한 적의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소심하고 좁은 마음의 소유자다그러니까 과거의 그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건들은 그런 그의 태도가 낳은 해석들을 거친 기억의 산물인 것이다그는 노년이 된 지금까지도 철저하게 자기보존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온 인물이다다시 말해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그는 오로지 점수를 잘 받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고감정을 유예하고적당히 책임지지 않을 연애만 했다이후에도 겉으로는 이혼한 아내와 친분을 유지하고 결혼 한 딸과도 가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동네 병원 도서 관리직으로 자원봉사도 하면서 적당한 만족감을 유지하지만그 어떤 관계나 일에서도 진정성은 부족하고 그러니 당연히 외로운 삶을 산다그런 가운데기억의 목록에서 지워버리려고 할 만큼 토니에게 수치를 안겨준 옛 애인 베로니카라는 불편한 과거가 모습을 드러내자 위기감에 사로잡힌 토니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불청객과 집요한 한판 퍼즐게임을 벌이게 된다.

 

그 시작 단계부터 토니는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에이드리언이 남긴 편지의 말미가 만약 토니가로 끝나버리자 토니는 그 뒤에 올 말들을 여러가지로 상상해 보는 부분은 무척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토니가 더 분명하게 바라보고더 단호히 행동하고더 진실한 윤리적 가치를 고수했다면그가 애초엔 행복이라고그리고 나중엔 만족이라고 칭했던 수동적인 평화 상태에 그처럼 쉽게 안주하지 않았다면만약 토니가 두려워하지 않았다면스스로를 허락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서 허락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면 등등그렇게 가설에 가설을 거듭하면 마지막 가설에 이르게 된다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만약 토니가 토니가 아니었다면. (154)

 

후반부에 토니는 세 차례에 걸쳐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데첫 번째 진실을 발견한 후에는 이런 절절한 회한의 감정에 시달린다.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했고인생이 내게 던져주는 얼마 되지도 않는 교훈에 대해 크게 깨달을 깜냥도 못 되었다내 식으로 말하면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마냥 이렇다면 이렇게그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그래서 난생처음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젊은 시절 알게 된 친구를 잃었다즐겼던 야망을 저버렸다인생이 너무 성가시지 않기를 바랐고 성공을 거두었다이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평균치학교를 떠난 후 나란 인간은 줄곧 그랬다대학에서직장에서 평균치우정과 성실과 사랑에서 평균치섹스에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평균치였다…. 평균치란 말이 메아리 쳐 울려 퍼졌다평균치 인생평균치 진실평균치 윤리관. (173-174)

 

이 대목에서 정말 뜨끔했다속 좁고 상종하기도 싫었던 천하의 찌질이 토니와 내가 다를 바 뭐란 말인가과연 나는 언제 한 번이라도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다운 대결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소설의 초반에서도 에이드리언은 역사를 인식함에 있어서 어느 한 개인이나 구조나 카오스적 본질에 떠맡기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개개인의 책임소재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데책임에 관한 생각은 그의 짧은 일기에서도 반복된다첫 번째 진실의 전기충격을 받은 토니 역시 책임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게 되는데결론은 에이드리언의 것과 비슷하다.

 

나는 그 범위를 좁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미안하지만우리는 세상을 뜬 부모도형제자매도외동 신세도우리의 유전자도사회도그 어떤 것도 원망할 수 없다정상적인 환경에 있다면 안 될 일이다그와 정반대인 상황을 강력히 입증할 만한 것이 없다면자신의 인생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개념부터 챙겨라(181)

 

어쩌면 토니는 우리보다 운이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죽음이 모든 것을 무화시키기 전에 자신의 삶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에.

 

노년에 이르면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182-183)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붕괴하는” 순간을 겪어야만 한다. “그 새로운 것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 해도.”(183그러면 기억의 붕괴지나온 삶의 붕괴를 체험한 토니는 이제 타협과 부박함으로 점철된 인생”(239항로를 벗어날 수 있을까쉽지는 않을 것이다깨달았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토니는 베로니카로부터 계속해서 아직도 감을 못 잡는다고 질책을 받고수제 감자칩이 두꺼운 감자칩이라는 속뜻을 못 알아차리고 글자 그대로 손으로 만든 감자칩인 줄 알고 펍 주인에게 따지고 들어 상대를 황당하게 만든다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게 마련인 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상처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를 향해 기꺼이 마음을 열어두는 용기가 없다면 세상은 온통 이해불가의 모호한 모순덩어리로 다가올 뿐일 것이다그런 용기를 뒤로 하고 두려움 때문에 자기보존욕구에만 충실하게 산다면그러니까 나뿐인 놈”(=나뿐놈)이라면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도삶의 구원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그런데 이해를 하게 되면 두려움도 사라진다.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학문의 의미가 아니라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145)        

 

마침내 베로니카의 진실-그 일면이라 할 수 있겠지만-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 토니는 베로니카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 아프게 공감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이들을 이전과는 달라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다비로소 타인과의 진정한 교감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토니의 라는 것도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처럼그는 살인자도 아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일부러 곤경에 빠뜨리는 싸이코패스도 아니다그저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보통의 수동적인 인간에 가깝지 않은가그러니까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잤다는 끔찍한 진실을 뒤늦게 알게 된 오이디푸스처럼 제 눈을 찌를 필요까지는 없을지 모른다그런데도 바로 그 수동적 삶의 태도가 얼마나 비윤리적인 것인지를 이토록 강력하게 설득하는 소설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책을 덮고 나서 나는 서둘러 줄리언 반즈의 다른 책들을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201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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