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립자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68세대’라는 단어를 주로 정치적 행동주의와 연관 지어 떠올렸던 나에게 ‘비트족’이나 ‘히피족’이란 말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신념을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까지 확장하여 실천하고자 한 이들을 일컫는 긍정적인 단어였다. 이와
더불어 페미니즘, 가족, 성 해방(성적 자유주의), 과학의 진보에 관해서도 나는 나름 ‘입장’이라 할만한 것까지는 못 돼도 공감하는 관점 정도는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미셸 우엘벡은 이런 나의 생각을 마구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경제적 자유주의 못지않게 성적 자유주의도 인간을 무한경쟁의 늪에 빠뜨려 동물의 왕국에서의 지배논리인 ‘강자의 논리’에 종속되게 만든다는 우려는 아직 우리에게는 낯선 주제이기
때문이리라. 아직은 사회의 봉건적 관습과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고 이를 지켜내는
일이 시급한 우리에게는 이처럼 극단적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어두운 측면에 주목하는 관점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게 아마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선진적 서구사회가 당면한 문제라면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해당될 문제이니만큼 미셸 우엘벡이라는 작가를
간과하고 넘어가서는 안될 것 같다.
<섹스 앤 더
시티>를 비롯한 여러 미국 드라마를 즐기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의 자유분방한 사생활을
은근 부러워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나이를 불문하고 짝짓기가 지상 최대의 과제이자 온갖 고통과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는 서구 사회의 모습이 좀 지나치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오로지 성적 경쟁력을 갖추고 유혹의
기술을 연마하는데 젊음을 다 써버리고, 나이 듦을 경멸하고 두려워하는 서구 문화는 서구의 대량 소비주의
문화와 함께 현재 우리 사회에도 점점 깊숙하게 스며들고 있는 것 같다. 경제적 평등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된 유럽의 사민주의 국가(스웨덴, 덴마크 같은)를 비롯한 서구에서는 지금, 역사적으로 무한 자유를 부여 받은 지
얼마 안 된 성의 영역에서 새로운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 우엘벡의 진단이다. 그런데 개인주의의
확장이라는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귀결된 성 해방은 우엘벡이 보기에, 공동체주의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사회를 이끈다. 그에 따르면, 가족은 원시 공산주의의 마지막
섬으로 남아있었는데, 성적인 자유는 개인을 시장의 원리로부터 지켜주는 그 마지막 공동체마저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기 때문이다.
정말 놀라운 생각이다. 가족과
공산주의를 연결시키는 이 논리는 근대의 핵가족 시스템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유지시키는 기본 구조라는 엥겔스의 비판을 정면으로 뒤집는 논리 아닌가? 가족 제도가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구라는 페미니즘의 일반적인 입장에 대해서도 대립되기는 마찬가지다. 이 소설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강조하고 긍정하는 최신 프랑스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을 대놓고 비판하는 장면도 있다. 그렇다면 우웰벡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란 어떤 것일까? 부르주아적 가족주의 윤리로 돌아가잔 말일까?
작가가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은 좀 혼란스럽지만, 일단 두 가지의 극단적인 미래사회 모습을 상정해 보는 것 같다. 하나의
가능한 대안은 어느 정도 동질화된 전체주의적인 사회인 것 같다. 작가의 두 분신 가운데 하나로 보이는
분자생물학자 미셸(이름도 작가와 같다.)이 상상하는 이상적
미래에 관한 대목에서 이 소설은 갑자기 공상과학 소설이 되지만, 인류의 미래를 상상하는 데 과학의 진보가
가져올 긍정적 효과를 배제할 이유는 없다는 자세로 주인공을 따라 나도 최대한 상상력을 가동시켜 보았다. 미셸은
모든 악의 근원은 ‘차이’와 ‘거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차이와 거리를 줄이기 위해 유전학을 이용하자는 황당해 보이는 발상을 나름 진지하게 한다. 말하자면, 유성생식이 아닌 자기복제 방식으로 생명을 연장함으로써 돌연변이(차이)를 막고 개체의 영생도 누리자는 거다. 정말 ‘멋진 신세계’스러운 소름 끼치는 대안이다. (책에는 미셸의 입을 통해 실재로 올덕스 헉슬리와 그의 저작이 종종 긍정적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또 다른 극단에 서 있는, 미셸의
형이자 작가인 브뤼노는 무책임한 성적 자유주의자들을 끊임없이 조롱하고 경멸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도 성적 욕망에 전 생애를 몰아넣는 섹스중독자이다. 그가 ‘차이’와 ‘거리’를 좁히려는 방식은 처절할 정도로 직접적이고 육체적이다. 그는 육체의 교접만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리고
실재로 어떤 짧은 한 순간 동안에는 자신이 정신적으로도 구원받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의 육체가 온전한 한에서만 해당된다. 슬프게도, 둘
중 한 사람의 육체가 훼손됨과 동시에 그들의 사랑은 급격히 나아갈 길을 잃고 만다.
유전학과 성적 자유주의는 어쩌면 기괴한 디스토피아로 이끄는 서로
매우 닮은 한 쌍의 끌개인지 모른다. 양쪽 다 육체의 변형 또는 만족이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막연하게라도 상상하는 미래의 길은 어떤 길일까? (작가의 역할이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있지는 않지만, 이 소설의
주제 자체가 어느 정도 미래소설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에 분명 막연하게나마 작가 나름의 대안도 어느 정도는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에는 한 편으로는 힘과 경쟁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는 ‘남성성’을 부정적으로 보고,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상호적 관계와 이타주의에 미래적 가치를 두는 서술들이 간간히 보이는데, 나로서는 유난히 이런 부분들에 눈길이 갔다.
할머니는 기꺼이 손자를
맡았다. 아이는 부족함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 옷은 언제나
깔끔했고 일요일 점심때는 늘 특별한 요리를 먹었으며 애정도 듬뿍 받았다. 할머니는 평생 그렇게 자식과
손자를 위해 살았다. 만일 누구든 인류의 행동에 관해서 철저하게 분석하고자 한다면, 미셸의 할머니와 같은 사람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리라. 그런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평생토록 오로지 헌신과 사랑으로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 자기들의 삶을 말 그대로 남에게 바친 사람들, 그러면서도 전혀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헌신과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들의 삶을 남에게 바치는 것 말고는
삶의 다른 방식을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여성이었다. (99쪽)
<낙관주의, 너그러움, 은근한 연대, 화합 등이 세상을 발전시킵니다. 미래는 여성의 것입니다.> (134쪽)
확실히 여자들은 여러
면에서 남자들보다 나았다. 여자들은 상냥하고 다정하고 동정심이 많았으며, 폭력이나 잔혹함이나 이기심이나 자기 주장에 이끌리는 경향이 덜했다. 게다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합리적이고 똑똑하고 근면했다. ……
그렇다면 남자들은
대관절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일까? 맹수들이 많았던 옛날에는 남성의 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몇 세기 전부터 남자들은 거의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따금 테니스 경기를 하면서 따분함을 잊는다. 그건 별로 나쁠 게 없다. 하지만 때로 그들은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들이 역사를 발전시킨다고 생각하면서
벌이는 일은 주로 전쟁과 혁명이다. 전쟁과 혁명은 터무니없는 고통을 야기할 뿐 아니라, 매번 모든 것을 백지 상태로 만들고 다시 건설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과거의 가장 좋은 것을 파괴하기 일쑤다. 그리하여 인류의 진화는 정연한 흐름 속에서 점진적으로 상승해 가는 양상을 보이기보다는 무질서하고 불규칙하고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다. 그 모든 것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남자들에게 있다. 모험과 도박을 좋아하는 그들의 성향, 그들의 기괴한 허영심, 그들의 무책임, 그들의 폭력에 말이다. 여자들이 주도하는 세계는 모든 점에서 남자들이 주도하는 세계보다 나을 것이다.
비록 진보는 더딜지언정, 그 세계는 모두가 행복한 상태를 향해 규칙적으로 나아갈 것이다. 되돌아가는 일도 없이, 그리고 모든 것을 한 번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없이 말이다. (178-179쪽)
책 제목인 ‘소립자’가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개인’은 우엘벡이 보기에는 그 자체로는 텅 비어 있으며 그저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이제 두 개의 가설만이
남게 되었다.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의 운동을 결정하는 감추어진
속성들이 국소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립자들은
서로 얼마만큼 떨어져 있든 간에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또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들이 관측 문제와 무관하게 내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 소립자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우리는
깊디깊은 존재론적 공허 앞에 놓이게 된다. (136쪽)
개인의
동기, 욕망, 가치관 등은 세대 전체를 통해 형성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변형되는 것이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후기구조주의적 관점에 동의한다면,
이 소설에 장황하게 설명되고 있는 양자역학 이론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 해도 작가의 소립자론에 대해 어느 정도는 어림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는 도덕과 법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해 온 것으로 지목된 규범을 거부하기 위해
택한 또 다른 극단적 대안이었던 무한한 개인적 자유의 추구가 결국은 힘에 대한 야만적인 숭배로 귀결되고 말았던 예들이 수없이 나열된다. 이것은 내게, 타인과의 이타적, 연대적
관계가 배제된 단순한 욕망 덩어리로서의 개인은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경고로 보였다.
이 소설은 프리드리히 니체, 오귀스트
콩트, 질 들뢰즈 등 굵직한 철학자의 이름과 신학과 현대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먹물들을 자신의 향연에
초대하려는 듯 보이지만, 너무 많은 이론들을 끌어들여 논쟁에 참여시키려다 보니 산만해져서 깊이도 핵심도
살짝 놓쳐버린 듯한 아쉬움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갈망하는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바로 사랑이다. 진부해 보이는가?
얼핏 진부해 보이는 것을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작가의 일이라면 우엘벡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다음은 미셸이 남긴 명상 노트의 한 대목이다.
사랑은 존재들을 결합시킨다. 영원히 하나가 되게 한다. 선행은 존재와 존재를 묶어 주고 악행은
존재와 존재를 이간시킨다. 분리란 악의 또 다른 이름이다. 분리란
거짓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름답고 거대하고 상호적인 얽힘뿐이기 때문이다. (324-325쪽)
작가 우엘벡 자신이 부모의 이혼으로 조부모에 의해 길러졌다고
하니만큼, 이혼과 이로인한 가족의 붕괴가 가져온 고통이 작가에게 얼마나 생생하고 뼈저린 것인지는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책에는 히피족을 비롯한 반문명/자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넘쳐난다. 책의 많은 부분이 이들을 조롱하고 극단적 성적 자유주의자들의 행태를 역겹게
보이도록 묘사하고 그들간의 폭력적 행위와 관계를 그리는데 할애되고 있는데, 작가의 사적인 감정이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들이 모두 양육이라는 책임을 거부하고 자신의 성적 쾌락만을 좇는 극단적 이기주의자이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온당하게 말한다면, 이들은
우리에게 문명의 부정적 폐해를 끊임없이 각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지금의 생태주의 사상의 뿌리가 되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성적 자유주의에 대한 작가의 과감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해볼 참이다. 또한 이 책은 현대 과학 이론이나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 등에 대해 보다 진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좀
더 간절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내게 의미 있는 독서였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폐해가 인간성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아넣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인류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그려보려는 노력이 중단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은 위안이 된다.
2012.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