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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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위화를 처음 만난 건 장예모 감독이 그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 <인생>을 통해서다. 공리의 연기가 빛났던 영화 <인생>은 원작을 따로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 자체로 완벽하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였다. 영화가 나온 지는 오래 되었고 언젠가 이 영화를 보았던 기억도 조금은 남아 있지만, 나이가 들어 최근 다시 보니 정말 대단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물결을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밖에 없는 대다수 민초들의 잡초와도 같은 삶이 이토록 숭고하고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작품은 이 작품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영화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내게는 위화 보다는 장예모라는 감독의 이름 석자를 또렷이 머릿속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고, 그저 되는대로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나로 하여금 뒤이어 비교적 최근작인 <산사나무 아래서>를 찾아보는 열성을 발휘하게까지 했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는 <인생>에 비길 바 못 되었다. 아마도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운명(혹은 역사)의 힘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하는 의무를 부여 받은 인간 삶의 비극적 수동성과, 그 모든 불운에도 불구하고악착같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내고야 마는 인간의 강인함에 더 많은 공감을 할 수 있는 나이 탓일 거다.

 

이런 위화와의 인연은 그가 올해 여러 언어로 출간한 에세이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통해 다시 이어졌다. 열 개의 단어(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 홀유)를 통해 중국의 어제와 오늘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는 그에게서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었다. 49년의 공산혁명과 이후의 문화대혁명(66-76)을 통해 거대한 정치적 격변을 겪은 바 있는 중국 민초들은 89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이제는 경제적 대격변을 겪고 있는 중이다. 1960년 생인 위화는 마오의 문화대혁명기를 온몸으로 체험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풀어놓으며, 이를 현재의 중국이 겪고 있는 거대한 경제적 변혁기의 혼란과 병치시킨다.

 

두 시기를 관통하는 언어는 혁명풀뿌리라는 말이다. 중국은 아직도 대장정 중이다. 풀뿌리가 주인이 되는 사회를 향해. 거대한 집단적 광기를 통해 풀뿌리는 마침내 홍위병이 되고 조반파가 되고 거부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변화에 대해, 혁명이 부분적으로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위화의 대답은 완전히 긍정적이지도 완전히 부정적이지도 않다. 문혁과 개혁개방은 최하층에게 정치적, 경제적 상승이라는 두 차례의 거대한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가차없는 집단적 광기는 언제나 무시무시한 부작용을 낳는다는 자명한 사실에는 예외가 없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문혁을 통해 인간성 말살이라는 처참한 교훈을 되새길 겨를도 없이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현재의 중국은 산채’(가짜 상품)홀유’(속임수, 허풍)라는 특이한 단어로 대변되는 윤리의 실종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물질적 궁핍으로 인한 허기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사람들은 광기에서 벗어나 그 동안 내동댕이쳤던 윤리의식에로 눈을 돌리게 될까? 이것은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향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던져보는 질문이다.      

 

중국에 위화와 같은 지식인이 있다는 건 한 줄기 축복이다. 순전히 작가의 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태도의 진지함 차원에서만 우리 나라 작가와 연결 지어 본다면 유머러스한 장정일정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위화의 글이 유독 가깝게 느껴지는 건 중국과 한국이 처한 슬픈 현실(극단적 빈부격차와 윤리의식의 실종이라는 자본주의의 폐해)과 이에 대해 작가가 느끼는 안타까움 탓만은 아닐 것이다. 위화에게는 사회의 부조리를 준엄하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심판자의 시선이 아니라, 옆에서 열심히 구경하다가 시시때때로 참견하는 구경꾼 같은 느낌, 작가 자신이 민초의 일부인 양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사랑스러움이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생생히 되살려내는 현란한 입담뿐만 아니라, 현재의 어떤 심각한 사건도 따뜻함과 유머를 잃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전달하여 독자로 하여금 강렬하게 공감하게 만드는 작가의 탁월한 역량이 부럽기만 하다.

 

글쓰기에 대한 그의 생각 몇 구절을 옮겨 본다.

 

나중에 젊은이들이 종종 내게 묻곤 했다. “어떻게 해서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었나요?”

나의 대답은 하나이다. 바로 글쓰기덕분이었다. 글쓰기는 경험과 같다. 혼자서 뭔가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137)

 

그러니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일단 쓰고 보자.

 

지금의 나는 이미 27년이라는 글쓰기 경력을 갖고 있고 이제는 나는 글쓰기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일생을 통틀어 표현하고 싶은 무수한 욕망과 감정을 품게 된다.ㅏ 하지만 실제 현실과 개인의 이성과 지혜가 이를 억누르고 만다. 하지만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을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가 사람의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인생을 더욱더 완전하게 해준다고 믿는다. 또는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두 갈래 인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현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의 길이다. 이 두 가지 길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가 강대해지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내 현실에서의 삶의 길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것은 허구에서의 내 삶의 길이 갈수록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147)

 

그러니까 너무 풍부하게 살면 글을 쓸 여력이 없어진다는 말씀. 글을 쓰고 싶다면 삶은 적당히 단순하게 만들자.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53-354)

 

고통은 글쓰기의 연료다. 프루스트 역시 고통이 사유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통을 찬양했다.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타인이 배제된 자신만의 고통(자기연민)으로는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좋은 글은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연결될 때 나오는 것이므로. 글쓰기의 본질은 소통과 공감에 있으므로.

 

2012.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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