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2005년) 이 책은 '생각의 나무'에서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었는데,  최근(2010년) 출판사를 바꾸어 '청미래'에서 다시 개정판으로 출판되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보고 나서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영화에 나온 한 대사 때문이었다. 프루스트를 전공한 학자였으나 대학에서 실직 당하고 동성 애인으로부터 실연까지 당한 채 고향으로 돌아 온 삼촌이, 좌절에 빠진 조카를 위로하는 장면에서 하는 말인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프루스트는 인생의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평생 고통에 찬 삶을 살아왔지만, 고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으므로 자신의 인생이 값진 것이 되었으며, 오히려 행복했던 시간이야말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가장 멍청하게 살았던 시간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니 고통이야말로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보석 같은 것이니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라.’ 그 장면의 내용이 잊히지 않아 예전에 구입해 두고 모셔 놓기만 했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스완네 집 쪽으로 1, 2>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긴 했는데, 그 지루함에 대한 선입견 탓에 선뜻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예전에 읽었던 보통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역시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보통은 프루스트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콕콕 집어 핵심을 요약정리 해놓고 있다. 그것도 무척 재치있게. 보통이 프루스트 전문가도 아닐 뿐만 아니라 설령 전문가라 하더라도 어느 한 사람의 해석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참고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당신이 프루스트의 텍스트를 직접 만나 이 정도의 의미를 잡아낼만한 능력 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보통의 정리를 다시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프루스트는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는 고열을 앓으면서도 죽음이 자신을 덮치는 그 순간까지 책을 쓰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단순히 과거의 흔적을 추적하는 회고담이 아니, “시간의 분해와 상실의 이면에 있는 원인들을 탐색하여 삶을 낭비하지 않고 삶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실천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낫낫이 기억하고 그 의미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프루스트는 소설을 읽는 행위(그리고 다른 모든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는 결국 자기 자신(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을 읽는 행위라는 걸 알려준다. 그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여주인공에게 부여하지 않고서는 소설을 읽을 수 없다고 말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가 읽는 소설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삶과 친밀한 교감을 나누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현실에서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가 된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아마 독자가 자신에게서 결코 경험해 보지 못했을 어떤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이 진실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35-36)

 

책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면(이를 마르키 드 로 현상MLP’이라고 한단다) 좋은 점은 무엇일까? 우선 책 속의 사건이나 인물과 유사한 일을 겪거나 유사한 사람을 만났을 때 당황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어떤 느낌도 자기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게 되며(, 고독감을 해소해주며), 우리가 명확히 서술할 수는 없었으나 우리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느낌들을 콕 집어서 지적해 주는 능력 덕분에 우리의 삶을 이전보다 더 잘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즉 이게 뭐지? 할만한 상황이 줄어들고, , 이게 그거구나, 하고 상황을 이해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프루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약 천재의 새로운 걸작을 읽게 된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멸했던 우리 자신의 성찰들, 우리가 억압했던 기쁨과 슬픔, 우리가 깔보았지만 그 책이 문득 우리에게 그 가치를 가르쳐 주는 감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42)

 

셋째, 프루스트는 여유 있게 사는 법을 알려준다. 작가는 이전에는 우리가 거의 마음에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없는 삶의 측면들에 많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깊이 들여다보고, 연민을 느끼고, 그것을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여 공감을 이끌어내는 존재이다. 잠드는 것을 묘사하는 데 30페이지를 쓴 프루스트야말로 작가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젊은 주부가 가정불화를 이유로 열차 밑으로 몸을 던져 사망.”이란 신문 기사를 단숨에 읽고 넘어간다면 『안나 카레리나』같은 걸작을 통해 받게 되는 것과 같은 감명은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사건을 접할 때 인생의 비극성과 희극성에 대한 귀중한 통찰로 이어지는 공감과 연민을 갖기 위해서는 위대한 작가들처럼 대상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넷째, 프루스트는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을 알려준다. (이 주제는 역시나 이 책의 가장 많은 페이지를 차지한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무척 논리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고 심지어 현자의 글 같았지만, 그 자신은 지독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 살았다. 유태인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와 간섭으로 지극히 의존적인 성격이 되었으며, (어머니와의 지나친 애착 탓에 강화되었을 지도 모를)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꼈으며, 이성으로부터도 종종 퇴자를 맞았으며, 동성애의 대상 역시 냉담함이나 죽음으로 그에게 고통만을 남겼으며, 집필 계획을 세웠던 자신의 희곡에 대해 어느 극장에서도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걸작은 한동안 어느 친구에게서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었었다. 육체적으로도 천식, 만성적 소화불량과 변비, 예민한 피부, 오한, 기침, 치통, 소음에 대해 민감함, 나쁜 시력 등에 시달렸으며, 침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정도로 허약했다. 그는 거의 모든 면에서 극도의 감각적 예민함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그는 정말 고통의 화신, 고통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우리를 향해 하는 말은 우리는 앓는다, 고로 생각한다는 것. 그에 따르면 우리는 문제가 있기 전까지는, 즉 우리가 고통에 빠지고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는 우리는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젊었을 적의 한때, 나중에 회고할 때 너무 불쾌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자신의 기억에서 기꺼이 지워버리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았거나, 그런 삶을 살지 않았던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전적으로 후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모든 어리석고 불건전한 삶을 통해서 궁극적인 단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면 진정 현명한 사람이 되었는지-우리 중 누구라도 현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한에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혜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도 우리 대신 가줄 수 없는 여정을 통해서, 누구도 우리 대신 해줄 수 없는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93-94)     

 

그는 또 말했다. “행복은 몸에 좋다. 그러나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고뇌다라고. 그러니까 만족보다는 불행이, 그리고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읽는 것보다는 고통스러운 연애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으리라. 그리고 고통의 정도가 클수록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사고의 깊이는 더 깊어지리라. 행복할 때는 그저 무지한 채로 남아있으리라.

 

그러나 고통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고통은 그저 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탐구의 가능성을 열어줄 뿐 고통 자체가 그것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더 큰 지혜는 제대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불행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는 데 있다. 보다 많은 경우에, 고통은 더 헛되고 나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고통(콤플렉스)에 대처하는 잘못된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해결책을 생각해 보도록 유도한다. 예컨대 사교계의 최고 귀족가문들의 초청인사 목록에 들지 못해 괴로워하는 베르뒤랭 부인의 경우, 손이 닿지 않는 신포도에 대처하는 여우처럼 좌절된 대상에 대해 무작정 비난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좌절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른 인물들의 경우에도 자신의 실수나 무지나 결점에 대해 보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결함은 극복될 수 있으며 보다 지혜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아야 함을,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섯째, 프루스트는 감정을 표현할 때 진부하거나 허식이 가득한 문장을 사용하지 말고, 보다 상황에 맞는 표현, 좀더 정직하고 정확한 표현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진부하고 허식이 가득한 표현법에 매달리는 것은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방식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프루스트는 집요할 정도로 구체적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 적합한 말을 찾도록 노력했다. 그는 모든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확실성이란 없습니다. 심지어는 문법적인 확실성도 말입니다. … 우리의 선택, 우리의 취향, 우리의 불확실성, 우리의 욕망, 우리의 연약함의 모습이 새겨진 것만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132)

 

우리는 작가는 아닐지라도, 세상을 주체적으로 느끼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흉내나 내는 말을 하면 자신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상투어로는 결코 자신만의 정체성을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 생각의 고유한 성격을 더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관례를 무시해야 한다.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모든 성공적인 예술작품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전에는 왜곡되었거나 무시되었던 현실의 측면들을 우리의 시야에 회복시키는 능력이다. 프루스트의 표현에 따르면,

 

허영, 열정, 모방심리, 추상적인 지성, 습관이 오랫동안 우리의 눈을 가려 왔으며, 예술의 과제란 그것들을 치우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술은 우리를,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숨겨져 있는 깊은 층위에 도달하도록 이끈다. (142)

 

그러니까 삶은 상투적이라기보다는 낯선 실체라는 걸 인정하잔 말이다!

 

여섯째, 프루스트는 자기자신을 지키면서도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을 알려준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아낌 없이 베풀고 아낌없이 칭찬하는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기억되었다. 스스로 대화의 주제를 이끌지 않고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기울여 들어주며 상대의 관심사에서 대화의 소재를 찾아냈으며, 누구도 지루해하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정중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의 이런 태도는 사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는, “친교의 표현 양식인 대화란, 습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피상적인 여담일 뿐이다. 우리는 일 분 일 분의 공허함을 무한정 반복하는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평생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단언하면서, 친교란 본질적이고 소통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유일한 부분을 피상적인 자아를 위해 희생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친교는 우리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려는 거짓말이상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정한 사람이었다는 게 아니다. 어느 정도의 회의주의는 오히려 삶의 불완전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친교에 대한 프루스트의 비관적 태도는, 친구가 우리의 가장 심오한 자아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력자라거나 우리의 관심사와 타인의 관심사가 쉽게 일치할 수 있다는 낙관적 기준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상대에게 보다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상 대화란 게 시간과 공을 들여 계속해서 수정할 수 있는 글쓰기와는 달리 공백도 수정 기회도 없이 쉬지 않고 쏟아내야 하는 특성 탓에, 의사가 상당히 왜곡될 가능성이 높은 불완전한 전달 방식임에 틀림없지 않는가. 또 오로지 이기적으로 자신의 관심사에 충실 하느라 상대를 지루하게 하느니 상대방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게 보다 실용적인 친교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프루스트에게는 친교의 목적이 소통(지적 교류) 보다는 온정과 애착에 있었다. 대부분 자신보다 지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 바랄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게다가, 진지하고 솔직한 태도는 종종 친교에 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타자와의 교류를 위해서는 친교보다는 독서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프루스트는 애정과 진실을 분리함으로써, 충직하고 매력적인 친구이자 정직하고 심오한 사상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대화라는 무계획적이고 두서 없고 피상적인 매체의 처분에 맡기기엔 너무 중요한 주제임을 잊지 말 것, 그러니 친교 시 질문에 답하기 보다는 질문을 하는 입장이 될 것, 친교를 남들을 가르치기 보다는 그들에 대해 배우는 장으로 생각할 것.

 

일곱째, 프루스트는 좋은 삶이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부당하게 무시하고 헛되이 다른 것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가르쳐준다. 그는 화가 샤르댕이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이루는 대상들을 아름답게 볼 수 있도록 복원해 내는 재능에 감탄하면서, 예술가의 역할이 이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해 눈을 뜰 수 있도록, 미처 발견하지 못한 미감을 찾아낼 수 있도록 매개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봄으로써 생길 수 있는 행복은 프루스트의 치유 관념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불만이, 삶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대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의 유년기가 흐릿하고 평범하게 기억되는 까닭은 유년기에 실재로 매혹적인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억들을 잊어버린 탓이다. 한 조각의 마들렌이 불러일으킨 유년기의 풍부하고 친밀한 기억은 그의 유년기가 자신이 기억보다 더욱 아름다운 시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평범했던 것은 그의 삶이 아니라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삶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삶이 매우 아름답게 보이는데도 삶이 사소한 것처럼 생각되는 까닭은, 삶의 흔적 그 자체가 아니라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고 있지 않은 매우 다른 이미지들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는 데 있다. – 때문에 우리는 삶을 멸시하는 것이다. (195-196)

 

우리가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고 믿는 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탓이다. 우리 자신에게 고유한 아름다움은 언제나 삶의 소박하고 세부적인 사소한 모습들(폭신한 벙어리 장갑 한 짝, 가느다란 냄새를 피워 올리는 풀꽃 향기등처럼)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들은 대체로 낡았을 뿐 아니라 쓸데없이 사치스럽다. 프루스트는 수수한 광경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복원하라고 주장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특정 계급이나 집단의 천편일률적인 취향을 연결시켜 이해(확신)하는 조잡한 방식을 넘어서서 그 사람만의 독특한 취향과 특징을 들여다 볼 것을 권한다. 그런 것이 없다면 아무리 그의 직함이 화려하다 해도 그는 자신만의 미학이 없는 지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역으로 말한다면, 누구든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에 있어서 진부한 계급적 교양에 기대지 말고 보다 섬세하게 개발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스스로 평가할 능력이 없는 속물 예술 애호가가 자신의 느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의 교양을 입증하려는 무교양적 행태를 벌이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알고 있다면 말이다.

 

여덟째, 프루스트는 행복한 사랑을 하는 법을 알려준다. 비법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간은 친숙한 것을 경멸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다. 인간은 영구적으로 보이는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반대로, 무언가 박탈 당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사랑에 있어 밀땅의 법칙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진리인가 보다. 프루스트도 이렇게 말한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저항하고, 즉시 소유할 수 없으며, 앞으로 소유할 수 있을지조차 처음에는 알 수 없는 여성들만이 유일하게 흥미를 끄는 사람들이다.” 프루스트에게는, 오늘 밤 시간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창녀는 제 아무리 매력적이라 할 지라도 사랑의 감정을 자극할 수는 없다. 슬픈 창녀의 딜레마’. 여성들이여, 그리고 남성들이여, 행복한 사랑을 하려거든 때때로 오늘 밤 시간이 없어요라고 말할 준비를 하라. 그리고 가끔씩 질투심을 자극하라. 습관은 사랑의 가장 큰 적이며 불확실성이야말로 사랑의 최음제이므로!

 

아홉째, 프루스트는 책을 치워버려야 하는 순간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대가가 느꼈던 것을 자신 속에 다시 그려 보려고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때문에 독서를 해야 한다. 그러나 설사 우리를 돕는 것이 다른 작가의 생각일지라도, 결국 우리가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이다. 책들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감수성을 키워주고 지각능력을 길러주지만, 어떤 시점에 다다르면 그러기를 멈춘다. 이것은 그 저자가 우리가 아니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대가들은 우리의 상황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커다란 자극은 주지만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독서의 역할이 안내원역할에 있는 것이지 해결사역할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

 

우리 속 깊은 곳에 있지만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알지 못했던 집의 문을 마법의 열쇠로 열어주는 한, 우리의 삶에서 독서의 역할은 유익한 것이다. 반면에 독서가 정신에 자신만의 삶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해진다. 그러면 진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사고의 본질적인 진보 및 우리의 진실한 노력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이상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몸과 마음이 완벽히 평온한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맛을 보면 되는,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246-247)

 

작가는 신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깊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디 예술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자. 예술가가 포착한 아름다움은 대상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자신만의 이유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고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에 내재한 일반적인 교훈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자. 일리에 콩브레에 가서 마들렌을 먹어본다고 해서 프루스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 말로 예술 우상숭배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하는 것일 터.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콩브레를 방문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일 거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야말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내린 나의 소박한 결론:

1.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고 많은 지혜를 주는 중요한 작가임에 틀림없구나. 꼭 읽어봐야겠다.

2.     보통은 글을 참 재치 있고 재미있게 잘 쓴다.

3.    책만 들여다보지 말고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기울이고, 주말에는 하이킹을 가자. 오늘을 소중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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