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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이 이야기는 진실은 기억의 주체, 혹은 역사적 해석 의도에 따라 완전히 그 실체가 달라진다는 포스트모던한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진실의 모호성, 기억의 불완전함이나 왜곡 가능성을 경고하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이 소설을 반만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토니는 결국 자신의 잘못된 기억을 정정하고 진실의 실체와 대면하는 순간을 맞기 때문이다. 무려 40여년 전의 애인이었던 베로니카가 자신 몫이라며 넘겨준 얼마간의 유산과 역시 40여년전에 이미 죽은 친구 에이드리언의 일기 한 페이지, 메리라 불리우는 베로니카와의 몇차례의 간단한 이메일 교환과 두 차례의 짧은 만남, 이런 작은 퍼즐 조각으로 토니는 진실에 다다른다. 물론 진실은 언제나 끔찍한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진실의 추함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다. 찌질한 “평균치 인생”을 살아온 토니가 더 이상 찌질한 인간이기를 멈추고 성숙한 인간으로 탈바꿈 하게 되는 계기는 바로 그가 이 진실 찾기를 멈추지 않았다는데, 그리고 그 진실을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냉정하게 성찰하는 일과 연계시키는 의미화 작업을 행했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 전체의 주제는 사실 -대부분의 좋은 장편들이 그렇듯- 소설의 앞부분에 모두 복선으로 나와있다. 역사 선생과 학생들간에 주고받은 역사에 대한 생각들이 괜히 삽입된 게 아닐 것이므로. 난데없이 시작된 진실 찾기 게임을 통해, 역사가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만 생각했던 미숙한 토니는 자신의 자기기만적 기억을 마주하면서 결국 역사가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조 헌트 선생의 정정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토니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건 역설적으로 역사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토니에게는 명징한 정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말하면서 친구 롭슨의 자살의 실체적 진실을 알기 힘들다는 것을 예로 들며, 진실을 안다는 것(역사 이해)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조 헌트 선생이 에이드리언을 향해 제기한 반론은 의미심장하다. 선생은 롭슨 자신의 증언이 없다 해도 검시관의 보고서, 일기나 편지, 전화 기록, 주변인 인터뷰 등을 통해 진실에 근접할 수 있으며, 당사자 본인의 설명에 의존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며, 행위를 통해 행위자의 정신상태가 추론될 수 있으므로, 역사와 역사가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바로 이런 일들이 토니가 나중에 실행하게 되는 작업들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억은 경험이 주관적 해석을 거쳐 입력된 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분류, 수정되는 역동적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으며, 나아가 왜곡이야말로 기억의 본질이라는 사실에 오늘날의 뇌신경과학자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그런데 문학의 역할이 고작 이 뻔한 신경과학적 사실을 확인하는 일에 있겠는가? 사실 기억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리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를 하는 건 오로지 현재의 욕구와 관심사 때문이라는 데서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다. 토니의 기억이 패배감과 수치감이라는 자신의 해석과정과, 이 경험을 없었던 것으로 부정하고픈 이후의 욕구 때문에 왜곡되어 저장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과연 이 왜곡된 기억의 객관적 진실을 되찾는 일, 즉 다시 기억하기, 기억 수정하기를 통해 토니가 찾게 되는 삶의 진실은 무엇인가? 문학이 답하는 건 바로 이 부분일 거다.
또다시 작가가 앞부분에 깔아준 복선으로 돌아온다면 이해가 훨씬 명확해질 것이다. 장면은 영어 수업시간. 필 딕슨 선생은 “’탄생, 성교, 그리고 죽음.’ 이것이 T. S. 엘리엇이 말한 인생의 총체이지.”라고 말한 후, 이름 모를 시를 한 편 들려주고는 학생들에게 감상을 묻는다. 학생들 가운데 가장 진지하고 똑똑했던 에이드리언은 이 시가 “에로스와 타나토스”에 관한 이야기라고 답한다. “죽음의 원칙과 충돌하는 에로스의 원칙,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에 대한 이야기”라고. 당시에는 누구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에이드리언은 “타나토스에 굴복”하고 만 듯,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그렇다면 토니의 삶은 어땠을까? 과연 에로스가 충만한 삶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버전의 타나토스에 붙들린 삶이었을까?
나름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토니 앞에 베로니카라는 까다로운 수수께끼가 다시 떨어졌다. 수수께끼를 받아 들기 이전의 토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젊은 날의 그는 사랑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상대의 진심을 저울질하고, 취향에 대한, 계급적 차이에 대한 열등감으로 상대의 사소한 언행도 모욕으로 받아들이며, 질투심으로 인한 적의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소심하고 좁은 마음의 소유자다. 그러니까 과거의 그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건들은 그런 그의 태도가 낳은 해석들을 거친 기억의 산물인 것이다. 그는 노년이 된 지금까지도 철저하게 “자기보존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온 인물이다. 다시 말해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그는 오로지 점수를 잘 받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고, 감정을 유예하고, 적당히 책임지지 않을 연애만 했다. 이후에도 겉으로는 이혼한 아내와 친분을 유지하고 결혼 한 딸과도 가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동네 병원 도서 관리직으로 자원봉사도 하면서 적당한 만족감을 유지하지만, 그 어떤 관계나 일에서도 진정성은 부족하고 그러니 당연히 외로운 삶을 산다. 그런 가운데, 기억의 목록에서 지워버리려고 할 만큼 토니에게 수치를 안겨준 옛 애인 베로니카라는 불편한 과거가 모습을 드러내자 위기감에 사로잡힌 토니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불청객과 집요한 한판 퍼즐게임을 벌이게 된다.
그 시작 단계부터 토니는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에이드리언이 남긴 편지의 말미가 “만약 토니가”로 끝나버리자 토니는 그 뒤에 올 말들을 여러가지로 상상해 보는 부분은 무척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토니가 더 분명하게 바라보고, 더 단호히 행동하고, 더 진실한 윤리적 가치를 고수했다면, 그가 애초엔 행복이라고, 그리고 나중엔 만족이라고 칭했던 수동적인 평화 상태에 그처럼 쉽게 안주하지 않았다면. 만약 토니가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허락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서 허락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면 등등. 그렇게 가설에 가설을 거듭하면 마지막 가설에 이르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만약 토니가 토니가 아니었다면. (154쪽)
후반부에 토니는 세 차례에 걸쳐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데, 첫 번째 진실을 발견한 후에는 이런 절절한 회한의 감정에 시달린다.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했고, 인생이 내게 던져주는 얼마 되지도 않는 교훈에 대해 크게 깨달을 깜냥도 못 되었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마냥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젊은 시절 알게 된 친구를 잃었다. 즐겼던 야망을 저버렸다. 인생이 너무 성가시지 않기를 바랐고 성공을 거두었다. 이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평균치. 학교를 떠난 후 나란 인간은 줄곧 그랬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평균치. 우정과 성실과 사랑에서 평균치. 섹스에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평균치였다…. 평균치란 말이 메아리 쳐 울려 퍼졌다. 평균치 인생. 평균치 진실. 평균치 윤리관. (173-174쪽)
이 대목에서 정말 뜨끔했다. 속 좁고 상종하기도 싫었던 천하의 찌질이 토니와 내가 다를 바 뭐란 말인가! 과연 나는 언제 한 번이라도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다운 대결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소설의 초반에서도 에이드리언은 역사를 인식함에 있어서 어느 한 개인이나 구조나 카오스적 본질에 떠맡기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개개인의 책임소재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책임에 관한 생각은 그의 짧은 일기에서도 반복된다. 첫 번째 진실의 전기충격을 받은 토니 역시 책임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게 되는데, 결론은 에이드리언의 것과 비슷하다.
나는 그 범위를 좁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뜬 부모도, 형제자매도, 외동 신세도, 우리의 유전자도, 사회도, 그 어떤 것도 원망할 수 없다. 정상적인 환경에 있다면 안 될 일이다. 그와 정반대인 상황을 강력히 입증할 만한 것이 없다면, 자신의 인생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개념부터 챙겨라. (181쪽)
어쩌면 토니는 우리보다 운이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죽음이 모든 것을 무화시키기 전에 자신의 삶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에.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182-183쪽)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붕괴하는” 순간을 겪어야만 한다. “그 새로운 것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 해도.”(183쪽) 그러면 기억의 붕괴, 지나온 삶의 붕괴를 체험한 토니는 이제 “타협과 부박함으로 점철된 인생”(239쪽) 항로를 벗어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깨달았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토니는 베로니카로부터 계속해서 “아직도 감을 못 잡는”다고 질책을 받고, 수제 감자칩이 두꺼운 감자칩이라는 속뜻을 못 알아차리고 글자 그대로 손으로 만든 감자칩인 줄 알고 펍 주인에게 따지고 들어 상대를 황당하게 만든다. 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게 마련인 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를 향해 기꺼이 마음을 열어두는 용기가 없다면 세상은 온통 이해불가의 모호한 모순덩어리로 다가올 뿐일 것이다. 그런 용기를 뒤로 하고 두려움 때문에 “자기보존욕구”에만 충실하게 산다면, 그러니까 “나뿐인 놈”(=나뿐놈)이라면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도, 삶의 구원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해를 하게 되면 두려움도 사라진다.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 학문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145쪽)
마침내 베로니카의 진실-그 일면이라 할 수 있겠지만-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 토니는 베로니카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 아프게 공감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이들을 이전과는 달라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다. 비로소 타인과의 진정한 교감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토니의 ‘죄’라는 것도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는 살인자도 아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일부러 곤경에 빠뜨리는 싸이코패스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보통의 수동적인 인간에 가깝지 않은가? 그러니까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잤다는 끔찍한 진실을 뒤늦게 알게 된 오이디푸스처럼 제 눈을 찌를 필요까지는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바로 그 수동적 삶의 태도가 얼마나 비윤리적인 것인지를 이토록 강력하게 설득하는 소설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서둘러 줄리언 반즈의 다른 책들을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2012.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