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소설집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를 정말 기대하지 않고 봤는데 정말 충격적으로 읽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듯... 그 작가는 젊은 작가인데 정말 요즘 스타일의 글이 아니고 좀 예전 느낌의 글을 쓴다. 엄청 한자한자 정성스럽게... 감각적이고 발랄하고 통통 튀는 감성적인 요즘의 글들이 아닌 정말 마음 깊은 곳의 감정을 건드려서 생각하게 하고 많은 여운이 남는... 그런 글을 쓰는 특별한 작가였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많이 궁금했다. 바로 읽어볼 수도 있었지만 작년에 사둔 책이 아직 책장에 꽂혀 있었고.... 나름 아껴두었다 읽었다.
음.... 역시 글은 정말 잘 쓰는 것 같다. 어떤 작품이든지 허투루 쓰지 않고 정말 되새기고 생각해보고 감정을 쑤~욱 건드리는 것 같은....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좋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좋은 문구들이 많아서 적어놓고 싶고.. 다시금 새기고픈 부분들이 참 많았지만.... 이 책 전체에 흐르는 십대 이십대...작가가 지나온 미성년의 시간이 스며 있다는 이 글들 어린아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고독, 한량없는 슬픔과 외로움, 스쳐지나가는 우정과 사랑, 상실의 감각, 관계망 속 미세한 균열, 여성주의, 영원하지 못 하는 감정의 불안정성.... 암튼 이런 이야기들의 모음이라서 그런지 .... 좋아할 수는 없다. 좋은 글이었지만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고 물론, 비슷한 작품만 모은 소설집이겠지만 계속 비슷한 자조랄까, 자아비판이랄까, 후회랄까, 미련이랄까, 상실한 뒤의 공허.... 등이 전반적으로 있어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다음 작품은 다를까? 아무리 글을 잘 쓰셔도 내 정서랑은 안 맞아서.... 다음에는 다른 이야기도, 다른 소재도, 다른 분위기의 글을 기대해본다.
[그 여름].....이경과 수이.....첫 사랑, 그 기쁨과 불안정성....가슴에 많이 남았다.
[601, 602]... 남존여비.... 나 어릴 때 시절이 그랬더랬다. 그 때 나도 속상한 부분이 한 두개가 아니었지만... 그 시절에도 본 적없는 극단적 효진이네 집..짜증났다.
[지나가는 밤]... 너무 다른 자매 윤희, 주희....그래도 그녀들에게는 둘 뿐..젤 임팩트가 없다.
[모래로 지은 집] 모래, 공무, 나비... 너무나 다른 고교 익명동호회 통신 친구.... 셋의 우정과 사랑... 발랄한 청춘 드라마를 바랬던 건 나의 욕심이었다. 좋은 문구들이 많았고 그냥 그냥 읽어버리기 아까운 글이었다.
[고백] 수사가 된 종은에게 고백한 미주의 이야기... 고교 친구 미주, 주나, 진희.....여기도 세친구... 발랄한 청춘 드라마는 이 작가 님의 글에서 바라지 말자. ... 마음이 아팠다.
[손길]...신혼부부 삼촌 집에서 어린 시절 살았던 혜인... 헤어지고 한참 만에 만나는 숙모....사람들은 왜 이리 염치가 없을까? 너네는 뭐가 그리 잘났냐고.. 따지고 싶고.....숙모랑 혜인은 다시 관계를 형성하면 좋으련만...
[아치디에서] 아일랜드에 무작정 사랑찾아 날아온 백수 브라질 청년 랄도와 한국에서 날아온 말을 돌보는 하민의 아일랜드 시골 아치디에서의 만남,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이야기.... 참 상처입은 사람도 많고 이해 안 되는 상황도 많고... 남자다움의 희생양 랄도와 한국에서 여자라서 딸이라서 희생을 강요당하고, 병원에서 혹사 당하는 그런 일들... 이 또한 짜증이 넘 나더라...
암튼, 이 작품의 글귀들은 생각이 많이 날 것 같다. 특히 ‘모래로 지은 집’
...이경은 자신의 기만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그 거짓말이 비겁함이 아니라 세심하고 사려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려라니. 지금의 이경은 생각한다. 배려라니. 그 거짓말은 수이를 위한 것도,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이고 위선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이경은 몰랐다. p.52
왜 병든 사람들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 p.109
왜 이해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을까.
고등학생 공무는 천리안 동호회에 그렇게 썼었다. 그 문장은 며칠이고 내 안에서 구르면서 마음에 상처를 냈다. 나는 늘 이해하려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공무의 글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나를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를 강요받고 있었다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 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p.121
“모든 건 다 변한대.” 모래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시간이 가면 다 변한다고. 영원한 건 없다는 말 있잖아. 그런데 너희를 만나고 그 말이 싫어졌어. 왜 변해야 돼? 왜 지나야 돼? 공무 사진처럼 그냥 어느 순간에 그대로 남고 싶기도 했어.”p.131
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해. 어쩌면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무서운 일이라고.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알리바이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p. 156
나비는 세상 모든 이름 없는 고양이들의 이름이라고. 그냥 길 가는 고양이에게 나비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들이 좋아서 나비라고 했다고. 화를 내면서, 악을 쓰면서 나비야, 나비야, 하진 않잖아, 라고. 그래서 나도 너를 부를 때 나비야, 나비야, 하고 어쩐지 다정하게 불렀던 것 같아. 넌 이름 없는 고양이들에게서 너를 봤을까.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봉투를 뜯는, 이름 없는 고양이라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하기도 하는 그 길가의 애들에게서 너를 봤을까. p.176
중력도 마찰력도 없는 조건에서 굴린 구는 영원히 굴러간다.
언젠가 네가 한 말을 난 종종 떠올렸어. 영원히 천천히 굴러가는 공을 생각했어. 그 꾸준함을 상상했어.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보면 쓸쓸해지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여서.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력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은 되지 않을 거야. p.179
.........사람에게 치명적으로 상처받지 않았으므로 마음껏 다정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p. 180
당시는 몰랐지만 오랜 시간 내 마음속에서 자라나던 공포는 그때부터 본격적을 커졌던 것 같다. 절대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 그것이 나의 독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게 했다. 어느 시점부터는 도무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어 멀리서 맴돌기만 했다. 나의 인력으로 행여 누군가를 끌어들이게 될까봐 두려워 뒤로 걸었다.
알고 있는데도,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몸은 그렇게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