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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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정말 눈물 콧물 다 흘리다가 히히 낄낄 웃다가 누가 보면 흡사 미친 사람처럼 읽었던 기억이 있다. 색다르고 좋은 경험이어서 이후 작가 님 작품을 찾아서 귀하게 재미있게 읽어왔는데 드디어, 반갑게도 이번에 신작이 나왔다.

제목부터 소개글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골 마을에 레지가 이사왔다로 시작하는 소개글을 보고 나도 처음에는 당연하게 다방 레지인줄 알았다.(이렇게 레즈비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녹아나는 작품이 있었나?)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너무 흥미진진 재미있고 몰입되어 끊을 수 없고 덮을 수 없기 때문에 이동수단이나 짧은 짜투리 시간에 읽으려고 펼치는 건 절대 말리고 싶다. 나도 우연히 지하철에서 펼쳤다가 끊고 싶지가 않고 잠깐이라도 책을 덮고 싶지 않아 식겁했기 때문이다.(아니, 길에서 걸으면서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출판사 소개글에서 소설은 첫 페이지부터 독자를 수평마을 한가운데로 단숨에 끌고 들어간다. 오전 여덟시 반, 마을회관에 긴급 소집된 노인들 앞에서 자칭 지식인이자 마을의 실세인 ‘윤 선생’이 비장하게 폭로한 중대 사건은 서울에서 귀촌한 두 젊은 여성 성진과 혜진, 일명 ‘찌니들’이 “여자끼리 좋아하는” ‘레지’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촌로들이 아는 ‘레지’는 레즈비언이 아니라 다방에서 일하는 여성을 일컫던 옛말. “새 레지가 왔으먼 나가 모를 리가 없제”라는 여든일곱 한씨의 호언장담에 엄숙했던 회의는 순식간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말의 뜻을 겨우 알아들은 뒤에도 ‘절골댁’은 태연하게 묻는다. “좋응게 항꾼에 살겄지라. 싫으먼 암만 같은 여자라도 항꾼에 살겄소?” 진짜 갈등은 이제부터다. 여자끼리 함께 살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뿌리 깊은 믿음 앞에서 찌니들은 졸지에 해괴하고 위험한 존재가 된다. 윤 선생은 “마귀 새끼”를 당장 쫓아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세상의 날 선 시선을 피해 수평마을까지 흘러온 찌니들은 다시 문을 걸어 잠근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찌니들은 그들의 폭력적인 무례함을 견딜 수 없다. 고요하던 수평마을에는 마침내 일촉즉발의 ‘찌니주의보’가 발령된다. 이후 펼쳐지는 대환장 파티들..

하지만 윤 선생의 계획은 좀처럼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장의 베트남인 아내 쑤언이 찌니들을 몰아내려는 마을 사람들 앞을 가로막는다. 이십년 전 낯선 땅으로 시집와 이방인으로 살아온 쑤언에게 찌니들의 처지는 남의 일이 아니다. “갸들이 사램을 죽였어, 도둑질을 혔어? 머슬 워쨌다고 지랄옘벵을 떨어싼대?”

수평마을 누구보다 거침없는 언변을 자랑하는 쑤언의 등장은 이야기에 예측 불허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찌니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완고한 시선보다 촌로들의 모순된 행동이다. 내쫓아야 한다고 수군거리면서도 찌니들의 집 문고리에 시래깃국과 가지나물을 슬며시 걸어두고, 낯 뜨거운 질문으로 사람을 질리게 하고는 돌아서다 말고 갓 부친 호박전을 손에 쥐여준다. 자신들을 미워하는 것인지 아끼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치명상을 입혀놓고 음식을 먹이는” 기묘한 이웃들 앞에서 찌니들이 굳게 믿어온 선과 악, 예의와 무례의 경계도 조금씩 흔들린다. 여기에 찌니들의 서울 친구 기희가 반려 닭 ‘삐돌이와 삐순이’를 데리고 나타나면서 마을은 또 한번 발칵 뒤집힌다. 닭을 자식처럼 유모차에 태우는 도시 여성과 평생 닭을 가축 이외의 존재로 생각해본 적 없는 노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소동은 폭소를 자아내는 동시에,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얼마나 엉뚱한 방식으로 뒤섞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처음 펼치면서 윤 선생과 이웃들의 무례함과 편견에 화가 났는데 볼수록 한 명, 한 명 사연들이 보통이 아니다. 누구나 비밀이 있고 사연이 있고, 조금씩은 나쁘고 이상한 이 마을, 아니 이 세상에서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이 서로 얽히며 기묘한 나눔과 도움, 무례를 주고 받는 당황스러운 전개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예전 해학과 풍자극을 보는 듯 하다. 작가 님은 참 생활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해학적으로 잘 풀어내신다. 물론, 그래도 막말과 무례함 등으로 끝까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고 어디서 보아왔고 경험했기에 그런 사람들의 무례함이 떠올라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인생이 그렇잖아.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무례하고 어처구니 없는 경우를 겪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러면서 위안을 받고 서로 도움도 주고 받는 게 인생이었지.

 

이 작품에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넘쳐난다. 단연코 제일 멋있는 쑤언(이장의 부인이자 베트남 이주여성인데 이렇게 멋진 캐릭터라니, 그녀의 시어머니가 더욱 고맙다.), 작품에 갈등과 다양한 흥미를 주는 윤 선생(정말 안 만나고 싶은 캐릭터지만 이웃, 사회 속에 꼭 있는 캐릭터), 대환장 웃음과 폭소를 담당하는 닭에 미친 기희 등을 비롯하여 여기에 나열하지 못 한 캐릭터들이 하나하나 너무 재미있다.

 

퀴어와 이주, 노년과 가족, 돌봄과 공동체라는 오늘의 문제가 생생하게 담겨 있고, 그렇다고 아름답게 완전히 서로를 이해하고 안아주지도 않지만, 흉을 보고 다투면서도 누군가 아프면 밥을 챙기고, 미운 이웃이 위험에 빠지면 먼저 손을 내미는 구체적인 시간이 있는 오래된 마을의 정겨움과 새로운 관계가 얽혀서 참 유쾌하고 행복한 읽기의 시간이었다.

 

아... 큰 일이다. 작가님 어떡해요...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고요.

물이 오르셨다는데(황석영 선생님 추천평에서 감히 가져다 씁니다.).. 다음은 더 좋아지는 거죠?^^

 

건강하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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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ㅣ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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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굉장히 인기가 많았던 책. 항상 베스트셀러를 사두고 묵혀 읽는 나쁜 습관으로 이제야 읽었다.

몰입되고 금방 읽힌다. 모두가 연애이야기라고 하기에 그런갑다. 읽었는데... 이 작품은 호불호가 아주 많이 나뉘는 책이었는데 나는 불호였다.

이야기가 순식간에 읽히기는 하지만 내용이 내가 좋아하는 전개가 아니었다. 사랑이야기 너무 좋아한다. 성장 치유 이야기도 굉장히 좋아한다. 학원물 넘 좋아하지. 그런데... 왜 이렇게 불편하고 공감이 되지 않은 걸까?

 

출판사 리뷰

열여덟. 그들은 그날 그 밤의 사건을 덮어 둔 채, 가족의 손에 이끌려 작별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번에 잃게 된 악몽 같은 순간을 매일 복기하며 서로 다른 성격으로,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날 이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이 남긴 거대한 물음표를 지닌 채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거나, 혹은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품고 죄인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스물하나.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우연히 재회했을 때, 도담과 해솔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한 채다.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 연인이 되지만 이들의 관계는 절뚝거리고 위태로워 보인다. 그들은 이 사랑이 죄책감 때문인지 진짜 사랑인지 혼란스러워하며, 지난 불행을 잊기 위해 이번에는 반드시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서로의 얼굴을 보면 진평에서의 그날이 떠올라 서로를 똑바로 보지 못한다. 소설은 같은 트라우마를 지닌 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도담과 해솔이 같은 상처를 어떻게 다르게 지나가는지, 어떻게 다시 한 번 서로를 사랑으로 선택하는지를 그려낸다. 충격적이지만 보편적인 사랑이야기이자, 애틋한 사랑이야기인 동시에 낭만적이기만 하지는 않은 복잡하고 깊은 물 같은 이야기다. 시간이 흐르며 그들이 마주하게 된 사랑과 진실들은 각기 다른 유속과 방향으로 흐르는 물처럼 한 가지가 아니지만, 각자의 물살에 따라 살아가던 도담과 해솔은 몇 번이고 서로를 향한 끌림, 애처로움과 죄의식,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느낀다. 사랑을 이루는 감정은 하나가 아니며, 그러므로 사랑의 성질 역시 다이아몬드처럼 순정한 한 가지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여러 감정이 축적된 퇴적암에 가까울 것이다.

이처럼 『급류』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단 한 가지 모양이 아닐지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사랑에 눈뜨고, 배신당하고, 사랑을 믿고, 믿지 않고, 사랑에 빠지기를 두려워하거나 혹은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해 보려는 이들이 이 소설에는 등장한다. 언제나 잔잔할 것만 같던 수면이 한순간 예상치 못한 깊이와 속도로 깊고 거세지는 물 같고, 따뜻하게 쬘 줄만 알았던 불꽃이 순식간에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뜨겁게 치솟는 불 같은 것. 그만큼 예상치 못한 사랑의 성질을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깊이 경험할 수 있을까? 용감하게 몸을 던져 깊은 물의 바닥까지, 뜨거운 불의 안쪽까지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사랑을 한 뼘 더 가늠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랑의 모양이 하나일 수 없고 아름답기만 한 것이 사랑이 아니며 사랑에 빠지는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사랑을 이해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것 같다.

 

또 하나 많은 이들이 좋아하지만 나는 불호인 작품을 만나 뭔가 당혹스러워 서평도 늦게 남겨보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싶은... 오랜만에 서평쓰기가 싫어졌던 읽기...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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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명 버튼 ㅣ 위픽
김동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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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픽시리즈 읽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데 그런 것 치고는 늦게 보게 된 ‘백 명 버튼’, ‘회색인간’으로 알고는 있었고 다른 소설집 모음에서 작가 님의 작품을 읽은 적은 있지만 어쩌다보니 늦게 접했다.

너무 참신한 소재와 있을 수 있을법한 다양한 상황들이 펼쳐져 작가님의 거침없는 상상력이 너무 흥미로웠다. 내용도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고 유독 짧게 느껴져서 정말 30분도 안 걸려 후다닥 읽어버린 이야기.

출판사 소개글 - 인간 세상에 홀연히 나타난 악마는 백 명이 누르면 그중 한 명이 성공하고 두 명이 파멸하는 ‘백 명 버튼’을 만들어 판매한다. 이 의문스러운 버튼을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코 꿈꿀 수 없는 성공과 뜻하지 않은 파멸을 목격한다. 누구나 단돈 만 원이면 ‘백 명 버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세상은 점차 지옥으로 변해간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타인을 짓밟을 준비가 된 사람들과 불행한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들. 어느 쪽이든 눈앞의 ‘백 명 버튼’을 피할 수는 없다. 선택지는 단 하나.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짧지만 강렬하고 빈틈없는 서사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부터 팬층을 다져온 이야기꾼 김동식은 『백 명 버튼』이 불러온 불행과 절망, 탐욕과 공포의 장면들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거침없는 상상력은 예측할 수 없는 전개를 빚어내고,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을지 한계를 시험하는 듯하다. 그러나 깃발이 위태로울 만큼 모래를 걷어낸 자리에는 김동식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희망과 연대라는 이름의 든든한 주춧돌이 남아 있다. 함부로 불행에 절망하거나 탐욕에 지지 않기를 바라며, 손을 놓친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닌지 수시로 뒤를 돌아보는 김동식의 세계에 악마가 설 자리는 없다.

 

만약에 내가 ‘백 명 버튼’을 만난다면 나는 사용할까? 나는 관심갖지 않을 거지만, 놀랍게도 책 속에서는 원하지 않지만 써야되는 상황들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버튼 기계와 노예같은 내용들은 너무 비참하고 악랄한데 그런 것들이 현재 세상에서 행해지는 것들을 비틀어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끔찍했다. 아무튼 작가님의 상상력이 참 놀랍고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면의 다양성과 무한한 확장성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작가님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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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의 온기
김혜진 지음 / 창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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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김혜진 작가 님의 작품은 처음 보게 되었다.

단편 소설집이다. 작품들이 최근에 읽어온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과 다르다. 예쁘거나 아기자기하지는 않은데 뭔가 문학적이고 담백하고 본질적인 부분이 있다. 어찌 보면 인물들이 비호감인 것도 같고 뭔가 주류에 속하지 못 한 외롭고 뭔가 고립되어 있지만 그래도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꼿꼿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며 우직하게 살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아니었음에도 볼수록 빠져 들었고 정말 사람에 대한 애정, 대단하게 따뜻하지 않았지만 은근하고 과묵한 선의의 인물들로 인해 읽는 동안 위로를 받았다.

 

제목과 표지의 따뜻함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 <관종들>에서 내가 이 사람의 이웃이라면 이들을 과연 좋아했을지 의문이 갔고 뭔가 불편했는데 다른 작품들을 읽어나가면서 왜 점점 빠져들었을까?

출판사 소개글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삼켰던 고독한 말들이 타인의 어깨를 다독이는 진심 어린 손길로 치환될 때, 『달걀의 온기』 속 인물들은 비로소 자기만의 성벽을 허물고 세상 밖으로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디딘다. 타인의 고통에 함부로 뛰어들어 손쉬운 위로를 건네기보다 스스로 진창을 딛고 일어설 때까지 묵묵히 곁을 지키는 김혜진 특유의 신중하고 사려 깊은 방식은 지금 우리 시대에 소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고요히 증명해 보인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아주 조금의 틈을 내어주기, 빛을 비추어 그 밖에도 세상이 있음을 넌지시 일러주기. 그 “최소한의 일”(29면)이 남기는 “미약하고도 충분한”(100면) ‘달걀의 온기’는 책장을 덮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 깃든 온기 역시 결코 쉽게 식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 우리는 그 온기와 함께 비로소 각자의 삶을 씩씩하게 끌고 갈 수 있는 작고도 귀한 용기를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작품 소개 - 『달걀의 온기』 속 작품들은 타인과 상처를 주고받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려 애쓰면서도 결국은 타인에게 손을 내밀고야 마는 이들의 “과묵한 선의”(추천사)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각 작품은 단절된 개인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서로의 삶에 개입하며 만들어내는 미세한 파동을 통해 굳게 닫혀 있던 내면이 조금씩 열리고 그 틈으로 온기가 스며드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관종들」의 ‘정해’와 ‘영기’ 부부는 평소 타인의 무질서에 서슴없이 목소리를 내 눈총을 받곤 한다. 싸늘한 주변의 시선은 그들마저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고 남들도 반기지 않는 이런 일은 이젠 진짜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19면) 생각하게 만들지만, 막상 어느 추운 겨울날 길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을 목격하자 그들은 주저 없이 경찰에 신고하기로 결심한다.

남편과 자전거가게를 운영하며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는 「빈티지 엽서」의 화자 ‘나’는 헬스장에서 만난 남자의 부탁으로 그가 수집한 외국의 빈티지 엽서들을 읽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나’의 일상은 조금씩 빛을 되찾아가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남자와 ‘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하며 균열이 발생한다.

이어지는 「푸른색 루비콘」과 「하루치의 말」 역시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맞닥뜨림으로써 일어나는 생의 파동에 집중하는 작품들이다. 김유정문학상 대상작 「푸른색 루비콘」의 화자 ‘나’는 아내와 사별한 뒤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추레한 행색의 한 남자를 만나고, 그의 부탁으로 허름한 양봉장에 차를 몰고 가게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일이 꼭 필요한가”(94면) 자문하던 ‘나’에게 남자와 보내는 시간은 진창에 빠진 차를 하릴없이 건져올리는 일이나 다름없지만, 그 모든 시간이 지난 뒤 남자가 내어준 꿀물 한잔에 ‘나’는 뜻 모를 평화를 느낀다. 그런가 하면 타인과의 접촉이 언제나 온기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직이 상기시키며 서늘한 음영을 남기는 작품들도 있다. 어머니의 이불가게를 물려받게 된 「하루치의 말」의 화자 ‘애실’은 놀랄 만큼 말이 잘 통하고 배울 점도 많은 손님 ‘현서’와 가까워진다. 그녀와 함께하며 애실의 일상도 점차 변해가기 시작하는데, 이 달가운 변화를 만끽하던 애실에게 어느 날 사람들이 찾아와 묻는다. “애실씨, 혹시 걔한테 돈 빌려줬어?”(127면) 한편 「우연의 직조」의 화자 ‘우나’는 저명한 미술가 ‘안지일’의 전시장에서 관람객의 반응을 기록하는 일을 하던 중 안지일이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이를 맞닥뜨린다. 이 소설은 표절 논란과 그에 쏟아지는 비난마저 자신의 작품으로 흡수해버리는 미술가의 행위 앞에서 우나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담담히 따라간다. 「우리와 우리 아닌 것」 역시 개인의 삶을 뒤흔드는 욕망의 정체를 조용히 들여다보는 작품으로, 삼년 전 경도인지장애 판정을 받은 아버지로부터 과거 절친했던 ‘희래 삼촌’에게 땅을 빼앗겨 물려줄 것이 없다는 말을 들은 ‘나’의 혼란을 그려내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세 작품을 거치며 서늘해진 마음의 온도가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곳은 소설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표제작 「달걀의 온기」이다. 투자 사기를 당한 뒤 아버지가 살던 고향 집을 처분하러 내려온 ‘선희’는 마을에서 어린 여자아이 ‘민지’를 자꾸만 마주친다. 버려지듯 조모에게 맡겨진 뒤 그곳에서 자라온 민지는 혼자 닭을 키우고 주변 어른들에게 달걀을 팔며 살아가고 있는데, 선희는 계속해서 눈에 밟히던 그애의 다부진 태도가 실은 “자신의 처지를, 바꿀 수 없는 자신의 태생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체념에 가까운 감각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 자신이 내내 움켜쥐고 있다가 이곳을 떠날 때 미련 없이 내던져버린 뭔가와 닮아 있다는 것을”(211면) 깨닫는다. 오랜 자기연민에 빠져 타인을 원망하기 급급했던 선희는 한발짝 떨어진 곳에서 민지를 지켜보기 시작하고, 이는 점차 스스로를 돌보는 데까지 이어지며 끝내 하나의 달걀처럼 “자기 세계와 바깥 세계가 만나 이루어지는 아름다운”(해설, 정주아) 균형을 이루게 된다.

 

작품 중 ‘관종들’이 생각이 많이 났고, ‘빈티지 엽서’와 ‘푸른색 루비콘’에서 뭔가 뜨끈한 듯 아련한 기분이 들었고 ‘달걀의 온기’에서 뭉클하면서도 따스해졌다.

 

그래, 이런 작가도 있어야지. 섬세하면서도 조용하게 과묵한 선의를 가지며 은근히 위로하는 이도 있어야지.

여태까지 미뤄두었던 작가 님 작품들을 하나 둘 읽어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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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아래 올리브 ㅣ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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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초엽 작가님의 초기작부터 지금까지 볼 수 있는 모든 작품을 찾아 읽었고 처음부터 작가님을 사랑해 왔던 독자다. 처음부터 재미있었고 남달랐고 창의적이면서 따뜻했던 작품들. 나는 작가 님은 최소 천재같다.

그런 내게 이번 책은 그냥 최고라고 얘기하고 싶다.

사실, 개인적으로 힘든 일들이 많아 작가 님의 신작을 제일 먼저 읽고 빨리 서평을 쓰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 해 책을 받아 들고 제법 늦게야 펼쳐 읽었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다.

 

로드무비, 여자들의 우정, 너무나 다른 두 사람, 수녀회, 합성뉴런, 웨트웨어, 의식과 감각질을 지닌 인공의식, 성당, 신앙, 논쟁, 비난 .... 너무나 어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적절하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흥미진진하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이번 소설은 또 한번 작가 님이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처음부터 잘 하셨지만 갈수록 성장하는게 놀랍고, 문체나 문장 구성, 흐름 진행 등이 너무너무 느는게 팍팍 느껴진다.)

 

‘지구 끝의 온실’은 내가 참 좋아하는 작품인데 다소 산만(?)한 느낌이 있어 조금 어려운 면이 있고, ‘파견자들’은 다소 어둡고 난해한 면도 있었던 것도 같다. 근데, 이번 작품은 우선 등장인물인 이레(베로니카 수녀님), 솔민(미놋)이 너무 다르면서도 각자 매력적이고 다른 준이모, 주희 아줌마, 채림, 탈리아, 카윈, 노암 등도 서사가 있고 각자 사연 속에서 캐릭터가 살아 있어 좋았다.

이레와 솔민의 과거 이야기가 너무 따뜻하고 설렜고, 이레와 준이모와의 만남도 별을 쫓는 것처럼 아련했다.

이레와 신과의 만남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느낀 것처럼 작가 님의 경험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깊이가 깊었다.(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성당에서의 경험은 나에게도 굉장한 버팀목이 되었거든.)

 

그리고 중간중간 왜 이렇게 좋은 글들이 넘쳐 나는 걸까? 책을 아껴 읽어 줄 긋는걸 싫어하는데 너무 줄 긋고 싶어 혼났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어마어마해지고 갈수록 태산이고 해결하려 할수록 뭔가 쉽지 않았다. 끝까지 세상은 친절하지도 호의적이지도 않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멋지게 삶을 개척하고 달려나가는 이들로 인해 책을 덮는 순간까지 행복했다.

 

아... 작가 님... 또 얼마나 나아가시려고... 이렇게 설레게... 해주셔서 무한 감사드린다.

행복한 독서였다. 이만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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