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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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뱃길로 백두산에 다녀왔다. 서울-속초-러시아 세관- 중국 장영자 세관을 통과해서 훈춘에 이르기까지 가는 시간만 꼬박 하루가 걸렸던 것 같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다다른 곳이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노랑머리에 꼬부랑말을 쓰는 외국인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모습의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훈춘에서 다시 백두산으로 가는 차창 밖으로는 옥수수 밭과 해바라기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노란 물감을 쏟아놓은 듯한 해바라기 밭이 듬성듬성 보이지 않았다면 8월의 간도지방은 오직 녹색, 한 가지 색 뿐이다. 생각 없이 따라 부르던 노래 ‘선구자’가 가슴에 얹혔고 ‘광활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용정의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에서 마대 자루에 가득 삶아놓은 옥수수와 단고기로 큰 대접을 받고 다음날 그의 묘소를 찾았다. 물어물어 찾아간 시인의 묘소에 절하고 둘러본 주변에는 봉분만으로 그것이 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비석도 없는 사람들의 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독립운동 하다 죽은 사람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간도로 이주해왔다가 까닭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의 묘라고 했다. 아마도 지금쯤 무성히 자란 풀들로 봉분마저 사라진 곳도 많을 것이다.

『밤은 노래한다』는 1930, 40년대 간도(동만, 연변이라고도 한다)지방을 배경으로 일제의 토벌대에 쫓기는 조선 공산당원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간도는 중국 땅이지만 조선인들이 개척한 곳으로 조선인들이 더 많은 곳이다. 또 일본제국주의와 중국공산당,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격돌하던 최전선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일어난 민생단 사건은 조선인들의 치열한 항일 혁명의지와 조선공산당 내에서 이념적으로 분열된 사람들의 피폐한 모습을 보여준다.

‘민생단 사건’을 박사논문으로 쓴 한홍구 박사는 ‘논문을 쓰는 내내 이건 논문이 아니라 소설로 써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논문의 주제에 담을 길 없는 그러나 빼놓기에는 또 너무나 암담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많다는 뜻이리라. 이 민생단 사건으로 처형된 항일 혁명가가 최소 500여명이라고 하는데, 일제의 토벌대에 의해 죽은 사람보다 항일혁명조직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인 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 초기에는 혁명, 투쟁, 독립운동 등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거의 신경증적 발작으로까지 보여질 정도이다. 밥을 설익게 하거나 태워도 민생단, 밥을 물에 말아 먹어도 용변을 자주 보느라 혁명과업을 게을리 한다고 민생단, 동지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려도 패배주의를 조장한다고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되었다니 말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김해연은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 용정지사에 근무하는 측량기사다. 그는 혁명조직의 일원이었던 이정희를 사랑하게 되면서 잔인한 운명에 휩싸이게 된다. 이정희는 토벌대의 정보를 빼내다 발각되자 자살한다. 그 충격으로 해연은 아편에 빠지기도 하고 그녀가 죽은 곳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심리적 후유증으로 말을 잃은 해연이 용정의 사진관에 일하다가 혁명조직의 또 다른 일원인 여옥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여옥과 경성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할 무렵 토벌대의 습격으로 여옥은 한쪽 다리를 잃게 되고 해연은 민생단 혐의자로 체포된다. 같은 혁명조직원들이지만 중국공산당이 우선이냐 조선 공산당이 우선이냐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와중에도 해연은 살아남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전반부에서는 내내 최인훈의 『광장』이 떠올랐고, 후반부에서는 캔 로치 감독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오버랩 되었다. 전반부에는 보들레르, 바쇼, 푸쉬킨 등이 등장하면서 시적인 문체의 아름다움이 읽는 이를 매료시킨다. 후반부는 이정희를 중심으로 혁명도 사랑도 이루지 못한 채 어두운 역사속으로 사라져간 사람들의 기록으로 읽는 이마저 격랑에 휩쓸리는 느낌이다. 내가 다녀왔던 용정의 그 이름 없는 무덤들 중에 이정희의 무덤도, 그녀를 사랑했으나 혁명에 치여 서로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무덤도 함께 있을 것만 같다.  

* 어디서 눈동냥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작가가 꼭 붙이고 싶어한 제목이 있었다고 했다. <사랑하라, 아무런 희망없이> 인지 <사랑하라, 희망없이>인지 그것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밤은 노래한다>보다 <사랑하라, 아무런 희망없이>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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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5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25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8-25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너무 좋아요.
밤은 노래한다, 이런 내용이었군요.
전 읽어보지 못한 김연수의 소설이라 넙죽 담아갑니다.^^

반딧불이 2009-08-25 10:2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저도 김연수의 소설은 처음이었어요. 문체도 아름답고 흡인력도 있고,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게되고 조선족에 대해 다시생각할 기회가 되었어요.
 
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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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열네 살 때 수도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7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나와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치고 신경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시계공장에서 실습을 하기도 하고 서점에서 책 거래 견습공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946년, 69세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그의 작품이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지만 헤세의 어린 시절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그가 짧은 시간 몸담았던 수도원에서의 방황과 고통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에서 헤세는 한스 기벤라트라는 아름답고 순수하며 섬세한 소년으로 형상화된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 속물적인 내면을 지닌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한스는 아버지는 물론이려니와 학교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마을의 수재다. 한스는 뛰어난 인재들만 골라 뽑는 주 시험에 당당하게 2등으로 합격하여 아버지의 자부심을 충족시키고 모든 이들의 기대에 부응한다.

포룸, 아테네,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등 그 이름만으로도 로마나 그리스의 환영이 되살아나올 것만 같은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수도원에서 한스는 헬라스 방을 배정받아 유별난 친구를 사귀게 된다. 그중에서도 한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이올린과 시에 능했지만, 선생들로부터는 '불만에 가득 찬 혁명적인 인물'로 낙인찍힌 헤르만 하일너였다. 예술이 가진 불온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하일너와의 우정이 깊어질수록 한스의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원인모를 두통에 시달리며 초췌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끝내는 신경쇠약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증세는 전혀 호전되지 않는다. 한스는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아, 나는 피곤합니다/아, 나는 지쳤습니다/지갑에는 돈 한 푼 없고,/주머니에도 없습니다."라는 라틴어 시구를 주절거리곤 했다. 이 노래를 들은 아버지는 아들의 증세를 정신박약의 불치병으로 받아들인다. 한스는 다른 마을에서 온 엠마에게 사랑을 느끼고 잠시나마 활기를 되찾아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기계공이 되기로 한다. 하지만 곧 엠마의 사랑이 단순한 유희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또 대장장이의 푸른 작업복을 입자 그동안 공부를 위해 자신이 흘린 땀과 눈물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한스에게는 고민이나 사랑을 함께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좋아하던 낚시나 수영, 토끼 기르기, 숲 속의 산책 등을 함께 할 친구도 없었다. 오직 라틴어와 역사, 그리스어와 시험만을 알고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한스에게 위로자의 가면을 쓰고 찾아온 것은 죽음의 유령이었다. 차가운 달빛이 비치는 가을밤. 한스는 위로자가 이끄는 대로 검푸른 강물위로 떠내려갔다.

아름답고 영민한 한 소년을 이렇게 일찍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누구인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으로부터 멀리 두고, 이성 친구는커녕 교내에서 친구를 사귈 시간조차 없이 학업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헤세는 부모의 세속적인 욕망과 국가 교육의 문제, 그리고 국가로부터 받은 직무를 합법적으로 수행하는 교사 등에 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의 세속적 욕망과 제도교육의 수레바퀴에 깔려죽은 한 소년을 위한 진혼곡에 다름 아닌 이 책은 1906년 출간되었는데 그로부터 100년도 더 넘게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구나 내가 학교를 다니던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고등학교의 필독 도서 목록에 버젓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 일 뿐이다.

 

 

 

밑줄 긋기

 

학교선생의 의무와 그가 국가로부터 받은 직무는 어린 소년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자연의 조야한 정력과 욕망을 길들임과 동시에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이다. 또한 그 아이에게 국가적으로 공인된 절제의 평화로운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72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학교의 사명은 정부가 승인한 기본 원칙에 따라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일원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잠재된 개성들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은 병영에서의 주도면밀한 군기(軍紀)를 통하여 극도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72

 

국가나 학교가 해마다 새롭게 자라나는 보다 귀중하고 심오한 젊은이들을 뿌리째 뽑아 버리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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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마음 - 시인 문태준 첫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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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권의 시집을 낸 한국 서정시의 적자 문태준 시인의 첫 번째 산문집이다. 산문 역시 시 만큼이나 서정적이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책은 ‘느린 마음’ ‘느린 열애’ ‘느린 닿음’ ‘느린 걸음’ 의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런 구성에 맞춰 읽기보다는 어린 시절 그가 보아온 풍경과 가족들의 모습, 또 하나의 가정을 일구고 아내와 아이들을 거두는 중년 사내의 모습 그리고 그가 읽은 많은 책과 불교적 사유의 세 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읽었다. 나누어 읽기는 했지만 그 나눔은 수채화 같은 이미지로 그리고 시인이라는 느낌으로 언제나 수렴되곤 했다.

수채화의 주인공은 어린 아이였다가 어느새  한 여자의 남편이 되어 차를 끓이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또 어느새 여덟 살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일찍 귀가한 날은 우렁 각시처럼 아이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기도 한다. 그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또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남편이지만 나는 그가 천상 시인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어머니 아버지의 ‘얹힐라’ ‘소 받아라’ ‘이제 오느냐’ 등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서 그 말 뒤의 미처 꺼내놓지 못한 어른들의 마음을 읽어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이 그랬고, 예닐곱 살 아들의 자라나는 모습을 곰살맞게 지켜보면서 말버릇에서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아버지의 사랑에서도 또한 그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반가웠던 것은 산문에서 그의 시의 단초를 발견할 때였다.

   
  그 언젠가는 소복차림의 동네 아주머니가 아침 식전에 곡을 하는 것을 여러 날 보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그 아주머니는 남편의 무덤 앞에서 길고 긴 곡을 하고서야 내왔습니다. 까마귀떼가 요란하게 구천을 날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식전바람에 곡을 하고 내려갔고, 햇무덤은 누군가 급한 일을 보러가 덩그러니 남겨진 반죽처럼 또 마르고 있었습니다.             
                                                <상여가 지나가는 오전, 부분 >
 
   





햇무덤


까마귀가 한 마리 또 두 마리 울며 날아가
죽은 나무에
나무의 폐에
흉탄처럼 내려앉는

슬픈 九天

여자는 식전바람에 곡을 하고 내려갔네
누군가 치대다 급한 일 보러가
덩그러니 남겨진
반죽처럼

또,
마르는 
햇무덤 

         <시집『그늘의 발달』에 수록> 

 산문의 몇 구절이 말을 아끼고 행을 가르자 그대로 시가 된 경우다. 아니 시가 산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산문보다 시를 먼저 보았다. 누군가 치대다 둔 밀가루 반죽과 햇무덤의 비유가 가슴에 와 닿던 시였다. 시를 먼저 본 탓인지 여전히 시가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산문과 시의 제목이 같은 <아, 24일>도 있다. 또 어릴 때 시인이 그의 부모님께 듣고 자랐던 ‘이제 오느냐’라는 말을 이제 시인이 아버지가 되어 그의 아이들에게 한다. 시속에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다. 또 시인의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된 시인이 있다. 시인의 말대로 ‘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 말’을 하는 풍경이 살뜰하게 드러나는 시다.

이제 오느냐

화분에 매화꽃이 올 적에
그걸 맞느라 밤새 조마조마하다
나는 한 말을 내어놓는다
이제 오느냐,
아이가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
나는 또 한 말을 내어놓는다
이제 오느냐,

말할수록 맨발 바람으로 멀리 나아가는 말
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 말

뜨거운 송아지를 여남은 마리쯤 받아낸 내 아버지
에게 배냇적부터 배운 

시집과 산문집을 함께 읽는 즐거움은 남다른 것이었다. 또 보태어야 할 즐거움은 시인의 불교적 사유와 그가 읽은 책들이다. 시인에게 책은 단지 종이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보르헤스가 자연만한 책이 없다고 했듯이 시인이 읽은 종이책뿐만 아니라 자연의 책을 읽는 것을 간접 경험하는 즐거움도 또한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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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7-27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 저 이 책 담아갑니다.
문태준의 첫번째 산문집이라는 것만으로도.^^

반딧불이 2009-07-28 00:19   좋아요 0 | URL
넵! 읽으실 책이 많으신걸로 아는데....천천히 읽으셔용~

라로 2009-07-27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불이님의 뽐뿌질이라니!!!ㅎㅎ

반딧불이 2009-07-28 00:20   좋아요 0 | URL
ㅎㅎ 나비님 자전거 바람이라도 빠지셨세여?
 
첫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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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새벽, 첫차, 첫인상, 첫키스, 첫사랑. ‘첫’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에서는 아련함이 묻어난다. 녹슨 기억을 더듬어야 할 만큼 나이가 든 때문일까, 그래도 여전히 ‘첫’자가 붙은 단어들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첫’을 몇 번 발음 해보니 입이 열려 발음이 되는 순간 이미 윗니 안쪽에 혀가 달라붙고 가슴께까지 숨이 막힌다. ‘첫’이라는 글자 하나만으로도 이러할진대 오감을 통째로 뒤흔드는 사랑이라는 말과 합해진 첫사랑은 지구 밑을 지나가는 거대한 용암의 뒤틀림처럼 한 인간의 삶에 덮친 황홀한 재앙일지도 모른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투르게네프 자신이 『첫사랑』은 ‘창작이 아니라 나의 과거’라고 말했고, 어머니의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가 하나 있었을 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고 하니 말이다. 『첫사랑』은 나이 마흔이 된 독신남자의 입을 빌린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열여섯 살,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어머니와 함께 칼루가 관문 근처 별장에 살고 있다. 어느 날 별채의 허름한 곁채로 몰락한 자세키나 공작부인이 스물한 살의 딸 지나이다와 이사 온다. 아름답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지나이다 알렉산더로브나 곁에는 백작, 의사, 시인, 경기병 등 젊은 청년들이 몰려다닌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반해버린 주인공 역시 이 무리에 합류하게 된다. 그녀의 곁에 있는 많은 남성들이 그의 경쟁자가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나이다는 그들의 열정을 유치하리만큼 즐길 뿐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지 않는다. 그녀는 주변의 남성들에게 당당하게도 “내게는 나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하고 맞닥뜨릴 것 같지는 않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죠. 난 누구의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라고 말할 뿐이다. 

자신을 정복할 수 있는 남성의 출현을 기대하는 지나이다는 자신의 곁에 있는 지위, 부, 열정, 권력 등을 상징하는 백작, 의사, 시인, 경기병 등이 자신을 추종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결코 그녀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추종자의 일원이면서 이것을 곁에서 지켜봐야하는 블라디미르에게는 이중 삼중의 고통이 따른다. 질투에 몸을 떨면서 사랑의 무모함에 휘둘리는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지나이다의 꿈 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알아버린다. 

물보라가 치는 분수 옆에서 내가 사랑하고 날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서서 날 기다리고 있어요. 그 사람은 화려한 옷도 입지 않았고, 보석도 지니고 있지 않고, 아무도 그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날 기다리며 내가 나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갈 겁니다. 내가 그에게 가서 그이와 함께 머물려고 하고, 그이와 함께 정원의 어둠 속으로, 바스락 대는 나무 아래로, 물보라 치는 분수 아래로 사라지려고 할 때 나를 제지할 수 있는 힘이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자신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사랑, 그 사랑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지나이다의 사랑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지위도 부도 열정도 권력도 아니다. 어린아이 같은 블라디미르는 더더욱 아니다. 그녀의 사랑은 ‘정원의 어둠속으로’ ‘물보라 치는 분수 아래로 사라지’는 사랑이다.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아버린다. 집안으로 날아든 익명의 편지와 오랜 염탐을 통해 스스로 현장을 목격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에게도 지나이다에게도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때로 광적인 발작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고 신중한 아버지가 오히려 더욱 커 보이기까지 한다.

자신의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지나이다를 사랑하는 블라디미르는 그녀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운다. 공작이라는 어엿한 신분을 가진 여자가 백작이나 의사 시인 등 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의 장래가 파멸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부남을 사랑한다는 것.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비명을 삼키고 그 상처로 입술을 가져가 천천히 핥는 것 등을 보면서 블라디미르는 사랑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과 헌신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그에게 학습된 첫사랑은 평생 동안 그를 지배한다. 첫사랑은 그 ‘첫’이라는 그 발음이 주는 찰나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용암처럼 한 사람의 생을 영영 덮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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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6-28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마디 남기고 싶지만 그냥 추천만,,,ㅎㅎ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지음, 이상원.조금선 옮김 / 황소자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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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루비셰프가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남자는 하루 10시간 씩 잠을 자면서도 일 년 평균 60여 차례의 공연과 전시를 관람했고, 70권의 학술서적과 단행본 100권 분량의 연구논문, 학술자료를 남겼다고 한다. 인간능력의 한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분량이라고 한다.

그는 몇 가지 생활 원칙을 세워놓고 철저히 지켰는데, “의무적인 일은 맡지 않는다. 시간에 쫓기는 일은 맡지 않는다. 피로를 느끼면 바로 일을 중단하고 휴식한다. 열 시간 정도 충분히 잠을 잔다. 힘든 일과 즐거운 일을 적당히 섞어 한다.” 등이었다. 하루 종일 의무적인 일에 매달려야하고 진종일 시간에 쫓기면서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늘 잠이 모자라 머리만 닿으면 눈이 감기는 즐거운 일이라곤 없는 현대인에 비하면 그는 거의 귀족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 일은 다했다고 한다. 비결이 뭘까?

그가 사용한 방법은 시간통계법이었다. 그는 매일 자기가 사용한 시간을 계산하고 월간, 연간 통계를 냈다. 그가 77세 때 낸 통계는 이렇다. “러시아어로 된 서적 50권 읽음-48시간, 영어원서 2권 읽음-5시간, 불어 원서 3권 읽음-24시간, 독어 원서 2권 읽음-29시간, 7편의 논문을 인쇄에 넘김” 어떻게 50권의 책을 48시간 만에 읽을 수가 있나? 나 같으면 글자는 읽지도 않고 50권의 책을 펄렁펄렁 한 장씩 넘기기만 해도 48시간 이상 걸릴 것 같다. 그는 심지어 자기의 어린 아이들이 와서 질문하고 답하고 할 때도 시간을 계산하여 적었다고 한다. 시간을 계산하여 적는다고 시간이 붙들어 매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나처럼 계산이 느리고 열 번 계산하면 열 번 다 다른 답이 나오는 여자는 계산하는데 낭비하는 시간이 더 걸릴 터이니 차라리 지네 다리에 운동화를 신기고 벗기는 일이 훨씬 보람 있는 일일 터이다. 더구나 무계획, 무대뽀, 막무가내, 대충대충, 얼렁뚱땅, 내키는 대로 같은 어휘들과 친한 나는 그가 외계인처럼 느껴진다. 두 달 동안 내 몸에 창궐하는 두드러기 때문에 진득하니 책을 읽을 수가 없다. 안 그래도 못된 성질은 더 못되어지고 짜증이 늘어가고 토막 난 시간을 어찌 주어 담을 수 없을까 싶어 집어든 책이었는데 책을 읽고 이렇게 막막해 보기도 처음이다. 저자의 말처럼 “천재는 분석될 수 없고 따라서 연구해보았자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 천재는 그저 바라보고 감탄하면 되는 대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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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6-2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네다리에 운동화를 신기고 벗기는 일이 훨씬 보람 있는 일"이라는 말씀에 100% 동감해요~.ㅎㅎ
첫인사부터 드려야하는데,,,^^;;프레이야님의 페이퍼에서 보고 왔어요~.천재는 그저 감탄하면 대상이라는 말씀 역시 공감하구요,,,오늘은 무척 더웠어요,,,장마가 시작이라고 했는데 제가 잘못 들은건지,,,날씨도 오락가락하네요,,

반딧불이 2009-06-21 23: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나비님. 반갑습니다. 첫인사라는게 뭐 따로있나요. 이렇게 뵈면 인사지요.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

하레 2009-09-2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 글 너무 재밋네요.ㅎㅎ
두드러기는 다 가라앉았을지 궁금...

반딧불이 2009-09-28 19: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하레님. 제 못된 성정이 다 드러나는 글로 처음 뵙게 되네요. 그래도 재미있으셨다니 참으로 다행이에요. 두드러기는 떠날듯 떠날듯 하면서 미련을 갖고 아직도~ 안가고 있답니다. 혹 하레님께서 얘를 보내 버릴 수 있는 방법을 아시면 살짝 일러주세요.(두드러기가 못듣게 속삭임 모드로...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