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레슨 - 느끼고, 사랑하고, 충추라!
화이 지음 / 오푸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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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탱고 인구가 몇 명이나 될까?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300-5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동호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는 것 같다. 친목을 우선으로 하는 동호회는 뒤풀이 자리가 종종 마련되는 모양이다. 서울 강남의 신사동을 중심으로 동회회의 성격을 지니면서 강습을 병행 하는 곳이 몇 군데 있는 것 같다. 이런 동호회 활동에 익숙하지 못한 내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선택한 곳은 신사동에 자리한 엘불린이라는 탱고 아카데미이다.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이곳은 탱고를 배우고자하는 사람들을 위한 강습이 목적이기 때문에 친목을 위주로 하는 곳과는 분위기가 다른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엘불린의 운영자 이면서 이곳에서 부군과 함께 탱고를 지도하고 있다.

 

저자는 발레를 전공했다. 모든 춤에 능한 그녀는 뮤지컬 배우로서 이름도 얻었다. 그런 그녀가 탱고와의 사랑에 빠져 아시아인으로써는 처음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계 탱고대회에서1위를 하고, 그야말로 운명이 바뀌어 탱고에 정착하게 되기까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엿볼 있다. 또 서울 탱고 페스티벌 등 굵직한 행사를 개최하기도하고 레슨을 하면서 경험한 많은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풀어놓았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사항들을 조목조목 안내해주고 있다. 편안하게 쓴 에세이 같으면서도 전문가의 깊이가 느껴지는 글이다. 한국에서 탱고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거나 이미 탱고를 배워 즐기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탱고 자체를 책으로 배울 수는 없다.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저자와 저자의 남편인 헝얏의 강습을 받아왔던 나는 그들이 강습 시간에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몸짓들이나, 설명을 위해 예로 드는 적절하고도 유머러스한 비유들이 떠올라 책을 읽는 기쁨이 배가 되었다.

 

탱고 강습을 받기 위해 처음 엘불린에 갔을 때의 뻘쭘함을 잊을 수 없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구령에 맞춰 행진이나 체조는 해봤어도 리듬에 맞춰 스텝을 밟아본 기억이 없다. 막춤조차도 추어본 적이 없고 신나는 음악에 맞춰 어깨조차 흔들어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 내가 어쩌자고 여기와 있단 말인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내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인 뻔뻔함이 이런 뻘쭘함을 금방 해결해 주었다. 그래, 모든 배움에서 학습지진아에 다름 아닌 내게 탱고라고 빗겨가겠는가, 갈 때까지 가보자, 뻔뻔함이 부추기니 나는 곧 막가파의 큰 형님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만 하루 이상을 비행기로 날아가야 간신히 닿을 수 있는 남미의 문화에 접속하는 일은 지진아이면서 국가 대표급 저질 체력인 내게 참으로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탱고의 용어는 모두 스페인어로 되어있기 때문에 뒤늦게 스페인어 사전을 뒤적이고 스마트폰에 어플을 깔아놓고 짬짬이 단어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 스페인어 강좌가 모두 영어로 되어있어 한번 들어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음악 들으랴 스페인어 공부하랴 영어 공부하랴 지진아의 하루는 고단하기 짝이 없다.

 

그 뿐이랴.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과 가슴을 밀착시키고 덥석 덥석 안아야하는 아브라소의 공포를 극복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보다 못한 선생님은 군대에 간 남동생이라 생각하라고, 위로하듯 따듯하게 안으라고 거듭 말씀을 하셨고 나는 파트너 앞에 설 때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야했다. 최면은 주효했다. 지금도 낯선 사람 앞에서 여전히 긴장하고 뻣뻣해지지만 심리적으로는 많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짧은 생각이지만 탱고에서는 아브라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 것 같다. 이것을 해결하고 나니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동작이야 배우고 연습하면 되는 것이니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곧 새로운 문제에 당면했는데 그것은 주제넘게도 탱고로 아름답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동작을 정확하게 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음악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남성과 그 남성의 몸의 언어를 표현하는 여성. 이것들의 삼위일체가 아름다움의 조건이 되는 것 같다. 나는 그동안 탱고의 아름다움이 여성의 화려한 동작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동작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파트너의 수고스러움이 새삼 고맙게 여겨진다.

 

무엇이든 몰아서 해치우는 성향이 강한 내게 탱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토요일 오후 6시간 이상을 9cm 높이의 힐을 신고 놀았다. 탱고는 발뒤꿈치보다 발가락에 체중을 실어야 하기 때문에 발볼이 현격하게 넓어지더니 평생 부어본 적 없던 발이 붓기 시작했다. 새끼발가락은 까맣게 멍이 들었고 오른발의 발가락들은 쥐가 난 것처럼 감각이 없어졌다. 침 한 번 맞으면 낫겠지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4,5번 경추에 문제가 왔다나 뭐래나....... 도대체 이놈의 몸뚱이는 써먹을 곳이 아무 곳도 없는 거냐고 따져 물었더니 선택은 잘 했는데 공주의 몸을 갖고 태어났으니하고 말끝을 흐린다.

 

: “몸은 공준데 무수리처럼 몸을 굴린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지요? 근데 탱고 추는 무수리 보셨어요?”

의사 : “공주님은 왕자님하고 딱 한번만 추는 거예요. 당분간 굽 높은 구두 신지 마시고 두 시간 이상 춤추지 마세요.”

 

영국의 BBC에서 만든 탱고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탱고 살롱 La Confiteria Ideal에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한 남자에게 탱고를 못 추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다리를 잘라버리겠다고 한다. 나는 아직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탱고에 미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아픈 몸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탱고를 좀 더 오래 추기 위해서라도 다리는 좀 보호해 줘야할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몸에만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탱고에 빠지자 가 뒷전이 되어버렸다. 대체 원고는 언제 들여다보나? 정신은 시에 끄달리면서 몸은 탱고에 빠져있다. 그런데 시와 탱고는 닮았다. 우선 쉽지 않다는 것, 그렇지만 아름답다는 것, 두 가지 모두 영혼을 위로한다는 것이 닮았다. 또 시와 탱고는 다르다. 시가 언어를 매개로 한다면 탱고는 육체를 매개로 한다. 시가 영혼을 더 많이 담고 있다면 탱고는 육체를 더 많이 담고 있다. 탱고는 몸으로 쓰는 시다. 그러니까 나는 시를 뒷전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시를 쓰고 있었다는 건가? 탱고의 힘은 위대하다. 모든 것이 합리화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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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4-1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 공주님께 부러움과 흠모의 박수를 보냅니다~~~Estoy enamorado de ti!!!!

반딧불이 2013-04-12 20:06   좋아요 0 | URL
읔...시아님께서도 사전을 찾게 만드시네..고맙습니다.
근데 혹시 나비님이신가요?

수이 2013-04-1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탱고는 언제나 바라보아도 추어도 좋기만 해서, 살아있는 게 그렇게 좋아지더라구요.
즐거운 봄날 되세요 반딧불이님~

반딧불이 2013-04-12 20:11   좋아요 0 | URL
앤님..땅고를 추시는 군요^.~ 반가워요. 곧 피어날 아름다운 꽃들과 탱고와 함께 아름다운 봄날이시길 바랄께요.

2016-05-14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5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탱고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 탱고를 찾아 떠나는 예술 기행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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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병을 앓고 있다. 불치병이다. 아무 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 자가 진단이지만 어느 전문의보다 정확한 진단이다. 내 몸에 관한한 어느 의사가 나보다 더 정확할 수 있을까. 그런데 최근 이 불치병이 치료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땅고를 접하고 난 후 부터다. 땅고 음악에 취한건지 춤에 취한건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 땅고에 취해 있다. 대체 땅고의 무엇이 나를 이토록 유혹하는 걸까.

 

바이올린, 콘트라베이스, 피아노, 반도네온이 펼치는 하모니는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1930-40년대의 음악들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다. 음악에 대해 내가 무얼 말하랴마는, 이 당시의 음악들을 듣다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으면서도 다른 무언가가 있다. 땅고 음악에는 슬픔, 비애 같은 것들이 진하게 배어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고상한 언어를 동원해서 우아하게 말하면 좋겠지만, 편하게 내 식으로 말하면 땅고 음악에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이상한 청승끼가 배어있는 것 같다. 특히 반도네온은 자신의 몸에 가득한 주름들을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다른 음을 내는데, 청승끼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음색으로 사람을 취하게 한다.

 

그런데 이 청승끼에 내 몸이 반응한다. 간신히 파트너의 동작을 따라갈 만큼 스텝을 밟게 되었지만 몸짓은 아무리 예쁘게 해봐야 마네킹이나 로봇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자꾸만 몰입하게 된다. 대체 그것이 무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몇 권의 책을 뒤적였다.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그중의 하나다.

 

저자 박종호를 접한 건 오래전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을 통해서였다. 깊이 있고 아름다운 그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글은 내게 큰 믿음을 주었던 것 같다. 그 믿음 때문인지 땅고 대한 그의 책을 선택하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골라야할 만큼 땅고에 대한 책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를 클래식 음악 해설가로 알고 있었지만 책을 읽고 나서 그의 본업이 클래식 음악 해설가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정신과 전문의이면서 클래식 음악에도 전문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정신과와도 클래식과도 무관한 듯 보이는 땅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까?

 

 

저자는 클래식 음악이 팬 층을 확충하고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첫 번째 분야로 땅고를 꼽고 있다. 클래식 음악에서 땅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 예술의 전당에 연주를 보러 가면 가끔 탱고 연주를 듣게 되는데 나는 그것이 한국 팬을 위한 이벤트성 연주로 생각했었는데....... 어쨌거나 클래식 음악의 흐름이 이러하니 저자가 땅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2008년 당시 땅고에 대한 책이 단 한권도 없었다는 것이 아마도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는 정보를 수집하면서 일본의 한 소설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다녀와 땅고에 대한 경험을 소설로 써서 일본에 다시 한 번 땅고에 대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 역시 그 소설가가 머물렀던 호텔을 예약하고 일정도 그녀와 똑같이 2주간으로 잡고 그곳에 머물렀다 다녀와 쓴 글이다.

 

책의 내용은 주로 땅고 음악에 관한 것이다. 땅고의 중심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더 나아가 남미의 문화 전반에 관해 사진을 곁들여 개괄했다. 카를로스 가르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에비타, 피아졸라, 마라도나, 체게바라 등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부담 없이 펼쳐놓았다.

 

땅고 춤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그는 땅고를 출줄 모르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땅고 카페를 순례하면서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그 분위기를 즐겼던 것 같다. 그가 땅고 춤에 대해 내린 정의는 아래와 같다.

 

 

그들의 춤은 3, 그들의 사랑은 3. 3분 동안 그들은 울부짖듯이 모든 열정을 다하여 춤을 춘다. 그러므로 탱고의 춤사위는 그들의 몸부림이며, 탱고의 음악은 그들의 절규다. 섹스가 육체를 위로한다면 탱고는 영혼을 위로한다. 그래서 탱고는 슬프다. 섹스가 육체의 위안이라면, 탱고는 영혼의 섹스다.”

 

일반적으로 땅고는 한 곡만을 추지 않는다. 보통 분위기가 비슷한 곡이 서너 곡 연주되고 이것을 한 딴따라고 부른다. 파트너가 정해지면 한 딴따를 함께 추게 되는데 한 곡의 연주시간이 3, 4분 정도라면 10 - 15분 정도 함께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의 리드를 받게 되므로 남성이 어떻게 음악을 해석하고 어떤 동작을 하느냐에 따라 춤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서로의 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섹스가 육체를 위로한다고? 잘 모르겠다. 탱고가 영혼을 위로한다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탱고가 슬프다고? 동의할 수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땅고의 무엇이 나를 이토록 유혹하는지 그 해답을 이 책에서 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땅고 음악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떤 변천사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땅고 음악에 흐르는 청승끼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문화의 전반을 맛볼 수 있는 건 커다란 덤이었다. 내 질문의 답은 책을 통해 구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나에게서 찾아야할 숙제일 것이지만, 아마도 청승끼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은 내면의 깊은 욕망 같은 건 아닐까 자문해본다.

 

 

사족.

유럽에서 처음 연주된 아르헨티나 땅고 음악, El Choclo(엘 쵸클로)는 원래 옥수수나 나막신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남자를 상징하기도 한단다. 이 음악은 우울할때 들으면 위로가 되었는데 자꾸 듣다보니까 이젠 음악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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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1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2017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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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산티페를 위한 변론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법정진술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변론으로 읽혀진다. 그는 남들이 부와 명성을 얻으려 노력할 때 지혜와 진리를 얻으려 노력했고, 사람들이 몸과 재산보다 최선의 혼의 상태에 관심을 쏟도록 설득하는데 자신의 생을 탕진했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거리를 싸돌아다니며 젊은이들을 현혹(?)한 결과 그는 아내 크산티페를 세계3대 악처 중 한명으로 등극시키고 당대의 소피스트와 권력자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소피스트들이 사회적 출세를 빌미로 수사학을 내세워 고액과외를 일삼으며 실용주의 노선을 탈 때 그는 무료봉사를 일삼는 거리의 철학자가 되어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가장 남자다운 남자로 인정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칠십이었으니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30살 이상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진 크산티페에게는 가슴에 보듬고 있을 정도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젊거나 잘생겨서 성적매력이 넘쳐나는 것도 아닌데다 나이 칠십의 추남인데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거기다 자식은 셋씩이나 슬어놓고 툭하면 제자들을 끌고 새벽이슬을 밟고 오는 남편을 세상의 어느 여자가 공경하겠는가. 그러므로 부디 결혼하시라,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해질 수 있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는 나쁜 아내 때문에 철학자가 된 것이 아니라 철학하느라 철이 없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크산티페는 악처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던 듯싶다. 사형집행일 날 남편에게 울부짖으며 한 크산티페의 마지막 말이다.

 

여보! 소크라테스, 당신 친구들이 당신에게 말을 걸고 당신이 친구들에게 말을 거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에요.” 어린 것들과 나는 어찌 살라고를 외치며 목청을 높일 수 있을 법도 하건만 그녀의 관심은 남아있는 자식과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자신이 아니라 남편을 향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이 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고 나는 밥을 빌어먹어도 좋으니 당신 좋아하는 을 더 하기 위해서라도 제발 살아달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던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와 이혼법정에 섰더라면 아마도 독배를 마시듯 크산티페의 이혼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2500여 년 동안 악처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는 크산티페는 세계3대 악처의 위치에서 강등되어야 함이 마땅하려니와 남편을 인류 사상의 아버지로 만드는데 세운 공로도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2. 직접민주주의에서의 웅변술

 

소크라테스의 자기 변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문제점 등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야 할 듯싶다. 고대 그리스는 촌락단위인 폴리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스파르타와 아테네였고 아테네는 민주정치가 가장 발달되어 있는 곳이었다.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은 민회였다. 부녀자와 아이, 노예 등은 민회에 참석할 수 없었고 군대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에게만 개방되었다. 참정권을 가진 시민들은 아고라 광장에 모여 중요한일에 대해 연설을 하거나 정책사안에 대해 토론하였고 정책이나 관리 선출 등을 투표로 결정하였다. 당연히 사람들을 설득하는 연설능력은 정치의 핵심이 되지 않았을까.

 

소크라테스는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의 웅변술이 가지는 중요성이나 달변가들에 의해 변질되거나 궤변으로 빠질 가능성, 기타 직접민주제의 문제점들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시대의 등에가 되기를 자처하여 웅변술로 잘 포장된 거짓들을 끊임없이 파헤쳤고 시민들을 각성시키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반면 사과나무 줄기에 마치 나뭇가지처럼 붙어 영양분을 빨아먹은 자벌레 같은 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일부 소피스트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틈새시장을 노려 고액과외로도 모자라 특강료까지 챙겨가며 큰돈을 벌었던 것 같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부의 축적이나 명예에 관심이 없었고 민주정치가 발달한 아테네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보다 나은 시민 양성을 더 중요한 일로 여겼던 것 같다.

 

이것 보세요! 당신은 아테나이인이오. 당신의 도시는 가장 위대하며, 지혜롭고 강력하기로 명성이 자자하오. 하거늘 부와 명예와 명성은 되도록 많이 획득하려고 안달하면서도 지혜와 진리와 당신 혼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부끄럽지 않소.”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자신을 고발한 자들에 대한 일갈이면서 그가 일생을 통해 추구하고 행한 일에 대한 변론이며 동시에 현대인들에게는 통렬한 자아비판의 지침이 될 말이기도 하다.

 

3. 지혜와 미덕에 대한 순교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델포이의 신탁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신탁을 부정하고 반박하려 한다. 그는 명망 높은 정치가, 시인, 장인 등을 찾아다니며 이를 증명하려 하지만 가장 명망 높은 사람이 실은 가장 결함이 많고 시인이나 장인들도 그들의 전문가적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일로 사람들의 미움을 산 소크라테스는 그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한 반면 자신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신탁을 부정하려 했던 그는 결국 가장 지혜로운 자는 지혜에 관한한 자신이 진실로 무가치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신탁의 의미였다고 재해석한다.

 

사람들이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이와 같은 행동은 결국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이것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사론을 정론으로 만든다는 등의 비난을 받으며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적의를 품는다. 첫 번째 고소 내용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두 번째 고소내용은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는 대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믿음으로써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이 두 고소내용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자기 변론이다. 나는 당시의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이 변론을 토대로 살펴보면 당시에는 증거나 증인을 내세우기보다 오직 변론으로써 500명이나 되는 배심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원고의 고소장 접수 - 피고인의 자기변론 - 배심원의 판결 - 피고인의 최종 진술 등의 순서를 거치는 것 같다. 변론의 내용과 주석을 참고하여 보면 원고는 고소장과 함께 형량을 청구할 수 있었고 피고 역시 자신의 죄에 해당하는 형량을 청구 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행동은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시청사에서 제공하는 무료 식사라고 청구한다. 시청사라고 하지만 이곳은 폴리스의 귀빈이나 올림픽의 우승자 등 국빈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었던 듯하다. 철학에 생활고의 방망이를 들이대는 크산티페가 아닌 이상 누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맞설 수 있었을까. 그러나 세계철학의 아버지도 배심원들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귀머거리거나 죽이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 아닌가. 모종의 정치적 꼼수가 있었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정치적 배경이 있음을 알고 정계진출을 포기하고 철학을 통해 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로 한 플라톤의 행보를 넉넉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쾌락, 고통, 두려움 등 이 모든 것과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동전은 지혜뿐이라던 그는 죽음까지도 지혜와 맞바꾸었다. 그의 죽음은 지혜와 미덕을 위한 순교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하며 잘 사는 것은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 숙제로 남는다.

 

불교에서의 윤회설과도 비슷한 그의 죽음에 관한 사유는 <파이돈>에 잘 나타나 있다. 육체와 혼을 분리하고 죽음은 곧 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서로 대립되는 쌍의 생성과정을 예로 들며 죽음이 곧 생성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는 죽음에 대한 그의 사유는 죽음을 불행의 최종심급으로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이 한번쯤 생각해보아야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몸, 쾌락, 욕망을 지나치게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거부감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말로 철학하는 자가 마땅히 취해야할 태도로 받아들인다면 달리 반론의 여지도 없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이 말하는 상기론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원형인 듯싶기도 하다.

 

그 외에도 가장 일반적이고 쉬워서 누구나 이해 가능한 예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제되는 사안에 까지 접근해가며  관념적인 문제까지 추론을 통해 해결하는 방법, 언제나 긍정의 답이 나올 수 있도록 질문을 던져 끝내는 답하는 자가 스스로 자기논리에 말려 아니오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대화법이 흥미 있었다. 당사자는 괴로웠겠지만 그것이 어떤 이익을 추구하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앎에 대한 어떤 불가능의 상태로 이끌어가며,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결국에는 앎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다르게 유도하는 질문이었으므로 그와 대화한 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을 것 같다. 열광하거나 고소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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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진경문고 5
정민 지음 / 보림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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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히지만 아주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이미 오래전에 같은 저자가 쓴 『한시 미학 산책』에서 일별한 적 있다. 같은 내용을, 정확하게 말하면 『한시 미학 산책』에 실린 앞부분을 쉽게 풀어 썼다. 저자는 딸 벼리가 한자에 눈떠가는 모습을 보며 아이를 위한 선물로 이 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어린이에게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쉽게 읽히는 장점이 있다. 요즈음 이런 방식의 책들이 많이 나오는 모양이다.

 

내가 이런 형식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수잔 와이즈 바우어가 쓴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 역사 이야기』였다. 적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옛날이야기를 읽듯이 읽을 수 있었다. 이후에 이와 비슷한 형식을 가진 책들이 유행하기 시작한 듯하다. 시를 어려워하고 한시라면 더더욱 어려워할 뿐만 아니라 외국어 대하듯 하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몹시 다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시에 관심을 가지고 한시를 읽으면서 아이의 한자실력도 함께 늘어날 것을 염두에 두었는데, 사실 이 책은 한시를 읽는 독자만이 아니라 시를 창작하는 사람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한시를 예로 들었지만 한권의 시론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울림이 있는 말’, ‘간결한 것이 좋다’ 등 소제목만으로도 시를 지을 때 명심해야 할 내용들이 모두 보인다. 특히 ‘절벽 옆에 말을 세우니 몸이 너무 피곤해서/나무에 시를 쓰는데 글자가 써지지 않는다’를 ‘절벽 옆에 말을 세우니 몸이 너무 피곤해서/나무에 시를 쓰는데 글자를 반만 쓰고 말았다.’로 한두 자를 바꾸어 전혀 다른 맛이 나게 고치는 부분,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를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로 절반으로 줄이면서 의미는 더욱 풍성하게 하는 방법을 눈여겨보았다.

 

창작자는 피로써 피를 씻듯이 다른 사람의 시를 읽게 되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시인만의 새로운 시각을 갖기 위해 애쓰다보면 초심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잃는 것 까진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지금 어디서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게 될 때, 빛나는 형용사만을 찾아 시선이 흔들릴 때, 시를 보는 눈은 한없이 높아져서 정작 자신은 시를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퇴고를 위한 자기검열의 기준이 모호해 졌을 때, 이 책의 내용들이 도움이 될 듯하다. 책의 뒷부분에는 본문에 인용된 시의 원문을 함께 수록했고, 각 저자들의 간단한 소개도 곁들였다.

 

최근 읽고 있는 『잘라라, 기도한 그 손을』의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몇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어 원문을 거의 외우다 시피 한다고 한다. 독서를 혁명이라고 말하는 그는 한 권의 책을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그것의 내용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며, 그것은 또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번 읽은 책은 몇 권되지만 두 번 읽은 책은 두어 권 뿐이며 반복해서 읽고 또 읽은 책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시 그의 말을 빌리면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은 명백하게 어리석은 일이지만, 우리들은 이 어리석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 역시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어리석음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시 미학 산책』을 읽을 때 보다 오히려 가슴에 와 닿거나 깨닫게 되는 부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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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2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24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름과 경이 I21총서 1
이영광 지음 / 천년의시작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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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인연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악연일 수도 호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사놓고 몇 년 째 읽지 않는 책이 있다면 악연일까? 호연일까? 출간과 동시에 구입해서 바로 읽었다면 그건 호연일까? 악연일까? 끙끙대며 읽었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그건 악연일까? 호연일까? 이상한 몰입의 힘에 이끌려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자 진이 다 빠지고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건 호연일까, 악연일까?

 

최근 이런 책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출간 소식은 출판사의 개인 메일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서점에 깔리기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시름과 경이 』라는 제목에 기대어 시에 대한 이야기겠거니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마도 저자가 시인이라는 믿음도 있었겠고 그가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서 소개한 두보의 시에 대한 기억도 있었으리라.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423413&cloc=olink|article|default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공부하여 쓴 글과 시와 시 쓰기에 대한 글을 골라 묶’은 책이다. 본문은 총 네 부분으로 나뉘었다. 1부의 글에서는 시의 형식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특히 소월시의 수미상관을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으로 진단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2부는 무속의 세계로 미당의 시를 해석하고 있는데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3부는 오탁번, 조정권 등 시인들의 시세계를 다루었다. 오탁번 선생의 ‘폭설’이나 ‘굴비’처럼 적나라한 욕이나 성애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시들이 사람들에게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 늘 궁금했었다. 나는 있는 사실을 말해도 외설이 되고 음담이 되는데 말이다. 저자는 이런 나의 궁금증을 마치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이 알려주었다. 조정권론에서 저자는 ‘미묘하고 역동적인 분열의 느낌’이 눈길을 끈다고 했다. 내가 시집 『고요로의 초대』를 읽었을 때의 느낌과(http://blog.aladin.co.kr/734872133/4590458)’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 ‘보유’라는 제목으로 5편의 산문을 묶었다. 바로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책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세 권의 시집을 낸 사람으로서, 시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시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곱씹으며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동틀 때까지 잠들 수 없었다.

 

시의 황홀경을 맛본 자가 다시 그것에 접하려 할 때, 아마도 그 정신의 상태는 모종의 비상한 ‘몰입’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몰입이란 정신이 딴 데로 가 버렸다는 것, 그는 현실이 아닌 곳에 자기 아닌 다른 이로 다가가서, 없던 말을 얻어 와 이곳을 충격에 빠뜨림으로써 낯선 진실을 드러내는 자이다. 이처럼 시는 어떤 특별한 몰입을 통해, 그러니까 “모든 감각들의 이치에 맞는 착란(랭보)”을 통해 만나게 되는 특별한 순간이고, 특별한 순간에 태어나는 낯선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시 쓰기는 어렵다. 제 감각과 의식을 지우면서, 그러나 지성의 컨트롤타워를 유지한 채 미쳐야 하기에, 시에 미치는 것과 미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265쪽)

 

이렇게 시는 어디선가 온다. 의식 하의 몸의 소리가 의식에 남기는 흔적이 곧 시의 순간일 것이다.……그러니 시에 닿으려면 아예 그것을 의식 차원에서는 잊고 있거나, 아니면 찌른 자리를 또 찌르듯 무의식의 작동 메커니즘에 다시 몸을 맡겨야 한다. 그렇게 시인은 괴롭게 넋을 잃는다. 넋을 잃다니, 하면서도 시인은 그렇게 제 몸의 시간의 수라장을 건너간다. 넋을 잃으면 많은 것을 더 잃겠지. 생활의 균형, 페르소나의 분실 같은 것. (-270쪽)

 

 

 

‘책은 사람을 비추는 종이거울’이라고 썼던 적이 있었다. 시를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내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을 만난 것 같다. 시인의 종이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초라하기가 비에 젖은 닭 같다. 시와의 치열한 만남 앞에서 나는 헐겁기가 터진 그물망 같다. 이렇게 부끄러워 본 적 없었다. 아니 창피했다. 나는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흉내 내는 얼치기 독자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잔뜩 기가 죽어서, 때로는 질투에 떨면서 인정해야했다. 카프카였던가?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한 이가? 나는 지금 카프카가 말하는 도끼를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데 이 책은 내게 과연 악연일까, 호연일까?

 

갑자기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대한민국의 국가 대표급 시인이 낸 책인데 어째서 그 흔한 보도자료 한 장이 없는 걸까? 네이버 책에서는 아예 검색도 안 된다.

“시는? 정신을 조금만 잃고, 삶은?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라더니, 시인은 아예 삶에서 정신을 놓아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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