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로의 초대 민음의 시 171
조정권 지음 / 민음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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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獨樂堂)


독락당 대월루(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시집 『산정묘지』에 실려 있는 시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참으로 독한 시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시인이 깊이 은거할 것 같은 예감과 시집에 실려 있는 ‘산정묘지’ 연작들이 마치 그 은거에 필요한 주문처럼 느껴졌었다.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리고, 맑은 달빛을 마주 하며 홀로 즐기는 집에 거한 이. 그것은 이름처럼 즐거운 집이 아니라 외롭고 쓸쓸한 고행을 달게 견디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시인의 새 시집 『 고요로의 초대』를 읽으면서 그 때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은둔지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독락당’이 ‘은든지’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그곳은 ‘외로움의 성전’이 되었다. 시인은 그곳에서 스스로 교주이면서 스스로 신도이다. 그가 교주로서, 신도로서 읽고 쓰는 것은 오로지 詩라는 성전. 그는 쓸수록 허기지는 말=시를 새겼고, 새기고, 새길 것이다. ‘독락당’이면서 ‘은둔지’이고 또한 ‘외로움의 성전’이기도한 이곳에서 시인은 교주이면서 신도이듯이, 실체이면서 그림자이고, 초대하는 자이면서 초대받는 자다. 아무도 없는, 시인이 혼자 거하는 이곳은 고요한 장소다. 아니 고요 그 자체다.



고요로의 초대



잔디는 그냥 밝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 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시를 가만히 읽고 있으면 화자는 고요 자체이다가 ‘초대하는 나’로 바뀌고 ‘무거운 머리’와 ‘헐벗은’두 손을 가진 ‘초대받는 나’로 등장한다. 중복되는 화자들, 그러나 그들은 각각이 아니라 모두 한 사람이다. 내게는 외롭고 쓸쓸한 고행을 달게 견디겠다는 뜻으로 읽히던 ‘독락당’이 비로소 홀로 즐기는 ‘독락당’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그곳은 시인이 ‘대지가 갓 발행한 파릇한 풀잎을 붙이고/나도 모르는 곳으로 나를 발송해 버’(<우표에 대한 상처>)린 곳인지도 모르겠다.


시집 전체에 분열된 자아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다. ‘왕벚꽃 온 사방에서 몰려와 내 눈을 염해 버린다.’(<벚꽃 하품>)에서 처럼 ‘염’한다는 단어들도 자주 등장한다. 시집을 덮고 나서도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시인의 각각의 모습들과 ‘염’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박혀있다.  시집 곳곳을 배회하는 분열된 자아들이 다만 시적 전략이기를, '염'이라는 단어 역시 시인과 아직은 멀리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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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05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열된 자아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표현... 정말 시적이로군요.
'고요로의 초대'란 시집을 소개하는 문장으로는 딱이다 싶습니다^^

반딧불이 2011-03-05 13:05   좋아요 0 | URL
시를 너무 오랜만에 읽었더니 생면부지의 남의 집에 들거간것 같습디다. 제가 쓰고나서도 제가 쓴것 같지가 않아요. 후와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게도 분열된 자아가 있어 저도 모르게 그것이 쓴게 아닌가 싶어지네요.

양철나무꾼 2011-03-0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정묘지' 읽었던 것 같아요, '독락당'이 기억나는 걸 보면...
'고요로의 초대', 찾아 보겠어요~

자아를 관조하는 느낌의 페이퍼라 저도 수선 떨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요~^^

반딧불이 2011-03-05 18:36   좋아요 0 | URL
관조는요. 무슨...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말인걸요.
나무꾼님 시도 많이 읽으시던데요. 새해엔 시를 좀봐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저는 잘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