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책
박민영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은 즐겁기도 하고 참담하기도 하다. 전자의 경우는 처음 읽었을 때는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거나 또 다른 의미로 충만해질 때이다. 후자의 경우, 책은 온몸에 붉은 줄 푸른 줄을 긋고 내 책꽂이에 꽂혀있으면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고 있는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다. 처음엔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전자의 경험보다 후자의 경험이 잦아지면서 나는 영화속 여주인공처럼 혹시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어있지 않나 의심하게 되었다. 정기검진을 받으러 오라는 치과의사의 호의를 무시하다 어금니를 뽑아야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고 어떤 식으로든 내 독서 방법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때였다. 

 알라딘에서 한참 뜨고 있는 독서에 관한 책을 발견했다.(http://blog.aladin.co.kr/734872133/1994606) 이 책은 표지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책장이 바람을 일으키며 후르륵 넘어가는 이미지였다. 이 책을 읽고나면 나도 모든 책들을 저렇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굼뜨고 껄끄러운 내 독서방식에서 비롯된 프로이트적 욕망의 발로였으리라. 더구나 저자가 일본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라는 평을 들을 만큼 유명한 소설가라고 한다. 나는 날름 주문을 했고 책이 배달되어 오기까지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 모두 읽어버렸다.  저자가 소설가인 덕분에 이 책의 대부분은 소설읽기에 할애되고 있었다. 더구나 그가 선택한 일본 소설들이 유감스럽게도 내가 읽어보지 못한 소설이 더 많았다. 나는 읽지 못한 소설들을 독서목록에 추가하고, 이 소설들을 읽은 후에 다시 한번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곤『책을 읽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이 책을 ‘소설을 읽는 방법’이라고 내 맘대로 바꿔버렸다.      

  이미지에 현혹 당했던 눈을 씻고 다시 고른 것이 박민영의 책이다. 우선 그가 이 책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이 마음에 든다. ‘책을 읽어도 좀처럼 자신의 지적 능력이 발전하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사람’,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할지 모르는 사람’, ‘독서를 통해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폭넓은 교양과 깊이 있는 지적 역량을 갖추고 싶은 사람’, ‘지성인으로서 사회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싶은 사람.’ 머리 속 지우개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적 능력, 교양, 지성인 같은 어휘들이 적당히 내 허영을 부추겼다. 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잠언 같은 말들에 나는 또 많은 밑줄을 그었다.

책은 인간의 생각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촉진시킨다는 점에서 어떠한 매체보다 우월하다-23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색에 의해서 얻어진 것만이 참된 지식이다 -41
책을 읽는다는 것은 외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한다. -42
열역학 제2법칙을 모르는 인문계와 셰익스피어를 모르는 이공계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79
공부하는데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공부하지 않는다. -88
인간에게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함으로써 이해되는 과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96
책과 문화가 서로 대화하게 하라. 그러면 독서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더불어 다른 예술작품을 향유하는 능력도 성장할 것이다. -102
무딘 연필이 좋은 머리보다 낫다. -113
반대하거나 논쟁하기 위해 독서하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도 독서하지 말라. 그저 자신이 생각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독서하라. -125
생각하지 않고 책장을 넘기기 위해서만 책을 읽는 무리들이 많다. -153
언어가 정밀하다는 것은 곧 사유가 그만큼 정밀하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154
지식은 타오르는 불과 같다. 처음에는 불을 붙여 주는 사람의 힘에 의지하지만, 불이 붙고 나면 그 스스로 타오른다. -196 
진정한 독서가에게 모든 책은 참고문헌일 뿐이며, 책에 있는 텍스트를 발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참고로 하여 자기 내부의 텍스트를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227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독서의 진정한 목적이다. -228
가장 불행한 독자는 인쇄된 문자 이외에는 다른 것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다. -228
독서가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하는 것에만 머무른다면 독서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229
독서가 다른 사람의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232
메모는 자신이 책에 심어 놓은 수많은 지적 이정표이다. -248
사물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은 불연기연, 즉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를 반복함으로써만 가능하다. -268 

  밑줄 그어 놓은 말들을  같은 내용끼리만 묶어보았다.  추려낸 내용들을 살펴보니 그간의 나의 독서행위는 무엇이든 그저 알고싶다는 욕심이 앞서서 눈도장 찍기에만 급급했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저 줄거리 파악하기에 바빴고 애꿎은 형광펜과 칼라펜으로 책을 학대하는데 그쳤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에 와닿는 말은 진정한 독서가는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의 내부를 발견한다는 것이었다. 늘 바깥을 향해 흔들리던 눈길을 내 안을 향하도록 거두어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밑줄 그어놓은 많은 말들은 곧 내 기억 속 지우개의 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왠지 이제는 지우개가 두렵지 않다. 지우개가 지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우개는 단지 나의 기억만을 지울 뿐 생각을 지우지는 못한다.  지우개가 지운 내 기억의 찌꺼기만큼 내 생각이 자랄 것을 믿기로 한다. 이제부터 다시 읽는 모든 책들은 내게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충만해지는 즐거움만을 가져다 줄 것이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독서목록에 추가한 책
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모디머J. 애들러, 『독서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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