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듣기도 싫고 하기도 싫은 말 중의 하나가 공부라는 말이다. 내가 어릴때 우리집은 가난하고 아이들은 많았다. 그 당시로서는 오남매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경제력에 비해 공부해야할 아이들이 많았다는 거다. 때문에 아들들이 당연히 우선시 되었고 딸인 나는 은근히 책 좀 안봤으면,  공부좀 덜했으면 하는 암묵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어야했다.  그러니 공부하라는 말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학창시절이 끝난 셈이다.  그런데도 공부하라는 말은 듣기 싫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하라고 할때의 그 공부가 듣는 사람이 하고싶은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또 오빠나 남동생을 겨냥하고 있는 그 말에는 공부를 잘해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기대를 담고 있는듯해서 옆에서 듣는 나까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가능하면 공부하라는 말은 삼키고 살았다. 참다 참다 하는 말이 고작 '책 좀 봐라' 였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은 만화로 된 '조선왕조실록'을 펴들었었다. 수십번을 봐서 책은 너덜너덜 한데도 그것만 본다. 한참 보다가 깔깔거리고 웃는 대목도 언제나  똑같다.  거의 외우다시피 봐도 여전히 웃긴다는 것이다. 참 질긴놈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재미있는 책들이 많은데도 왜 한가지만 파고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의 독서습관을 위해서는 부모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순 거짓말이거나 경험적 오류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책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책에서 멀어져갔다. 책을 읽다가 혼자보기 아까운 내용이 있어 읽어보라고 하면 엄마는 왜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보고 있냐고 되묻는다. 좀 더 커서는 세상에는 책보다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고 외려 가르치려 든다. 

 아이들 뿐만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날보고 공부하는게 그렇게 좋냐고 비아냥 거린다.  공부라고 해봐야 정말 공부하는 분들과는 체급이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나는 정말 할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책을 보는거다. 즐거울 때가 많지만 책을 보는 것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나마 가장 즐겁고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 할 것이다. 나도 하루 일과 중에 책 보는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려고 애쓴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책볼 시간이 없다는 얘기와도 같다. 직장생활과 집안살림만으로도 시간은 늘 모자란다. 책과 함께 있을때는 신간이 편안하다. 죽을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마도  어릴때 남들은 귀에 닳도록 듣는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자란  무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대를 물려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은 공부라는 것을 강유원은 몸으로 하라고 한다. 아니 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은 어때야 한다라거나 자신은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좀 다부지고 논리적인 문체로 적어놓았을 뿐이다.  그에게  책을 읽는 것은 죽을 때 후회하지 않겠다는 '인생의 알리바이' 라고 한다. 죽을 때까지 읽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것도 양에 대한 의미보다는 깊이에 천착한 '인생의 알리바이'다. 한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기를 그는 권하고 있다. 그러나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이 책을 읽다보면 그는 독서의 깊이 못지 않게 넓이도 갖추고 있고 읽은 책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는 공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다  짐작할 수 있다. 원전에 입각해서 수십번씩 읽고 생각을 모으고 정리했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참 독한 사람이다 싶다. 그는 이런 방법을 그의 스승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참 존경스러운 분이고 그것을 또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도 마땅히 존경받아야할 사람이다.

 근대가 시작될 무렵의 시기를 계몽주의 시기라고 한다. 계몽주의의 모토는 '이성을 대중화하라'였다.  현대는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대중은 매체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강유원은 대중을 우민화하는 대중매체에 대항하여 '대중을 이성화하라'고 외친다. 그것은 지식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가 지식인으로 꼽고 있는 대상은 소설가와 대학에 관련된 교수 혹은 그 주변인물들이다. 그는 어떤이가 명백하게 '돈을 위해서 소설을 쓴다면, 즉 소설을 하나의 상품으로서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소설가가라 부를 수는 없고 기업가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한다.  대학의 지식인들이 그들을 먹여살려주는 학생들을 위해 공부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 '쿠폰제'를 적용해야한다는 제안은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다.  

 강유원은 세가지 학문하는 태도를 짚는다. 그것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는 인문학적 태도,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파악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과학적 태도,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을 찾고자하는 공학적 태도이다. 가장 좋은 학문하는 태도는 이 세가지 태도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강유원은 이 밖에도 지식인과 매체와의 관계, 패스트푸드의 전체주의 등을 짚는다. 그는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명성에 굶주린 거지'라고 부르고 부르디외를 인용하여 '일회용 사고의 전문가들'이라고 꼬집는다. 이러한 단어들은 읽는이들에게도 자극적이지만 그가 지향하고 있는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해준다. 맥도날드는 패스트푸드의 대명사다. 맥도날드가 성공하게된 전략적 특성을 명료하게 요약 정리 한 그는,  전세계적으로 성공신화를 거둔 '맥도날드화'는  폭력과 억압, 독재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보다 더 무서운 전체주의라는 경고를 잊지 않는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를 읽으면서 나는 감동보다도 부끄러움을 먼저 느껴야했다. 무언가를 참 많이도 하고 있지만 제대로 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날날이 직장인이었고, 날날이 엄마, 주부였고, 순 날날이 원생이었다. 한마디로 순 날탕 인생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책은 무지한 나를 이성화 시키는데 단초가 되어주었다.  그가 궁금해졌고, 자신의 싸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www.armarius.net)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어가는 독서클럽, 원전강독, 많은 리뷰들이 그대로 오픈되어 있었다. 내게는 버겁겠지만 자주 들러서 몸으로 하는 공부를 함께 해야할 것 같다. 한동안 강유원을 해바라기 할 것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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