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역 이옥전집 1 :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완역 이옥 전집 1
이옥 지음,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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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환절기라고 답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과 여름과 가을의 건널목이 좋다. 둘 중에서도 고르라면 나는 당연히 후자를 고르겠다. 그러니까 요즈음과 같은 때다. 파장이 많이 짧아지긴 했지만 태양은 여전히 여름의 그것처럼 따갑고 바람은 완연한 가을이다. 절기로 치면 추분에서 한로 상강 지나 입동 직전까지이다. 나는 이때쯤 일 년 중 최고의 정신적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 같다. 평생을 저질체력으로 손가락질 받아온 몸뚱어리는 일찌감치 제쳐두고 말이다. 나는 거의 이 환절기에 취하다시피 사는 것 같은데, 아무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난치병을 앓고 있는 나의 증세가 조금이나마 호전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무엇에 취한다는 것. 그것이 일이든 취미든 도박이든 가끔은 부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중 가장 부러운 남자를 최근 만났다. 이 남자는 묵향에 취해서 묵향을 토하며 살았던 남자다. 그의 이름은 이옥. “붓 끝에 혀가 달렸다.”고 그를 극찬한 사람도 있었지만 문체반정으로 정조에게 콕 찍혀 일생을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남자다. 한미한 무반계의 서족이라는 출생도 한 몫 했겠다. 하지만 그는 초시에 응시하여 수석을 차지하고서도 그의 글이 격식에 어긋난다고 꼴찌로 밀려나고 군역에 복무하는 충군의 벌을 받았다.


나는 처음 이 남자를 도서관에서 주워왔다. 그러니까 동네 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한다고 필요한 책이 있으면 가져가라는 공지가 떴고 나는 거기 가서 『담배, 연경의 모든 것』을 가져왔다. 몇 년 동안 책꽂이에 죽은 듯이 박혀있더니 그가 책의 향기에 취한 탓인지 내가 환절기에 취한 탓인지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이상하다! 먹은 누룩이 아니고, 책에는 술그릇이 담겨있지 않는데 글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할 수 있겠는가? 장차 단지를 덮게 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런데 글을 읽고 또다시 읽어, 읽기를 삼 일 동안 오래했더니 꽃이 눈에서 생겨나고 향기가 입에서 풍겨 나와, 위장 속에 있는 비릿한 피를 맑게 하고 마음속의 쌓인 때를 씻어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즐겁고 몸이 편안하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 들어가게 한다.” <墨醉香序 이옥전집1권, 268쪽>  

책을 어떻게 읽으면 눈에 꽃이 피고 향기가 입에서 풍겨 나온단 말인가? 위장 속에 있는 비릿한 피를 맑게 하고 마음속의 때까지 말끔히 씻어내는 책읽기의 경지라니! 마치 알코올이 모세혈관을 광포한 말처럼 달려 나가 혈관을 확장하고 심장을 펌프질 하고 뇌세포를 마비시킨 다음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사람을 퀵 배송한 다음에야 느낄 수 있는 기분일 것 같다. 아무것에도 취해보지 못한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시여(詩餘)는 사(詞)이지, 술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취(醉)’라고 이름 붙이니, 그 글이 사람의 폐부를 적시고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흥겹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자가 그 누구인들 취하지 않으리오. 나도 이제 진실로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하게 되었다.
크게 취해서 취함이 극에 달한 자는 반드시 토하게 되는 것이니, 마치 옛날에 이불에 토했다는 것과 혹 수레에 토했다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런데 나는 술이 있어서 취하면 토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니, 나의 주벽이 그런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읽고서 이것을 지은 것은 또한 내가 취하여 토한 것이다. <묵토향의 앞에 적는다, 이옥전집1, 270> 


술 마시고 토하는 일은 나도 잘 할 수 있다. 소주 세 잔, 막걸리 두어 잔, 맥주 두어 병 정도면 아주 공손한 자세로 변기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몸과 정신을 취하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토하는 것이라는 데 있다. 지구상의 모든 이에게 추파를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그 흔한 알코올마저도 자기로 하여금 취하는 것을 내게는 허락하지 않으니 술에게서조차 버림받은 나는 그가 정조에게서 버림받은 것을 은혜 입은 광신도처럼 찬양해야할 판이다.

토하는 것은 진실로 취한 사람의 보통 일인데, 위가 약하거나 결벽증이 있는 자는 남이 토하는 것을 보고 또한 그 때문에 토하기도 한다. 나는 남들이 나의 이 <묵토향>편을 보고 땅바닥에 손을 짚고 꽥꽥 구역질을 하지 않으리라고 말할 수 없다. < 묵토향의 앞에 적는다. 이옥 전집1 271)

중국여행길에서는 아침에 호텔에서 주는 흰죽 한 그릇만 먹고 4박 5일을 버틸 만큼 위도 부실하고, 아이들이 젖을 먹고 게우면 나도 같이 토악질을 할 만큼 결벽증(근데 이거 내가 아는 결벽증이랑 다르잖아?)도 있다. 지금 내가 두어 시간 만에 휘둘려 쓴 이 글이 이 옥의 토사물을 보고 내가 땅바닥에 손을 짚고 꽥꽥 구역질을 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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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10-2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보니 읽고 싶어지는 책입니다.
보관함에 담아갈게요.
환절기, 건널목, 건너다... 이말에 사로잡히네요.
이게 길을 건널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 딱 제게 오는 것 같아요.

반딧불이 2010-10-25 23:39   좋아요 0 | URL
음주교정에 이어, 음주스크랩은 아니시죠?
농담이었어요~ ㅎㅎ

프레이야 2010-10-26 19:16   좋아요 0 | URL
헤헤 음주는 아니었고 그 뒤에 밤늦게 했어요ㅋ

비로그인 2010-10-25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취하는 글이네요 ㅋㅋ
환절기를 좋아하고 술 몇 잔이면 불콰해지지만 취해본 적 없고...
반딧불이님의 체질과 제 체질이 많이 닮았네요 ㅎㅎ

"마치 알코올이 모세혈관을 광포한 말처럼 달려 나가 혈관을 확장하고 심장을 펌프질 하고 뇌세포를 마비시킨 다음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사람을 퀵 배송한 다음에야 느낄 수 있는 기분일 것 같다."

동감입니닷!!^^

반딧불이 2010-10-25 23:41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후와님도 저질체력??? ㅋㅋ
이거 자꾸만 후와님이 궁금해지는데요.

cyrus 2010-10-25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옛 글을 읽으면 참 좋은거 같습니다.
외국의 시랑 그 읽는 분위기와 느끼는 정서도 다르니까요.
그러고보니 저도 한시 안 읽은 지 꽤 됐네요.
세계문학작품만 읽다보니 참...-_-
반딧불이님의 글을 읽고나니, 한국고전문학들도 읽고 싶어지네요,
제가 다니는 도서관에도 이옥 전집이 있던거 같기도 해서 읽어봐야겠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ㅋ

반딧불이 2010-10-25 23:46   좋아요 0 | URL
처음 읽을 땐 '사랑스러운 찌질이'라고 불렀드랬는데 아무래도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이름짓기를 다시해야할 듯해요. 책값이며 분량이 묵직하니까 도서관 가시면 한번 훑어보세요. 정말 재미있는 아저씨여요.

양철나무꾼 2010-10-26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랑스러운 찌질이'가 더 맘에 드는 걸요~
이옥도 궁금하지만,전 이 가을 님도 좀 궁금합니다.^^

반딧불이 2010-10-26 12:37   좋아요 0 | URL
하는 짓을 보면 찌질이가 분명한데..글을 보면 찌질이라고 할 수가 없더라구요. 제가 이름을 붙여주는건 상당한 애정의 표현인데 마땅한 이름이 없어서 고민에요.

이옥은 도서관에서 금방 궁금증을 해소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저에 대한 궁금증은 어떻게 해드려야 하나 저도 고민이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6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문학 전공수업을 들으며 이옥의 이름을 들은듯도 해요. '소품문학'과 관련해서요.
벽사 이우성 문하의 제자들이 번역을 했군요? 고전문학은 정말 순교자적 정신으로 번역을 하는 분야지요. 품이 많이 들지만, 알아주는 이도 없구요.
겨울 날씨네요. 전 감기 들어서 병원에 잠깐 들렸답니다^^;
건강 유의하세요!

반딧불이 2010-10-26 12:40   좋아요 0 | URL
저는 정말 이 책을 번역하신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싶더라구요. 번역이 없었더라면 이 아름다운 글들을 한편도 못봤을거 아니에요.
정말 오랜만에 저를 흥분시키는 글을 발견해서 감기는 근처에도 못오고 있습니다. 근데 이맘때쯤이면 감기정도는 한번 앓아주시는 것도 계절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어요? 그래야 겨울을 건강하게 나실 수 있으실테니까요. 너무 심하게 앓지는 마시구요.

스트레인지러브 2010-11-0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읽어볼까 했는데, 가격이 만만치가 않네요.
속물이라고 불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도서관에 들여놔 달라고 신청해야겠네요 ^^;

반딧불이 2010-11-03 16:52   좋아요 0 | URL
속물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 저도 책값내는데 손이 벌벌 떨리던걸요~ 이거 사느라고 다윈평전을 못사서 저도 도서관에 구입요청했놨어요. 근데 요청하나마나 가서 한번 들여다보면 아마 밑줄긋고 싶어서 또 사고 말거에요.

도란도란 2010-11-18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반딧불이님!^^ 알찬 블로그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반딧불이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리플 남기고가네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반딧불이 2010-11-22 12:35   좋아요 0 | URL
네..감사합니다만 저의 관심분야는 아니네요. 다음에 좋은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넙치 2011-01-19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반딧불이님 리뷰 봤더니 밑줄 그은 곳이 똑같아요!ㅎ
반딧불이님 저질체력도 완전 공감.ㅋ

반딧불이 2011-01-19 15:29   좋아요 0 | URL
이럴땐 하이파이브 해야되는데 말이에요. 근데 넙치님도 저질체력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