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ㅡ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과 그 귀결~~
남은말 : 1946년 5월의 대분기

미군 진주를 전후해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구실로 인공 타도를 주장했던 송진우·장덕수·허정 등 한민당 핵심들은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임시정부 지지를 주장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인공 타도를 위해 임시정부의 명성과 위광을 활용하려했을 뿐, 임시정부 자체를 봉대할 본심이 없었다. 장덕수는 임시정부를 그대로 두고 독촉중협을 장래 한국 정부로 만드는 것이 미군정의 생각이라고 했고, 허정은 대외관계로 군정이 임시정부를 부인해서 독촉중협을 조직했는데 곧 행정권을 이양받을 것이며, 송진우는 일체를 이승만에게 맡겨서 일을 처리하자고 주장했다." 임시정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은 임시정부가 공인될 수 없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김구와 몇 사람을 끌어
들여 독촉중협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 P403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미군 진주 이후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내세우고 인공 타도를 외치며 미군정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군정의 요직을 독차지한 한민당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정무위원회(=독촉중협)가 국무회의가 되고 한국 정부의 토대가 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자, 과감하게 임시정부와의 연관성을 끊어버리려 한 것이다. 손안에 들어온 권력을 임시정부와 나누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 P404

미국 문서와 이승만 문서가 공개되고 나서야 우리는 미로처럼 뒤엉켜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던 해방정국부터 신탁통치 파동에 이르는 과정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게 되었다. 독촉중협은 이승만 중심의 우파 정치 블록이었다는 기존의 이해와 달리, 국무회의이자 민의의 대표기관으로 미국 외교문서에 등장하는 정무위원회의 실체였으며, 미군정으로부터한국 정부로 승인받아 행정권을 이양받을 주체였던 것이다.  - P404

미군정의 속내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지점은 개별 정치인 및 정파에 대한 재정적 후원과 공작이었다. 1946년 5월 미군정은 표면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한다고 했지만, 정치자금에 대한 미군정의 정책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먼저 하지 장군은 이승만에게 1,000만 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친일파가 중심이 된 대한경제보국회라는 일종의 정치적 보험조직이자 엽관운동 단체가 중개 역할을 했다. 대한경제보국회 회원 10명이 조선은행에서 200만 원씩 대출을 받아 총 2,000만 원의 정치자금을 마련했고, 그중 1,000만 원을 이승만에게 헌납했다. 조선은행은 개인에게 10만 원 이상 대출할 수 없었으므로 2,000만 원의 정치자금 대출은 하지 중장의 특별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명백한실정법 위반이었다. 이들은 어떠한 담보도 제공하지 않았으며, 정치적 결정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상환하지도 않았다. 특정 정치인을 위해 조선은행의 발권력을 남용한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 조달과 제공이었고 정치자금 스캔들이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감춰졌다. 그 비밀은 하지 중장과 미군정 수뇌부, 이승만, 대한경제보국회, 한민당지도부 정도만 알고 있었다. - P416

정치자금의 측면에서 상황을 헤아려보면, 미군정은 이승만에게+1,000만 원, 김규식에게 +300만원, 김구에게 0원, 여운형에게 0원,박헌영에게 
240만 원을 제공한 것이다. 
정치자금의 지원 규모가 해당정치인 및 정파에 대한 미군정의 선호도를 반영한다고 봐도 된다. 정치적기회의 측면에서도 불균등이 발생했던 것이다. 미군정은 1945~1946년에 두 차례의 대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에게 정치적 구심이 될 수 있는 전력을 다한 후원을, 김규식에게는 1946년 중반 이래 정치적 기회와 립서비스를, 김구에게는 1946년 이래 침묵 속 감시와 비협력을, 여운형에게는 회유와 공작을, 박헌영에겐 진주 직후 냉담함과 1946년 중반 이후전력을 다한 정치적 탄압을 제공했다. 
최소한 1946년 하반기까지 미군정은 이승만-한민당 블록을 중심으로 한 우익 진영에게 전폭적인 지원을제공하고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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