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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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년 전에 한참 이슈가 되던 책인데 이제야 읽다. 게으름에, 남들이 읽어라 읽어라 하면 읽기 싫은 청개구리 심보가 작용한 탓인데, 앞으론 고쳐야 할 고질병이다.

전인권 씨의 [남자의 탄생]은 그 자신의 유년 시절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어떻게 키워지고 만들어지는가를 서술한 책이다.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있기는 하나 크게 도드라지지 않으며, 그게 읽기를 부담없게 만들기도 한다.

헌데,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맘에 걸린 것은 철저히 저자 개인의 경험으로 한정된 서술이었다. 그 지극히 제한된 경험 분석을 통해 '동굴 속 황제' '신분적 인간' '분리된 사랑' 등의 보편적 규정이 도출되어서일까,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도 있지만 논리적 비약이다 싶을 때가 많다. '아버지 살해' 같은 것은 좀더 치밀하게 분석되고 주장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이미 규정을 내려놓고 자신의 경험을 대입한 듯한 단순함을 느낀다.

이 책은 출발이다. 이것을 출발점 삼아 스스로가 자신의 역사를 분석하면 좋겠고, 전인권 씨의 뒤를 이어 이보다 더 많은 사례와 치밀한 분석도구를 가지고 이런 작업을 계속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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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위의 여자 Mr. Know 세계문학 11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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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번역가 김석희 선생에게 그간 번역한 책 중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하고 물었더니 선뜻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꼽았다. 그래서 그 두께에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읽기 시작했다.

뜻밖에 잘 읽힌다. 19세기 소설 작법을 그대로 따라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쓰여 읽기에 부담이 없는데다, 이야기도 그 무렵의 소설들에서 익히 보던 것이다. 몰락해가는 귀족 청년과 스캔들의 주인공인 베일 속 아가씨,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아름다운 부르주아 약혼녀, 심술궂은 노파, 자유주의자 의사 등등. 읽다보면 제인 오스틴과 발자크와 호손의 소설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중간중간 뻔뻔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작가. 그 천연덕스런 음성과 문학 강의를 듣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존 파울즈의 이 책을 읽고 내처 [만티사]를 읽고 있는데, 아무튼 이 작가의 뻔뻔함과 위트는 인정해줄 만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풍경과 심리를 해부하다시피한 섬세하고 신랄한 묘사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최고의 역사소설로 꼽고 싶다. 아니, 역사소설의 한 전범으로. 역사소설이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이 아님을 놀랄 만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로 보자면, 주인공 찰스의 심리와 성격은 설득력도 있고 살아있는 데 비해 사라와 어니스티나는 애매하고 비어 있다. 사라의 욕망은 설득력이 없고, 그녀의 이기주의는 추하다. 어니스티나는 새로운 인물로 탄생할 가능성을 갖고 있음에도 여전히 전형적이다. 파울즈가 전형성을 의도했다고 봐준데도, 찰스의 전형성이 그 자체로 그 시대에 대한 풍자와 이해로서 설득력이 갖는 것과 달리 두 여자는 그렇지 못하다. [만티사]에서도 그렇지만, 존 파울즈는 여성에 대해선 한계를 드러낸다. 하긴 그 한계가 어찌 파울즈만의 것이랴!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의 태반이 행복하게 공유하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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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프로페셔널 - 자신이 믿는 한 가지 일에 조건 없이 도전한 사람들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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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민족주의가 아니라 미우나 고우나 '나'를 이해하는 데 필요조건이니까.

하지만 5천 년 넘는 한국사에서 조선, 그것도 영정조 시대에만 바짝 몰린 책쓰기는 좀 섭섭하다. 그 시대를 문예부흥이니 조선의 르네상스니 하기도 하던데, 사실 따지고 보면 양란으로 거의 다 망한 나라가 간신히 기력을 회복하던 시기로되 그 또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해 결국 백여 년 뒤 망하기에 이르게 되는 그 중간 어름에 아슬하게 걸친 시기다. 그러니까 그 시기의 빛과 그늘을 두루 조명하고, 그 시기가 해결해야 할 과제와 그 과제 해결력을 함께 얘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화에만 집중하여 부흥이니 르네상스니 하는 건 섣부르다.

공전의 히트작 [미쳐야 미친다]를 비롯해서 조선 후기의 문화와 독특한 인물들을 다룬 책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그 책들과 비교해 [조선의 프로페셔널]이 갖는 특장이 무언가, 찾았는데 발견하지 못했다. 프로페셔널을 '벽과 치'로, 즉 '마니아'로 설명하는 것부터 고개를 갸우뚱했다. 프로페셔널의 조건 중에 '몰입'이 있긴 하겠지만 어떤 일을 직업적으로 하여 어느 경지에 오른다는 게 더 중요한 조건이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여기 다룬 인물들은 기준이 애매하다. 책장수 조신 등은 프로페셔널이라 할 만하나 여행가 정란이나 원예가 유박이 그러한지는 모르겠고, 이들이 스스로 세운 기준 또한 기예의 장인이라기보다 전통적 유가 지성인을 꿈꾼 측면이 강하지 않나 싶다. 무엇보다 글을 쓴 안대회 씨가 이들을 조명하고 분석하는 분명한 기준이랄까 현재적 의미랄까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글솜씨는 좋지만 이 인물들과 그 시대를 아우르는 역사의식이 없으니, 책을 덮은 지금, 뷔페식당에서 밥을 먹고 난 뒤처럼 머릿속이 더부룩하고 아리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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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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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소설책을 읽지 않았다. 아니, 읽지 않았다기보다는 끝까지 읽기가 힘들었다. 물론 첫째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 특히 노벨상 수상작은 한동안 기피대상이 되었다. 노벨상을 받았다 해서 읽는 건 왠지 촌스러운 짓 같고, 숙제하는 중학생이 된 기분도 크게 작용했지만, 몇 번 숙제하는 심정으로 읽은 책들이 도무지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도 사실 별로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꽤 재미있다고 하는 게 거짓말 같지 않았다. 게다가 마침 도서관에서 막 반납된 1권을 발견했다. 그래서 읽었는데 와우, 재미있었다! 잘 짜인 카펫 모양 정교하게 짜여진 플롯, 천연덕스런 이야기 솜씨, 거기에 적절히 버무린 문명과 예술에 관한 지식들. 가슴에 오래 남는 감동적인 소설은 아니지만, 아주 잘 쓴 소설을 읽는 즐거움과 기쁨은 더없이 누릴 수 있다.

이슬람의 세밀화를 소재로 하여 추리소설 형식으로 써내려갔는데, 추리소설 형식은 요즘 자주 만나는 것이라 식상할 수 있는데 여기선 개, 말, 악마, 검정, 빨강 등이 화자로 나서는 독특한 서술로 새로움을 준다. 소설에선 몇 가지 주제가 꽤 진지하게 추구되고 있다. 파묵은, 신의 시선을 빌어 평면적이고 자기스타일을 죽인 터키식 세밀화와, 인간의 시선을 빌어 사실적이고 고유 스타일을 추구하는 서구식 초상화를 대비시키고, 서구식 화법에 침윤되는 전통 화가들의 갈등을 통해 예술가의 고뇌와 욕망을 드러낸다. 소설은 동서 문화의 갈등과 영향, 대립으로 읽힐 수도 있고, 나아가 예술이 지극해질 때 그것은 고유의 스타일을 추구함으로서인가 혹은 지극함 자체를 성실히 추구함으로서인가 등의 문제까지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재미있게 다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왜 내 이름은 빨강인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한 쪽도 건너뜀 없이 열심히 읽었는데... 단순히 정열과 피와 열정의 상징이 빨강이니까 빨강이다는 아닐텐데... 이슬람 미술책까지 펼쳐 놓고 빨강의 표현법을 찾아봤지만 특별히 빨강이 다른 의미를 갖는 것 같지도 않았다. 긴 역자 후기도 이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고, 아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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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젠 양으로 승부한다!

요 몇 년간 책을 읽는 데 너무 진지했단 생각이 든다. 눈도 아픈데 아무 책이나 읽을 순 없지 하면서, 고르고 골라 한 권씩 읽었다. 밥벌이의 고단함이 책 읽기를 방해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양질의 책만을 취사선택하겠단 결심에는, 섬세하게 선택된 책만을 골라 읽으면 영혼의 정화를 이루리라는 믿음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느냐? 서재는 쓸쓸해지고, 책값은 줄어든 대신 술값은 늘었으며, 눈은 과다한 TV시청으로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일 년에 100권씩의 무식(?)한 목표는 세우지 않겠다. 다만 틈날 때마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기로 하다.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해선 한 줄짜리 소감이라도 반드시 남기기로 하다. 그리고 좋은 책을 골라 읽기도 하겠지만, 화장실과 지하철을 적극 활용해 온갖 책을 다 섭렵하기로 결심해 본다. 어쨌든 양질 전화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걸 아직까지 보지 못했으니, 책 읽기 또한 그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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