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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는 학생이 그림이나 노래, 시 낭독 같은 것에 소질을 보이면 선생님이 진심으로 감동하며, 때론 수업중인데도 교실을 뛰쳐나가 교무실에 가서 모든 선생님을 불러오기도 했어요.

마찬가지로 주위 아이들도 함께 기뻐하는 거예요. 재능을 가진 사람과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순수하게 기뻐하고 그 사실을 축복하는 거죠. 그렇기에 그 사람의 재능과 자신의 재능을 비교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요. 열등감이 전혀 없죠. 열네 살 때 일본에 돌아왔을 때 ‘열등감’이란 말이 여기저기서 쓰이는 걸 보고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 학교에선) 어느 교과목이든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차이가 무척 컸어요.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못하는 아이도 못한다는 사실 자체를 개성으로 인정해준다는 점이에요. 시험도 구술시험이나 리포트라서 못하더라도 반드시 개성이 드러나게 마련이죠. 잘하는 경우에도 어떻게 잘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어 모두 같지는 않아요. 일본 학교에서는 0X와 사지선다형 시험으로 평가를 하니까 로봇이 대답해도 똑같은 답안이 되고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구별이 명확해지죠. 당연히 열등감이 생길 수밖에 없죠. 게다가 학교도 부모도 같은 잣대로 보니까 열등감을 가진 아이는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요. 눈금이 다른 잣대가 없으니까요. 러시아 학교에서는 잘하든 못하든 그 자체가 개성으로,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을 항상 느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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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용기는 사소한 상황에서 상당한 노력과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직면해야 할 도전은, 우리에게 엄습하는 불안을 극복하는 데 본질이 있다. 우리가 직업적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에 대한, 우리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지닌 자들과의 관게에 대한, 현세의 삶을 방해할지도 모를 모든 것에 대한 불안 말이다."      

 


컴퓨터 인공지능의 대표주자가 컴퓨터 만능의 사회를 비판하는 책이라 하여 관심을 갖고 봤다. 생각보다 얇고, 대담집이라 읽기도 매우 수월했다. 그만큼, 기대했던 이론적 비판보다는 바이첸바움의 인생과 신념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서 좀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책의 중반 이후에서 전개되는 사상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특히 인공지능의 주창자들이 하나같이 남자라는 점, 프로그래머 중에 여성이 드물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 생명을 창조하는 어머니가 되려는 욕망, 뭇 생명을 주관하는 신을 꿈꾸는 남성적 욕망을 비판하는 대목은 새로웠다. 책의 말미에 인용한 바이첸바움의 글은 요즘같은 광신의 시대에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주저앉을 거라는 불안을 극복하자. 저들이 이길 거라는 끔찍한 불안을 기어코 극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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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에게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감각이다...완벽한 감각은 완벽한 음정처럼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습득할 수 있다. 비결은 그것을 가진 작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작가를 모방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모방은 예술이나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창조적 과정의 일부다...관심있는 분야에서 최고의 작가를 골라서 그 작품을 큰 소리로 읽어보자. 그들의 목소리와 감각을, 다시 말해 언어에 대한 태도를 귀로 받아들이자. 모방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와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일랑 말자. (206, 208)

글은 써야 는다. 글쓰기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강제로 일정한 양을 정기적으로 쓰는 것이다.

글쓰는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또 자기가 쓴 글을 읽어보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가 제대로 말을 했나? 이 주제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보기에 글이 명료한가? 명료한 작가는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정확히 어디가 모호한지 알아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다...글을 쓴다는 건 힘든 일이다. 명료한 문장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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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 건 태연할 수 없다. 모두 조용히 놀라고 있는 거다"

"나이를 먹으면 모두 놀란다. 모두 처음으로 나이를 먹기 때문이다."

"나이 먹기 싫으면 혼자 되라고 했잖아요"     "아 그건 말야, 나이 먹는 게 싫다느니 젊을 때가 좋았다는 건 누군가와 같이 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거거든. 혼자 살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져. 나이를 먹든 언제 죽든"   "혼자 있으면 태연해진다구요?"    "그렇지."

-또 한 살을 먹었다. 태연할 수 없다. 아무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해도. 하지만 별 수 없다. 먹을 수밖에. 다시 젊어진대도 어쩌면 크게 달라질 게 없는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허무나 체념이라기보단 삶의 통찰이라고 우기고 싶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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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에밀 아자르의 [가면의 생]은 그 제사(편집자가 본문에서 가져와 임의로 붙인 것인지도 모른다)부터 내 눈을 사로잡았다. 막상 소설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구성과 스토리를 기대하는 전통적 독법이 내 안에 너무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그냥 에밀 아자르이고픈, 아자르일 수밖에 없는 로맹 가리의 긴 자전적 시라고 생각하면 어렵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조심하라. 적대적인 단어들이 여러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모든 것이 꾸민 것일뿐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저자나 작품이 될 수 없는 한 과거에도 현재에도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디 내 말을 믿어주기 바란다. 호메로스가 소리 높여 노래할 때 나는 이미 그런 상태였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유전자로부터는 진실이 나올 수 없다. 유전자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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