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쑤퉁은 요즘 잘 나가는 중국 작가다. 5년 전쯤 중국 현대미술 전시회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확실한 기본기에 강한 자신감과 문제의식이 담긴 힘 있는 작품들이, 중국 경제의 약진만큼이나 예술도 약진하겠구나 라는 부러움 섞인 전망을 가능케 했다. 그때부터 중국 문학에도 조금씩 관심을 가졌는데, 몇 년 전부터 중국 소설, 중국 에세이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두루 읽기가 바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읽고난 소감은 대개 찜찜하다. 중국의 대표적인 소설가인 쑤퉁의 이 작품 역시 읽기 전의 기대에 비해 읽고난 뒤는 실망이 크다. 뭣보다 중국적 소재, 오리엔탈적인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작품의 내적 요구라기보다 세계시장을 염두에 둔 포석 혹은 포즈 같은 혐의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소재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오르한 파묵이 [내 이름은 빨강]에서 이슬람 미술을 소재로 사용하여 주제를 부각시킨 것만 보아도 무엇이 재료냐가 이런 혐의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쑤퉁은 '섭국의 어린 제왕'을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중국 왕실의 분위기를 나른하게 묘사한다. 늙은 황후에 의해 점지된 어린 제왕은 왕실에 깃든 타락을 그대로 따르면서 잔학을 행하고, 모든 부패한 왕들이 저지르는 실정을 자신의 이름으로 허락한다. 그에겐 아무 권력이 없으나 잔학을 행할 만한 권력은 있으며, 사랑을 선택할 힘이 없으나 사랑을 버릴 힘은 있다. 그리고 마침내 권좌에서 쫓겨난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길은 줄타기 광대다. 줄타기 광대로서 그는 비로소 제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줄타기 광대 왕이 되어 스승이 남긴 '논어'를 읽는다. 이렇게 줄거리를 요약하면 뭔가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럴 듯함, 이것이 이 소설의 함정이자 패착이다. '논어'의 등장은 뜬금없고, 시종일관 되풀이되는 '마지막이 멀지 않다'는 예언은 소설의 진행 속에서 점차 힘을 잃어간다. 쑤퉁은 인생도 역사도 허무할 뿐이며, 그 허무를 택함으로써 줄 위에서 자유로이 놀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너무 낯익고 익숙해서, 현란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아무 감동을 주지 못한다. 혹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에 가슴 설레는 서구 독자에겐 약효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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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 2007-08-2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독하신듯.. ^^* 논어의 등장이 뜬금없는게 아님. 올바른 삶에 대한 지혜가 담겨있음. 또 처음부터 논어 얘기는 있었음. 또한 이 소설이 인생과 역사의 허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 진정한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이야기임. 그리고 반복되는 예언 구절은 소설의 의미와 방향을 환기하는 요소로, 코엘료 소설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음. 쉽게 쓰여진 듯 하지만 문장과 구성이 모두 탄탄함. 잘 읽어보면 감동도 있음. 자기 지식과 관점에만 함몰되어 작품의 의미를 깊게 짚어내지 못하고 단조롭게 이해해서는 곤란함

스머프 2007-08-2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소설을 보는 시각이 다른 것이지 잘 못 읽었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논어는 처음부터 등장하지만 소설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데 별 역할을 못 한다는 점에서 뜬금없다고 표현한 거고요, 예언은 어떤 상징성을 갖기엔 너무 단순하다 싶슴다. 각자 보는 눈이 있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