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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웰컴'을 보다. 영화평론가 김세윤이 극찬을 했길래 주저없이 선택했는데, 영화 중간쯤 느닷없이 눈물이 나더니 자꾸 눈가를 훔치게 했다.  

고향 이라크에서 4600킬로를 걸어 터키로 온 소년은 거기서 프랑스로, 다시 연인이 있는 영국으로 가기 위해 비닐봉지를 쓰고 트럭을 타고 문 닫은 수영장에서 밤새 수영을 한다.  

이주노동자에 관한 영화도 다큐멘터리도 꽤 본 터라, 뭐 그리 새삼스러우랴, 했는데 이 영화는 또 다른 울림을 준다. 두 남자 뱅상 랭동과 피랫 아르베르디의 연기는 행간이 많아서 가슴에 오래 머문다. 영화는 프랑스 난민촌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처참한 현실을 보여주지만 그 누구에 대해서도 비난하거나 평하지 않는데, 그래서 더 생각이 많아진다.  

영화를 보면서 국경 없는 세상에 대해, 노동의 세계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실감을 갖고서. 한동안 노마드니 유목민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했지만 나는 그 말들에 공감하지 못했다. 특히 자본의 세계 지배에 따른 끝없는 난민의 생산과 노동의 이동을 그 말들로 설명하려는 시도엔 불신감마저 들었다. 유목(遊牧)이란 말은 그 삶의 핍진함보다는 걸림없는 삶에 대한 감상을 낳기 쉽고, 실제로 그 말들을 즐게 사용한 이들에게선 그런 경향이 농후하다. 하지만 유목의 삶처럼 자연에 속박당한 삶도 없으리라. 자연을 정복한다는 엄두를 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의 또다른 희망일 수 있겠지만, 그 삶을 당연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했던 필부들에겐 가혹한 것이었다. 그 가혹함은 그리고 현재진행형이다. 자유는 거기서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고, 운명은 무거움이다.  

현대의 유목민에겐 기를 양이 없으며 이동의 자유도 없다. 가장 가난한 자들이 세상의 이곳저곳으로 떠밀리다 쓰러진다. 자본은 국경을 지우고 고향을 뿌리뽑고 디아스포라를 양산한다. 이들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고향을 찾으려 하면 사라졌던 국경이 문득 나타나고 민족이 유령처럼 목덜미를 잡는다.  

더이상 국경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 민족은 저들의 꽃노래일 뿐이라는 것을 절감하는 요즘이다. 하지만 그 실감을 설명하고 민족국가 너머로 나아가게 하는 이론은 만나기 힘들다. 민족국가는 없다,는 선언으로 우리의 가슴에 여전히 살아있는 민족국가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갈 길이 퍽 멀다. 앞으로 오래 공부해야 하리라.  

시작은 니시카와 나가오다. 글에 허영이 없는 점이 마음에 든다. [국경을 넘는 방법] [국민이라는 괴물] [신식민지주의론]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이 기다리고 있다. [국경을 넘는 방법]은 구성이 좀 산만하지만 읽는 재미는 있다. 모레쯤 [국민이라는 괴물]로 넘어갈 작정. 그 다음엔 무엇으로 할까? 서점에서 책을 보며 고민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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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독일영화가 나를 여러 번 울린다. 새해 시작과 함께 본 '타인의 삶'이 가슴을 치더니 이번엔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가 눈을 띵띵 붓게 한다. 제목으론 그냥 돼지 치는 엠마와 남자의 전원일기 같은 것인가 했는데, 이 영화, 정말 드물게 가슴 뻐근한 러브스토리다. 끔찍한 장면은 아주 사소한 것도 싫어하는 나지만 이 영화에서의 느닷없는 도살장면은 이해가 되었다. 꼭 필요한 장면이니까.

그런데 그 장면이 도화선이 되어 문득 [화성의 인류학자]가 떠올랐다. 올리버 색스의 그 책에 나오는 '화성의 인류학자' 템플. 자폐증을 앓으면서도 교수로 성공한 템플은 도살용 압박기계를 만들어 보급했는데, 그녀의 기계가 지향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없는 도살이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엠마의 말이 떠오른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가끔씩 템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커다란 체구의 남자를 거뜬히 들어옮기는 엠마의 건강함도 단단하고 건장한 느낌의 템플-본 적은 없지만 색스의 글에선 그런 느낌이다-을 떠올리게 했다. 홀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농장에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엠마가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늘에 뚝 떨어진 남자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끌리는 것도 그런 외로움 때문일텐데, 나는 툭하면 총을 겨누는 엠마와 따뜻하게 돼지를 위무하는 엠마를 보며 포옹기계에서 위로를 얻는 템플을 생각했다. 물론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는 '화성의 인류학자'와는 아무 연관도 없는 별개의 작품이다. 원작은 따로 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두 여자, 가장 고독하기에 가장 따뜻하게 사랑할 줄 아는 그 아름다운 여자들이 자꾸만 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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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울시에서 좋은 영화제라는 걸 한다. 벌써 12회째라는데 나는 올해 처음 알았다. 집 옆 구립도서관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영화를 보여주기에 두어 번 갔다. 러시아 영화 '리턴'과 프랑스 영화 '차일드'를 봤는데, 후자는 처음부터 기대도 없었고 역시나 했지만 전자는 꽤 오래 울림이 남았다. 그래서 영화제 사이트에 들어가 꼼꼼히 체크를 했다, 볼 만한 영화가 또 없나. 그렇게 해서 건진 게 '댈러웨이 부인'. 달력에 표시까지 해두었다가 정독도서관에 갔다. 낮 2시인데 사람이 꽤 많다. 스무 명쯤. 내 앞의 두 아저씨, 졸다가 벌떡 일어서길 몇 번 하더니 한 사람은 결국 삼십 분만에 나가고 또 한 사람은 온몸을 비틀며 어쩔 줄 모른다. 그래도 웬일인지 나가진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오래전 세 쪽쯤 읽다가 포기했던 소설이다. 대신 그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과 '3기니'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버지니아 울프 하면 왠지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떠올리지만 이 에세이들에선 전혀 그런 느낌을 읽을 수 없었다. 재기발랄하고 신랄하면서도 섬세한 지성이 상쾌한 느낌을 주었었다. 하지만 소설은 역시 또 달라서 읽기가 편치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안토니아스 라인'을 만든 마를렌 고리스 감독의 '댈러웨이 부인'은 보통 사람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잘 발라낸 다이제스트판 같다. 존재 자체가 영화인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나이든 댈러웨이 부인을, 나타샤 맥켈혼이 젊은 댈러웨이 부인을 연기하는데, 연기도 모습도 볼 만하다.

전쟁 후유증을 앓는 젊은이의 자살 기도 소식을 듣고 지금의 삶을 열심히 살아야지 라고 다짐하는 댈러웨이 부인, 그 모습에서 끊임없이 허무로 경도되는 자신을 다잡으려는 버지니아 울프의 안간힘을 떠올리게 된다.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이런 마음으로 긴 인생을 책임질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다. 마를렌 감독의 댈러웨이 부인이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얼마나 근사한지, 이번 참에 소설을 읽기로 한다. 그런데 열린책들에서 나온 저 책의 표지는 어쩐지 이물스럽다. 진짜 소설이 저런 느낌일까, 믿을 수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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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4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머프 2007-09-14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어떤 판을 선택해야 하나 걱정이었거든요. 꼭 솔 출판사 걸로 읽겠습니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피터 래빗'시리즈로 유명한 영국의 그림책 작가다. 피터 래빗 시리즈는 앙증맞은 토끼 그림이 마치 팬시상품 같은 그런 예쁜 그림책이다. 섬세한 수채화 그림에 와, 참 예쁘다고 감탄한 적은 많았지만 특별히 이 책이나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미스 포터]라는 영화를 보고 생각이 좀 달라졌다.

 르네 젤위거와 이언 맥그리거라는 잘 나가는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는데, 사실 배우들이 돋보이는 영화는 아니었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미스 포터라는 인물을 정말 잘 이해한 감독의 주문이었을지 몰라도- 모든 배우들이 다 제 몫을 하고 절대 오버하지 않으면서 서로가 어울리는 분위기를 전하는 데 열심인 까닭이다. 오히려 영화에서 튀는 것은 미스 포터의 친구들, 그녀가 평생을 두고 그려낸 캐릭터들이다.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피터 래빗과 제미마 퍼들덕 같은 미스 포터의 사랑스런 친구들은 발군의 매력을 과시한다. 종이 위에 얌전히 있다가 미스 포터의 한마디에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장난을 치거나 삐치기도 하는, 이 소박한 애니메이션이 사람을 정말 즐겁게 만든다.

허나 무엇보다 마음을 끄는 것은 미스 포터가 가진 진정성이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서, 이야기 해주는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서, 자신을 즐겁게 하고 위로하고 늘 함께하는 그 친구들을 표현하는 단순소박한 열망에서 그녀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런 진정성은 그녀가 레이크 지방의 농장들을 사들여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 동참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어떤 이념이나 이론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맑고 정직한 마음이 시키는 대로 고스란히 실천하는 그녀의 삶이 참 아름답다. 아마도 그런 마음이 그녀의 책을 백 년이 넘어서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하는 비결인 듯싶다. 좋은 작가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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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늘 느끼는 거지만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그것도 앞자리와의 간격이 넓고 의자의 높이가 적당하여 앞에 누가 앉든 전혀 상관없는 쾌적한 극장에서. 씨네큐브에서 '준벅'을 보게 된 데는, 첫째 일러스트 같은 그림이 친근감을 준 영화포스터 둘째 씨네큐브라는 극장에 대한 호감도, 그리고 셋째 '준벅'이란 정체불명의 제목이 뭔가 하는 궁금증이 작용했다.

영화는 미술관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이 큐레이터니까. -아,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된 바로 그 큐레이터!- 큐레이터 아내는 관심이 있는 화가를 찾기로 하는데 마침 그곳이 시댁 근처다. 그래서 결혼 6개월만에 남편과 함께 시댁을 찾는다. 근데 이 시댁이 만만찮다. 대단하단 뜻이 아니라 이해와 소통의 가능성이란 면에서 그렇단 얘기다. 끊임없이 담배를 피는 거구의 어머니, 말없이 창고에서 공예품을 만드는 -그러나 완성된 작품은 별로 보이지 않는- 아버지, 계속 다리를 떨며 신문을 뒤적이다가 신경질을 내고 소리를 지르는 남동생, 눈치없는 종달새처럼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내는 만삭의 동생 부인. 이들 사이엔 대화가 거의 없는데 이들 속에 끼어든 부부 역시 이 집에 들어간 순간부터 급속히 대화가 사라진다. 다행히 몸의 대화는 밤마다 이어져서 동생 부부를 심란하게 하지만.

영화는 이 이상한 식구들의 어긋나는 소통법을 옆집에서 구경하듯 은근히 보여준다. 관객은 킬킬대며 그들의 불화를 구경한다. 특히 웃음소리가 커지는 대목은 큐레이터가 찾아간 아웃사이더 화가의 그림을 클로즈업할 때다. 남북전쟁의 기억 속에서 사는, 화가인 것도 같고 환자인 것도 같은 그의 그림은 과장된 성기와 어린아이 같은 터치, 자유로운 구성과 상상력으로 관객들의 즐거운 탄성을 자아낸다.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전시회를 가진 적도 없는 이 아웃사이더 화가와 계약하려고 큐레이터 아내는 기를 쓰는데, 남북전쟁의 환상에 사로잡힌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쉽지가 않다. 결국 이 식구들은 화해를 하는지, 큐레이터는 이 전도유망한 아웃사이더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지, 그건 영화를 볼 사람들을 위해 말하지 않겠다.

영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영화에 나오는 화가의 그림은 앤 우드라는 젊은 화가가 아웃사이더 아트의 흐름을 고려하여 새로 그린 것이란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거나 정신질환이 있는 화가들의 그림을 가리키는 아웃사이더 아트는, 아이 같은 표현과 신선한 상상력으로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책은 이들에 대한 좋은 안내서다. 그림을 그리는 데도 그림을 보는 데도 학력이 문제가 되고, 심지어 그림이 주식 같은 투자종목이 되었으니 이런 땅에서 '아웃사이더 아트'란 게 가능하기는 한 건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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