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날 눈이 먼다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된다면, 위안이 될까 악몽이 될까. 아마 처음엔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게 위안이 되리라. 하지만 내 손을 잡고 안내해줄 아무도 없다는 데 이윽고 지독히 절망하리라. 사마라구의 환상은 어느날 눈이 먼다면, 이라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상상에서 시작하여 이 지독한 절망의 현실을 그려낸다. 환상의 현실이지만 그것은 칼비노의 마술적 리얼리즘과는 궤를 달리한다. 사마라구의 환상의 리얼리즘은 한 틈의 환상도 허용하지 않는 지독한 리얼리즘이다. 그의 환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 뿐,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적 사용에서 말하는 환상과는 조금도 같지 않다.

오직 한 여자만이 볼 수 있다. 그 여자의 손을 잡고 그녀의 인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위안이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여자에겐 저주이고 악몽이다. 그녀가 볼 수 있고 보게 되는 것, 봐야 하는 것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은 현실이다. 더구나 오직 그녀만이 볼 수 있기에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고 위로받을 수 없다. 

"...이 성당에 있는 모든 성상들은 눈을 가리고 있어요.  ...혹시 이 동네 사제가 한 일일지도 몰라요, 눈 먼 사람들이 성상들을 볼 수 없다면, 성상들도 눈먼 사람들을 볼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죠. 원래 성상들은 못 보잖아. 그렇지 않아요, 성상들은 그들을 보는 사람들의 눈을 통해 봐요, 다만 이제 실명이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되는 바람에 성상들은 못 보게 된 거죠. ..사제가 성상들의 눈을 가린 거라면 좋겠군. ..난 눈먼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이 안으로 들어온 그 사제를 상상하고 있어, 그는 결국 그 세계로 돌아가야겠지, 그 자신도 눈이 멀기 위해서 말이야, ...제단에 올라가 붕대를 두르고, 그림들이 맞이한 백색의 밤이 더 짙어지도록 하얀 물감을 두 번 칠하는 모습이 보여, 그 사제는 모든 시대와 모든 종교에서 최악의 신성모독을 저지른 사람임에 틀림없어, 그러나 그 신성모독은 가장 공명정대하고 또 가장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것이기도 해, 그 사람은 궁극적으로 신은 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러 여기에 온 거야."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여자는 눈먼 자들의 세계로 기꺼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녀는 신은 볼 자격이 없다고 선언한다, 모두 다 눈을 뜰 때 눈을 잃음으로써. 소설의 끝은 예상했듯이 모두가 다시 보게 되는 해피엔딩이지만 누구도 기뻐할 수는 없는 해피엔딩, 도무지 내가 장님인지 아닌지 이 세상을 보고 있는지 보지 못하는지 장담할 수 없는 어둑한 결말이다.

소설에서 사마라구는 쉽고 간결한 알레고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겸손한 작가의 미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의 문체는 정확하고 정직하고 신랄하여 조금치의 허영도 용납하지 않으며, 모두의 눈을 덮은 하얀 적막처럼 끈덕지게 독자를 물고 늘어진다. 문체와 주제는 호응하고 환상은 리얼리즘을 만나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며 알레고리는 딱 그만큼의 효용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소설이 아직도 제 몫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가운 소설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winpix 2007-08-0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죠. 강렬한 인상을 받은.(눈뜬자들의 도시는 읽다 잠시 중단했긴 하지만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ㅁ'

스머프 2007-08-0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뜬 자들의 도시를 시작하려고 해요. 이만큼 좋았으면 싶은데...어떤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