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오규원(1941-2007) : 이 시는 유고시집 [두두]에 실려 있다. ‘두두’란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고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다)’에서 나온 말. 시인은 자신의 시는 ‘두두시도 물물전진’의 세계이며, 의미를 비우고 존재로 말한다고 함. 죽기 며칠 전, 그가 문병 온 제자의 손바닥에 쓴 마지막 시는 이렇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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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저편에

현산면 백포리, 여기까지 왔다 윤두서 고택 용마루에 기러기 한 마리 오래 앉아 있다 기러기는 움직이지 않는 기러기다 움직이지 않음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저 방식이 불편하다

망부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이곳 바다 내음이 인다 오갈피나무 검은 열매를 혓바닥에 물이 들도록 따 먹었다 모래가 살결보다 고운 송평에서, 꽃이 지나간 자리 같은 작은 새 발자국 따라 멀리 가본다 막다른 길에 바다가 서 있다

당두리 갈대숲이나 연구리의 살구나무 한 그루 노하리의 가지 부러진 노송이 새겨져 있는 내 몸은 티베트 사자의 서처럼 단번에 읽을 수는 없는 책과 같아서 다만 어란, 가학리, 금쇄동 하고 낮게 불러보는 지명들 다 끌어안고 다니며 길을 앓는다

나를 뚫고 지나가는 풍경들이 또 나를 앓고 있는 길 위, 몸에 미열이 인다 어불도 앞 책바위에 와 나는 내 안의 길을 다 쏟아놓는다 풍경들은 나를 잘 읽지 못한다

-40만이 나라 밖으로 떠났다는데, 그래도 길이란 길은 꼭꼭 막혀 몸살을 앓는다. 길 위엔 선 저 많은 사람들이 그리움 때문에 길을 떠났을까. 여행조차 타성이 된 시대, 작은 새 발자국을 따라 걷는 시인은 하나의 풍경조차 오래 앓는구나. 그 마음이 아프다.

 

단 한 번의 풍경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최고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동시에 보아버리고/ 알아버린 생이/ 다시 올까 두렵다

너무 많은 아름다운 풍경이/ 내 눈을 멀게 했다

끔찍하다/ 이 세상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위해/ 무엇을, 

살고자 하는 의지는/ 죽음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너무 많은 아름다운/ 풍경이

-여행을 가려는 마음을 버리기로 했다. 디카도 사지 않기로 했다. 눈앞의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남기면 무엇하나! 나는 이 첨단의 유목민들을 거슬러 혼자 이곳에 남기로 했다. '단 한 번의 풍경'으로도 삶을 감당할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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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는 그럴듯한 명분이 많아요

곧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되는

그에게 전해줘요

한평생 나는 그의 적일 것이라고

등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해주세요

뒤에서 쏘아버릴지 모르니

술을 마시고 타협을 하고 그의 그 무슨

대의명분이라고 하는 것까지

삭을 대로 삭아버린다면

총알 한 개로 숨을 끊어주겠어요

철학을 기만한 죄

나는 잘 모르는 사상을 기만한 죄를

톡톡히 갚지 않으면 안 될 거요

여자를 기만한 죄는

묻지 않겠어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그럴듯한 명분이 있어야 하므로

남자들에게는 그럴듯한 명분이 많아요

여자들은 그들을 타락시킬 뿐

사실은

보다 인간적이 되는 일 축하해요

양애경의 이 시를 아침신문에서 읽는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많은 남자들이 숱한 명분으로 숱한 여자들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여온 것이 남성의 역사라면, 많은 여자들이 숱한 명분에 기꺼이 속아주고 그걸 사랑이라 이름해온 것이 여성의 역사. 그리고 둘의 거짓이 어우러져 만든 게 인간의 역사이리라. 경쾌한 이 시를 읽고 하하하 웃고 말았지만 오래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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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적는 것만으로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안되겠다면 도리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렵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이성선 시인(1941-2001)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부분을 빌리다

김사인 시인이 오랫만에 내놓은 [가만히 좋아하는]을 읽다가 이 독특한 시에 마음이 머물렀다. 이성선 시인의 시를 통해 자신의 부끄러운 마음을 쓴 시가 나를 착하게 만든다. 그가 오래 전에 썼던 [밤에 쓰는 편지]를 좋아했는데, 시인은 아직도 그때의 부끄러움을 잃지 않았구나. 나는 이렇게 뻔뻔해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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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지난 겨울에 내린 눈
잊지 말라는 당부 같은

춘삼월에 내린 폭설도

또다시 눈 녹듯 사라진 삼월 십이 일 저녁

신문에 난 ‘한국의 책 100권’의 목록을 들여다보다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공자(孔子)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주(周)나라의 눈 덮인 겨울을 생각합니다

 

막소주 한 되를 사러

질척이는 거믄절 고갯길을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뒤따라 나선 아이가 자꾸

집 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립니다

나무가

나무가 없다고

까치집을 머리에 이고 있다고

그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 그늘을 지운다고

오늘 아침나절에

옆집 늙은이가 덜컥 베어버린

집 뒤에 늘 서 있던

그 커다란 굴참나무가 보이지 않는다고

향음주례(鄕飮酒禮)하고

천천히

활시위를 당기다

이창기의 시집을 읽다. 표제작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도 좋고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도 좋다. 예전 [이생이 담 안을 엿보다] 보다 더 좋은 것같다. 요즘 나이 좀 들고 시도 좀 오래 쓴 시인들이 툭하면 인생에 대한 잠언 같은 걸 시라고 쓰는 폐단이 있는데, 이창기는 그걸 슬쩍 비껴가는 듯하여 반갑다. 김수영의 시제에서 따온 윗 시는 오래 읽고 음미할 수록 행간의 뜻이 새록하여 재미있다. 다만, 시집 뒤에 실린 이남호의 해설은 사족 중에도 사족이요, 시집의 안내글로서도 영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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