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백년 18세기 - 동서문화 비교 살롱토크, 문화의 창 6
한국18세기학회 엮음 / 태학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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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에서 18세기는 화려한 문예부흥기, 자생적 개혁의 모색기로 평가된다. 그리고 개혁군주 정조와 박지원,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이 보여준 근대지향성이 늘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한다. 특히 최근 들어 쏟아지는 박지원 저작들은 이런 관점을 더욱 강화하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그런데 개혁자로 통칭되는 이들 사이가 꽤 멀다. 동시대를 살았으나 그들은 서로 무시하거나 견제하거나 대립했다. 그리고 거기엔 근대화의 방법론을 둘러싼 갈등으로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18세기의 역동성은 분명히 엄연한 사실이나, 그 역동성의 출처가 문장에서 비롯하는지는 되짚어봐야 한다. 특히 거기에 근대의 딱지-탈근대 역시 마찬가지다-를 붙이는 것은, 서구사의 보편론을 조선사에 그대로 적용하는 또다른 '담론의 횡포'인지도 모른다.

18세기의 실체가 궁금하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는데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18세기 학회'라는 게 있는지도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각국사 전공자들이 함께 모여 18세기를 얘기한다는 출발점이 신선했다. 국경의 울타리, 대륙의 울타리가 역사학자들을 얼마나 얽매는지는 식민사관,동북공정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시도는 그 시도만으로도 평가할 만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일국사에 갇혀 있던 연구자들의 시각이 같은 시대 다른 나라를 만나면서 새롭게 확장되는 걸 목격할 수 있다. 물론 독자들의 눈도 함께 열린다. 근대화의 성공이냐 실패냐는 사후판단을 앞세워 조선과 중국은 왜 실패했고 일본은 왜 성공했는가 그 요인을 살피자는 게, 이 새대를 다룬 그간의 역사서의 대종이라면 이 책에선 그걸 다르게 생각할 여지를 준다. 일본이 개방에 적극적이어서 성공했다는 통념이 깨지고, 중앙집권과 분권, 권력의 무력함이 미치는 다양한 효과, 실제 18세기 역동성의 주역인 상품경제 담당자들의 활약 등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이 거둔 성과에는 좌담이라는 형식도 일조를 한 것 같다. 대화로 피력된 주장들은 읽기에 쉬우며, 말하는 이들도 글을 쓰는 부담을 잊고 좀더 편하게 자기 주장을 펼 수 있었던 듯하다. 많은 학자들이 전문가들이 모인 공간에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들을 상식인 양 얘기하면서도 정작 대중을 상대로 한 글쓰기에선 교과서에서 배운 통념을 확대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좌담집이 갖는 한계는 있지만 이 책은 전문적 성과를 교양서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앞으로 다른 시대도 이런 식의 연구와 소통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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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적는 것만으로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안되겠다면 도리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렵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이성선 시인(1941-2001)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부분을 빌리다

김사인 시인이 오랫만에 내놓은 [가만히 좋아하는]을 읽다가 이 독특한 시에 마음이 머물렀다. 이성선 시인의 시를 통해 자신의 부끄러운 마음을 쓴 시가 나를 착하게 만든다. 그가 오래 전에 썼던 [밤에 쓰는 편지]를 좋아했는데, 시인은 아직도 그때의 부끄러움을 잃지 않았구나. 나는 이렇게 뻔뻔해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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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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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이게 처음이다. 예쁜 표지를 펼치자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뱃속의 아기가 딸국질을 하고 그때문인지 만삭의 십대 임산부가 남편에게 총을 들이댄다. 빠르고 선정적인 이야기 전개에 눈이 혹해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근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슬슬 흥미가 준다. 그래도 뭔가 굉징한 게 나올 거라는 기대로 계속 열심히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나의 기대가 무너졌음을 알았다. 아멜리 노통브의 장점은 바로 이거다. 끝까지 기대를 갖고 읽게 만드는 힘. 한마디로 필력인데, 빠르고 거침없는 서술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문제는 기대가 기대로 끝난다는 것. 이 소설의 부제는 나를 죽인 자의 일생인데, 결말은 이 부제를 만족시키려고 억지로 짜낸 결말처럼 생경하다. 주제의식 같은 건 물론 생각할 여지도 없다. 아멜리 노통브의 명망에 비하면 상당히 실망스런 독서라 목하 고민중이다. 한번 더 시도할까, 이걸로 끝낼까.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범작은 있는 법이니까 한 권쯤 그녀의 소설을 더 읽어보는 게 좋겠지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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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에밀 아자르의 [가면의 생]은 그 제사(편집자가 본문에서 가져와 임의로 붙인 것인지도 모른다)부터 내 눈을 사로잡았다. 막상 소설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구성과 스토리를 기대하는 전통적 독법이 내 안에 너무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그냥 에밀 아자르이고픈, 아자르일 수밖에 없는 로맹 가리의 긴 자전적 시라고 생각하면 어렵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조심하라. 적대적인 단어들이 여러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모든 것이 꾸민 것일뿐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저자나 작품이 될 수 없는 한 과거에도 현재에도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디 내 말을 믿어주기 바란다. 호메로스가 소리 높여 노래할 때 나는 이미 그런 상태였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유전자로부터는 진실이 나올 수 없다. 유전자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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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학과 서양과학의 만남 - 조선후기 서학의 수용과 북학론의 형성
고즈윈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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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과연 이 시대가 그처럼 화려한 부흥의 시대였던가 의심하기 시작한 게 꽤 여러 날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의심을 해갈할 만한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책들이 박지원, 홍대용, 정약용 등 당대 최고의 지성에 대해 이론의 여지 없이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에 전력을 다한 근대적 실학자라고 정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빗겨나는 경우라 해도, 박지원을 근대가 아닌 탈근대의 지성으로 보는 정도이니 나의 의심을 궁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정조와 그 주위의 지성들이 중세의 유학을 벗어나 근대적 실학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해도, 같은 시대 지방과 집안에서는 철저한 유교 가부장적 질서가 하나의 체제로 완성되고 사람들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상층과 하층, 서울과 지방, 문화와 체제 사이에 언밸런스가 있었달까. 문제는 이 시기를 근대의 이행기로 이해'해야 한다'는 단계론적 역사 이해가 작동하는 한, 이런 언밸런스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탈근대 담론조차 근대의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그 반향 혹은 비틀기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근대냐 중세냐, 탈근대냐 라는 담론의 자장에서 벗어나 그 시대에 눈을 갖다대는 투명한 역사학은 불가능한 걸까. 박성순의 이 책은 그런 의심과 불신에 대한 하나의 희망이었다.

박성순은 매우 조심스럽게 기왕의 실학 연구을 뒤집고 있다. 이 책은 말하자면, 뒤집기를 위한 샅바싸움 같다. 새롭게 보기 위해서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 문제틀 자체를 바꾸지 않고는 오랜 세월 이런저런 이데올로기로 물든 실학사를 다시 보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좀더 강하게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박성순의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북학론이건 정약용이건 유학의 자장을 벗어난 건 아니라는 건 지금 시기에 반드시 짚어져야 할 대목이다. 정약용과 정조를 유교 이상주의자로 본다고 해서 한국사가 정체된 역사로 퇴보하는 건 아니다. 최한기의 기학을 근대의 출발로 보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사를 움직이는 발전의 동력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한국사만의 독특한 역사흐름을 아는 것이다. 근대화란 기본적으로 서구식 자본주의화를 의미한다. 그 길을 밟았느냐 아니냐로 역사의 진보냐 후퇴냐를 말하는 건 우습다. 박성순의 연구가 근대-진보의 역사관 자체에 대한 질문을 포함해 조선 후기에 대한 새로운 역사쓰기를 실현하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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