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에밀 아자르의 [가면의 생]은 그 제사(편집자가 본문에서 가져와 임의로 붙인 것인지도 모른다)부터 내 눈을 사로잡았다. 막상 소설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구성과 스토리를 기대하는 전통적 독법이 내 안에 너무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그냥 에밀 아자르이고픈, 아자르일 수밖에 없는 로맹 가리의 긴 자전적 시라고 생각하면 어렵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조심하라. 적대적인 단어들이 여러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모든 것이 꾸민 것일뿐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저자나 작품이 될 수 없는 한 과거에도 현재에도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디 내 말을 믿어주기 바란다. 호메로스가 소리 높여 노래할 때 나는 이미 그런 상태였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유전자로부터는 진실이 나올 수 없다. 유전자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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