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뉴스의 나라 - 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
조윤호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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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신문은 물론이고, TV에서 뉴스를 보지 않게 된 지도 꽤 된 것 같다. 요즘은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언론사(방송사와 신문사)의 뉴스를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예전처럼 뉴스를 보거나 듣기 위한 시간을 고스란히 남겨두지도 않게 되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고 뉴스를 검색하고 그것에 대한 짤막한 느낌을 정리하며 정보를 축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뉴스에 대한 책을 굳이 찾아볼 필요가 있을까만은, '나쁜 뉴스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우리나라의 현 상태를 한번 들여다 보고 싶은 생각에 이 책을 골랐다.


부제가 '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이다. 이에 제목이 대답해준다. '나쁜 뉴스'이니까. 뉴스에 대한 불신은 고스란히 해당 언론사로 연계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는 희망없는 이들을 버리고 다른 대안을 찾게 되었다. 지금은 주어진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도 충분히 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맥락과 다른 의견을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충분한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9시 뉴스에서, 종이 신문에서, 라디오에서 점점 돌아서고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 언론사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페이스북에서 미디어오늘의 기사들을 받아보고 있지만, 미디어오늘이라는 언론사가 매체비평지인지는 미처 몰랐다. 이 책은 '언론을 취재하는 언론사' 미디어오늘의 기자인 저자가 국내 매스컴에 대한 불신의 원인을 해부한 책이다. 그렇기에 기자와 대중 사이에서 위치하여 뉴스에 대한 양방향적 고민을 제기할 수 있다.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현재의 문제점을 진단하고(기레기와 찌라시 전성시대), 뉴스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며(뉴스란 무엇인가), 뉴스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갖는 방법을 제안하고(나쁜 뉴스 가려내기, 초중고급편), 앞으로 뉴스의 미래에 대한 과제를 제시한다(뉴스의 미래, 짐승 뉴스 전성시대). 그러나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제, 본질, 관점, 과제가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사회문제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관심이 있고, 왜곡된 언론사들의 기사와 침묵이라는 횡포를 비판하는 다른 매체(기사나 팟캐스트)를 보고 들었다면 이미 알고 있거나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기는 하다. 가려웠던 곳을 긁어준다기 보다는 그 가려움이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정도? 


초반에는 연예 뉴스를 통해 정부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감추려 한다는 음모론, 정부에 대한 조선과 한겨레의 시각 차, 바이라인(by-line)없는 낚시성 짜집기와 어뷰징 기사의 등장 이유, 언론이 구사하지 못하는 드라마(미생, 송곳)의 언어에 대하여 다룬다. 이어서 뉴스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상과의 차별성을 그 본질로 제시한다. 하지만 불분명한 연결고리 제시, 기사의 청탁, 데스크의 보도 누락과 같은 현실적인 한계로 인하여 뉴스가 뉴스가 아니게 되는 상황을 첨부한다. 특히 나쁜 뉴스 가려내기에서는 영화 <내부자들>이나 세월호, 위안부 문제가 발발했을 때의 여론을 마사지하는 물타기 수법("문제를 제기한 놈이 나쁜 놈이다", "돈 더 받아 내려고 수작 부리는 거지?", "다 똑같은 놈들!", "지들끼리도 싸우는 걸 보니 뭔가 있구먼!"), 반세기 계속되어 온 '빨갱이' 프레임 등을 사례화 유형화 하여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한다.


나쁜 뉴스는 기레기 기자, 데스크, 정부가 만들어 내는 합작품이기도 하지만, 기업이 배후를 조정하는 데에서 발생된 필연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언론산업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은 각 언론사의 지배구조를 통하여 그들이 풀어내는 뉴스에 대한 관점과 의도, 편향성을 짚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후반부에서는 언론산업을 통하여 언론사의 지배구조, 뉴스 전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유통에 대해서 다룬다. 광고라는 스폰서를 피할 수 없는 언론사의 현실, 이미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포털을 중심으로 재편된 유통 구조를 설명하면서 오마이뉴스, 국민TV, GO발뉴스, 뉴스타파와 같은 대안언론들이 그 영역을 더이상 확장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언론사가 어뷰징에 집중하고 트래픽을 강조할수록 멀쩡한 기사를 쓰던 기자들도 클릭 수에 얽매이게 된다. 열심히 취재해서 쓴 심층 취재 기사는 조회 수가 별로 안 나오고, 대충 베껴 쓴 기사의 조회 수가 폭발하면 허무해진다. - 55쪽

언론이 약자들의 이야기로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 어려운 이유는 이 사회의 언어와 사고방식이 가진 자의 것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보수 세력은 자신들의 가치를 대중에게 쉬운 언어로 설명할 필요성이 적다. 이미 즉물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진보 세력의 언어는 매우 복잡한 맥락을 가지고 있기에 항상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
예컨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서울 대한문 앞에서 농성 중인 상황을 설명한다고 가정해 보자. 보수의 언어는 깔끔하다. 불법 점거, 이 한마디면 된다. 실제 조선일보는 이런 언어로 사안을 설명했다. 보수 언론들은 2015년 11월에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를 묘사하며 `폭력` `불법`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불법과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에 기초한 매우 명료한 설명이다.
반면에 진보의 언어는 복잡하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대한문 앞에서 점거 농성을 하는 상황이 왜 불법이 아닌 합법인지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왜 이들이 불법을 각오하고라도 점거를 할 수밖에 없는지 또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 귀에 잘 안 들어온다. - 63쪽

기자에게는 대중을 분노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기자들은 자신이 쓴 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공감하고 분노하길 바라며, 자신의 기사가 널리 회자되어 군중이 벌떼같이 일어나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 자신의 기사가 `펜의 힘`을 갖길 바라는 것이다. - 73쪽

그러나 언론이 `팩트를 추구해야 한다`는 명제와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명제는 분명 다른 말이다. 팩트는 말 그대로 어떤 사건에 대한 `5W1H`, 그리고 이 정보에 살을 붙인 또 다른 사실관계를 뜻한다. 이때 사실관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같은 팩트도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 우리가 기사나 방송에서 보는 뉴스들은 현실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재구성`된 사실이다. - 125, 126쪽

반면에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은 2015년 9월 21일 열린 `중앙 50년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아젠다 키핑(agenda-keeping)을 강조했다. 정보가 빠르게 소비되는 미디어 시장에서 언론사는 많은 정보 중 중요한 것을 고르고, 이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JTBC는 200일간 세월호 참사를 메인 뉴스로 다뤘고 4대강 문제 역시 반년 가까이 보도했다. 대중들에게 중요한 의제를 던지는 `세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회적 의제가 되도록 만드는 `키핑`이다.
이 키핑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프레임(frame)이다. 프레임은 언론과 미디어가 강조하고 싶은 의제나 정보를 `잘` 전달하기 위해 이들을 재구성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뉴스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틀을 뜻한다. - 128, 129쪽

기사는 가설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 가설이 팩트를 바탕으로 잘 엮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기사 안의 문장을 무작정 사실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문장을 해체해 원인과 결과로 나누고, 인과관계의 끈을 이어 주는 조건이 합리적인지 살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답은 텍스트 안에 있다. - 148쪽

정치학에는 `Two faces of power`라는 개념이 있다. 권력에는 두 가지 속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언론의 힘에도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흔히 사람들은 언론과 미디어가 어떤 뉴스를 생산했느냐를 두고 왈가왈부하지만, 진짜 미디어의 힘든 보도하지 않는 데 있다.
권력을 바라보는 시각은 흔히 명시적인 힘에 집중돼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남을 강제하는 `명시적` 권력은 눈에 잘 띄는 힘이다. 언론도 이런 명시적 권력을 지니고 있다. 원하는 이슈를 의제로 설정하고 특정한 프레임 안에서 사안을 인식하도록 보도하는 힘이다.
반대로 `묵시적` 권력도 있다. 바로 침묵의 힘이다. 이는 사회 지배 계층에게 불리한 이슈는 아예 의제로 만들지 않는 것으로, 정치학에서는 이를 무의사결정(non-decision making)이라 부른다.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결정한다`는 뜻이다. 언론은 이런 묵시적 권력을 가진 대표적 집단이다. 즉, 언론은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언제든 의사를 표출할 수 있다. - 151, 152쪽

이제 뉴스는 고양이와도 경쟁해야 할 처지가 됐다. 이는 유통이 생산을 장악한 뉴스 시장의 현재를 잘 보여 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언론사 사이트에 들어가서 뉴스를 보지 않는다. 이런 경향은 젊은 세대일수록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들이 뉴스를 보는 통로는 스마트폰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가장 큰 특징은 말 그대로 모바일(mobile)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한자리에 앉아서, 정해진 시간을 투자해서 뉴스를 보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습관적으로 아침 신문을 펼치거나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9시 뉴스를 보는 어른들도 있지만, 젊은 세대는 출퇴근길이나 이동 중에 뉴스를 소비한다. 뉴스는 정해진 시간에 챙겨 보는 고정적인 일거리가 아니라 짬 나는 시간에 소비하는 여러 가지 콘텐츠 중 하나가 되어버린 셈이다. - 292, 293쪽

그러나 2000년을 전후로 등장한 1세대 대안 언론은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콘텐츠는 신선했으나 유통 경로는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대안 언론으로 시작한 오마이뉴스, 한겨레를 더 이상 대안 언론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1세대 다안 언론은 대부분 포털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포털의 뉴스 경로에 유입되지 못한 대안 언론들은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삐걱거렸다.
이명박 정부의 언론 장악을 계기로 등장한 대표적인 대안 언론인 뉴스타파와 국민TV의 한계점도 유통이다. 뉴스타파는 유듀브와 시민방송 RTV로 유통되고, 국민TV는 유튜브와 팟캐스트 사이트 팟빵이 주요 유통 경로다. 대부분의 뉴스 소비가 포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기성 언론에 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좋은 보도를 내놓아도 `보는 사람만 보는` 방송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기 어려운 구조다.
결국 대다수의 대안 언론이 영향력 확대를 위해 유통을 확장하는 모험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됐다. - 324,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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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프로포즈
괴테 외 지음, 황내도 옮김 / 청어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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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정리하다가 발견했다. 한창 이런 류의 책이 인기를 모은 적이 있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같은 책을 중심으로 출처를 알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나 유익한 교훈들을 모아놓은(나쁘게 말하면 '짜집기한') 책들이 다수 출간되었다. 이 책도 그런 분위기에 동참한(나쁘게 말하면 '편승한') 책인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측면이 몇 군데 있다. 크게 두 가지만 지적하면,  

1. 책 표지에는 저자의 이름이 적힌 것이 아니라 '괴테, 베르나르 베르베르 외 일화'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 매우 인기 있을 때 편승하여 발간한 책인가 보다. 그렇다고 저자가 쓰여져야 할 부분에 이런 식으로 표기하는 것은 독자들이 베르베르의 책인줄로 오해하고 구입할 여지가 있는 좋지 않은 마케팅이다. 

2. 제목 '어설픈 프로포즈'는 이 책 4장에 있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일화 제목이기도 하다. 표지에는 괴테와 베르베르를 내세우더니 제목은 구로자와 아키라?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 '구로자와 아키라의 일화'라고 하던지. 모름지기 한 책의 제목이 되려면 그 제목이 책 전체의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을 절반 이상을 읽으면서 도대체 왜 '어설픈 프로포즈'가 제목인지를 알 수 없었다.


제목처럼 '어설픈' 구성의 책이다.

"이보게, 처음부터 대작을 쓰려고 하지 말게. 날개가 여물어야 날 수 있지 않겠나? 미래에나 가능한 대작을 꿈꾸지 말고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것을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써 보게. 그럼 언젠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작이 만들어져 있을 걸세. 날기에 앞서 날갯짓 연습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는 괴테의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겨 넣었다. - 1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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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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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광고 문구처럼 "그녀가 돌아왔다!" (그리 끌리지 않은 책표지와 함께...) 


정유정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28>이후 그의 소설을 무척이나 기다렸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7년의 밤>에서 보여준 치밀한 서술과 묘사는 읽는 내내 계속 가슴이 뛰게 만들었다. 그녀가 사실적으로 묘사한 저수지와 댐은 실제 눈에 그릴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그밖에도 등장인물의 생생한 말투와 행동은 외부의 시선으로 책을 읽던 나를 어느새 소설에 개입시켜 그들을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응원하기도 하는 감정적 동화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작가는 <종의 기원>에서도 여전한 흡입력으로 독자들을 소설의 한 가운데로 이끌지만, 전작에 비해서는 사건의 전개와 반전, 그에 따른 긴장감 같은 것이 다소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이것은 전작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나 <내 심장을 쏴라>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좌충우돌을 통하여 이야기 사이사이에 유머러스한 부분을 많이 삽입하였지만, <7년의 밤>이나 <28>과 같은 전작에서는 '악인(惡人)'에 대해 주된 이야기를 풀어 나갔고,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책을 읽기 전에 <종의 기원>의 '종(種)'을 '악(惡)'으로 치환하여 '악의 기원'으로 읽기 시작한 것도 그때문이다. 그런데 읽고 보니 이것은 이분적으로 ('선(善)'이 아닌) '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작가는 "<종의기원>은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에 여기서의 '악인'은 평범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의미의 악인이 아니었다. 만약 통상적인 의미의 악인을 가정하였다면, 악인의 탄생에는 원인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별다른 원인이 필요하지 않은, 즉 타고난 본성이 사이코패스인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운명? 특수성? 돌연변이? 어떠한 것도 답이 되지 않는다. 저자가 제시한 답은 바로 '생존'이다. 


'작가의 말'에서 인용하였듯이,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을 뿐이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고 한다면, '악'이란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이 지배하고 있는 비중이 어느 정도이며, 그것이 언제 발현되는가에 따라 그는 사회적인 악인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스토리를 '도덕성이 교육으로 습득되지 않는 어느 사이코패스가 결국에는 그 본성대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운명적으로 살인마가 되어 계속 살아간다', 라고 한 줄로 줄이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


작은 아들이 큰 아들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임을 알면서도, 그가 사이코패스임을 알면서도, 그가 결국에는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엄마는 아들을 돌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를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서는 적절한 관리와 통제(훈육, 약물)를 통하여 그를 평범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유진은 엄마와 이모가 맞춰놓은 틀 안에서 관리받고 훈육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일종의 '폭력'이 작용한다. 약을 먹으라는 폭력, 규율을 지키라는 폭력,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폭력. 절망해야 할 상황에서 '핏줄의 저주'를 거부하지 못한 엄마는, 얼마 전 읽은 <채식주의자>에서 동생을 정신병원에 맡겨서라도 살게 하려 했던 언니과 겹쳐보인다. 평범하게 살도록 하는 것, 죽지 않고 계속 살게 하는 것 이 두 가지 행위에 수반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폭력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폭력이 유진의 생각과 행동에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오직 그의 본성만을 탓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다가 몇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 그 중 가장 강한 의문은 작가가 과연 치유될 수 없는 사이코패스의 성질을 유진에게 그대로 대입한 것인지였다. 중반 이후까지 당연하게 인식되었던 생각들, 즉 유진은 사이코패스여서 정말 그런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유진은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맞선다. 종탑에서 형을 밀어 넘어뜨릴 수밖에 없었던 '원인'. 물론 형의 죽음 이후에 그려진 그의 담담함과 무심함은 놀랄만 하지만, 형과의 서바이벌 게임에서 당한 분노로 먼저 종탑에 올라간 형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은 미성숙한 소년들에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결국 형이 추락해서 사망하였지만 거기에 살인의 의도가 있었는지는 유진의 회상과 독백만으로는 불분명하다. 그렇다면 형의 죽음은 사이코패스로서 유진의 생존을 위한 것이나 살인이라는 흥분에 눈을 떠 자기 통제력을 상실해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이코패스로서의 악의 탄생을 그리고자 하였다면, 후반부 유진의 관점에서 서술된 형을 종탑에서 밀어버릴 때의 회상부분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은 유진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의붓형인 해진을 이전의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사이코패스도 자신이 죽이기 쉬운 대상을 선별하였기 때문에 여성이 아닌 남성인 해진을 살해할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나'로 서술되는 1인칭 시점에서(유진의 속마음까지 고스란히 노출되도록 서술하고 있는데도) 해진의 살해의도는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바다로 뛰어들기 전의 최후에는 '생존'에 대한 방어적 기재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그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그의 본성이 어느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를 훈육한 엄마와 이모의 잘못은 없는지를 논하는 것은 그리 의미 있는 일은 아닐지 모른다. 다만, (실제 사이코패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에서만 보자면) 살인이라는 결과와 살해라는 행위의 상관관계를 전적으로 유진에 내재된 사이코패스라는 본성에 의지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작가는 왜 (위의 의문들처럼) 불분명하게 남을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일까. 작가가 의도한 소설 본연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사이코패스라는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를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이들(훈육과 의학)의 확고한 '관념'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덧붙임: 사소하지만(?) 정말 궁금한 또 하나의 의문은 이모가 죽을 때 왜 유진을 보며 "유민"이라고 했는지이다. 나는 이것이 후반부에 있을 반전의 복선인줄로만 알았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누구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좀 알려주시길...)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해진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해진을 봤다.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해진은 나와 시선을 맞대왔다. 그렇지?라고 묻는 눈이었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뭔 예기를 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다만 녀석의 덩치가 나보다 두어 뼘쯤 커 보였다. 나와 불과 한 살 차이였건만, 열 살쯤 차이가 나는 형 같았다. 심지어 어머니와 대등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물었다. 해진은 다시 시간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한 번쯤 공평해지는 시점이 올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러려고 애쓰면요." - 67쪽

`규칙에는 예외가 있었고, 예외는 곧 규칙이 되었다.` - 68쪽

인간이 늘 `정답`을 선택하지 않는 건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의 눈금을 조금 낮추자 간단한 해결법이 보였다. - 135쪽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 139쪽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생의 1/3을 몽상하는 데 쓰고, 꿈을 꿀 때에는 깨어 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갖 소망이 실현된다"고. - 272쪽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 275쪽

나는 숨을 멈췄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분노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를 지배하던 충동이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핏줄의 저주에 걸려든 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는지 새삼스레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결코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걸 예감한 순간이었다. 평생토록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리라고 생각하던 순간이며, 내가 누구인지 자각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 308쪽

"나는 죽음에 대해 그런 식으로 낭만적인 치장을 하는 게 싫어."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해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마 광명역을 막 통과한 후였을 것이다. 나는 껌껌한 차창에 시선을 대고 있다가 멍하니 물었다.
"왜?"
"수류탄에 초콜릿을 바르는 꼴이니까."
"수류탄을 쥐고 있다고 꼭 진지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 330쪽

"어떤 책에서 본 얘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는 세 가지 방식이 있대. 하나는 억압이야. 죽음이 다가온다는 걸 잊어버리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양 행동하는 거.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살아. 두 번째는 항상 죽음을 마음에 새겨놓고 잊지 않는 거야. 오늘을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할 때 삶은 가장 큰 축복이라는 거지. 세 번째는 수용이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대.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여도 초월적인 평정을 얻는다는 거야. 이 세 가지 전략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커녕 생각하는 시늉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 이상한 문제로 고민하는 것보다 그냥 죽어버리는 게 쉽고 편할 것 같았다. 해진은 스스로 대답했다.
"모두 거짓말이라는 거야. 셋 다 치장된 두려움에 지나지 않아."
"그럼 뭐가 진실인데?"
"두려움이겠지. 그게 가장 정직한 감정이니까." - 330, 331쪽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는 그의 저서 <이웃집 살인마(The Murderer Next Door)>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그에 따르면,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 379쪽

처음 소설을 시작할 때, 나는 내가 작가로서 충분히 자유롭게 사고한다고 믿었다. 두 번째 다시 쓸 때까지도 그렇다고 우겼다. 세 번째로 다시 쓸 때에야 비로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인 `나`가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깨버리지 못했다는 걸. 주인공인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맹수`인데. 더 나쁜 건, 그 틀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선대의 작가들, 스승으로 삼았던 작가들을 통해, 작가는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한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으면서도. - 382쪽

이제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 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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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2016-06-3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왜 이모가 죽기전에 유민이라고 말했는지 너무 궁금해요..
 
걸음아 날 살려라 장생보법
이승헌 지음 / 한문화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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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창 집에 늘어놓은 책 정리를 하는 중인데, 정리를 하다보면 '이런 책을 내가 샀었나?'라는 의문이 드는 책이 더러 있기 마련이다. 취향상으로는 절대 내가 샀을리가 없는 책인데 어찌하여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지? 예전에는 책 모으는 것이 취미였던지라 책이라면 무조건 받고 보았는데, 그때 딸려온 것일까? 아무튼 읽지 않는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면서 그냥 보내기 아쉬워 몇 장 넘겨보다가 다 읽고 말았다. 


무언가를 절대적인 만병통치의 도구로 믿게 하는 일종의 사술에는 거부감이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은 올바른 걸음을 통하여 건강을 회복하자는 취지여서 이상한 기(氣)와 같은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접할 수 있었다. 더욱이 초중반에 제시하고 있는 건강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일부 새겨들을 부분이 있었다.


장생보법은 바르게 선 자세에서 몸을 1도 정도 앞으로 기울이고, 몸의 중심을 발바닥 용천에 두어 발을 내디딜 때 발가락까지 힘을 주고 11자가 되도록 걷는 것을 말한다. 아무래도 글만으로는 느낌이 잘 와닿지 않지만, 평소 의식하지 않는 걸음걸이부터 신경써야 한다는 것에는 수긍이 간다.

장수 시대에는 새로운 장생의 철학이 필요하다. `어떻게 건강하게 잘 살 것인가`에 스스로의 답을 찾아야 한다.
흔히 `장생`이라고 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원래 `불로장생(不老長生)`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선도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선도의 본질이 현대에 와서는 많이 훼손됐지만 옛말에는 그 의미가 조금은 남아 있다. `불로(不老)`란 늙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동사로서의 불(不)과 목적어로서의 노(老)의 문장으로 `늙지 않게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장생이란 말도 그저 오래 산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되는 이치를 터득하면 하늘에서 받은 생명까지도 자유롭게 연장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였다. - 22, 23쪽

뇌를 젊게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뇌를 잘 속이기만 하면 된다. - 26쪽

삶에 대한 목표나 비전은 삶을 건강하고 활기차게 만든다. 비전이 없는 삶이 편안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아무런 꿈이나 목표가 없을 때 삶은 무감각해지고 무질서해진다. 변화가 없는 삶, 타성에 젖은 삶, 도전하지 않는 삶은 뇌를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 37쪽

먼저 `감정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감정이 `내 것`이면 내가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이 나`라고 하면 평생 감정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 41쪽

생각은 절대 생각을 이길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잡생각으로 에너지를 소모해서는 안 된다. 제멋대로 떠오르는 생각은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관조함으로써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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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주는 사회적으로 <채식주의자>의 한 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스컴에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이 책의 수상에 대해 다루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이 책에 푹 빠져 지냈다. 내 기억으로 <파이 이야기>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또한 맨 부커상 수상작이었던 것 같은데, 이 책들을 만족스럽게 읽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채식주의자>에 대한 기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동기는 부족했다. 한강의 책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을 e북으로 사 놓은지는 꽤 되었지만, 맛있는 간식을 아껴놓는 심정이랄까? 꼭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한 책들을 웬만하면 급하게 바로 펼쳐보지 않는 이상한 습성 때문에 <채식주의자> 또한 e북 창고에 잘 저장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유일한 절친이라 할 수 있는 그가 '좋다'는 평가를 하였기에 읽던 책을 덮어 두고 <채식주의자>를 펴보게 되었다. 어찌보면 내게는 맨 부커상보다는 친구의 평이 더 신뢰가 가는 지도 모른다. 그처럼 나도 단 하루만에 단숨에 빨려들어 읽은 걸 보면, "나직한 목소리지만 숨 막힐 듯한 흡인력이 돋보이는"이라는 수식어는 이 책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말이다. 

 

이 책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각각의 단편을 합한 것이다. 이 3편의 단편들은 모두 '채식주의자'인 영혜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다. 각각이 단편이면서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녔음에도 3편이 합쳐져 또 다른 이야기의 배경과 흐름, 총괄적 완결성을 주는 구성은 자못 신선하다.


평범함과 무난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남들과 '다른' 혹은 '구별되는' 채식주의자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무리와 집단 내 다수와 같지 않다는 이질감은 끝끝내 다수의 불편함이 되어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까지도 영혜(채식주의자)와 유사하게 낯선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안긴다. 이런 낯섦에 반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불편함과 고통을 쉽게 극복해 낼 수 있는 주변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당연하게도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은 모두 그녀가 택한 방식을 바꾸려고 한다. 그래서 고기를 먹으라 하고, 억지로 먹이려 하고, 심지어 뺨을 때리기 까지 한다. 남의 살을 먹는다는 '육식'이 잘 숨겨왔던 불편함, 포장된 진열대 위의 고기가 주지 못하는 폭력성이 비로소 행위적인 강압과 폭력으로 현실화 되는 순간이다.   


불필요한 폭력으로 타인의 죽음을 섭취하며 살아가지 않으려는 채식주의자는 식물이 되고자 했나보다. 형부에 의해 그녀의 몸에 그려진 줄기와 화려한 잎사귀들은 아예 그녀에게 각인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몽고반점이라는, 어린 애의 티를 벗은 어른들이면 갖고 있지 않은, 상징은 어찌보면 영혜에게 아직 남아 있는 인간 본연의 순수함이었을 것이다. 모두들 그것을 잃어버렸지만, 누구도 상실감을 느끼지 않은 채 살아가는... 그러나 예술가인 형부는 몽고반점을 통해 그녀의 '무엇'을 발견한다. 그것은 처제라는 여자의 몸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지만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작품(바디페인팅을 통한 비디오 아트)의 완결이자, 그가 읽어낸 '식물의 욕망'이었을테다.


영혜는 자신이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며 식음을 전폐한다. 동물로서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언니를 비롯한 병원 의료진은 그녀를 살리려 하고, 살리기 위해 먹이려 한다. 이번에도 고기를 먹이려는 1부의 장면과 동일한 폭력이 자행된다. 읽을 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생명의 존중으로 치장된 이들의 생명연장 노력 앞에서, 내가 과연 타인의 삶을 어느 정도까지 관여할 수 있는지를 되묻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과연 누구의 인생인가?


내게 채식주의자는 단순히 육식을 하지 않는 한 여자의 에피소드로 읽히지 않았다. 내가 읽은 <채식주의자>는 삶의 다른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굳은 관념들과 냉담한 시선, 실제 '그녀'가 느끼는 불편함이 아니라 자신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기심, 그리고 관용을 잃은 폭력과 그 폭력에 물들어 있음에도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로 구성된 이 사회에 대한 자화상이었다. 순수는 추구될 수 없다. 그것은 내재되어 있을 뿐이니. 그런데 우리는 그 몽고반점을 잃어버린 것조차 알지 못한 채 당연한 육식주의자로 살아간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 49쪽

그녀가 살았으면 하고 그는 바랐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는 의문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버리려 했던 순간은 인생의 코너 같은 거였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부모, 그것을 방관한 남편이나 형제자매까지도-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다시 깨어난다 한들 그 상황이 변해 있을 리는 없다. 이번의 시도는 충동적이었지만 그녀는 다시 시도할 수도 있따. 그때에는 좀더 주도면밀하게 모든 것을 진행해, 이렇게 방해받는 일 따위는 없을 수도 있다. 문득 그는 차라리 그녀가 깨어나지 않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어난다는 상황이 오히려 막연하고 지긋지긋해, 눈을 뜬 그녀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 90, 91쪽

아이를 통해 연결된, 군더디기없는, 일종의 동업자의 관계가 이즈음 아내와 그의 관계였다. - 110쪽

그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제 동서라고 부를 필요도 없게 된 그녀의 옛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 그녀의 몸을 탐했을 거란 상상만으로도 그는 일종의 수치를 느꼈다. 둔감한 그는 그녀의 몽고반점을 알기나 했을까. 알몸의 두 사람을 상상한 순간, 그것은 모욕이라고, 더럽힘이라고, 폭력이라고 그는 느꼈다. - 117쪽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렀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 212쪽

그 순간 그녀는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살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한달 동안 염려했던 큰병의 가능성은 오히려 사소한 번민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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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여행 2016-05-25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보다 서평이 더 좋네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글에 관해 이렇게 깊게 생각해보고 토론해보고 기록까지 한다는 것을 알면 그 작가도 한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읽고 싶은 소설이 많지 않던 요즘에 참 인상적인 책이었습니다. 이 서평으로 다시 한번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붉은눈 2016-05-26 23:35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에 과찬을 해주셔서 부끄럽습니다. 그냥 제가 생각한 관점인데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희망여행 2016-05-25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평에 감동 받는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cyrus 2016-05-25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한국소설을 잘 안 읽는 편인데,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한국소설이 <채식주의자>였습니다. ^^

붉은눈 2016-05-26 23:38   좋아요 0 | URL
앗, cyrus님이 잘 안 읽으시는 분야도 있군요. ^^
저도 한동안 먹을 수 없었던 좋아하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듯 읽은 소설이었습니다.

가람과 뫼 2016-05-26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무슨 뜻인지 작가의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이 서평을 읽고난 후 이 책의 출판의도를 알 것 같읍니다. 물론 읽는 사람마다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긴 하겠지만 말이죠. 좋은 서평 감사드립니다.

붉은눈 2016-05-27 01:19   좋아요 0 | URL
작가는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까, 제가 나름대로 더듬거리며 읽어낸 작품의 뜻은 이 정도 밖에 안됩니다.
또 다른 분들이 새로운 관점이나 더 깊은 뜻을 읽어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게 무척 궁금하기도 합니다.
부족한 글인데도 좋게 봐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