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참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를 즐겨들을 때, 박준의 시 '환절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멍해졌던 기억이 있었다. 각 에피소드 맨 마지막에는 시를 낭독해주는 코너가 있었는데, 2시간이 넘는 팟캐스트 녹음의 막바지여서 그랬는지 진행자인 이동진의 다소 지친 목소리가 그날 따라 이 시의 느낌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로 시작하는 시를 듣고서, 연예세포가 거의 전멸되다시피 한 나라고는 하지만 이런 류의 시를 접해본지도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먹해진 감정을 추스리기도 전에 시구를 검색하였고,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샀다.


이 책을 산 것은 그 시집을 사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시인의 첫 산문집이 나온다는 광고를 보고 예약구매를 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어째 잘 읽을 수가 없었다. 시를 읽고 산문집을 구매한 그 짧은 시간 차에 다시 감정이 무뎌진 것일까? 어쨌든 이 책은 미쳐 값지 못한 빚처럼 내 책장에 고이 꽂혀있었다. 해가 바뀌었고 늘 그렇듯 '정리'라는 미명 하에 책장에 꽂힌 책을 나름의 분류기준에 따라 이리저리 옮기는 짓을 하고 있을 때, 이 책을 다시 보았다. 그제서야 내가 이 책을 부푼 기대를 갖고, 그것도 '예약구매'까지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책을 옮기다 말고 표지를 열어 가볍게 훑어보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지금은 다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천천히 가끔은 빠르게 그의 시와 글과 생각을 읽어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장소를 기억하며 엮어낸 시나 산문이 눈에 띄었다. 인천, 경주, 여수, 협재, 벽제, 화암, 묵호, 해남, 혜화동, 삼척... 돌아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장소에 가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 혹은 그 사람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장소가 이토록 많다는 것은 생경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시인의 기억과 후회와 원망과 그리움을 적어 놓은 한 줄의 글귀에는 적잖은 공감이 갔다. 사람이 사는 일이라는 것이 누구를 만나, 설레고, 기쁘고, 뜨겁다가 일상이 되고, 당연시되고, 식은 줄 모르게 식어버린 것을 뒤늦게야 알고, 힘들어 하고, 멀어지고, 괴로워하고, 추억하는 것의 반복이기는 하겠지만, 몇 번을 반복한 관계라는 것이 왜 이리 매번 낯설고 어려운지.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19

떠나는 이를 기억하는 일은, 아직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과 꼭 닮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 23

그해 밤 별빛은
우리가 있던 자리를 밝힐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눈으로 들어와 빛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해 여수」 - 27

환절기를 지나며 나는 더 아팠어야 했는데, 아프지 않으려 하지 말고, 일을 접어두고 병원에 가지 말고, 따듯한 물을 많이 마시지 말고, 구깃구깃한 약봉지를 뜯어 입에 털어넣지 말고, 밀린 걱정들을 떠올려가며 더 아팠어야 했는데. - 30

어떤 일을 바라거나 무엇을 빌지 않아도
더없이 좋았던 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날들이 다 지나자
다시는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스스로에게 빌어야 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지금은」 - 47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과거의 일들과 마음만으로는 될 수 없을 미래의 일들을 생각한다. 독선의 끝에는 더욱 날 선 독선이 기다리고 있음을 목격한다. "나는 시간 속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영원을 향해 몸을 돌려보았다. 발을 딛고 설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라는 에밀 시오랑의 문장을 종종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고립의 시간을 보내다보면 그제야 내가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고 무겁게만 여겨졌던 내 인연들의 귀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맑은 눈빛을 다시 보고 싶어한다. - 50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나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 51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 63

어쩌면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일지도 모른다. - 82

상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그 누군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 혹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그 사랑이 과거 ‘그 누군가’가 받았던 것이라거나, 훗날 다른 ‘그 누군가’가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로 사랑을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곧잘 상한다.
하지만 생각을 한번 더 깊이 가져가보면 그리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대상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나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부를 방법이 없다. - 92, 93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그 수많은 다름을 견주어보는 동시에 그 다름을 감내해내야 한다는 점이 우리의 사랑을 아프게 만든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평소 자신에게 조차 내색하지 않던 스스로의 속마음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대개 오랜 상처나 열등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사랑을 외롭게 한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당신의 외모와 성격과 목소리가 자라온 환경과 어떤 것에 대해 품고 있는 마음이 나와 다르다는 점에서 사랑이 탄생한다. - 94

작은 일들은 작은 일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 101

사람에게 미움받고.
시간에게 용서받았던. 「그해 행신」 - 103

여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던 날, 나는 처음 각오했던 한권 분량의 원고를 쓰기는커녕 몇 개의 단상만을 메모해둔 채 별 소득 없이 서울로 향해야 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낯설기만 했던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이 더없이 친숙해졌다는 것, 얼굴과 목이 많이 탔다는 것, 그리고 평소 지겹고 답답하기만 했던 원래의 내 삶의 일상과 거처가 조금 그리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 110

음식을 대하는 일이 마치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느껴지곤 한다. 나의 오랜 버릇 중 하나는 한번 갔던 식당이 마음에 들면 몇 번이고 그곳을 찾아 매번 같은 메뉴를 먹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 인간관계를 넓히는 일 앞에서 늘 서름서름해하는 내 성격과 꼭 닮아 있다. - 112

가난 자체보다 가난에서 멀어지려는 욕망이 삶을 언제나 낯설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 136

사상까지는 못 되지만 사유하며 살아가고 혁명은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가닿고 싶어하는 어른됨 또한 그리 비범한 것은 아니다. - 146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 148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 157

하지만 아무리 무겁고 날 선 마음이라 해도 시간에게만큼은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여긴다. - 1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자의 이름만으로 책을 살 이유는 충분했다. 출간소식을 듣고 집 근처 서점에 갔는데, 아직 구비가 되지 않아 알라딘에 주문을 했다. 기다리는 내내 마음이 설랬다. 이름만으로 설렘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작가가 그리 많지 않은 요즘이다. <문맹>을 기다리면서, 그의 전작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다시 조금 읽다가 덮었다. <문맹>을 완독한 후 다시 읽어볼 요량으로. 모든 책은 다시 읽혀야 한다는데, 이번에는 <문맹>이 그 분수령이 될 것 같았다.


책을 받았다. 표지도, 제목도, 저자의 이름도 마음에 든다. 책을 폈다. 그런데... 어? 


예쁘장한 양장본인 것까지는 좋은데 12x18(cm) 크기의 책에 좌우 2cm, 상하 각각 2, 3.5cm씩 큼지막한 여백을 두었다. 그리고 페이지 안에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테두리를 두었다. 그 한 페이지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는 글자수가 250자 정도는 될까? 너무나도 쉽게 넘어가는 책장의 느낌이 내 갈급했던 기다림도, 작가의 진중한 고백도, 가볍게 희석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쓸데 없는 여백과 디자인을 줄이면 책은 절반정도의 분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독자들이 책의 디자인을 중시하고, 문고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이런 낭비스러운 편집은 오히려 책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 같다. 아무튼, 책을 받았을 때의 기쁨은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반감되었고, 그 기분은 꽤 오래 갔다.


'모든 소설은 결국 자전적'이라는 말을 곱씹어본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었을 때에는 심리적인 묘사나 등장인물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건과 행동만을 서술하면서도, 서사만으로 완벽하게 감정까지도 잡아낼 수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었는데, 그 책을 읽고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사람, 그가 속해있던 국가인 헝가리, 그가 처해 있던 사회인 스위스, 그가 몰린 상황에서 미숙한 외국어인 프랑스어(그의 말에 따르면 '적의 언어')로 써내려간 소설의 배경을 알게 됨으로써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이라는 물리적 상황으로 인해 분열된 내적 자아, 감정을 배제한 채 짧고 간결할 수밖에 없었던 언어적 사회적 한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은 덕에 탄생한 이야기. 


이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 9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 34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 나이로 스위스에, 그 중에서도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 - 52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 89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 90, 91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슬퍼할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 안전하다고 말한다. 나는 웃는다. 나는 그에게 소련인들이 무섭지 않고 만약 내가 슬프다면 그것은 오히려 지금 너무 많이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직장과 공장, 장보기, 세제, 식사 말고는 달리 생각할 것도, 할 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잠을 자고 내 나라 꿈을 조금 더 오래 꿀 수 있는 일요일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에게 말하지 못한다. - 90, 91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 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사내전 - 생활형 검사의 사람 공부, 세상 공부
김웅 지음 / 부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제목을 그대로 따서 살짝 바꾼 제목의 무성의함, 표지 디자인, 게다가 저자가 검사... 내가 좋아할 요소는 하나도 갖추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서 읽은 것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꽤 오래 머물러 있는 책이라면 괜찮은 책일 가능성이 높다는 알라딘 독자들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철지난 베스트셀러를 읽어본 결과 이러한 나의 편향을 실제로 몇차례 깨뜨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심스러움(?) 때문에, 유행이 지난 책을 뒤늦게 읽곤 하지만...


우선, 저자의 소개를 보았다. 문유석 판사도 그렇지만 요즘 법조계에서는, 누구보다 조직적일 것 같은 분들이 실상 '조직에 적응 못'한다는 커밍아웃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곤 한다. 이런 책을 쓰기 위해서는 조직에 적응 못한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분들이 이런 책을 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책 날개를 보았을 때만해도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저자에 대한 의심, 몇몇 사건 이야기와 더불어 간단한 팁과 함께 훈장질이나 했을 것이라는 내 예상은 처참하게 무너졌고,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들어 '낄낄'거리며 책장을 넘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개체 수로만 따진다면 개미가 지구의 왕이다", "만만한 데 말뚝 박고, 생가지보다 마른 가지를 꺾는 법이다", "18급 100명이 머리를 짜낸다고 이창호 국수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라는 참신한 표현들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되어버렸고, "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다", "제대로 충고하려면 애정을 빼고, 주저하지 말고, 심장을 향해 칼을 뻗듯 명확하고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 "좋은 것을 굳이 광고까지 해서 당신에게 알려주는 선의란 없으며, 만약 그런 게 있다 해도 절대 당신의 순번까지 돌아오지는 않는다"라는 충고들은 읽는 내내 머릿속에 박혀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1장 '사기 공화국의 풍경'에서는 우리의 탐욕이 빚어낸 이 시대의 자화상을 날카롭고 재치 있게 그려낸다. 읽을 때는 재미있게 읽지만 그 뒷맛은 씁쓸하면서도 안타깝기만 한 사건 이면의 이야기들은 2장 '사람들, 이야기들'에서 이어진다. 3장 '검사의 사생활'에서는 그가 프로필에서 밝혔던 조직 부적응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도 대한민국 검사라면 자신도 모르게 조직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권위의식이 굳건히 쌓였을 법도 한데, 스스로를 '당청꼴지 또라이'라 칭하면서 민낯을 보여준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4장'법의 본질'에서는 죄와 벌의 가장 심층적인 관계인으로서 법이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 3장까지의 흐름에 비해 보다 진지하고 학술적인 서술이어서 흥미가 다소 떨어지는 감이 없지는 않으나, 에피소드로만 일관하여 책 한권을 끝맺었다면 다 읽고 난 후의 느낌 또한 허무했으리라. 초반에는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사건에 대한 에피소드로 시작하여, 마지막은 이러한 에피소드와 그에 따른 교훈이 갖는 의미를 법, 재판, 국민참여, 형벌, 형평 등 피상으로서가 아닌 본질로서 법을 비롯한 관련 이념과 제도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보자는 것은 괜찮은 시도였다고 본다.


추천사를 쓴 김민섭 작가의 권유대로 "나는 어떤 물음표를 가지고 살고 있는지, 어떤 눈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와 같은 심도 깊은 성찰까지는 무리였지만, 그의 표현대로 '아, 역시 잘하는 놈들은...'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쉽고 효과적인 해결책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모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함은 터무니없을수록 효과적이다. - 49

숫자는 때로 별 의미가 없고 오히려 본질을 흐릴 때도 있다. 개체 수로만 따진다면 개미가 지구의 왕이다. - 56

우리는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꽤 오랜 기간 동안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흔히 수학, 과학을 배우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굳이 수학과 과학을 배우는 이유는 이성과 논리에 따라 판단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함이다. 물론 대부분 그런 과학적인 사고체계는 졸업장 속에 남겨두고 나온다. 그래서 고등교육 과정을 마쳤음에도 우리는 미신과 우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오류와 맹신의 순교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 62, 63

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주성분은 욕심, 욕망, 욕정이다. 우리는 ‘욕심’이라는 거친 바다 위를 구멍 뚫린 ‘합리’라는 배를 타고 가는 불안한 존재들이다. 마땅히 쉼 없이 구멍을 메우고 차오르는 욕심을 퍼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욕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허세를 부린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으로부터 논리와 이성을 지켜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 결과 아무리 허술한 속임수라도 피해자의 욕심과 만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 - 63

최근 뇌과학에 따르면 감정이 시성에 우선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한다. 외부 자극에 대한 감정적 반응은 이성적 반응에 비해 짧은 회로로 진행하기 때문에 이성적 인식이 나오기 전에 이미 감정이 결론을 내리고 인식은 그에 따를 뿐이라고 한다.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도 마찬가지다. 감정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목사님이 허술한 사기에 속은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치밀한 수에 속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당한 것이다. 인식의 오작동을 낳는 것은 그보다 재빠른 감정, 즉 욕심 때문일지 모른다.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어떠한 사실과 증거에도 결코 그 오류를 수정하지 않는 강한 변화 저항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 70

흔히 사람들은 여럿이 모이면 좀 더 나은 판단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집단지성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18급 100명이 머리를 짜낸다고 이창호 국수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여럿이 모일수록 그 집단이 빠진 오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오류에 빠진 사람이 같은 오류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 78

선의는 자신이 베풀어야 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기도 마찬가지다. 사기꾼은 없는 사람, 약한 사람, 힘든 사람, 타인의 선의를 근거 없이 믿는 사람들을 노린다. - 86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가소로웠다. 일단 우리에게 꽃다운 청춘이란 것은 없었다. 꽃다운 청춘이란 드라마 주인공이나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젊었을 때도 지금처럼 구질구질했고 늘 허덕거렸다. 게다가 목 좋은 곳의 카페와 함께하는 여유로운 노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건 서울의 건물 같은 것이다. 지천으로 깔렸는데 우리 몫은 없다. 그런 망상에 가까운 희망은 망하는 게 당연한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87

제대로 충고하려면 애정을 빼고, 주저하지 말고, 심장을 향해 칼을 뻗듯 명확하고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감안해서 애매하게 할 거면 아예 안 하는 것이 낫다. - 96

그냥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은 모조리 거짓말이다. 좋은 것을 굳이 광고까지 해서 당신에게 알려주는 선의란 없으며, 만약 그런 게 있다 해도 절대 당신의 순번까지 돌아오지는 않는다. - 97

그러나 사건들은 시나리오처럼 뚜렷한 모습을 가진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이, 원인과 결과가 그렇게 쉽게 구분될 수 없다. 만약 쉽게 구분된다면 그건 감정 탓이다. 감정이 이끄는 결론과 확신은 편하지만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 112

피해자와 목격자 두 명의 진술이 할아버지 한 명의 진술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다. 진실은 다수결이 아니다. - 127

사람들은 늘 진실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분노할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래서 언론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보다는 대부분 흥밋거리에 집착한다. 위기관리 전문가 에릭 데젠홀(Eric Dezenhall)은 이렇게 말했다. "뉴스 매체는 결코 타락할 수 없는 공명정대한 존재가 아니라 진실과 아무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려는 강한 욕구를 가진 영리 기업일 뿐이다." - 164

애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의를 강제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자연은 인간의 뇌 속에 정의를 침범했을 때 동반되는 처벌에 상당하는 의식, 상응하는 처벌에 대한 공포를 인류 결합의 위대한 보증으로서 심어둔 것이며, 이것이 약자를 보호하고 폭력을 누르고 죄를 응징하게 하는 것이다." - 190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눈물 흘리기 좋은 감성적인 소재가 아니다.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냉철하고 엄중한 과제이자 요구이다. 존엄한 것은 함부로 대할 수 없고, 훼손될 경우 반드시 응분의 대가가 따라야 한다. 마음대로 짓밟고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는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짓밟힌 것이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간청해야 한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존엄한 것은 두려운 것이고 원시적인 것이다. 지켜지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 193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말했다. "진정 용서하고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응징 혹은 정당한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죄인이 적절하게 징벌되고 나서야 나는 앞으로 움직일 수 있고, 그 모든 일과 작별할 수 있다." - 194

충언은 몸에 해롭다. 왕의 몸이 아니라 충신의 몸에. - 231

양념과 아부는 비슷하다. 재료가 좋으면 별로 필요 없다. 원물의 질이 떨어지니 양념으로 미각을 속이는 것이다. 게다가 양념과 아부는 한번 넣기 시작하면 점점 더 많이 들어간다. - 233

사실 의지로 되는 것은 거의 없다. 의지란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 예외적으로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고, 대부분은 여러 가지 여건이 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우연한 행운을 마치 노력의 대가인 것처럼 속이기 위해 동원하는 말이다. - 242, 243

모든 현상에는 이면과 원인이 있다. 대개 여러 개의 원인들이 경합하며, 그것들이 화학적인 결합을 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현상에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인터넷 댓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인을 찾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무척 어려운 과학적 추론이 필요하며 자신은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실패에 대한 인식이다. 원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자신이 틀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 258

선의가 꼭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부작용은 시차를 두고 발생하기 때문에 정상배들은 늘 선의만 강조한다. 표는 지금 받는 것이고, 책임은 나중에 지면 되기 때문이다. - 286

프로이트가 말하길 이 세상의 현상을 알고자 한다면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공감과 반감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두 극단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게다가 정치인들이 연출해낸 적대적인 상황은 ‘무관심도 적으로 간주’하는 문화와 ‘공격을 참여라고 생각’하는 돌림병을 낳았다. 적대적인 정치 환경은 무관심할 자유도 주지 않는다. 잘못된 정치에 동조하지 않고 거기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할 자유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투표가 세상을 바꾸고, 투표율이 높을수록 선진국이라는 말이 아무런 고려도 없이 주술처럼 떠돈다. - 3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피 공부 - 매일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핼 스테빈스 지음, 이지연 옮김 / 윌북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름 공들여 출판한 책에 혹평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뭘 말하려는 책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원제인 Copy Capsule을 '카피 공부'라고 번역한 것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제목만으로는 마치 이 책이 광고 카피 공부를 위한 이론서 혹은 실용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평을 보니 나처럼 생각하고 기대했다가 실망한 독자들이 꽤 되는 것 같다. 그 평을 미리 확인했어야 했는데...). 막상 책을 펼쳐보면 제목과는 너무 다르게, 광고문구, 저자의 충고나 격언, 유명인들의 인용구 몇 줄로 구성되어 있다. 원제 그대로 정말 '캡슐'인 것이다.


차례에 등장하는 '광고의 기본', '광고에 관한 조언', 헤드라인을 쓰는 기술' 같은 제목들도 몇가지 유사한 문구들을 인위적으로 묶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다(이러한 문구들이 별 구분 없이 중간중간에 반복된다). 마지막 장인 '인간의 위트와 지혜'에 유명인들의 말을 짜집기한 부분은 무성의함의 극치였다.


말장난 같은 표현도 많지만 '언어유희'라고 받아들이고, 등장하는 격언들 중 일부는 '광고'가 아닌 '인생'을 위한 격언으로 여겨도 될 부분이 있다는 점, 원서만으로 접했을 때는 그 뉘앙스를 알 수 없을 법한 부분을 번역자가 약간의 설명을 해주었다는 점을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그 정도다. 

광고쟁이는 팩트(fact)를 ‘아이디어’로 바꾸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감정’으로, 그 감정을 다시 ‘사람’으로, 그 사람을 다시 ‘판매’로 바꾸어놓는 사람이다. 팩트를 아이디어로 바꾸려면 무언가를 봤을 때 그게 팩트임을 알아봐야 한다. 아이디어를 감정으로 바꾸려면 마음에 품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사갈까?’라는 질문의 답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게 뭘까?’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움직이고 상품을 움직일까?’ - 6

감정(emotion) 속에 움직임(motion)이 그토록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결국 뿌리는 같다. - 20

광고는 메시지(message)가 되든가 쓰레기(mess)가 되든가, 둘 중 하나다. - 22

정신적으로 예리해지고 싶다면 모든 것에 꾸준한 호기심을 키워라. 머릿속으로 세상을 돌아다녀라. 요컨대 머리는 집시처럼 거침없이 돌아가게 하고 두 발은 단단한 땅을 딛고 서라. - 41

똑똑한 작가는 꽃을 심기 전에 잡초부터 제거한다. - 42

두 번째 문장은 독자가 세 번째 나오는 문장을 읽도록 만들어야지, 첫 번째 문장으로 되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의사들은 이것을 ‘리버스 연동 운동’이라고 부르고, 나는 이것을 ‘잉크 역류’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흐름을 깨지 마라’! - 50

망설여질 때는 빼라. - 56

항상 기억하라. 계속해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그러니 계속 불을 지펴라. - 68

성공을 지속하려면 머리만으로는 부족하다. 버팀목이 필요하다. - 81

젊음을 유지하고 싶다면 계속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 녹슬고 싶지 않다면 부단히 노력하라(To stay youthful, stay useful. To stay rustless, stay restless). - 83

표현의 자유에 관한 판결로 유명한 홈즈 판사는 구체적인 것을 크게 강조했다. "모든 일반화는 진실이 아니다. 이 문장도 마찬가지다." - 149

"반복이 평판을 만든다(Repetition makes reputation)" - 200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을 사용하지 마라. 가장 마지막에 떠오르는 생각을 사용해라. (만약 그게 하나로 같다면 내가 옳다는 것을 두 배로 확신할 수 있다.) - 209

구멍을 뚫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발견하는 것은 석유일까, 분노일까? - 230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마음은 바뀐다. 기분은 바뀐다. 옷은 바뀐다. 직업은 바뀐다. 아내와 남편, 집은 바뀐다. 하지만 사람들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 238

사람들은 ‘사고’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느낌’으로 생각한다. 그게 바로 감정이다. - 238

프랑스의 저명한 성직자이자 설교가인 자크 보쉬에는 카피라이터들이 가슴에 새길 만한 말을 남겼다. "가슴은 논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갖고 있다." - 283

조지 엘리엇은 이런 혜안을 덧붙였다. "하늘의 빛이 될 수 없다면 방 안의 등불이 되라." - 284

프랑스 속담이다. "훌륭한 궁수는 화살 때문에 유명한 것이 아니라 과녁 때문에 유명하다." - 286

알렉산더 해밀턴은 말했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기보다 합리적 이유를 찾는 동물이다." - 293

올리버 크롬웰은 말했다. "더 훌륭해지려는 노력을 멈추는 사람은 더 이상 훌륭하지 않다." - 293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8-06-12 1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약 제 주변에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전 이런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의도가 아니어도 여성을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의미를 줄 수 있는 카피를 만들 수 있으니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만들어 달라고요. ^^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추리소설을 읽고 싶어 이책 저책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책이다. 독자들평도 좋은 것 같았고, "진범은 따로 있다"라는 띠지의 문구가 상상하기 힘든 반전의 예고처럼 보여, 간만에 괜찮은 추리소설을 보게 된다며 기대를 많이 하며 책장을 넘겼다. 작가의 문체도 내가 좋아하는 류이고, 인물의 관점을 달리한 서술, 인물의 심리묘사,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 등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데, 뭔가 많이 허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딸과 아내의 죽음을 추적하는 아빠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딸과 아내의 부재의 상황에 처한 남자의 비참함이나 우울함, 범인을 찾기 위해 추적을 시작하는 비장함 같은 것들이 다른 추리소설에 비해 상당히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요새 너무 자극적이어서 이 소설에서의 사건 전개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느꼈는지, 반전을 기대하는 마음에 스토리나 결말이 미치지를 못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의 중반을 넘어서자 초반에 의문을 품은 채 긴장하며 읽던 마음이 첫장을 펼 때의 기대와 함께 슬슬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스릴러라기보다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소설이었다. 

오려내듯 딸만 사라진 일상 속에서 그 아픔을 이기는 방법이라고는 자신을 고통에 몰아넣거나 화석처럼 굳어져 무감각해지는 수밖에 없다. 아내는 자신의 몸을 괴롭혀 암세포를 키웠고 우진은 거북의 등껍질처럼 딱딱한 방어막을 만들고 안으로 숨어들었다. - 47

죽음은 한 번으로 끝나는 상황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밀려들고 반복되는 무간지옥의 시간이다. 고통의 파도는 죽을 때까지 그의 뺨을 후려갈길 것이다. - 47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달라졌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 216

사람들은 생각한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고. 그러면 잘못된 일들을 바꿀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야 모든 것이 전과 같아질까? 잘못된 길로 가기 시작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한다고 결과가 달라질까?
어느 때로 돌아가든 답은 같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달라지는 것은 없다. - 377

누군가 그랬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지옥이 된 이유는 악마들이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 3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