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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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 저자의 이름만으로 책을 살 이유는 충분했다. 출간소식을 듣고 집 근처 서점에 갔는데, 아직 구비가 되지 않아 알라딘에 주문을 했다. 기다리는 내내 마음이 설랬다. 이름만으로 설렘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작가가 그리 많지 않은 요즘이다. <문맹>을 기다리면서, 그의 전작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다시 조금 읽다가 덮었다. <문맹>을 완독한 후 다시 읽어볼 요량으로. 모든 책은 다시 읽혀야 한다는데, 이번에는 <문맹>이 그 분수령이 될 것 같았다.


책을 받았다. 표지도, 제목도, 저자의 이름도 마음에 든다. 책을 폈다. 그런데... 어? 


예쁘장한 양장본인 것까지는 좋은데 12x18(cm) 크기의 책에 좌우 2cm, 상하 각각 2, 3.5cm씩 큼지막한 여백을 두었다. 그리고 페이지 안에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테두리를 두었다. 그 한 페이지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는 글자수가 250자 정도는 될까? 너무나도 쉽게 넘어가는 책장의 느낌이 내 갈급했던 기다림도, 작가의 진중한 고백도, 가볍게 희석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쓸데 없는 여백과 디자인을 줄이면 책은 절반정도의 분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독자들이 책의 디자인을 중시하고, 문고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이런 낭비스러운 편집은 오히려 책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 같다. 아무튼, 책을 받았을 때의 기쁨은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반감되었고, 그 기분은 꽤 오래 갔다.


'모든 소설은 결국 자전적'이라는 말을 곱씹어본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었을 때에는 심리적인 묘사나 등장인물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건과 행동만을 서술하면서도, 서사만으로 완벽하게 감정까지도 잡아낼 수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었는데, 그 책을 읽고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사람, 그가 속해있던 국가인 헝가리, 그가 처해 있던 사회인 스위스, 그가 몰린 상황에서 미숙한 외국어인 프랑스어(그의 말에 따르면 '적의 언어')로 써내려간 소설의 배경을 알게 됨으로써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이라는 물리적 상황으로 인해 분열된 내적 자아, 감정을 배제한 채 짧고 간결할 수밖에 없었던 언어적 사회적 한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은 덕에 탄생한 이야기. 


이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 9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 34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 나이로 스위스에, 그 중에서도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 - 52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 89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 90, 91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슬퍼할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 안전하다고 말한다. 나는 웃는다. 나는 그에게 소련인들이 무섭지 않고 만약 내가 슬프다면 그것은 오히려 지금 너무 많이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직장과 공장, 장보기, 세제, 식사 말고는 달리 생각할 것도, 할 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잠을 자고 내 나라 꿈을 조금 더 오래 꿀 수 있는 일요일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에게 말하지 못한다. - 90, 91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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