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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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월


2년 전의 울분에 이끌려 책장에 있던 책을 다시 폈다. 노란 리본, 하늘색 바다, 그 속으로 가라 앉은 배의 모양, 그리고 그 배에 달린 말풍선에는 이런 말이 써있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라고. 그렇다 세월호는 사고가 아닌 사건이었다. 모든 국민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로 거대한 배가 천천히 가라앉는 모습을,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단 한 명도 구출되지 못하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그것은 사건이었다.


그때부터 였나? 모아놓은 돈, 제대로 된 기술하나 없으면서 '이민'이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수차례 써보았던 것이. 그때 였나? 이런 나라에서 더는 내 자식을 못키우겠다고 다짐한 것이, 자기 나라 국민조차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에 더이상 꼬박꼬박 세금 바쳐가며 충실한 국민 노릇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시 4월. 공교롭게도 선거철이다.

세월호 후폭풍을 우려해 "한 번만 도와달라"고 읍소했던 그 추악하고 뻔뻔한 얼굴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선거 전날까지는 우리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는 결국 세월호 유가족들을, 우리를 무릎 꿇렸지. 그리고 마침내 새누리가 압승한 선거 결과는 내게 도대체 누구에게 화풀이를 해야하는지 모르겠을 울분으로 아직 남아 있다. 여전히 냉담한 정부, 인양되지 않는 세월호, 충분한 조사 없이 지내온 시간을 입증하듯 청문회에서 하나하나 밝혀지는 의혹들...


 '아직도'가 아니라 '여전히' 4월은 내게 세월호다.

`최선`을 다하겠단 얘길 들었다. `최대`한 힘쓰겠다는 말도, `모든 걸 동원`하겠다는 약속도 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그럴듯한 말들은 주로 `위`에서 내려왔다. 그 안에는 부사와 형용사, 서술어와 추상명사가 많았지만 시제와 동사, 주어와 고유명사는 잘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책임`이란 말이 들려왔다. `적폐`라는 말, `엄벌`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그런데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어도 대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보다 `기다려달라`는 청보다 선명하게 들린 건 지도층의 막말과 실언이었다. 그리고 그중 어떤 말은 결국 유족을 거리로 나서게 했다. 어버이날, 두 팔을 올려 벌서듯 자식들의 영정을 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정부가 말한 `최선`과 `최대`의 대상은 국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는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고 민심을 달래는 `입`이길 자처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이 간절히 원한 건 권력의 `귀`였다. (김애란) - 13쪽

얼마 전 `미개(未開)`라는 말이 문제돼 그 뜻을 찾아봤다. `사회가 발전되지 않고 문화수준이 낮은`이라는 뜻이 먼저 등장했지만 그 아래 `열리지 않은`이란 일차적인 뜻도 눈에 띄었다. 앞으로 우리는 누군가 타인의 고통을 향해 `귀를 열지 않을`때, 그리고 `마음을 열지 않을` 때 그 상황을 `미개`하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김애란) - 13, 14쪽

- 지금 당신을 가장 절망케 하는 건 무엇입니까.
작가들은 그 자리에서 저마다 할 수 있는 말들을 했다. 나는 좀 당황한 나머지 부끄럽고 두루뭉술한 얘기를 했다. 절망에 대해 혹은 희망에 대해 모두가 한마디씩 하고 이윽고 이창근씨 아내인 이자영씨 차례가 왔을 때, 그녀는 누구도 건너본 적 없는 시절로 혼자 돌아가듯 담담하게 말했다.
"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더 노력해야 된다는 말이었어요." (김애란) - 16쪽

지금 진도에 `사실`은 차고 넘치나 `진실`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사이 나는 망가진 문법더미 위에 앉아 말의 무력과 말의 무의미와 싸워야 했다. 어떤 말도 바다 속에 가 닿을 수 없고, 어떤 말도 바로 설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납득시킬 만한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마냥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2년 전 이자영씨를 떠올리며 내가 가까스로 발견해낸 건 만일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 `바깥`에 서느라 때론 다리가 후들거리고 또 얼굴이 빨개져도 우선 서보기라도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 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김애란) - 18쪽

어른들이 만든 원 바깥에서 그네를 타고, 모래성을 쌓으며 뭐라 외치고 웃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모든 게 마치 전생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순간 상복을 입은 내가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 중 하나가 `삶의 생생함`이라는 걸 깨달았다. 슬픔 속에 숨기려 해도, 환멸 안에 감추려 해도, 냄새처럼 기어코 드러나고야 마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의 그 `어쩔 수 없는 선명함`이었다. (김애란) - 19쪽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협력하는 한,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 진실은, 우리가 경제 성장이라는 분칠 속에 감춰둔 한국사회의 민낯일지도 모르겠다. 이 민낯을 마주 대하는 건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어차피 내가 아는 한, 한국사회는 원래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혹은 안일하게도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그 얼굴이 점점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한 것만은 부끄럽다. 그건 나이가 든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 그런 착각을 했던 것일까? 그건 진보에 대해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 - 38, 39쪽

과연 역사는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는가? 말했다시피 이건 나이가 든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지혜로워진다는 것만큼이나 거대한 착각이다. 인간은 저절로 나아질 수 없고, 그런 인간의 역사 역시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가만히 놔두면 인간은 나빠지며,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즉 진보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거가 더 낫게 미래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반 일리치는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김연수) - 40쪽

세월호는 애초부터 사고와 사건이라는 두 개의 프레임이 겹쳐진 참사였다. 말인즉슨 세월호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이제 이 두 장의 필름을 분리해야 한다. 겹쳐진 필름이 이대로 떡이 질 경우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프레임, 즉 `세월호 침몰사고`로 기억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아직도 이 타이틀을 쓰고 있다. 별다른 오류가 없어 보이지만 여기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함정이 있다. 명사는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를 `사고`로 인지하기 마련이다. 사소한 문제인 듯하나 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박민규) - 56쪽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사전적 해석을 빌리자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 반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의미하는데 거기엔 또 다암과 같은 해석이 뒤따른다. 주로 개인, 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며 범죄라든지 역사적인 일 등이 이에 속한다. 그렇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교통사고를 교통사건이라 부르지 않으며, 살인사건을 살인사고라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월호 사고와 세월호 사건은 실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나는 후자의 비중이 이루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박민규) - 57쪽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교통사고 사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같은 방식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없다. 손써볼 사이도 없이 발생한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이들을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괴로워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어가는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이 엉망진창인 시스템을 방치한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몸서리치는 것이다. (진은영) - 73, 74쪽

이번 지방선거와 이어진 보궐선거에서 `도와주세요`나 `살려주세요`라는 구호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오고간다. 지독하게 퇴행적인 선거 구호라는 논평들이 지배적이었다. 저들은 침몰하는 배 안에서 그토록 살려달라고 외쳤던 아이들의 간절한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저런 구호가 전략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지 의아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가지 구호 모두 결과적으로 효과가 있었다. 선거 결과를 구호의 효과로만 볼 수는 없겠지만, 참사의 책임을 묻는 심판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구호들이 부정적 효과를 내지 않고 선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참 놀라운 일이다. (진은영) - 77쪽

그러나 그런 연설들이 성공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 편만한 시혜의 에토스이다. `도와주세요`와 `살려주세요`는 그런 에토스를 환기시키는 강력한 언설들이다. 그 언설들을 통해 선거는 거룩함을 획득한다. 우리는 그저 한 표 행사할 뿐이지만 그 단순한 행위로 천사가 될 수 있다. 참사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눈물만 흘리는 한 여인을 돕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또다른 여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천사 말이다. 싸우고 항의하고 따져 물어야 하는 순간에 임재하여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천사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소거한다. (진은영) - 77, 78쪽

선거는 우리를 대신하여 발언하고 활동할 정치인들을 뽑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제대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살려달라며 약자 코스프레를 하는 정당에 안됐다고 한 표 던지는 유권자들이 그 정당이 이후에 자신들의 뜻을 대리해줄 거라고 믿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으로 자신을 대리할 사람을 뽑는 활동이 아니라면 이것을 가장 직접적인 활동으로 만드는 방식은 선거 자체에서 가장 극적인 효과를 만들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선거 국면에서 약자로 자처하는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계층적 이해관계에 반하는 어리석은 정치적 선택을 하고 있따고 보이는 유권자들이야말로 실제로는 직접적 정치활동의 욕망에 가장 충실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진은영) - 80쪽

여당이든 야당이든 불쌍해서 뽑아주는 투표 행위는 실제로 자신들의 진정한 대리자를 선출한다는 유보적 방식(사실 우리가 뽑은 이들이 우리를 제대로 대리할지의 여부는 미래로 유보되어 있다) 대신에 직접적 활동의 기쁨을 가장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선거의 장을 만들어가려는 시도이다. 즉 당선시킴으로써 우리는 더이상 불확실한 미래로 유보되지 않는 완결된 활동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진은영) - 80, 81쪽

세월은 돌이킬 수 없게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나 역시 그 세계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른들을 향해서, 당신들의 세계를 왜 이렇게 만들어버렸습니까, 라고 묻는 입장이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황정은) - 93쪽

그들은 그 순간에 그렇게 하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고 그대로 했을 것이다. 명령에 따랐을 것이다. 기울어진 선실에 머물고 있는 수백 명 목숨들에 관한 질문도 없이, 내가 이렇게 해서 정말 괜찮은 걸까, 라는 자문도 없이. 그런데 이것은 왜 이렇게 낯이 익나. 질문 없는 삶, 상상하지 않는 삶, 무감한 삶. 총체적으로 그런 삶에 익숙한 삶, 말하자면 살아가는 데 좀더 편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 (황정은) - 94쪽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
나는 그것을 듣고 비로소 내 절망을 돌아볼 수 있었다. 얼마나 쉽게 그렇게 했는가. 유가족들의 일상, 매일 습격해오는 고통을 품고 되새겨야 하는 결심, 단식, 행진, 그 비통한 싸움에 비해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것, 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다 같이 망하고 있으므로 질문해도 소용없다고 내가 생각해버린 그 세상에 대고, 유가족들이 있는 힘을 다해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공간, 세월이라는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말하자면 내가 이미 믿음을 거둬버린 세계의 어느 구석을 믿어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뭘 할까.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세계와 꼭 같은 정도로 내가 망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황정은) - 96, 97쪽

세상은 신의 노여움을 잠재울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하는 게 아닐 것이다. 세상은 분명 질문에 대답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질문하는 사람 자리로 슬쩍 바꿔 앉는 순간에 붕괴될 것이다. (배명훈) - 113쪽

세상은 그렇게 역설적이다. 경쟁을 더 잘할 것 같은 사람들이 "이제 경쟁 좀 덜해도 되는 사회로 바꿉시다!"하고 외치고, 진짜 경쟁에 돌입하면 금세 나가떨어질 것 같은 사람들이 "이 빨갱이들이 무슨 소리야, 자유경쟁이 최고지!"하면서 그들을 매도하기도 한다. "너는 살 만하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나는 당장 이거라도 해야겠다"는 질타를 몇 차례 듣다보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공공재를 제공하겠다는 각오가 금세 무색해져버리기도 한다. (배명훈) -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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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씽 The One Thing -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단순함의 힘
게리 켈러 & 제이 파파산 지음, 구세희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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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겨울 때면 무언가 위로가 되거나 새로운 다짐을 줄 수 있는 꺼리들을 찾기 마련이다. 이런저런 일과 사람들에 둘러싸여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도 모르는 평범한 직장인들에게는 새해의 시작(1월), 진짜 새해의 시작(2월), 업무의 시작(3월)이라는 분기 한 번을 보내고 나면, 그러한 위로나 다짐이 더욱 간절할 것이다. 그래서 찾은 책이 <(더) 원씽>이다.


우리는 흔히 성공에 이르기 위해서는 탁월한 능력을 길러 다방면의 업무를 수행해내고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하여 마침내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가도로 나아가는 것을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가장 중요한 '단 하나'를 찾아서 그것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성공의 요인이라고 한다(물론 그 단 하는 독자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마치 제대로 된 하나를 밀면 그보다 큰 도미노를 연속적으로 넘어뜨릴 수 있는 도미노 효과처럼 핵심을 파악하고 그것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그걸 누가 몰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핵심을 찾기 위해서는 "모든 일이 다 중요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자신이 일에 대해 갖고 있는 초점을 가능한 한 좁혀야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통념과는 사뭇 다르게 느낄 수도 있다. 


저자에 따르면, 많은 일을 벌여 놓게 되면 오히려 작은 일 하나도 성공하지 못한 채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겨우 해내다가 길을 잃고 만다. 따라서 핵심을 찾고 그 외의 것은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는 마이너스(-)적 태도가 필요하다. 핵심에 관한 내용을 지속적으로 숙달하고 이것을 습관화 할 때 성공의 파급력은 더욱 확대된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성공에 관한 몇가지 통념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시도하는데, 예를 들면 멀티태스킹은 능력이 아니라,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망칠 기회"에 지나지 않으며(멀티 능력이 떨어지는 나는 이 대목이 매우 반가웠다), 성공을 위한 철저한 자기관리라는 허상에 주눅들 것이 아니라 습관을 만들 수 있는 66일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한다. 의지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의지가 계속될 수 있도록 관리가 필요하며, 일과 삶의 균형을 찾을 것이 아니라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삶의 시간은 반드시 확보하고, 점진적 사고가 아니라 크고 대담한 생각을 시도하라는 것이다.


성공의 의미는 물론 개인마다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성공을 위해 일하다보면 그것은 내 자신의 착각일 뿐, 오히려 성공을 방해하는 많은 업무와 관계들로 인해 내가 무엇을 원했던 것인지를 잊고 살기도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 기회에 시간을 내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단 하나에 초점을 맞춘 삶, 그 외의 것들은 기꺼이 거절할 수 있는 삶, 핵심에 접근하여 그것을 이루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원하는 일이 어떤 것이든 최고의 성공을 원한다면 접근방법은 늘 같은 방식이어야 한다. 핵심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파고든다는 것’은 곧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모든 일을 무시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모든 일의 중요성이 똑같지 않음을 인식하고, 가장 중요한 일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이 ‘원하는’ 일을 연결 짓는 아주 단호한 방식이기도 하다. 탁월한 성과는 당신의 초점(focus)을 얼마나 좁힐 수 있느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 18쪽

자신의 일과 삶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 내려면 최대한 파고들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커다란 성공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고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달력과 할 일 목록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성공은 점점 더 멀게만 느껴지고 결국 보잘것없는 결과에도 만족하고 마는 일이 생기게 된다. 이들은 소수의 몇 가지 일을 잘해낼 때 커다란 성공이 온다는 것을 모르고,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애쓰다 길을 잃는다. 결과적으로 너무나도 적은 일을 해내는 데 그친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대치는 점점 낮아지고, 꿈을 포기하며, 삶 자체가 움츠러든다. 하지만 핵심을 파고들면 상황은 달라진다. - 18, 19쪽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그것을 너무 넓게 펼치려 애쓰다 보면 노력은 종잇장처럼 얇아진다. 사람들은 일의 양에 따라 성과가 점점 더 쌓이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하려면 ‘더하기’가 아닌 ‘빼기’가 필요하다. 더 큰 효과를 얻고 싶다면 일의 가짓수를 줄어야 한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하려다 보면 처음엔 그렇게 하는 것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것도 줄이지 않은 채 일을 자꾸 더하기만 하면 결국엔 부정적인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다. - 19쪽

핵심은 오랜 시간이다. 성공은 연속하여 쌓인다. 단, 한 번에 하나씩이다. - 26쪽

파레토는 우리에게 매우 뚜렷한 방향을 제시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 중 대부분은 당신이 실천하는 몇 개의 일에서 비롯될 것이다. 남다른 성과는 생각보다 훨씬 적은 수의 행동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숫자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파레토의 이론은 불평등을 기초로 한 것이고, 이것이 80/20이라는 비율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상황에 따라 비율은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다. 90/20, 성공의 90퍼센트가 20퍼센트의 노력에서 나올 수도 있고, 70/10나 65/5가 될 수도 있다. 단 이 비율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같은 원칙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주란의 통찰이 훌륭한 이유는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는 데 있다. 어떤 일들은 다른 일들보다 중요하다. - 51, 52쪽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적은 자기통제력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성공은 옳은 일을 해야 얻는 것이지, 모든 일을 다 제대로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을 이루는 비결은 올바른 습관을 선택하고 그것을 확립하기에 필요한 수준만큼의 통제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이 습관이 삶의 일부가 되면 당신도 남의 눈에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당신 스스로는 그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 75쪽

당신의 습관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준다. 당신이 얻는 성취는 한 번의 행동(action)이 아닌 삶에서 만들어진 습관(habit)에서 나온다. 애써 성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선택적 집중의 힘을 이용하여 올바른 습관을 들여라. 그러면 탁월한 성과가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 80쪽

중요한 것은 중심을 잡느냐 잃느냐가 아니라 ‘짧게 가느냐, 길게 가느냐’이다. 개인적 삶에서 중심이 흔들리는 경우라면 간격을 짧게 두고 수시로 중심을 잡아라. 짧게 가면 가장 중요한 모든 것들과 관계를 잃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함께 움직여 나갈 수 있다. 직업적인 살에서는 오랜 기간 활동하면서, 탁월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불균형 상태를 유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길게 가면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다. 개인적 삶에서는 버리고 가는 것이 없게 하고, 반대고 직업적 삶에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 110, 111쪽

내가 배운 성공의 핵심은 이렇다. 삶의 매순간마다 가장 적합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떳떳하게 "여기가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이고, 나는 내가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의 삶 속에 숨어 있는 모든 훌륭한 가능성들이 현실이 될 것이다. - 133쪽

1. "당신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
2. "그 일을 함으로써"
3. "다른 모든 일들을 쉽게 혹은 필요 없게 만들"(바로 그 일은 무엇인가?) - 142쪽

미국심리학협회의 전 회장인 마틴 셀리그만 박사는 우리의 행복에 다섯 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다. 긍정적인 감정(positive emotion)과 기쁨(pleasure), 성취(achievement), 인간관계(relationships), 참여(engagement), 그리고 의미(meaning)이다. 이 중에서도 그는 참여와 의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우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 줄 방법을 찾아 거기에 더 몰입하면 할수록 오랫도록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하는 행동이 더 큰 목적의식을 충족시킨다면, 가장 강력하고도 오래 지속되는 행복이 가능해질 것이다. - 180, 181쪽

시간을 내어 쉬어라. 긴 주말과 긴 휴가를 따로 떼어 두고 그것에 맞춰 쉬어라. 그러면 전보다 에너지를 회복하여 더 여유롭고 생산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원활히 기능하려면 휴식 시간이 필수적이고, 당신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쉬는 것은 일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 208쪽

최고의 성과를 올리는 사람들을 코치할 때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단순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겁니까?" 그들을 골탕 먹이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이 질문이 나오면 사람들은 언제나 당황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이룰 수 있는 최고 수준까지 노력하지는 않고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나 행동 방식에 변화를 일으킬 마음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의 경지에 이르는 길은 그냥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노력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 확보하기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려면 자신의 일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것을 나는 ‘도전(entrepreneurial)에서 목적의식(purposeful)으로의 이동’이라고 부른다. - 225, 226쪽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 부탁을 해오면 ‘아니오’를 1000번쯤 한 후에 ‘예’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말이다. 젊은 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이 그것보다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집중하려고 할 때 자꾸 방해를 받는 것도 문제지만, 목표 지점에 이르기도 전에 자꾸 다른 길로 빠지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자신이 정해 놓은 시간을 보호하고 생산성을 유지하려면 당신을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사람이나 사물에 반드시 거부 의사를 밝혀야 한다.
동료들은 당신에게 조언과 도움을 청할 것이다. 팀원들은 당신을 자기 팀에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친구들은 무언가를 도와 달라고 할 것이다. 낯선 사람들도 당신을 찾는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으로부터 각종 초대장과 방해가 날아든다. 이 모든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단 하나와 궁극적으로 원하는 성과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진다. - 240쪽

무언가에 대해 ‘예’라고 말할 때는 무엇을 거절하는지에 대해서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 시드니 하워드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의 절반은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결국 크게 성공하는 가장 좋은 길은 파고드는 것이다. 그리고 파고들 때에는 다른 일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순간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다. - 241쪽

몸속의 에너지를 잘 지키지 못해 미래의 힘을 자꾸 빌려 쓰게 되면 천천히 연료가 다 떨어져 버리거나, 너무 빨리 망가지고 마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어디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단 하나의 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은 일을 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런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효과가 떨어지게 되므로 결국 자기 자신과 끔찍한 거래를 맺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바로 자신의 건강을 희생하는 대가로 성공을 얻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늦게까지 일하고, 식사를 거르거나 대충 먹고,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건강과 가정생활을 희생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생각에만 빠진 그들은 자기 몸을 해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지만 그런 도박은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당신이 향후 한가한 시간에 느긋하게 즐길 수 있을 때까지 건강과 가정생활 두 가지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 큰 오산이다. - 248쪽

출근해서는 자신의 단 하나를 위해 일하라. 당신도 나와 같다면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끝내야 할 몇 가지 업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일들을 처리할 시간으로 최대 한 시간 정도 투자하라. 어정거리지도 말고 속도를 늦추지도 마라. 깔끔히 해치운 다음 곧장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시작하라. 정오쯤에는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먹고, 퇴근하기 전까지 처리할 수 있는 다른 모든 일에 주의를 집중하라.
마지막으로 퇴근한 뒤 잠들 시간이 되면 최소한 여덟 시간은 숙면을 취하도록 한다. 강력한 엔진은 다시 가동되기 전에 열을 식히고 충분히 쉴 시간이 필요하다. 당신도 다를 바가 없다. 정신과 신체가 푹 쉬고 재충전하여 다음 날 더욱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잠을 자야 한다. - 250쪽

사고의 한계를 높이면 삶의 한계 역시 넓힐 수 있다. 더 큰 삶을 상상할 때에만 큰 삶을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
문제는 최대한 큰 삶을 살려면 생각만 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데 필요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다른 성과를 얻으려면 단 하나를 파고들어야 한다.
초점을 최대한 작게 맞추면 사고가 단순해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뚜렷하게 보인다. 얼마나 크게 생각하든, 거기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려면 언제든 작은 초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259, 260쪽

행동은 행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습관은 습관 위에 쌓인다. 성공도 성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제대로 세운 도미노는 그다음 것, 그리고 그다음 것을 연달아 넘어뜨리게 되어 있다. 그러니 남다른 성과를 원할 때마다 도미노 넘어뜨리기를 시작하게 할 바로 단 한 가지의 행동을 찾아라. 커다란 삶은 연쇄 반응의 물결을 타고 만들어진다. 성공을 목표로 할 때 중간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바로 결론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 남다른 성과는 그런 식으로 창출되지 않는다. 당신이 매일, 매주, 매달 그리고 매년 단 하나를 위해 살 때 축적되는 지식과 가속도가 곧 남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일어나는 법이 없다. 당신 스스로가 일어나게 만드는 방법 외에는. - 260,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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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 행복지수 1위 덴마크에서 새로운 길을 찾다 행복사회 시리즈
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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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먼 남의 나라의 부러운 이야기를 읽게 된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 지쳐가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최근 읽었던 <행복의 기원>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책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둘 사이는 그저 막연한 단어인 '행복'으로만 연결이 되어 있을 뿐이지만 서점에 들러 진열된 책들을 보며 '행복의 다른 차원'을 고민하기 위해서라면 이 책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구매했다. 


행복의 다른 차원? 

<행복의 기원>이 인간 개체이자 개인이 어떤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며 그 행복이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 책이라고 한다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는 사회적인 체제나 시스템이 어떻게 다수의 시민에게 행복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검토한 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아니며, 왜 같은 인간인데 우리는 스스로가 살고 있는 사회를 '헬조선'이라 칭하며 절망하는 한편, 덴마크는 자타가 행복하다고 공인하는 1위의 국가가 되었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질문을 바꾸어 '우리는 왜 불행한가?'를 생각해면 어떨까. 

어릴 때부터 주어지는 경쟁적인 환경을 보자. 명문대학이라는 목표를 위해 개인의 특성은 모두 배제된 채 공부를 잘 하는지, 성적이 좋은지에 따라 평가를 받게 된다. 과장해서 말하면 '수능성적'이 남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당연히 초중고 학생들에게는 무엇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예전에는 공부만 잘하면 됐다. 그런데 이제는 부모로부터 제대로 지원을 받지 않고서는 그나마도 힘들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점 관리에 어학 연수에 토익 성적을 관리하며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고시를 준비하며 기한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직장, 힘들게 합격한 공직, 그 어디도 안정적이지 않다. 그러면서도 흘끔흘끔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산다. 내가 남보다 얼마나 앞서 있는지 혹은 뒤쳐져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차이를 넓히거나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덴마크 사회를 방문하고 그들의 삶에 깃든 생각과 체계들을 분석하여 덴마크가 행복한 이유에 대한 6개의 핵심요소를 뽑아냈다: 자유, 안정, 평등, 신뢰, 이웃, 환경이 그것이다. 

(임의로 순서를 조금 바꾸어 설명하면) 덴마크 사람들은 직업이 무엇이든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다(평등). 따라서 공무원이나 판검사, 의사를 부러워하지도 않으며 그런 직업을 가져야 할 유인도 없다. 이 때문에 덴마크 사람들은 스스로 좋아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자유). 따라서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하여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심지어 고등학교 진학 전에 1년간 '인생학교'에 가서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 이런 자유는 사회가 언제나 개인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안정'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안정은 덴마크 성인들이 월급의 50% 가까이 내는 세금을 통하여 마련되고, 신뢰는 좌파이건 우파이건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은 유지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유지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거두어들인 세금을 제대로 활용한다는 믿음과 실제 그 혜택을 받은 이들은 자신이 받은 혜택을 미래세대도 동일하게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꺼이 비용을 감수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유대와 연대가 가능하다(이웃). 이러한 유대감은 인간이 아닌 환경에 대해서도 확장되는 듯하다. 자전거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자전거가 많고, 원자력 발전이 아닌 재생에너지를 통하여 에너지를 자급하는 나라가 덴마크다.


물론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덴마크도 처음부터 복지국가였던 것이 아니라 우리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상황이 안좋은 나라였음을 안다면 그런 간단한 핑계는 댈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이번에야 알았다. 전쟁을 통하여 독일과 노르웨이에 국토를 빼앗기고 척박한 토양에서 우리나라의 경상도 크기만 남은 이 나라는 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안으로의 발전을 추구했다는 것을. 이를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의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농촌에서부터, 아래에서부터 변화의 움직임을 일구어 내기 시작한 것을. 이를 통하여 덴마크는 노동자-경영자-정부라는 골든 트라이앵글이 신뢰를 기반으로 확고히 마련되었으며, 경영의 효율을 추구하지만 개인의 안정을 담보할 수 있는 시스템을 통하여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였고, 경쟁없고 자유로운 교육을 통하여 학교에서 배우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상과 사례를 접하고 나니 막연한 부러움 보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뒤를 잇는다.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나와 같은 개인은 아무 힘도 없는 존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나와 내 가족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주변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변화를 욕망하는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행복의 기원>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는 것도 행복일 수 있지만, 이 구체적 한 장면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장면을 연출하기 까지의 내 삶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할 것이다. 구체적인 행복을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사회가 어떻게 변하면 좋을지, 행복에 대하여 조금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개인을 넘어선 시민/국민의 입장에서도 고민해볼 일이다.

"한 번도 아들이 판검사나 의사나 교수가 되길 바라지 않았어요. 열쇠 수리공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필요하고 의미 있는 직업입니까?"
덴마크에 가기 전에 만난 한국의 한 대기업 간부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아들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비로서 참 부끄럽다"라고 했다. 또다른 나의 지인은 직업이 의사인데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기가 죽는다. 그는 아들이 자신처럼 명문대를 나오지도 않았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아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페테르센은 고등학교 동창회 자리에서도 자신이 식당 종업원이고 아들이 열쇠 수리공이라는 사실을 떳떳이 이야기한다고 한다. 아들이 자랑스러운 덴마크 웨이터와 아들이 못마땅한 한국 의사, 누가 더 행복할까? 이것은 부자 관계의 차이가 아니라 노동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 29쪽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죠. 그게 돈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 큰아들은 요리사가 되고 싶어 해요. 큰딸은 쇼핑몰 판매원이죠. 작은딸은 병원에서 일하게 될 것 같고요.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직업을 선택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어요. 부모의 선택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선택이어야 하니까요. 부모가 특정 직업을 강요해서 그걸 선택했는데, 나중에 그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삶이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자기가 하는 일이 즐겁지 않다면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밀보는 자신에게도 자녀들에게도 세속적 가치 기준에서 자유로운 듯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까? 문득 덴마크에서 만난 초등학교 교장의 말이 떠올랐다. 덴마크에서는 초등학생 때부터 즐거운 일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성적이나 등수로 비교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도록 교육한다. 밀보와 초등학교 교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덴마크는 학교에서 배운 것이 사회에서도 통하고 있다. - 36쪽

"덴마크는 불평등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공립학교에 보내는 것은 무료지만 사립학교는 돈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부모가 자식을 사립학교에 보내고 싶으면 학비를 정부에서 대줍니다."
`불평등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상대적으로 고액 연봉자들인 이 회사의 간부와 직원들은 월급의 50퍼센트 정도를 세금으로 내는데도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그 세금으로 덴마크가 행복사회로 자리 잡은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엑스트란올센이 말했다.
"우리가 세금을 내기 때문에 덴마크는 걱정 없는 사회가 된 겁니다. 나뿐 아니라 내 친구들이, 그리고 내가 모르는 우리의 이웃들이 평생 병원비를 걱정하지 않고 진료받으며 건강을 돌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 - 50쪽

덴마크 경영자들은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기업하기 좋은 환경에서 사업을 한다. 사업이 계획보다 잘 안되면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그런데도 덴마크 노동자들의 직장 만족도는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70퍼센트 가까이 된다. 덴마크는 어떻게 두 마리 토끼 잡기에 성공했을까?
그 비결은 유연안전성(flexicurity)이다.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전성(security)을 결합한 이 용어는 두 마리 토끼 잡기에 성공한 덴마크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조어다. 기업에는 노동자의 채용과 해고에서 유연성을 보장하고, 동시에 노동자들에게는 안정된 소득과 고용을 보장한다는 뜻이다. - 67쪽

덴마크의 유연안전성 시스템은 이렇듯 노동자와 경영자가 통 큰 양보를 주고받았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노동자와 경영자 사이에 이런 신뢰가 가능했던 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인 ‘신뢰받는 정부’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노사 간 신뢰에 강한 접착제 역할을 한 것이다. 정부 역할의 핵심은 시장에서 일시 탈락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다시 시장으로 진입하게 하는 일이다.
정부는 실업자에게 직업을 찾을 때까지 생활 자금을 지원해준다. 현재 법적인 실업보조금 지급 기간은 2년이다. 처음 1970년대에는 기한이 없었는데 차츰 9년, 7년, 4년, 2년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실업자들이 직업을 찾고 일정한 수입이 생길 때까지 정부와 사회가 도와준다는 기본 정책은 이어지고 있다. - 70쪽

덴마크 사회의 직업안정성은 직장인들을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눅 들지 않게 만들고, 이것은 다시 도전 정신의 확대로 이어진다. 헤넬리오위츠는 이러한 ‘선순환 효과’를 주목했다.
"덴마크 직장인들은 방어적이지 않습니다. 지금의 내 직장을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능력과 실력을 키워서 더 좋은 곳을 찾아야겠다고 공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문화는 당연히 경영자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사원들의 대우를 개선해서 떠나지 않게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교. 그러니 직장과 업무 환경을 개선하는 선순환 효과가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 78쪽

신뢰는 연속성에서 나온다. 진보에서 보수로, 보수에서 진보로 정권이 바뀌어도 노동자-경영자-정부의 ‘황금 삼각형’, 즉 신뢰의 체인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덴마크의 현대사는 진보파인 사회민주당이 주로 집권했지만 1968~1971년, 1982~1985년 등 드문드문 보수파가 권력을 잡았으며 특히 2001년부터 2010년까지는 연속 두 차례 보수정당 연합이 집권했다. 이때 실업보조금 지급 기간이 단축되고 실업자의 취업 노력 강제가 더 엄격해지긴 했지만 실업안전망 자체에 대한 기본 정책은 유지되었다.
왜 그랬을까? 실업안전망으로 대변되는 사회복지는 덴마크 사회에서 정책이 아니라 문화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이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뤄지면 그것은 탄탄한 문화가 된다. 그만큼 신뢰가 견고해진다. 이렇게 형성된 문화와 신뢰는 여와 야를 초월한다. 만약 이것을 깨려고 드는 당이 있다면 선거에서 패배를 예약하는 셈이다. - 82쪽

신뢰는 현실적 이득을 체험하면서 생긴다. 덴마크 국민들이 정부를 신뢰하고 높은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다면 ‘황금 삼각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덴마크 국민들의 조세 및 사회보장기여금 부담률은 2011년 기준 47.7퍼센트로 OECD 평균 34.1퍼센트보다 높고 우리날 25.9퍼센트의 두 배에 가깝다. 월급을 타면 절반은 세금으로 낸다는 뜻이다. 이 세금으로 덴마크 정부는 실업보조금 등 사회안전망을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이 없었다면 노동시장에서 유연안전성이란 말은 성립되지 못했으리라.
그렇다면 덴마크 국민들은 왜 월급의 절반가량을 기꺼이 세금으로 낼까? 실업하면 실업보조금을 받고 대학까지 공짜로 다니고 병원비가 평생 무료이기 때문이다. 내가 낸 세금을 정부가 제대로 쓰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증세에 저항감이 높은 이유는 ‘세금이 준 혜택’을 국민들이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이명박 정부처럼 22조 원이나 되는 세금을 멀쩡한 강을 죽이는 ‘4대강 사업’에 쏟아붓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 세금이 일부 대기업 건설업자들의 배만 불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 83, 84쪽

"덴마크인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평등이라고 할 수 있어요. 평등이 행복의 모든 요소들과 연결되는 것 같아요. 서로 평등하면 특별히 남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해서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잖아요. 남보다 잘되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없죠. 여기서는 의사나 청소부나 큰 차이가 없어요. 서로 어울려 등산과 스포츠를 함께 즐기고 비슷한 삶을 살아요. 의사를 그냥 친구처럼 이름으로 부르죠. 심지어 경찰관이나 공무원을 부를 때도 이름을 불러요." - 96쪽

덴마크의 협동조합은 출발부터 철저히 민간 주도로 이뤄졌다. 정부에서는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다. 초창기 낙농 협동조합이 한창 발전할 때 정부에서는 왕립 농업대학이나 농업연구소를 통해 관련 기술을 간접적으로 지원했을 뿐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신기하게도 덴마크엔 협동조합법이 없다.
협동조합의 천국에 협동조합법이 없다니, 처음에는 선뜻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거듭 확인했는데 정말 없었다. 조합원들끼리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총회에서 만든 정관만으로도 모든 일을 결정하고 운영할 수 있으니 굳이 국가가 나서서 법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샤를로테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이런 사실에 당황스러워한다고 말했다. 일찍이 1920년대에 일본에서 덴마크 협동조합을 배우자는 붐이 일었다는데, 이때 시찰단으로 덴마크에 파견된 한 공무원도 여기저기 아무리 뒤져봐도 협동조합법을 찾지 못해 난감해했다고 한다. - 120쪽

덴마크 사회는 기본적인 사회복지가 잘되어 있고 빈부격차도 크지 않은데 왜 스반홀름 사람들은 이런 특별한 공동체에서 살아갈까? 이곳에 오면서 품었던 핵심 질문에 대해 린드블래드는 미국 사회와의 비교를 예로 들었다.
"과연 미국에서 이런 실험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큰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할 겁니다. 건강보험, 실업보조금 등 사회복지가 제대로 안되어 있으니 실패하면 타격이 크죠. 그런데 덴마크는 병원비가 평생 무료고 교육비도 대학까지 무료고 실업보조금도 2년 이상 나올 정도로 여러 기본 복지 제도가 잘되어 있잖아요. 실험을 하다 실패해도 괜찮은 거죠."
스반홀름 창립 멤버 레고르가 공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점 때문에 나도 대학 졸업 후에 바로 이 길을 선택할 수 있었어요. 실패해도 위험부담이 없으니까요."
사회적 안정이 창의적 도전을 가능케 한다는 말이다. 궁핍, 척박, 고난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 만들어낸 것과는 ‘삶의 질’이 달랐다. - 135, 136쪽

"덴마크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은 기본적으로 아이들끼리 경쟁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8학년부터 시험을 보지만 등수를 매기지는 않습니다. 성적이 좋다고 상을 주지도 않아요. 물론 학생들끼리는 서로 점수를 알 수 있으니까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를 압니다. 그러나 담임교사나 학교가 공부 잘하는 학생을 공개적으로 치켜세우거나 특별히 대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경쟁은 일어나지 않죠."
덴마크에서는 성적 우수상이 아예 없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여러 가지 능력 중 하나이기 때문에 특별히 따로 상을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교사의 애정이 학생들에게 골고루 나뉘어 모든 아이가 저마다의 장점을 칭찬받을 수 있다. - 155, 156쪽

신기한 것은 이렇게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운영되는데도 자유학교의 예산을 정부가 지원한다는 점이다. 학교 운영비의 75퍼센트를 정부가 지원하고 실제 수업료의 25퍼센트만 학부모가 부담하는데, 학부모당 한 달에 우리 돈으로 20만 원 정도다. 자유학교뿐 아니라 덴마크의 모든 사립학교가 동일한 국고 지원을 받는다. 정부가 자유학교와 사립학교에 예산을 지원하는 이유를 아우켄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헌법에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한다’고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죠.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학생들은 꼭 국가가 운영하는 공립학교에 다니면서 의무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자유로운 교육철학과 방법에 의해 배워도 됩니다. 이러한 정신은 그룬트비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186쪽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공립학교가 아니더라도 ‘깨어 있는 시민’을 양성하는 일에 대한 지원 역시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에 학교 운영비의 75퍼센트를 국가가 부담한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 자유학교와 사립학교는 학생 선발권, 교사 선발권, 교과 편성권 등에서 자유를 누리면서도 국가로부터 학교 운영비를 지원받는 독특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 186쪽

"덴마크에서는 모든 학교의 등록금이 무료에요. 대학도 마찬가지죠. 대학에 다니는 동안 정부에서 생활비를 대주니까 아르바이트 부담도 없고요. 독립해서 사는 대학생의 경우 매달 약 6000크로네(약 120만 원)씩 나오거든요. 부모님과 함께 살아도 이 금액의 반절 정도 나오고요."
비싼 대학 등록금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한국에서는 얼마 전부터 반값등록금이 이슈다. 그런데 덴마크에서는 등록금이 아예 무료고, 대학생들에게 생활비까지 지원한다.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의 나라들도 등록금이 없거나 매우 낮지만 생활비까지 지원하진 않는데 덴마크는 학생 복지의 최첨단을 걷고 있는 것이다. - 209쪽

왜 이렇게까지 할까? 학생들이 돈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가난한 학생도 돈 걱정 없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으니 기회의 균등이 완벽하게 보장된다. 교육을 시장에 맡겨두지 않고 시민이 누려야 할 기본 권리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여기 드는 비용은 모두 기성세대가 내는 세금에서 충당된다. 어른들이 많게는 월급의 절반이 넘는 세금을 내기 때문에 이런 대학생 복지가 가능한 것이다. 덴마크의 성인들에게 불만이 없는지 물어보면 늘 한결같은 답이 돌아온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돈 한 푼 내지 않고 생활비까지 받았다. 그런 혜택을 누렸으니 이제 우리 후배들에게도 같은 혜택을 줘야 하지 않겠는가?’ 학생 복지가 대를 이어 문화로 정착돼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209, 210쪽

"행복은 ‘have to(~해야 한다)’에서 나오지 않아요. ‘like to(~를 좋아하다)’에서 나오죠. 의무적으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고 있어요."
그는 덴마크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개개인이 자유롭고 동시에 서로 화합을 잘하기 때문이라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교육비 무료, 의료비 무료 등 기본 사회복지가 되어 있으니까 남의 눈치,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죠. 우리는 부모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어요. 내가 뭘 할까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죠. 나 자신에게만 물으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도다른 이유는 서로 화합을 잘하기 때문이에요. 그룬트비 정신을 지닌 이 학교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토론을 매우 중시합니다. 이런 훈련이 돼 있기에 우리 덴마크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싸우지 않고 토론을 합니다. 그래서 실현 가능한 해법을 찾아내죠." - 225, 226쪽

덴마크를 새로운 나라로 만든 농민학교(자유학교) 운동, 협동조합 운동, 국토 개간 운동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시민의 주체적 참여로 가능했다는 점이다. 국가나 어느 정파나 일부 지식인이 주도하지 않았다. 운동의 과정에서 ‘깨어 있는 농민’들이 탄생했고 세 가지 운동이 서로 어울려 좋은 화음을 냈으며 하나의 운동은 다른 운동을 더 발전시키는 시너지를 냈다. 학교에서 눈을 뜬 농민들은 협동조합과 국토 개간 사업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황무지를 농토로 일구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땀을 흘리며 땅만 가는 것이 아니라 연대의 마음도 함께 갈았다. 또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농토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국토 개간과 협동조합에 참여하다 지치거나 실패하면 다시 농민학교에서 충전하며 새 길을 모색했다. - 259쪽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덴마크를 돌아보며 참 부러웠다. 새로운 나라 만들기가 농촌과 농민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말이다. 오늘날의 덴마크가 신뢰와 연대 속에 유지되고 있음은 바로 그 농촌과 농민의 건강함이 전 사회로 전이되고 있음을 말한다. 현재 덴마크 산업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5퍼센트에 불과하다. 제조업이 24퍼센트, 서비스업이 70퍼센트다. 덴마크는 낙농 선진국이지만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러나 농촌의 공동체 문화, 농민들의 근면과 신뢰의 정신은 현대 덴마크 사회에 깃들어 있다. - 260, 261쪽

다른 한편으로 농촌의 아들로서 부끄러웠다. 우리 농촌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려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청년들은 죽어가는 농촌을 뒤로 하고 서둘러 도시로 떠났다. 마을에 아기 울음소리가 그치더니 초등학생이 사라지고, 중고등학생이 사라졌다.
서울로 간 그 많은 농촌 청년들은 어떤 마음을 품었던가? 나도 그랬지만 고향을 떠나는 순간부터 농촌의 앞날에 대한 걱정은 깨끗이 접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기억을 지워버리면서 ‘우리’까지 없애버렸다. 나 한 명의 출세로 우리 한 가족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농촌사회를 어떻게 살릴지 고민하지 않았다. - 261쪽

덴마크에서는 우파 정당마저 사회적 연대에 바탕을 두고 탄생했다. 벤스트레의 중심에는 농민이 있었고 그들은 그룬트비 학교의 학생이었으며 협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 자유와 평등을 체화한 깨어 있는 시민이었다. 출발선부터 그들은 대지주 등의 기존 특권 세력에 저항하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지금은 중도우파의 노선을 걷고 있지만 과거의 역사와 정신이 살아 있기에 ‘사회적 연대’를 철학적 기반으로 하는 사회복지 정책의 초당적 협력이 가능한 것이다.
벤스트레는 당시의 시대정신과 맞았기 때문에 1901년 처음 집권을 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산업화가 진행되고 도시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사민당을 만들자 벤스트레는 그들에게 좌파의 자리를 내주고 상대적으로 중도우파가 되었다. - 274쪽

벤스트레는 1924년부터 사민당에 집권당 자리를 내준 이후 20세기의 대부분을 야당으로 보냈으며 가끔씩 집권을 했다. 그러나 야당일 때나 집권당일 때나 사민당이 주도한 사회복지 정책의 필요성과 핵심 정책에는 뜻을 같이 했다. 특히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연속 2회 집권했을 때도 사민당의 사회복지 정책을 보수적으로 다소 ‘개혁’했을 뿐 기본 틀을 크게 바꾸지는 않았다. 이런 역사가 있기에 덴마크 우파는 못 가진 자, 덜 가진 자를 향한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덴마크는 지구 상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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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의 모험 - 당신이 사랑한 문구의 파란만장한 연대기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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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치고는' 필기구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교보문고에 가면 꼭 핫트랙스에 들러 새로운 연필이나 펜을 조금씩 사 모으곤 한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부터 이런 증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옆에 앉은 친구의 낯선 연필이 있으면 내 것 두 개를 주고서라도 바꾸어 써보곤 했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는 증상이 훨씬 더 심해져서 교과서에 싸인펜으로 표시를 할 때 빨간펜으로 밑줄 긋고 파란펜으로 설명을 달고 형광펜으로 키워드를 칠하고 초록펜으로 선생님이 강조한 부분 동그라미를 쳤었다. 혹시라도 잘못 표기하면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를 잘 했느냐는 별개로) 아무튼 문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보고 싶은 매력적인 제목과 표지의 책을 만났다.


아무래도 필기구의 연대기를 다룬 책이라서 그런지, 사실과 인물,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풍문에 의해 고착화된 이야기에 대해 그것은 '사실이 아님'을 밝히는 대목이 꽤 많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보험설계사인 워터맨의 만년필에서 잉크가 새서 바로 고객과의 계약을 못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과 고흐, 피카소, 헤밍웨이 등 유명인들이 아꼈다던 노트가 사실은 (진짜) 몰스킨이 아니었다는 이야기, 또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블랙윙 연필이 원래의 블랙윙이 아니라는 이야기 등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사실을 파해쳐 그 진위를 밝히는 저자의 노력은 '연대기' 저술자로서 정확한 사실을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무척이나 대단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이런 이야기들은 '낭만적인' 스토리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도 든다. 난 아직도 내 만년필을 보며 계약을 따내지 못해 망연자실한 워터맨이 만년필을 바라보며 '절대로 잉크가 새지 않는 만년필을 만들겠어'라고 다짐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들과 더불어 만년필 촉, 볼펜의 볼, 연필의 흑연, 스테이플러 심과 같이 내가 소비자이자 사용자로서는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필기구에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고민들이 많이 녹아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책의 중반까지 서술된 내가 알고 있는 워터맨 만년필이나 빅 볼펜, 스태들러와 파버카스텔 연필, 블랙윙 602, 더웬트 연필깍지 같은 것들은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는데, 나머지 알지 못하는 필기구나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기는 품목들(지우개, 스카치테이프, 수정테이프, 클립, 스테이플러)의 설명은 다소 지루한 면도 있었다. 이런 나의 편향된 관심 영역에 상관없이 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최대로 풀어놓았다. 이 책을 단순히 개인의 에세이를 넘어선 문구에 대한 연대기라 칭할만한 이유이다. 중반 이후 부분은 훑어 넘기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여기에 나오는 문구들을 다 알고 있다면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인데, 나도 내가 사용한 문구의 일대기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초등학교때 사용하던 캐릭터가 그려진 문화 연필이나 점보 지우개,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쓰기 시작했던 제도 샤프, 중학생 때 사용하던 모나미 볼펜, 플러스펜, 파이롯트 볼펜, 톰바우 연필, 펜텔 젤러펜, 대학생이 되어 쓰게 된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만년필, 파이롯트 하이텍크 씨, 펜텔 0.3mm 샤프, 사쿠라 겔리롤, BIC 볼펜, 최근 몇 년간 쓰기 시작했던 라미 사파리 만년필, 오로라 만년필, 파버카스텔과 스테들러 연필, 십년이 넘도록 내 책상 한 귀퉁이를 지켜주고 있는 하이샤파 기차모양 연필깎이 까지... 시간 여유가 있는 날, 어지러운 책상 서랍을 열어서 심이 부러진 채 굴러다니거나 어느새 잉크가 말라버린 펜들을 한번씩 정리하며 학창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처음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둘 만년필이 등장한 것은 1884년의 일이었다. 그것은 루이스 에든스 워터맨(Lewis Edson Waterman)이 디자인한 ‘아이디얼(ideal)` 만년필이었다. 1837년 뉴욕에서 태어난 워터맨은 아주 기초적인 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교사, 도서 영업상원, 보험 영업사원 등 여러 작업을 거쳤다. 그가 고성능 만년필을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마지막 직업인 보험 영업사원을 하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고객과 대형 계약을 성사시키고 막 계약서에 서명하려는데 펜에서 잉크가 새는 바람에 중요한 서류에 잉크 얼룩이 크게 번져버렸다. 그가 새 계약서를 준비하는 동안 고객은 가버리고 말았다. 워터맨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의 귀에 솔깃하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거의 전부가 거짓말이다. 빈티지펜스(Vintage Pens)웹사이트를 운영하는 데이비드 니시무라(David Nishimura)는 워터맨 펜 회사(Waterman Pen Company)의 홍보자료를 연구하여 (워터맨이 죽고 20년 뒤인) 1921년 이전에는 잉크 얼룩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 50, 51쪽

지난 1960년대의 우주 경쟁 시대에 나사(NASA)는 큰 문제에 봉착했다. 우주인들은 진공 상태인 우주에서도 잘 쓰이는 펜이 있어야 했다. 나사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래서 150만 달러를 들여 우주 펜을 개발했다.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펜은 시장에서 인기를 약간 누렸다.
러시아인들도 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그래서 그들은 연필을 썼다.

이 이야기는 틀 밖에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 최고의 해결책인 경우가 많다는 것도. 흔히 수평적 사고(lateral thinking)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드 보노(Edward de Bono)가 1999년 자신의 저서 <뉴 밀레니엄을 위한 새로운 사고(New Thinking for the New Millennium)>에 이 이야기를 수록한 이유도 당연히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 74, 75쪽

내 책상 뒤의 가로 8인치, 세로 5인치인 오렌지와 크림색의 색인 카드 상자(이베이에서 산 벨로스 85 제품) 곁에는 작은 검은색 공책 세 권이 쌓여 있다. 이 공책에는 아이디어나 글귀 같은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끼적여두었다. 아마 다시 읽을 일은 절대로 없을 텐데도 보관하고 있다(다시 읽는다고 해도 무슨 말을 썼는지 알아보지도 못하겠지만). 그 공책은 바로 몰스킨(Moleskine)이다. 그렇게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책은 몰스킨 외에 거의 없다. 작고 검은 몰스킨은 거의 종교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허세의 상징으로 조롱받기도 한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나 있는 똑같이 생긴 유명 커피숍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신이 독창적인 사람임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허세적 소도구라는 것이다. 작고 검은 몰스킨이나 희고 납작한 맥북 같은 것들. - 89쪽

몰스킨 공책 안쪽에는 공책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는 작은 안내서가 있다. 몰스킨은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브루스 채트윈(Bruce Chatwin) 같은 유명 인사가 사용한 전설적인 공책의 상속자이자 계승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속자이자 계승자`라는 문구다. 그런데 반 고흐, 피카소, 헤밍웨이, 채트윈이 사용한 공책은 사실 몰스킨 공책이 아니었다. 그저 몰스킨 공책과 비슷한 종류의 공책이었을 뿐이다. - 89, 90쪽

리히텐베르크의 문제 조건을 충족시키는 반쯤 마술적인 비율은 1:(루트)2(대략 1:1.41)다. 이 비율로 만든 종이 한 장을 절반으로 자르면 원래 종이와 똑같은 비율의 종이 두장이 생긴다. 이것이 현대의 A시리즈(A3 용지를 반으로 자르면 A4 용지 두 장이 생긴다)에 사용되는 원리지만 그 기원은 적어도 1000년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볼로냐 점토판에 그려진 네 종류의 종이 규격 가운데 둘은 1:1.42의 비율로서 거의 정확하게 이 비율을 따른다). - 112쪽

리걸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듯이 레터 판보다 큰 8.5X14인치 사이즈는 흔히 법조계와 결부되곤 한다. 1994년 메사추세츠 출신의 토머스 홀리(Thomas Holley)라는 제지 노동자가 종잇조각을 한데 묶어 값싼 필기장을 만들었다. 200년 전 네덜란드 제지업자들처럼 체격이 작지 않던 홀리는 종이 크기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으므로 각 종이를 3인치씩 더 길게 만들고 미국 패드 앤드 페이퍼 회사(American Pad & Paper Company, AMPAD)를 세워 그 필기장을 팔았다. 문구류 세일즈맨인 윌리엄 보크밀러(William Bockmiller)가 그에게 연락하여 특별 주문을 했다. 보크밀러의 고객이던 어느 판사가 이 필기장을 사서 직접 줄을 그어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판사가 원하는 것은 줄이 쳐지고 여백이 있어서 주석을 달 수 있는 필기장이었다. 홀리는 줄이 쳐진 필기장을 만들기 시작했고 리걸 패드가 태어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리걸 패드는 항상 노란색 종이로 만들어졌다. 왜 그런지 이유는 불분명하다. 한 가지 통설은 원래 패드를 여러 제지 공장에서 남은 종이로 만들다 보니 통일된 외양을 갖추기 위해 노란색으로 염색했다는 것이다. - 119, 120쪽

뉘른베르크 외곽의 작은 마을인 슈타인에서 카스파어 파버(Kaspar Faber)라는 금고 제작자가 1761년에 연필을 만들기 시작했다. 파버는 원래 뉘른베르크에서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그 도시의 규제 때문에 슈타인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스테들러의 뿌리가 시간상으로는 75년가량 더 앞섰지만 두 회사 모두 자기들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 둘 사이의 분쟁은 계속 이어지다가 1990년대 법정이 공식적으로 파버-카스텔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2010년 스테들러가 175주년을 축하할 때 파버-카스텔은 250주년 축하 계획을 짜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스테들러가 연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카스파어 파버보다 거의 100년은 앞섰는데도 말이다. - 133, 134쪽

지금도 쓰이는 H와 B 표시를 도입한 것은 런던의 연필 회사인 브루크먼(Brookman)으로 여겨진다(H는 단단한(hard) 연필, B는 더 검은(blacker), 혹은 더 부드러운 연필을 가리킨다). 브루크먼은 연필의 강도가 커짐에 따라 H의 수를 늘렸다. 제조 공정이 더 복잡해지고 더 많은 등급이 만들어지자 H와 B라는 글자와 숫자를 함께 쓰는 편이 더 합리적으로 보였다(HHHHHHHH와 HHHHHHHHH를 구별하기 보다는 8H와 9H를 구별하기가 더 쉽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연필은 H와 B의 세계 중간 지점에 있는 HB로서 균등함과 조화의 상징이다. 우리는 모두 HB처럼 되기를 소방해야 한다. - 134쪽

딕슨 타이콘데로가 사는 그냥 연필만 만드는 곳이 아니었다. 그 회사는 "사람들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 생각, 사실, 아이디어, 꿈을 가질 능력을 부여하며, 그들 자신을 간단하게 연장해주는 도구를 사용하여 그런 것을 보존해준다". (딕슨 타이콘데로가에 의하면) 이 연필은 "세계에서 제일 좋은 연필"로서 값이 싸고 품질은 좋으므로 금방 미국 전역의 사무실과 교실 어디에나 익숙하게 보이는 물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 연필은 인기는 그처럼 좋았지만 부정적인 면이 하나 있었다.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 에피소드 1: 보이지 않는 위험(Star Wars Episode 1: The Phantom Menace)>의 시나리오 초고를 쓸 때 사용한 필기구가 아마 딕슨 타이콘데로가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그 연필은 자 자 빙크스(Jar Jar Binks)를 만들어낸 책임을 적어도 일부나마 져야 한다. - 139, 140쪽

딕슨 타이콘데로가를 사용한 유명 인사는 루카스 외에도 더 있다. 로알드 달(Roald Dahl)도 이 연필을 애호하여 매일 아침 그날 사용할 여섯 자루를 뾰족하게 깎은 다음에야 일을 시작하곤 했다. 달이 딕슨타이콘데로가를 쓰기 시작한 것은 2차 대전 후인 1946년의 일이었다. 그는 원래 사용하던 영국제 연필의 품질에 불만스러워졌다. 영국제 연필은 "마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 목탄 조각으로 글씨를 쓰는 것 같았다".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필기구에 얼마나 의존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들이 연필의 품질에 예민하게 구는 것도 놀랍지 않다. "내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다. 매일 너무 많은 시간 동안 연필을 쓰는 바람에 생긴 것이다."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썼다. "알다시피 나는 매일 여섯 시간씩은 손에 연필을 쥐고 있다.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게 사실이다. 정말로 난 조건화된 손을 가진 조건화된 동물이다." - 140쪽

스타인벡은 마음에 드는 연필을 찾아내면 한꺼번에 수십 자루씩 사두곤 했다. 그가 써본 것 중에는 브레이스델 캘큘레이터(Blaisdell Calculator),에버하드 파버 몽골(Eberhard Faber Mongol) 408("아주 검고 연필심이 단단해")도 있었지만 스타인벡이 제일 좋아한 품종은 블랙윙(Blackwing) 602였다.

새 연필을 찾아냈어. 지금껏 써본 것 중에 최고야. 물론 값이 세 배는 더 비싸지만 검고 부드러운데도 잘 부러지지 않아. 아마 이걸 항상 쓸 것 같아. 이름은 블랙윙인데, 정말로 종이 위에서 활강하며 미끄러진다니까.

블랙윙 602는 에버하드 파버가 1934년에 출시한 제품이었다. 특유의 부드러운 심은 흑연에 왁스를 더하고 점토를 섞은 결과물이었다. 그 연필의 광고문에 따르면 그 덕분에 손의 힘을 절반만 주고도 글쓰기 속도는 두 배로 높일 수 있다고 했다. - 144쪽

이베이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에버하드 파버의 원조 제품을 구매하는 블랙윙 열광자가 저지르는 아이러니는 그들이 연필 한 자루를 사용할 때마다 그들이 사랑하는 바로 그 대상을 소멸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연필깎이도 그 연필을 깎아낼 때마다 그 생명은 줄어든다. `블랙애더 시즌2`에서 에드먼드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설명하듯이 "부인, 당신 없는 삶은 부러진 연필과도 같습니다. 무의미해요". 연필깎이는 문자 그대로 연필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을 죽이기도 한다. 내가 알기로는 결혼도 그렇다. - 147, 148쪽

3M이 일련의 난관(강옥이 아니었던 강옥, 에드워드 애치슨이 개발한 인공 연마제, 기름 먹은 석류석)을 창의적으로 극복하고 광업 회사보다는 접착제 회사로 성공을 거둔 과정을 살펴본다면 이 회사가 강력한 혁신의 기업문화를 가지게 된 것이 의외가 아니다. 딕 두르가 원래는 사포를 만들어야 하는데도 테이프를 개발할 수 있었고, 실버가 (아직) 쓸모도 없는 풀에 그처럼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문화 덕분이었다. 3M에는 `15퍼센트 규칙`이 있었다. 이는 직원들의 업무 이외에 다른 기획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을 쏟을 수 있게 하는 규칙이었다. 그들은 이런 창의적인 자유 덕분에 마감 시간에 쫓기며 과녁을 맞히는 데만 몰두했더라면 찾아내지 못했을 발견을 해냈고 서로 다른 부서와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협업을 이룰 수 있었다. "3M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디어의 저장고였어요. 어떤 아이디어든 그냥 내버리는 것이 없었어요. 누가 그걸 어디서 필요로 할지 모르니까요." 프라이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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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 2016-03-28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미 사파리 챠콜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로트링600을 쓰고 있는데, 책과 더불어 문구, 필기구도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려워요…^^;

붉은눈 2016-03-28 16:43   좋아요 1 | URL
그러시군요. 저도 중저가 만년필의 가성비라는 매력에 빠져 사파리를 2개 구입했습니다. 초반에는 닙까지 블랙인 챠콜은 구입하기 어려워서 포기했었는데요... ^^ 참, 말씀을 듣고 보니 로트링도 있군요.
 
다윈의 식탁 - 논쟁으로 맛보는 현대 진화론의 진수 다윈 삼부작 2
장대익 지음 / 바다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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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거대한 거짓말 혹은 픽션에 빠져버렸다. 


<다윈의 서재>를 읽은 후 연달아 읽게 된 <다윈의 식탁>에서 저자는 사실과도 같은 설정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이며, 다윈주의/진화론에 대한 거대한 콘서트로 독재들을 초대한다. <다윈의 서재>에서는 다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문객들이 그의 서재를 볼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한 끝에 데닛 교수가 다윈이 멘델의 논문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것을 밝혔다는 상황을 설정한다. 이 때문에 그동안 다윈의 유전학이 조야했다는 비난의 원인을 밝혀냈고, 이것을 계기로 '21세기에 다윈이 살아 있다면 그의 서재에는 어떤 책이 꽂혀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상 저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것이다. <다윈의 식탁>에서는 윌리엄 해밀턴의 장례식에 진화론의 대가들이 총집합한 기회를 놓치기가 아까워, 진화론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들을 도킨스와 굴드의 팀으로 나누어 각각의 견해 차를 듣는다는 설정이다. 거듭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설정'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게 된 독자들은 사실인 줄만 알았던 그 치밀한 '설정'에 배신감을 느끼기 이전에 진화론에 대한 최근의 논쟁들을 살펴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나와 같이 진화론에 무지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윈의 서재>에서는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하여, '통섭'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쓴 올리버 색스, '침팬치의 대모' 제인 구달 등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학자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이론을 대담 형식으로 설명하였는데, <다윈의 식탁>에서는 강간의 적응성, 이기적 유전자와 협동, 진화의 속도, 진화와 진보, 진화와 종교 등에 관하여 다양한 학자들의 생각과 이론을 접목시킨다. 이 책에서는 각 팀을 꾸리고 매회 팀의 멤버도 변경을 하는데, 이런 설정이 막상 쉬워보이지만 각각의 주제에 맞게 학자들을 배치하고, 그들의 입장이 되어(빙의?) 주장을 제기하고 토론을 진행하는 것은, 각 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였다면 만들 수 없는 설정이며, 쓸 수 없는 글이다.  


책을 읽다보면, 대중서이기 때문에 쉬운 표현으로 쓰려고 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물론 이에 대하여 '깊이가 없다'는 등의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대중서는 일반인들이 거부감을 덜 느끼도록 쉽게 쓰여져야 한다는 것에 찬성하는 나로서는 그런 비판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이 책에 빠져들었다. 일반인들이 리처드 도킨스나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은 대가들의 논문을 접할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원하는 이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학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될 일이다). 그들의 이론과 주장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여 이렇게 쉽게 풀어 표현한 것을 보면 저자인 장대익 교수의 내공에 대해 '깊이'를 운운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앞으로는 어디로 갈 것인지와 같은 질문들은 단순히 철학적인 사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변모해왔고 생명의 연결고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 또한 우리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답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리즈는 <다윈의 정원>이라는 미발간 책까지 3부작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 과연 저자가 <다윈의 정원>에서는 어떠한 거짓말(설정)로 우리를 진화론의 논의에 초대할지 자못 기대된다.

자연선택은 복잡하고 정교한 형질들이 어떻게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생겨날 수 있는가에 대한 유일한 설명방식입니다. 가장 복잡한 형질이라고들 하는 인간의 눈이 자연선택으로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뮬레이션도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연선택의 이러한 강력한 힘을 의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것이 누적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선택은 정교함을 단 한번에 만드는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금고털이범 같이 일을 하지요. 무슨 말이냐고요?
여러분이 만약 금고털이범이라고 상상해보세요. 지금 여러분 앞에 비밀번호 숫자 열 개를 순서대로 다 맞춰야 열 수 있는 금고가 있습니다. 어떻게 여시겠습니까? 제 아무리 금고털이의 신이라 해도 단 한 번에 그 숫자를 다 맞히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마도 청진기를 다이얼 근처에 대고 일의 자리부터 돌리다가 덜커덕 하면 그 번호를 그대로 둔 채 다음 자리로 이동하는 식으로 하겠지요. 이런 과정을 열 번을 거쳐야 금고가 열립니다. 금고털이범은 이런 식으로 `누적적인 과정`을 거치며 `불가능해 보이는` 금고 열기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 32쪽

자연에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형질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단번에 생겨날 수 있겠느냐"며 진화론을 의심하고 창조론으로 쉽게 넘어갑니다. 하지만 금고털이범의 예에서처럼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그렇게 단번에 일어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게다가 복잡한 형질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이 아직 없다는 이유로 창조론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회피`이지, 더 좋은 대안적 설명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론자들은 "자연계는 너무 정교해서 자연적 원인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 자신들의 이론을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32, 33쪽

어떤 능력이나 행동의 적응성 여부는 옳고 그름의 여부와 별개라는 것. 같은 적응이라도 고도의 언어 능력은 좋지만 강간은 나쁜 행위이다. 자연은 윤리적 기준을 갖고 선택하지 않는다. 자연은 일부 페미니스트의 주장처럼 여성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남성 편도 아니다. 자연은 그저 자연일 뿐! - 94쪽

(도킨스) 일벌의 불임은 벌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일벌 자체를 위한 것도 아니며, 오직 유전자의 이득을 위한 행동인 것이지요. 자연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 설명이죠. 이렇게 뒤집어 보면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이며 운반자(vehicle)일 뿐입니다. 주체가 인간 집단이나 개체에서 유전자로 바뀌었지요. 닭이 알을 낳는 게 아니라 알이 닭을 낳는다는 식이지요. -107쪽

(도킨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다수준 모형이 설명하는 모든 현상은 이기적 유전자 이론도 설명합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거든요. 물론 차이는 있죠. 어떤 현상에슨 `친족/비친족`의 분해를 통해 설명을 하는 것이 더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되지만, 다른 현상에는 `집단 내/집단 간` 분해를 해야 더 쉬운 이해가 가능합니다. - 127쪽

(도킨스) 저는 이런 인간 중심주의적 시각이 탈색된 진보 개념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진보에 대한 적응주의적(adaptationist) 견해인데, 진보를 복잡성이나 지능 등의 증가로 보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의 성공적 적응에 기여하는 특성들이 축적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예컨대 여러 계통에서 발생한 눈의 진화는 바로 진보적 진화 과정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사람의 눈이든 거미의 겹눈이든, 비록 형태는 다를지라도 명암과 색조를 감지할 수 있는 장치는 여러 계통에서 진화했죠. 그런데 이런 식의 진화가 가능하려면 각 계통들에서 보유한 시각 능력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조건이 돼야 하죠. 물론 그렇게 되려면 환경이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하고요. 만일 영장류 계통에서 갑자기 작은 두뇌 크기가 유리한 상황으로 환경이 바뀌었다면, 그런 환경 변화 속에서 진화는 진보적으로 진행될 수 없습니다. - 219쪽

(도킨스) 제가 셋째 날, 이기적 유전자에서 어떻게 이타적인 개체가 진화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면서 인간이 유전자의 운반자(vehicle)라고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전자뿐 아니라 밈도 운반하고 전달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때로는 유전자의 `명령`과 밈의 `명령`이 상충하기도 합니다. 가령 독신(獨身)이나 만혼(晩婚)의 예를 생각해봅시다. 현대 사화에서 이 밈들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요. 주로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흔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 밈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유전적 적합도를 생각해봅시다. 분명히 적합도는 낮아집니다. 그럼에도 밈들은 계속 사람들 사이에서 복제되지요. 이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밈이 마치 자신의 복사본을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이기적 유전자> 초판의 맨 마지막 문장을, "우리만이 이기적 유전자의 독재에 항거할 수 있다"고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242쪽

(굴드) 저는 전통적인 다윈주의가 세 가지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봅니다. 하나는 자연선택이 다양한 조직의 수준에서 작동하기보다는 주로 개체 수준에서 작동한다는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선택이 진화적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생각이며, 나머지 하나는 개체군 수준에서 벌어지는 점진적 변화를 단순히 확장하기만 하면 생명의 전 역사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20세기 초반에 헤게모니를 쥐게 된 `근대적 종합`이 일어난 이후에 다윈주의의 이 세 가지 토대는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죠 (...)
하지만 저는 자연선택이 유전자 수준에서만 작용하고 진화적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그런 변화가 누적되어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진화해왔다는 견해는 명백히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견해는 한마디로 `울트라슈퍼 다윈주의`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 253, 254쪽

(굴드) 저는 창조론자들이 제 `NOMA` 원리를 제발 좀 이해하고 수용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 원리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종교는 가치와 의미만을 얘기할 뿐 객관적인 실재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창조론자들은 정확히 이 원리를 어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서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 것 마냥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 어디에서 창조에 대한 `어떻게(how)`를 얘기한단 말입니까? 창세기는 인류 탄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아시아 지역의 신화일 뿐입니다. 창조론자들과 괜히 과학적인 주제들에 대해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 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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