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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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월


2년 전의 울분에 이끌려 책장에 있던 책을 다시 폈다. 노란 리본, 하늘색 바다, 그 속으로 가라 앉은 배의 모양, 그리고 그 배에 달린 말풍선에는 이런 말이 써있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라고. 그렇다 세월호는 사고가 아닌 사건이었다. 모든 국민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로 거대한 배가 천천히 가라앉는 모습을,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단 한 명도 구출되지 못하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그것은 사건이었다.


그때부터 였나? 모아놓은 돈, 제대로 된 기술하나 없으면서 '이민'이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수차례 써보았던 것이. 그때 였나? 이런 나라에서 더는 내 자식을 못키우겠다고 다짐한 것이, 자기 나라 국민조차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에 더이상 꼬박꼬박 세금 바쳐가며 충실한 국민 노릇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시 4월. 공교롭게도 선거철이다.

세월호 후폭풍을 우려해 "한 번만 도와달라"고 읍소했던 그 추악하고 뻔뻔한 얼굴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선거 전날까지는 우리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는 결국 세월호 유가족들을, 우리를 무릎 꿇렸지. 그리고 마침내 새누리가 압승한 선거 결과는 내게 도대체 누구에게 화풀이를 해야하는지 모르겠을 울분으로 아직 남아 있다. 여전히 냉담한 정부, 인양되지 않는 세월호, 충분한 조사 없이 지내온 시간을 입증하듯 청문회에서 하나하나 밝혀지는 의혹들...


 '아직도'가 아니라 '여전히' 4월은 내게 세월호다.

`최선`을 다하겠단 얘길 들었다. `최대`한 힘쓰겠다는 말도, `모든 걸 동원`하겠다는 약속도 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그럴듯한 말들은 주로 `위`에서 내려왔다. 그 안에는 부사와 형용사, 서술어와 추상명사가 많았지만 시제와 동사, 주어와 고유명사는 잘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책임`이란 말이 들려왔다. `적폐`라는 말, `엄벌`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그런데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어도 대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보다 `기다려달라`는 청보다 선명하게 들린 건 지도층의 막말과 실언이었다. 그리고 그중 어떤 말은 결국 유족을 거리로 나서게 했다. 어버이날, 두 팔을 올려 벌서듯 자식들의 영정을 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정부가 말한 `최선`과 `최대`의 대상은 국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는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고 민심을 달래는 `입`이길 자처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이 간절히 원한 건 권력의 `귀`였다. (김애란) - 13쪽

얼마 전 `미개(未開)`라는 말이 문제돼 그 뜻을 찾아봤다. `사회가 발전되지 않고 문화수준이 낮은`이라는 뜻이 먼저 등장했지만 그 아래 `열리지 않은`이란 일차적인 뜻도 눈에 띄었다. 앞으로 우리는 누군가 타인의 고통을 향해 `귀를 열지 않을`때, 그리고 `마음을 열지 않을` 때 그 상황을 `미개`하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김애란) - 13, 14쪽

- 지금 당신을 가장 절망케 하는 건 무엇입니까.
작가들은 그 자리에서 저마다 할 수 있는 말들을 했다. 나는 좀 당황한 나머지 부끄럽고 두루뭉술한 얘기를 했다. 절망에 대해 혹은 희망에 대해 모두가 한마디씩 하고 이윽고 이창근씨 아내인 이자영씨 차례가 왔을 때, 그녀는 누구도 건너본 적 없는 시절로 혼자 돌아가듯 담담하게 말했다.
"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더 노력해야 된다는 말이었어요." (김애란) - 16쪽

지금 진도에 `사실`은 차고 넘치나 `진실`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사이 나는 망가진 문법더미 위에 앉아 말의 무력과 말의 무의미와 싸워야 했다. 어떤 말도 바다 속에 가 닿을 수 없고, 어떤 말도 바로 설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납득시킬 만한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마냥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2년 전 이자영씨를 떠올리며 내가 가까스로 발견해낸 건 만일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 `바깥`에 서느라 때론 다리가 후들거리고 또 얼굴이 빨개져도 우선 서보기라도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 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김애란) - 18쪽

어른들이 만든 원 바깥에서 그네를 타고, 모래성을 쌓으며 뭐라 외치고 웃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모든 게 마치 전생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순간 상복을 입은 내가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 중 하나가 `삶의 생생함`이라는 걸 깨달았다. 슬픔 속에 숨기려 해도, 환멸 안에 감추려 해도, 냄새처럼 기어코 드러나고야 마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의 그 `어쩔 수 없는 선명함`이었다. (김애란) - 19쪽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협력하는 한,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 진실은, 우리가 경제 성장이라는 분칠 속에 감춰둔 한국사회의 민낯일지도 모르겠다. 이 민낯을 마주 대하는 건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어차피 내가 아는 한, 한국사회는 원래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혹은 안일하게도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그 얼굴이 점점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한 것만은 부끄럽다. 그건 나이가 든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 그런 착각을 했던 것일까? 그건 진보에 대해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 - 38, 39쪽

과연 역사는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는가? 말했다시피 이건 나이가 든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지혜로워진다는 것만큼이나 거대한 착각이다. 인간은 저절로 나아질 수 없고, 그런 인간의 역사 역시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가만히 놔두면 인간은 나빠지며,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즉 진보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거가 더 낫게 미래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반 일리치는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김연수) - 40쪽

세월호는 애초부터 사고와 사건이라는 두 개의 프레임이 겹쳐진 참사였다. 말인즉슨 세월호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이제 이 두 장의 필름을 분리해야 한다. 겹쳐진 필름이 이대로 떡이 질 경우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프레임, 즉 `세월호 침몰사고`로 기억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아직도 이 타이틀을 쓰고 있다. 별다른 오류가 없어 보이지만 여기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함정이 있다. 명사는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를 `사고`로 인지하기 마련이다. 사소한 문제인 듯하나 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박민규) - 56쪽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사전적 해석을 빌리자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 반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의미하는데 거기엔 또 다암과 같은 해석이 뒤따른다. 주로 개인, 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며 범죄라든지 역사적인 일 등이 이에 속한다. 그렇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교통사고를 교통사건이라 부르지 않으며, 살인사건을 살인사고라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월호 사고와 세월호 사건은 실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나는 후자의 비중이 이루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박민규) - 57쪽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교통사고 사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같은 방식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없다. 손써볼 사이도 없이 발생한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이들을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괴로워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어가는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이 엉망진창인 시스템을 방치한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몸서리치는 것이다. (진은영) - 73, 74쪽

이번 지방선거와 이어진 보궐선거에서 `도와주세요`나 `살려주세요`라는 구호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오고간다. 지독하게 퇴행적인 선거 구호라는 논평들이 지배적이었다. 저들은 침몰하는 배 안에서 그토록 살려달라고 외쳤던 아이들의 간절한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저런 구호가 전략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지 의아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가지 구호 모두 결과적으로 효과가 있었다. 선거 결과를 구호의 효과로만 볼 수는 없겠지만, 참사의 책임을 묻는 심판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구호들이 부정적 효과를 내지 않고 선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참 놀라운 일이다. (진은영) - 77쪽

그러나 그런 연설들이 성공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 편만한 시혜의 에토스이다. `도와주세요`와 `살려주세요`는 그런 에토스를 환기시키는 강력한 언설들이다. 그 언설들을 통해 선거는 거룩함을 획득한다. 우리는 그저 한 표 행사할 뿐이지만 그 단순한 행위로 천사가 될 수 있다. 참사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눈물만 흘리는 한 여인을 돕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또다른 여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천사 말이다. 싸우고 항의하고 따져 물어야 하는 순간에 임재하여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천사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소거한다. (진은영) - 77, 78쪽

선거는 우리를 대신하여 발언하고 활동할 정치인들을 뽑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제대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살려달라며 약자 코스프레를 하는 정당에 안됐다고 한 표 던지는 유권자들이 그 정당이 이후에 자신들의 뜻을 대리해줄 거라고 믿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으로 자신을 대리할 사람을 뽑는 활동이 아니라면 이것을 가장 직접적인 활동으로 만드는 방식은 선거 자체에서 가장 극적인 효과를 만들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선거 국면에서 약자로 자처하는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계층적 이해관계에 반하는 어리석은 정치적 선택을 하고 있따고 보이는 유권자들이야말로 실제로는 직접적 정치활동의 욕망에 가장 충실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진은영) - 80쪽

여당이든 야당이든 불쌍해서 뽑아주는 투표 행위는 실제로 자신들의 진정한 대리자를 선출한다는 유보적 방식(사실 우리가 뽑은 이들이 우리를 제대로 대리할지의 여부는 미래로 유보되어 있다) 대신에 직접적 활동의 기쁨을 가장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선거의 장을 만들어가려는 시도이다. 즉 당선시킴으로써 우리는 더이상 불확실한 미래로 유보되지 않는 완결된 활동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진은영) - 80, 81쪽

세월은 돌이킬 수 없게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나 역시 그 세계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른들을 향해서, 당신들의 세계를 왜 이렇게 만들어버렸습니까, 라고 묻는 입장이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황정은) - 93쪽

그들은 그 순간에 그렇게 하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고 그대로 했을 것이다. 명령에 따랐을 것이다. 기울어진 선실에 머물고 있는 수백 명 목숨들에 관한 질문도 없이, 내가 이렇게 해서 정말 괜찮은 걸까, 라는 자문도 없이. 그런데 이것은 왜 이렇게 낯이 익나. 질문 없는 삶, 상상하지 않는 삶, 무감한 삶. 총체적으로 그런 삶에 익숙한 삶, 말하자면 살아가는 데 좀더 편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 (황정은) - 94쪽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
나는 그것을 듣고 비로소 내 절망을 돌아볼 수 있었다. 얼마나 쉽게 그렇게 했는가. 유가족들의 일상, 매일 습격해오는 고통을 품고 되새겨야 하는 결심, 단식, 행진, 그 비통한 싸움에 비해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것, 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다 같이 망하고 있으므로 질문해도 소용없다고 내가 생각해버린 그 세상에 대고, 유가족들이 있는 힘을 다해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공간, 세월이라는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말하자면 내가 이미 믿음을 거둬버린 세계의 어느 구석을 믿어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뭘 할까.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세계와 꼭 같은 정도로 내가 망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황정은) - 96, 97쪽

세상은 신의 노여움을 잠재울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하는 게 아닐 것이다. 세상은 분명 질문에 대답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질문하는 사람 자리로 슬쩍 바꿔 앉는 순간에 붕괴될 것이다. (배명훈) - 113쪽

세상은 그렇게 역설적이다. 경쟁을 더 잘할 것 같은 사람들이 "이제 경쟁 좀 덜해도 되는 사회로 바꿉시다!"하고 외치고, 진짜 경쟁에 돌입하면 금세 나가떨어질 것 같은 사람들이 "이 빨갱이들이 무슨 소리야, 자유경쟁이 최고지!"하면서 그들을 매도하기도 한다. "너는 살 만하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나는 당장 이거라도 해야겠다"는 질타를 몇 차례 듣다보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공공재를 제공하겠다는 각오가 금세 무색해져버리기도 한다. (배명훈) -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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